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115화. 만년필에 남은 첫 반려와 멈춘 시계의 퇴근 시간
제목: 114-115화. 만년필에 남은 첫 반려와 멈춘 시계의 퇴근 시간
제목: 114화. 만년필에 남은 첫 결재
시야 구석의 붉은 숫자가 내 수명을 씹어 먹고 있었다.
[남은 시간: 09:47]
10분.
평소라면 편의점 도시락 데우고 젓가락 뜯다 절반쯤 날아가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점장실에서는 사람 이름 4,219개가 백지가 되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비겁하게 튀기는.”
나는 어둠 속으로 물러나는 보관자를 향해 이를 갈았다. 놈은 검은 장부를 품에 안고 뒷걸음질쳤다. 우산은 펼치지도 않았는데, 그림자가 먼저 바닥을 적셨다.
달그락, 달그락.
벽면의 명패들이 떨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진인가 싶었다. 곧 아니란 걸 알았다. 명패들이 하나씩 벽에서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얇은 금속판들이 파란 형광등 아래서 칼날처럼 번쩍였다.
“도윤 씨! 위!”
이현우의 외침과 동시에 명패 하나가 내 뺨을 스쳤다. 종이에 베인 상처처럼 얕았는데, 통증은 훨씬 더럽게 깊었다. 살이 아니라 내 출근 기록 어디쯤이 긁힌 기분이었다.
[상태 이상: 미출근 마모]
“사람을 때리는데 용어가 왜 이렇게 직장인 우울증 같냐.”
“아저씨, 책상!”
반가온이 소리쳤다.
점장실 가운데 놓인 마호가니 책상. 그 위에 낡은 결재판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가운데에는 잉크가 말라붙은 만년필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별것 아닌 물건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물건은 늘 ‘그냥 볼펜인데요?’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저게 첫 번째예요. 그런데…… 이상해요.”
가온의 감정 나침반 바늘이 만년필 앞에서 덜덜 떨었다.
“결재가 아니에요. 저건 받아들인 기억이 아니라 밀어낸 기억이에요.”
그 말을 끝까지 들을 여유는 없었다.
검은 우산살들이 바닥에서 솟았다. 송곳처럼, 아니 결재 서류에 꽂히는 스테이플러 심처럼 내 발목을 노렸다. 나는 몸을 비틀어 피했다. 앞에서는 출퇴근 카드들이 수천 장의 병풍처럼 세워졌다.
“이 방은 왜 모든 공격이 사무용품이야.”
카드 병풍 사이로 윤서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제가…… 열겠습니다.”
“서하 씨, 지금 움직이면 다시 쓰러집니다.”
“이미 쓰러져 봤습니다. 별로 추천은 안 하지만, 한 번 더 못 할 정도는 아니에요.”
농담처럼 말했지만 얼굴은 창백했다. 목덜미의 검은 잠식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퇴근 보류. 내가 겨우 낮춰 둔 상태였다. 완치가 아니라, 시스템이 잠깐 펜을 내려놓은 것뿐이다.
윤서하는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을 밀었다.
[퇴근 보류자 접근 권한 확인]
[임시 통로 허용]
카드 병풍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퇴근이 보류된 사람은 이 방의 규칙에서 조금 밀려나 있었다. 그 틈을 윤서하가 억지로 벌렸다.
코끝에서 피가 떨어졌다.
“지금이에요.”
나는 더 묻지 않고 뛰었다.
[복구 절차 진행 중]
[주의: 복구율 상승 시 명패 가독성이 저하됩니다.]
[실종자 데이터 소멸 위험 증가]
인이어에서 이현우가 욕을 삼켰다.
“형, 명패들이 이름을 잃고 있어요. 빈칸으로 바뀌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저거 다 비면 끝이에요.”
“나도 알아. 내 인생도 빈칸이 되는 중이라 공감은 잘 된다.”
만년필은 손끝 바로 앞에 있었다.
그때 보관자의 목소리가 천장과 바닥에서 동시에 울렸다.
“네가 찾는 건 구원이 아니다. 네가 저지른 죄의 영수증이지.”
검은 장부에서 새어 나온 연기가 만년필을 감쌌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손톱 밑으로 얼음물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도윤 아저씨!”
반가온이 비명을 질렀다.
“저건 첫 결재가 아니에요. 첫 반려예요. 누군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되돌려 보낸 기억이에요!”
반려.
서류를 되돌려 보낸다는 말. 내 인생에서 가장 자주 당한 행정 처분 중 하나다. 그런데 이번엔 내가 반려받는 쪽인지, 반려하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만년필을 움켜쥐었다.
화아악!
점장실이 뒤집혔다.
소음이 사라졌다. 명패도, 우산살도, 동료들의 목소리도 멀어졌다. 새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눈앞의 점장실은 지금처럼 썩어 있지 않았다. 책상은 반짝였고, 벽의 카드들은 가지런했다. 막 개업한 지옥 같았다.
책상 뒤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진하.
내 얼굴과 닮았지만 눈빛은 달랐다. 훨씬 차갑고, 훨씬 지쳐 있었다. 그의 손등에는 아직 바코드가 없었다.
맞은편에는 검은 우산을 든 사람이 서 있었다. 얼굴은 우산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 방 안의 공기가 물에 젖었다.
이진하가 서류를 내려다봤다.
[성명: 보호자 0번]
“거절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직위도, 이름도 없는 항목을 근무자로 등록할 수 없습니다. 이 기록은 사람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사람 대신 이름을 먹습니다.”
검은 우산 아래에서 웃음이 났다.
— 늦었어, 이진하.
“아직 결재하지 않았습니다.”
— 네가 점장 자리에 앉은 순간 이미 서명은 끝났다.
이진하가 만년필을 세웠다. 결재가 아니라 반려 도장을 찍으려는 손길이었다. 손끝이 떨렸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미 결과를 알고도 거부하는 사람의 떨림이었다.
“나는 이걸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 그 이름은 이미 네가 대신 썼다.
검은 우산의 손이 만년필 끝을 눌렀다.
— 보호자 0번은 빈칸이 아니야. 네가 앉은 자리의 다른 이름이지.
만년필 끝에서 검은 잉크가 터졌다. 종이를 적시고, 이진하의 손목을 타고 올라갔다. 잉크가 지나간 자리마다 글자가 새겨졌다. 살에 새기는 계약서 같았다.
[대리 등록 진행 중]
[보호자 0번: 이진하]
이진하가 이를 악물었다.
“아니야.”
그가 만년필을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현재의 점장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헉……!”
손에는 낡은 만년필이 쥐여 있었다. 금속 몸체는 재처럼 바스러지고 있었지만, 기억은 머릿속에 박혔다. 누가 나사를 조인 것처럼 아팠다.
[첫 번째 기억 조각 ‘반려된 결재’를 획득했습니다.]
[원본 근무표 복원률: 33%]
[점장 기억 키 1/3 확보]
“형!”
이현우가 달려와 내 팔을 잡았다. 반가온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내 손등을 보고 있었다. 윤서하는 통로를 열어 둔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윤희의 잔향이 그녀의 등을 받치고 있었다.
“괜찮아요?”
“괜찮다고 말하면 믿어줄 겁니까?”
“아니요.”
“그럼 물어보지 마요.”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만년필 끝에서 묻어난 검은 잉크가 손등의 바코드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잉크는 피보다 느리고, 저주보다 정확했다. 곧 빈 공간에 글자가 떠올랐다.
[보호자 0번: 강도윤]
[이전 등록명: 이진하]
점장실의 공기가 한 번 멎었다.
반가온이 숨을 삼켰다.
“아저씨…… 그거, 이름이 이어진 게 아니라 덮어쓴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벽에서 소리가 났다.
째깍.
분명 멈춰 있던 시계였다. 초침도 없던 낡은 벽시계가, 어딘가 없는 초침을 가진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째깍.
두 번째 기억 조각.
나는 쓰라린 손등을 감춰 쥐고 시계를 올려다봤다.
오늘 나는 내 과거를 찾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내 이름 위에 덮어쓴 시간을 벗겨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목: 115화. 멈춘 시계의 퇴근 시간
째깍.
초침도 없는 시계가 소리를 냈다.
째깍.
그 소리는 귀가 아니라 뼈에 닿았다. 톱니바퀴가 한 칸 움직일 때마다 점장실의 공기가 얇게 벗겨졌다. 벽면의 명패 몇 개가 희미해지더니, 이름 칸이 종이처럼 하얗게 비었다.
“가온아, 현우야. 정신 잡아!”
내 목소리가 방 안에서 꺾였다.
반가온은 감정 나침반을 쥔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이현우는 태블릿 화면을 보고 있는데, 손가락이 멈춰 있었다. 윤서하는 숨을 얕게 몰아쉬며 벽을 짚었다.
시계가 사람을 재우는 게 아니었다.
퇴근시키고 있었다.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순간으로.
시야가 흔들렸다.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찔렀다. 눅눅한 지하 감식실. 낡은 형광등.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사건 봉투. 나는 스물넷이었다. 감식반 계약직 명찰은 목에 걸려 있었고, 내 눈 밑 다크서클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해도 될 만큼 깊었다.
“강도윤 씨, 이것만 정리하고 퇴근해. 젊은 사람이 고생이 많네.”
상사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나갔다.
항상 그랬다. 젊은 사람은 고생이 많고, 늙은 사람은 퇴근이 빠르다. 인류 문명의 오래된 불공정이다.
내 앞에는 첫 사망 현장이 있었다. 서류상 사고사. 현장은 살인. 잔향은 더 노골적이었다. 형체가 망가진 시신 옆에서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삼킨 말이 내 머릿속을 긁었다.
— 퇴근하고 싶어.
그건 죽은 사람의 말이기도 했고, 내 말이기도 했다.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냥 집에 가서 양말도 안 벗고 잠들고 싶었다. 그 순간, 시신의 입이 열렸다.
— 속지 마세요.
윤희의 목소리였다.
— 이건 당신 기억이 아니라 시계가 던진 미끼예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식실이 검은 연기처럼 찢어졌다. 나는 다시 점장실 바닥에 서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윤서하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언니…… 안 돼. 내가 갈게. 내가…….”
그녀의 눈은 지금 여기를 보지 않았다. 윤희가 남긴 어떤 오후를 보고 있는 듯했다. 보호받던 순간. 동시에 그 보호 때문에 갇히게 된 순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윤서하!”
윤희의 푸른 잔향이 윤서하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와 나를 향했다. 이번엔 내 귓가에 직접 속삭였다.
— 이진하는 처음엔 우리를 내보내려 했어요.
“알아. 만년필에서 봤어.”
— 그런데 시계가 퇴근 시간을 바꿨어요. 마지막 시각을, 죽은 시간을, 실종된 시간을 전부 이 방의 퇴근 시간으로 덮어썼어요.
“그럼 퇴근이 아니라 납치잖아.”
— 그래서 모두 여기 남았어요.
이현우가 숨을 헐떡이며 태블릿을 다시 두드렸다. 눈동자는 아직 흔들렸지만 손은 움직였다. 훌륭하다. 개발자는 공포보다 로그를 더 무서워한다더니 사실이었다.
“형, 윤희 씨 말이 맞아요. 사망자랑 실종자의 최후 시각이 전부 점장실 기준 퇴근 시간으로 재기록됐어요. 실제 시간은 지워지고, 이 방의 시간이 원본처럼 덮였어요.”
“퇴근하는 순간 박제된 거네.”
“네. 그리고 시계가 한 번 울릴 때마다 명패 하나가 백지화됩니다.”
댕.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소리가 울렸다. 벽에서 명패 하나가 새하얗게 변했다. 이름 없는 금속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는 사람 하나가 세상에서 빠지는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보관자가 웃었다.
“시간은 공정해야지. 모두에게 같은 퇴근 시간을 주었을 뿐이다.”
“그걸 공정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대개 남의 야근표에 자기 이름 안 쓰더라.”
나는 만년필 잔해를 움켜쥐고 시계 쪽으로 뛰었다.
벽시계는 점장실 정면에 걸려 있었다. 초침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리가 났다. 시침과 분침은 서로를 잡아먹듯 느리게 겹쳐지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발이 무거워졌다. 내 발목마다 퇴근 못 한 날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보관자가 장부를 펼쳤다.
검은 우산살이 그림자에서 솟아났다. 이번엔 찌르지 않았다. 우산살들은 출퇴근 카드들을 꿰어 긴 사슬로 만들었다. 사슬이 내 허리를 감았다.
“강도윤!”
윤서하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퇴근 보류 상태의 그녀가 다시 규칙 틈을 잡아당겼다. 카드 사슬 일부가 헐거워졌다. 대신 그녀가 피를 토했다.
“그만해요!”
“싫습니다.”
윤서하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퇴근 보류자도 쓸모가 있네요.”
“그런 쓸모는 회사 복지 목록에 넣지 맙시다.”
나는 풀린 틈으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왔다. 시계가 코앞이었다.
유리판 너머로 과거가 비쳤다.
이진하가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 손으로 시계를 붙잡고 있었다. 태엽은 이미 부서졌고, 초침은 뽑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시계는 계속 움직였다. 이진하는 시계 뒷면에 뭔가를 새겼다.
[퇴근 승인자: 윤서하]
“……미친.”
십 년 전 시계에 윤서하 이름이 있었다.
그때의 윤서하는 아이였을 것이다. 아니, 이 일에 끼어들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름은 이미 새겨져 있었다. 미래 출근 예정. 그 끔찍하게 성실한 문구가 왜 장부에 있었는지 이제야 윤곽이 잡혔다.
이진하는 시계를 멈추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 윤서하가 승인자가 되도록 시간을 꼬아 놓았다. 구원인지, 더 큰 함정인지 아직은 몰랐다.
댕.
또 하나의 명패가 백지가 됐다.
나는 만년필 잔해를 거꾸로 쥐었다. 검은 잉크가 아직 손등에 남아 있었다. 보호자 0번 바코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내 퇴근은 내가 정한다, 이 고물딱지야.”
말은 멋있게 했지만 손은 떨렸다. 사실 내 퇴근을 내가 정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알바도, 감식반도, 프리랜서 현장 정리도 늘 남의 죽음이 내 퇴근 시간을 정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시계 중심축에 손등을 눌렀다. 만년필 잔여 잉크와 바코드가 같이 타들어 갔다.
드드득!
초침 없는 중심축이 비명을 질렀다. 시계 안쪽에서 푸른빛과 검은빛이 충돌했다. 벽의 명패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보관자가 어둠 속에서 욕설을 토했다.
[점장 기억 키 2/3 확보]
[원본 근무표 복원률: 66%]
[퇴근 시간 조작 로그 일부 복원]
압박이 썰물처럼 빠졌다. 반가온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현우는 태블릿을 끌어안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윤서하는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도윤 씨, 괜찮아요?”
“죽겠네요. 시말서 쓰는 게 차라리 쉽겠습니다.”
“그건 제가 반려하겠습니다.”
“그 말, 지금은 좀 무섭습니다.”
그때 멈춘 시계에서 치익, 노이즈가 흘렀다.
스피커가 있었다. 낡고 먼지 낀 구멍에서 오래된 안내 방송이 새어 나왔다.
『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시각은 퇴근 시각이 아닙니다. 』
나는 굳었다.
목소리가 내 것이었다.
변조도 아니고, 녹음 잡음도 거의 없었다. 지금 내가 말하는 목소리와 똑같았다. 내가 모르는 내가, 점장실 전체에 안내 방송을 하고 있었다.
『 윤서하 승인 전까지 보호자 0번 강도윤은 퇴근할 수 없습니다. 』
윤서하가 나를 돌아봤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방송은 마지막 문장을 또박또박 읽었다.
『 다시 알립니다. 당신의 퇴근은 윤서하가 승인할 때까지 보류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