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173화. 호흡권 이전 승인 대기와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
172-173화. 호흡권 이전 승인 대기와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
172화. 호흡권 이전 승인 대기
내 손등 위로 불거진 핏줄이 바르르 떨렸다. 손에 쥔 모나미 볼펜이 무슨 100kg짜리 덤벨이라도 되는 것 같다. 잉크가 말라붙은 펜촉 끝이 종이 위에서 멈춰 섰다.
[집행관 후보: 강도윤]
[사용 가능한 호흡 권한: 문태식(잔향 점유율 88%)]
[서명하지 않을 시 점유된 잔향 즉시 폐기]
눈앞의 상태창이 내 망막을 찢어버릴 듯이 번뜩였다. 심장 박동 모니터의 규칙적인 소음이 점차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비명 같은 단일음으로 바뀌었다. 삐이이이— 하는 수평선. 그 플랫라인의 리듬이 원장의 서명란 옆, 텅 빈 여백과 똑같은 박자로 내 목을 죄어왔다.
“서명해, 도윤아. 그래야 문 실장이 산다.”
강도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다정해서 더 역겨운 음성이었다. 침대 위에 누운 문태식의 형체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환자복 안에는 살점 대신 뿌연 종이 연기가 가득 차 있었고, 산소마스크 너머로 새어 나오는 건 호흡이 아니라 잘게 갈린 서류 조각들이었다.
환자의 손목에 감긴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보호자 번호: 0000 (연체 중)]
문태식은 연체 중이었다. 삶이 아니라, 숨을 쉴 권리 자체가.
“무슨 계약이 이따위야.”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유머는 내 유일한 방어기제였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건 비릿한 조소뿐이었다. 강도원의 독촉이 이어졌다. 집행관으로 서명하는 순간, 나는 문태식을 살리는 대가로 누군가의 잔향을 영원히 말살하는 칼잡이가 된다. 그게 이 ‘시스템’의 생리였다.
나는 볼펜을 꽉 쥐었다. 하지만 내가 펜촉을 가져간 곳은 ‘강도윤’이라는 이름 석 자 위가 아니었다.
찌익.
나는 문태식의 손목에 붙어 있던 [0000] 라벨을 거칠게 뜯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원장의 서명란, 가장 핵심적인 자리에 꾹 눌러 붙였다.
“뭐 하는 거지?”
강도원의 미간이 좁아졌다. 나는 그 빈칸 위에 볼펜 끝을 박아 넣듯 휘갈겨 썼다.
[수취인 불명: 실제 호흡 점유자 확인 요청]
“규정 위반이다, 강도윤. 이건 서류야. 장난이 아니라고.”
“장난? 아니, 난 지금 아주 진지하게 민원 제기 중인데.”
나는 고개를 들어 강도원을 똑바로 응시했다.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목소리만큼은 억지로 팽팽하게 유지했다.
“서류가 사람 숨까지 훔쳐 갔으면, 최소한 영수증 정도는 남겨야 하는 거 아냐? 문 실장 숨, 이 양반이 쓰고 있는 거 맞긴 해? 0000번. 이 번호 주인 데려와. 그럼 내가 기꺼이 집행관이든 뭐든 해줄 테니까.”
그때였다.
“……선.”
낮게 가라앉은 윤서하의 목소리가 병실의 공기를 갈랐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을 휘저었다. 이미 세 개의 선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붙들고 있던 그녀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깎아 먹는 네 번째 선을 그었다.
서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침식된 이름 때문에 그녀의 윤곽이 흐릿해졌지만, 네 번째 선은 정확히 산소마스크로 이어지는 호리호리한 호스 위를 덮었다.
치익—!
현실의 병실에서 공급되던 인공적인 호흡의 흐름이 끊겼다. 단 5초. 서하가 만들어낸 완전한 진공의 시간.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타탁. 탁.
규칙적이지 않은 노크 소리. 누군가 책상을 손가락으로 까닥거리며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산소마스크 안, 종이 연기 너머로 문태식의 진짜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야, 강도윤. 정신 안 차려?
거칠고 탁한, 평소처럼 짜증이 가득 섞인 욕설과 지시.
—0000은 환자 번호가 아냐. 보호자 대기번호라고, 이 등신아. 숨 쓰는 놈은…… 병실 밖에 있어.
목소리는 아주 짧게 끊겼다. 서하의 네 번째 선이 한계에 부딪혀 튕겨 나갔기 때문이다. 다시 기계적인 산소 공급음이 병실을 채웠다. 하지만 이미 충분했다.
“가온아!”
내 외침에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렸다. 녀석은 이미 ‘판정 보류’로 고쳐 쓴 시스템의 냄새를 역추적하고 있었다. 냄새 없는 냄새. 그 지독한 무취의 경로를 따라 가온의 시선이 병실 문밖으로 향했다.
“형, 찾았어. 이건 병원 냄새가 아냐.”
가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호자 대기실의 세 번째 빈 의자. 거기서 회수된 투명 우산의 냄새가 나. 비도 안 오는데 젖어 있어. 그리고…… 흰색 고리형 팔찌. 아니, 팔찌가 아니라 그건…….”
가온이 침을 삼켰다.
“흰 고리의 젖지 않는 손목. 냄새가 거기서 멈춰 있어.”
그 순간, 내 옆을 지키던 KDW-0가 움직였다. 녀석은 목록의 빈칸, 즉 ‘미결정 잔향’들이 모여 있는 심연 속으로 손을 뻗었다. 녀석의 손끝에서 튀어나온 것은 글자가 아니었다.
동전이 바닥을 구르는 짤랑거리는 소리.
편의점 비닐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비에 젖은 운동화가 복도를 지나갈 때 나는 찌걱거리는 마찰음.
그리고 낡은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띵-’ 하는 기계음.
그것은 ‘폐기’된 사람들이 남긴 마지막 생활 소음이었다. 그들은 데이터 조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누군가의 퇴근길이었으며, 누군가의 오늘이었던 실제 사람들이었다.
강도원이 비릿하게 웃었다.
“선택해, 도윤아. 저 이름도 없는 쓰레기 같은 잔향들을 다시 지우고 문 실장을 살릴지. 아니면 정의로운 척하다가 네 소중한 동료의 잔향이 폐기되는 걸 지켜볼지.”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문태식을 살려야 한다. 하지만 내 손으로 저 수많은 소음의 주인공들을 영원히 소멸시킨다? 그건 내가 알던 문태식도 원치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문태식은 죽는다.
‘세 번째. 세 번째 길이 있을 거야.’
나는 펜을 돌려 쥐었다. 그리고 서명란이 아닌, 내 가슴팍 쪽으로 띄워진 인터페이스 창을 강제로 끌어당겼다.
[알림: 집행관 후보 강도윤의 권한 행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지연 아니야. 담보 대출 신청하는 거지.”
나는 내 ‘잔향청취’ 스킬 아이콘을 서명란 위로 드래그했다. 시스템이 예기치 못한 입력에 잠시 노이즈를 일으켰다.
“문태식의 호흡권은 쓰지 않겠다. 대신 내 능력의 일부를 담보로 걸고, 이 집행의 ‘무기한 보류’를 신청한다.”
[경고: 해당 요청은 전례 없는 담보 설정을 요구합니다.]
[집행 보류 담보 접수: 강도윤의 첫 번째 사망 농담]
[담보 회수 대상: 강도윤이 생애 처음으로 들었던 죽은 자의 말]
원장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스템 그 자체가 내게 묻는 듯했다.
“……승인해.”
나는 이를 악물고 답했다.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사망 농담. 내가 헌터가 된 이후, 죽음을 비웃으며 버텨왔던 나의 모든 방어기제들이 뿌리째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내가 처음으로 잔향청취라는 저주 같은 축복을 얻었을 때 들었던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태식의 목소리도, 윤서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도윤아.
내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아주 오래전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혹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내 목소리.
—살려줘.
애처로운 비명이 고막을 찔렀다.
[집행 보류 신청이 수락되었습니다.]
[호흡권 이전 승인 대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병실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었다. 문태식의 심장 박동 모니터가 다시 느릿하게, 아주 아슬아슬한 곡선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지독한 유예 상태.
나는 비틀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보호자 대기실 방향.
비가 오지 않는 창밖 복도에서, 누군가 투명 우산을 접고 있었다. 우산 안쪽에는 젖지 않은 빗방울들이 기이하게 맺혀 있었고, 그 비닐 표면 아래로 내 이름이 적힌 헌터 자격증 이름표가 초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내 이름이 지워지고 있었다.
“……시작됐군.”
강도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끝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내 잔향이, 내가 듣지 못하는 나의 목소리가, 차가운 병원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173화.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
“살려줘.”
그게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고막을 찢고 들어온 비명이 내 것인지, 혹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어느 망자의 유언이었는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실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혀끝을 씹은 모양이다.
“……윤 씨! 강도……!”
윤서하가 내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입술이 움직이고 눈동자에는 절박함이 가득한데, 이상하게 소리가 징검다리 건너듯 끊겨 들렸다. ‘강도윤’이라는 내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공기 중에서 증발한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평소라면 지겹도록 들려와야 할 바닥 타일들의 수다라든가, 먼지들의 비명 같은 게 들리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고 단절된 파편들만 귓가를 스쳤다.
[방금 누가 밟았……]
[차갑……]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내 청각 시스템의 중간중간을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 같았다. 이것이 ‘집행 보류’의 대가인가. 내 생애 첫 번째 사망 농담을 담보로 건 결과, 나는 내 능력의 일부를 잃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불’했다.
“형, 흘리고 다녀.”
발치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KDW-0였다. 녀석은 바닥에 엎드린 채 무언가를 줍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검푸른 연기 같은 조각들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이거, 형 목소리야. 바닥에 새고 있어. 주워 담지 않으면 금방 말라 죽을걸.”
“……뭐?”
내 목소리가 바닥에 샌다고? 나는 내 목을 만져보았다. 성대는 멀쩡했다. 하지만 녀석의 눈에는 내가 흘리는 잔향의 파편들이 보이는 모양이었다. KDW-0는 내가 방금 지불한 ‘담보’의 구멍을 통해 내 존재 자체가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무심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도윤 씨, 정신 들어?”
윤서하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제대로 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강도윤’이라는 내 이름을 부를 때만큼은 묘한 노이즈가 꼈다.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맞지 않는 것처럼,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공기가 일렁였다. 이름 침식이 나에게까지 옮겨붙기 시작한 건가, 아니면 담보로 잡힌 내 과거가 내 현재를 부정하고 있는 건가.
“괜찮아. 좀 어지러워서 그래.”
나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유머는 내 유일한 방어기제다. 비록 지금 내 머릿속이 8비트 게임기의 끊기는 사운드처럼 엉망진창일지라도.
“문태식 팀장은?”
내 시선이 병상으로 향했다. 심장 모니터는 여전히 불안정하게 뛰고 있었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상태. 산소마스크 위로 그어진 윤서하의 네 번째 선이 강제로 시간을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선도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냄새가 바뀌었어.”
구석에 서 있던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의 눈이 병실 문 너머, 어두운 복도를 향했다.
“문태식 아저씨 냄새가 아니야. 아까 그 투명 우산, 그리고 빈 의자. 거기서 났던 냄새가 지금 복도 전체에 깔리고 있어. 이건……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종이가 타는 냄새 같아.”
가온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보호자 대기실 방향이었다.
“가야 돼. 저 냄새 사라지면 끝이야.”
“하지만 팀장님 상태가…….”
윤서하가 망설였다. 그때였다.
삐익— 삐, 삐익—.
불규칙하게 울리던 심장 모니터의 비프음이 갑자기 리듬을 바꿨다. 그것은 생체 신호라기보다는 누군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똑, 똑똑, 똑.
일정한 간격.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에 집중했다. 비록 잔향청취 능력이 반쪽짜리가 되었을지언정, 문태식이 남기려는 마지막 집념까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의자…… 밑…….]
문태식의 잔향이 쥐어짜듯 내뱉은 단어였다. 모니터의 그래프가 요동치며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보호자 대기실로 간다.”
나는 결단했다.
“어차피 여기 계속 있어 봐야 원장이 다시 오면 끝이야. 담보를 맡겼으니 당분간은 집행관들도 내 눈치를 보겠지. 그사이에 ‘진짜 보호자’를 찾아야 해.”
“하지만 도윤 씨, 지금 상태로 움직이는 건 위험해. 능력이…….”
“오히려 잘됐어.”
나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검은 우산이나 원장은 내 잔향청취 반응을 기준으로 나를 추적했어. 그런데 지금 내 능력이 비어 있잖아? 그놈들 레이더에는 지금 내가 ‘고장 난 기계’처럼 보일 거야. 추적이 어긋날 수밖에 없지.”
역설적이게도, 망가진 능력이 은폐 수단이 된 셈이다. F급 헌터의 비애 섞인 생존 본능이었다.
윤서하는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태식의 병상 주변에 임시로 가느다란 ‘선’들을 겹겹이 쳤다. 최소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누구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조치였다.
우리는 병실을 나와 복도로 나섰다. 밤의 병원은 고요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고요함이 수만 장의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음으로 들렸다.
보호자 대기실은 평범했다. 형광등 하나가 수명이 다해 가물거리고 있었고, 낡은 가죽 소파 몇 개와 자판기가 전부였다. 야간 보호자들이 덮고 자던 낡은 담요가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가온이 멈춰 선 곳은 달랐다. 세 번째 의자.
창가에서 가장 가까운 그 자리만 이상하리만큼 깨끗했다. 아니, 깨끗하다기보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여기야.”
가온이 바닥을 가리켰다.
창밖에는 비가 오지 않는데, 그 의자 다리 주변에만 동그랗게 빗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투명 우산의 뾰족한 끝이 바닥을 짓누른 듯한 원형 압흔이 선명했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의자 밑을 살폈다.
먼지 쌓인 바닥 구석에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병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접수 번호표였다. 하지만 그 위에 적힌 내용은 전혀 흔하지 않았다.
[순번: 0000/보호자 대리]
[대기 사유: 연체 자산 회수 및 폐기 감독]
“0000…….”
문태식의 라벨에 적혀 있던 보호자 번호와 일치했다. 하지만 뒤에 붙은 ‘보호자 대리’라는 명칭이 뒷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가온이 그 번호표를 낚아채더니 코끝을 가져다 댔다. 녀석의 미간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이거.”
“왜? 무슨 냄새 나?”
“도윤이 형 냄새야.”
가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형 냄새가 아니라, 아까 형이 담보로 넘겼다는 그 ‘첫 번째 사망 농담’ 냄새가 여기서 나. 아주 오래되고, 썩어가는…… 형의 옛날 목소리 냄새.”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방금 원장에게 지불한 담보가 왜 이미 이 번호표에 배어 있는 거지? 검은 우산의 남자가 내 과거를 미리 가로채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내가 오늘 이곳에 올 것을 알고 미리 ‘예약’이라도 해두었다는 건가.
그때였다.
대기실 한구석, 벽면에 붙어 있던 진료 호출 모니터가 지지직거리며 켜졌다. 아무도 조작하지 않았는데도 화면 위로 붉은 글자들이 명멸했다.
[현재 호출 번호: 0000-1]
정막을 깨고 천장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도, 간호사의 차분한 음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내가 조금 전 담보로 넘겼던,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였다.
0000-1번.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맑고 투명했다.
사망 전 보호자 확인 부탁드립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강도윤 님의 사망 전 보호자, 확인 부탁드립니다.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가, 병원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