
168-169화. 보호자 원장의 첫 줄과 이름을 주는 대가
168-169화. 보호자 원장의 첫 줄과 이름을 주는 대가
168화. 보호자 원장의 첫 줄
바닥이 꺼진다는 건 비유가 아니었다. 203호라는 낡은 파일철의 제본이 통째로 뜯겨 나간 것이다.
나는 허공으로 곤두박질쳤다. 아니, 이건 추락이라기보다 거대한 서류 뭉치 사이를 통과하는 감각에 가까웠다. 살을 에는 듯한 종이의 날카로운 단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눈앞의 풍경이 수천 장의 페이지로 분절되어 흩어졌다.
‘잔향청취’가 비명을 질렀다.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기록된 것들이 내뱉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소음이었다.
― 아파, 엄마. 이거 언제 풀어? (아이의 손목에 채워진 빳빳한 병원 팔찌가 쓸리는 소리)
― 손님, 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반쯤 찢어진 채 바닥을 구르는 종이 조각의 바스락거림)
― 비가 오네. 우산 가져올걸. (젖은 우산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먹물처럼 검은 물방울 소리)
수만 명의 생애가 각주처럼 내 몸을 치고 지나갔다. 기록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히려던 찰나,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빛의 선 하나가 내 시야를 갈랐다.
서늘하고도 날카로운, 누군가의 고집이 서린 궤적.
윤서하였다.
그녀의 이름 중 마지막 글자인 ‘하’가 수성펜으로 쓴 것처럼 흐릿하게 번져 있었지만, 그녀가 휘두른 검끝의 네 번째 선은 여전히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는 구조받기를 기다리는 인질이 아니다. 이 미친 서류더미 속에서도 자기 이름의 마지막 획을 붙잡고 버티는 생존자다.
“……윽, 도윤 씨! 들려요?”
귓가에 반가온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평소의 발랄함은 온데간데없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안 돼요, 보지 마……. 냄새가 너무 지독해. 이건 사람이 맡을 냄새가 아니야. 젖은 철제 캐비닛 안에…… 썩은 서류들을 억지로 쑤셔 넣은 것 같은…… 욱!”
비릿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가온이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 능력이 원장의 냄새를 맡으려다 과부하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경고: 비인가 열람자가 ‘보호자 원장(原帳)’의 진입로를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무기질적인 시스템 메시지가 허공을 메웠다. 그때, 내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이 느껴졌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내 목덜미를 꼭 붙들고 있는 존재.
KDW-0였다.
“도윤, 여기는 이름이 없어.”
그놈이 내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밀며 중얼거렸다. 원장의 어둠 속에서 0번은 오히려 투명해 보였다. 기록되지 않은 존재. 이름이 없기에 시스템의 인식조차 비껴가는 오류 페이지.
“나를 못 봐. 저기 있는 글자들이 나를 그냥 지나가.”
“당연하지. 넌 목차에도 없는 놈이니까.”
나는 이를 악물고 0번의 팔을 붙잡았다. 녀석의 무지함은 때로 가장 강력한 방패가 된다.
“0번, 정신 똑바로 차려. 저기 빛나는 페이지 보이지? 저기에 나를 던져.”
우리가 도착한 곳은 끝도 없는 어둠 속에 떠 있는 단 한 장의 거대한 종이 위였다. 발을 내딛자마자 찌릿한 전율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203호의 바닥이 꺼지며 드러난 심장부. 강도원이 공들여 숨겨온 ‘보호자 원장’의 첫 페이지였다.
허공에는 유리창 너머의 잔상처럼 강도원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직접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페이지의 여백에 적힌 주석과 결재선 사이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1순위 후보: 윤서하 (상태: 침식 진행 중)]
그 문구 아래로 파란색 만년필로 적힌 차가운 주석이 덧붙여졌다.
<― 관측 결과: 대상은 증언자 0호의 잔향을 가장 오래 견딘 유일한 생존자임. 203호의 네 번째 규칙(검의 궤적)을 스스로 생성하여 보호의 경계를 확정함. 소유권 주장 없이 ‘보호’만을 실행한 첫 번째 사례로 확인됨. 이에 따라 강도윤 사망 시, 대체 원본으로 활용 가능성 98.2%.>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강도원은 윤서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내가 죽었을 때 내 자리를 대신할, 성능 좋은 부품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지키려 했던 그 순수한 의지마저도 그는 ‘효율적인 보호의 표본’으로 수치화했다.
“재미있는 표정이네, 도윤아.”
강도원의 목소리가 원장의 종이 질감을 타고 울려 퍼졌다.
“너를 지키려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내 원장은 더욱 풍요로워져. 그게 네가 가진 진정한 가치야. 타인의 희생을 제물로 삼아 보존되는 ‘기록물’.”
“개소리하지 마.”
나는 숨을 몰아쉬며 원장의 결재선을 노려보았다. 윤서하의 이름이 적힌 그 오만한 기록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은 종이를 통과할 뿐, 아무런 물리력도 행사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탁― 탁― 탁탁.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주 멀고 낮은 곳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 문태식이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그가, 자신의 원본을 깎아 먹으며 내게 보내는 마지막 통신.
구조 신호가 아니었다. 이건 ‘힌트’였다.
탁― 탁― (아래를)
탁탁. (읽어라)
나는 시선을 내렸다. 윤서하의 이름이 적힌 1순위 후보 칸, 그리고 그 아래로 길게 그어진 붉은 결재선. 보통의 서류라면 거기서 내용이 끝나야 했다. 하지만 나는 잔향청취의 감각을 손끝에 집중했다.
결재선 아래, 보이지 않는 잉크로 짓눌러 쓴 듯한 자국이 있었다. 너무나 희미해서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누군가 절박하게 눌러 쓴 탓에 종이의 뒷면까지 패어버린 그 이름.
내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낯선 기록이 그곳에 숨겨져 있었다.
[보호자 임시 대리 및 관리 책임자: 문태식]
[최종 폐기 승인 권한자: 반가온]
“……뭐?”
머릿속이 하얘졌다. 반가온? 가온이가 왜 내 폐기 승인권자란 말인가? 그녀는 그저 냄새를 잘 맡는 감정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원장의 첫 줄보다 더 깊은 곳, 결재선 아래에 숨겨진 진실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도윤, 저기 검은 아저씨가 있어.”
0번이 허공을 가리켰다.
어둠의 한 귀퉁이, 검은 우산을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203호의 문밖에서 나를 조롱하던 그때처럼 비스듬히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손잡이에 걸린 흰 고리, 그 균열이 원장 페이지의 하단부와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이 공간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주 오래된 ‘대기번호’를 빌려 쓰고 있는, 이 거대한 서류철의 연체자에 불과했다.
“저 아저씨, 자기 이름이 없어서 남의 걸 빌렸나 봐.”
0번의 순진한 관찰이 정곡을 찔렀다. 검은 우산 남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조롱이 아니라, 분노 혹은 당혹감이었다.
그 순간, 원장이 파르르 떨리며 내게 새로운 선택지를 들이밀었다. 내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아닌, 피 냄새 섞인 먹물 글자가 새겨졌다.
[시스템 오류 발생: 보호자 원장의 결재선이 오염되었습니다.]
[증언자 0호(강도윤)에게 강제 선택지가 부여됩니다.]
[조건: 1순위 후보 ‘윤서하’를 대체 원본 목록에서 제외하십시오.]
[대가(代價)를 선택하십시오.]
[1. ‘KDW-0’에게 정식 성명을 부여하고 보호자 자격을 이양할 것. (주의: 0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자가 아니게 되며, 즉시 강도원의 추적 대상이 됨.)]
[2. ‘문태식’의 임시 보호자 자격을 강제 말소할 것. (주의: 문태식의 생명 유지 장치와 원본 연결이 즉시 단절됨.)]
차디찬 선택지였다. 0번을 사지로 내몰거나, 나를 위해 버티고 있는 문태식의 숨통을 내 손으로 끊으라는 뜻이다.
윤서하를 살리려면, 나를 돕는 다른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 강도원이 설계한 이 비극적인 연대보증의 굴레가 나를 옥죄어 왔다.
“도윤, 이름이 뭐야?”
0번이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녀석은 자기가 제물로 바쳐질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내가 줄 ‘이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가온이의 비명이 들렸다. 냄새에 질식해가는 그녀의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결재선 아래의 이름을 움켜쥐었다. 원장의 종이 질감이 내 손바닥을 날카롭게 베어 물었다.
나는 어떤 이름을 지우고, 어떤 이름을 새로 써넣어야 하는가.
원장의 첫 줄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결재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169화. 이름을 주는 대가
붉은색 숫자가 시야 상단에서 발작하듯 점멸했다.
[00:03]
[00:02]
결재 시한. 행정이라는 이름의 단두대가 목덜미에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원장(原帳)의 종이 질감은 마치 사람의 피부처럼 질척였고, 그 위로 흐르는 잉크는 굳지 않은 혈흔 같았다.
강도원이 내민 선택지는 두 갈래였다.
하나, KDW-0에게 정식 성명을 부여하고 내 보호자 자격을 놈에게 넘길 것.
둘, 나를 위해 생명줄을 잡고 있는 문태식 서장님의 임시 보호자 자격을 강제 말소할 것.
“이 정도면 민원실이 아니라 지옥 콜센터잖아.”
입술 사이로 비릿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손가락 끝이 원장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베여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 통증보다 더 끔찍한 건, 이 선택지 자체가 정교하게 설계된 함정이라는 감각이었다.
KDW-0에게 이름을 주면 놈은 강도원의 완벽한 사냥감이 된다. 문 서장님의 자격을 말소하면 그나마 남은 내 사회적 안전장치가 사라진다. 어느 쪽을 택해도 결말은 ‘소유권 반납’이었다.
그때, 귀청을 찢는 것 같은 이명이 들려왔다. 아니, 그건 이명이 아니라 잔향(殘響)이었다.
‘도윤 씨! 그 종이 냄새 말고…… 접힌 모서리 냄새를 맡아요!’
반가온의 목소리였다. 멀리서,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같은 외침. 그녀의 목소리에는 쇠붙이가 산에 부식될 때 나는 듯한 지독한 악취가 섞여 있었다.
[최종 폐기 승인 권한자: 반가온]
결재선 아래에 적힌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가온이는 왜 이곳에 적혀 있는가. 왜 그녀의 냄새 읽는 능력이 ‘폐기’와 연결되는가.
잔향청취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원장의 종이 냄새 속에서 미세한 층위를 나눴다. 갓 인쇄된 잉크의 독한 냄새, 오래된 창고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누군가 일부러 침을 묻혀 붙여놓은 듯한 눅눅한 ‘종이 접힘’의 냄새.
“여기인가.”
나는 가온이가 가리킨 곳, 원장 오른쪽 하단부의 미세하게 접힌 귀퉁이를 손톱으로 긁어 내렸다.
그곳은 검은 우산의 남자가 가진 흰 고리 균열과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종이가 펴지며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강도원이 제시한 1번과 2번 문항 아래, 마치 주석처럼 숨겨져 있던 제3의 빈칸.
[※ 이의 신청자 혹은 증언자 본인 진술란: ( )]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라 통로였다. 시스템이 강요하는 ‘예/아니오’가 아니라, 서류의 주인인 내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공백.
“이름을 줘. 그럼 내가 널 도울 수 있어.”
내 얼굴을 한 KDW-0가 무표정하게 속삭였다. 놈의 눈동자 속에는 이름이라는 닻을 내리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놈에게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줄 생각이 없었다. 이름을 준다는 건, 이 미친 설계도 안에 놈을 정식 부품으로 등록하겠다는 뜻이니까.
“이름 대신 줄 건 있어. 넌 오늘부터 ‘이름’이 아니라 ‘오류’다.”
나는 펜을 쥐었다. 손등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펜촉이 종이에 닿으려는 찰나,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윤서하가 비틀거리며 내 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중 ‘서하’라는 글자는 이미 203호의 어둠에 절반쯤 먹혀 흐릿했다. 하지만 그녀의 검끝, 그 끝에 매달린 가느다란 ‘네 번째 선’이 파르르 떨리며 궤적을 그렸다.
서하 씨는 자신을 갉아먹는 침식을 역이용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깎아내어, 내가 써 내려가야 할 빈칸으로 향하는 길을 물리적인 선으로 고정했다.
“강도윤 씨…… 쓰세요. 제 이름은…… 제가 붙잡을 테니까.”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진 붉은 낙인이 선명해졌다. 네 번째 선이 원장의 빈칸을 관통했다.
나는 그 선을 가이드 삼아 펜을 휘둘렀다.
[이의 신청자: 미결정 잔향(Unresolved Echo)]
[증언자 본인 진술: 임시 보호자 문태식의 자격을 ‘증언 보전 중’으로 갱신함. 최종 결재 전까지 신분 말소를 유예한다.]
KDW-0에게는 이름을 주지 않았다. 대신 놈을 ‘증언자’의 부속물로 묶어버렸다. 시스템이 놈을 강도윤의 복제품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처리되지 않은 데이터 찌꺼기로 인식하게 만드는 꼼수였다.
서걱, 소리와 함께 원장의 페이지가 떨렸다.
점멸하던 붉은 숫자가 멈췄다.
[00:00]
[시스템 알림: 이의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해당 안건의 결재가 ‘심사 보류’ 상태로 전환됩니다.]
[보호자 윤서하의 대체 원본 활용 프로세스가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하아, 하아…….”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에 숨을 몰아쉬었다. 성공인가?
아니,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병실에 누워 있을 문태식 서장님의 잔향이 급격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증언 보전’이라는 억지 지위는 서장님의 영혼을 이 기괴한 장부 사이에 끼워 넣는 행위였다. 멀리서 기계적인 심박동 소리가 불규칙하게 빨라지다가 삐- 소리를 내며 늘어지는 환청이 들렸다.
강도원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들려왔다. 분노도, 당혹감도 없는 무미건조한 음성.
“드디어 행정의 언어를 배웠구나, 도윤아.”
그의 그림자가 원장 너머에서 길게 드리워졌다.
“하지만 보류는 거절이 아니야. 서류는 결국 다음 장으로 넘어가야 하지. 네가 쓴 ‘보류’라는 글자가 얼마나 많은 피를 먹고 유지될지 궁금하군.”
옆을 보았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KDW-0가 그를 보며 “남의 대기번호를 빌려 쓰는 연체자”라고 조롱했을 때부터였다. 남자의 손목에 감긴 흰 고리가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쪽에서 낯선 숫자가 비쳤다.
[대기번호: 0000]
그것은 번호가 아니라, 무언가 시작되지 않은 존재의 표식 같았다. 남자는 갈라진 고리를 다급히 우산 안으로 숨겼지만, 그가 흘린 검은 물방울은 이미 원장의 다음 페이지를 적시고 있었다.
“가온아!”
나는 멀리 쓰러진 반가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코피를 닦지도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거대한 저울이 된 것처럼.
[최종 폐기 승인 권한자]
그 직함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잔향이 내게 속삭였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그녀의 감정(鑑定) 능력은, 강도원이 설계한 ‘필요 없는 원본’들을 공식적으로 지워버리는 지우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온이는 자신이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그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존재를 ‘폐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윤 씨…… 냄새가…… 안 나요.”
가온이가 창백한 입술을 달싹였다.
“저 사람들한테서…… 아무런 냄새가 안 나요. 죽은 사람보다 더 고약한, 아무것도 없는 냄새가…….”
원장의 페이지가 강제로 넘어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거대한 손길이 장부를 넘기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지자마자,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곳에 적힌 제목은 내가 방금 막아낸 ‘보류’보다 훨씬 더 잔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안건: 폐기 승인권자 반가온 / 냄새 없는 시신 목록]
그 아래로 줄줄이 이어지는 이름들.
그것은 가온이가 지금까지 ‘감정’해왔던 헌터들의 명단이었고, 그 이름 옆에는 모두 붉은색으로 단 한 단어가 적혀 있었다.
[폐기 완료]
그리고 명단의 맨 마지막 줄, 아직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곳에 익숙한 이름이 서서히 떠올랐다.
[차기 폐기 대상: 강도윤(잔향)]
나는 고개를 들어 가온이를 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감정용 돋보기가, 마치 사형 집행인의 칼날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