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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17화. 검은 퇴근 카드와 최초 점장의 첫 출근 일러스트

116-117화. 검은 퇴근 카드와 최초 점장의 첫 출근

제목: 116-117화. 검은 퇴근 카드와 최초 점장의 첫 출근

제목: 116화. 세 번째 키는 퇴근 카드에 있다

스피커가 끊긴 뒤에도 내 목소리는 방 안에 남아 있었다.

[윤서하 승인 전까지 보호자 0번 강도윤은 퇴근할 수 없습니다.]

노이즈는 사라졌는데 문장은 안 사라졌다. 귀에 붙은 게 아니라, 출근 카드 뒷면에 접착제로 붙어 버린 느낌이었다. 내 목소리로 내 퇴근 불가를 듣는 일은 생각보다 기분이 더러웠다. 이 정도면 사후 세계 고객센터도 산재 신청을 받아 줘야 한다.

윤서하가 나를 봤다.

얼굴이 하얬다. 방금 전까지 피를 토하고도 버티던 사람이, 저 문장 하나에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제가…… 승인자라고요?”

그녀의 시선이 허공의 잔상과 내 손등을 오갔다. 내 바코드는 아직 뜨거웠고, 윤서하의 목덜미에 남은 검은 잠식은 더 짙어져 있었다. 이상한 조합이었다. 내 퇴근을 막는 이름과, 그 이름 때문에 사라질 것 같은 사람.

어둠 속에서 보관자가 웃었다.

“어려울 것 없다, 윤서하.”

검은 장부가 천천히 펼쳐졌다. 젖은 종이 냄새가 점장실을 채웠다.

“네 권한으로 승인하면 된다. 보호자 0번은 나갈 수 있어. 강도윤은 퇴근한다. 아주 깔끔하지.”

“대신 조건이 있겠죠.”

윤서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무너지진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저 사람은 무너질 때도 예의 있게 무너지는 타입이다.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 장례식장 의자까지 접고 나갈 사람.

보관자가 우산을 기울였다.

“문이 열리면 누군가는 안에 남아야 한다. 네가 승인하면 저자는 나간다. 대신 네가 이 방의 새 부품이 되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서하의 손이 움직였다.

허공에 작은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퇴근 승인 권한 감지]

[보호자 0번 퇴근 승인 대기]

“서하 씨.”

“도윤 씨가 계속 묶여 있던 게 저 때문이라면…….”

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닙니다.”

“하지만 시스템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시스템이 말하는 걸 다 믿었으면 저는 지금쯤 사망자, 미출근자, 보호자, 점장, 불법 주차 딱지까지 다 됐습니다.”

“도윤 씨.”

“남의 퇴근 대신 찍어 주는 건 대리출근보다 더 불법입니다. 그리고 나는 남이 찍어 준 퇴근으로 나갈 생각 없습니다.”

말은 가볍게 던졌지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윤서하의 손목은 차가웠다.

“나가더라도 같이 나갑니다. 혼자 편의점 도시락 까먹으면서 ‘아, 윤서하 씨는 점장실 부품 됐지’ 하고 젓가락 뜯는 인간이 되긴 싫거든요. 그건 너무 맛없습니다.”

윤서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반박하려다가 삼켰다.

그때 이현우가 책상 밑에서 거의 기어 나오듯 외쳤다.

“형! 방금 방송 파일 찾았어요!”

“지금 분위기상 제 목소리 파일이 불법 유출됐다는 소송은 나중에 해도 됩니까?”

“파일명이 더 문제예요. `보호자0_최종퇴근.wav`. 그리고 연결된 물리 키가 있어요. 벽면 출퇴근 카드 더미 쪽입니다.”

이현우의 태블릿 화면에 낡은 파일 경로가 떴다.

[archive/root/manager_room/checkout/퇴근카드_0000]

[linked_key: BLACK_CARD]

[status: not_checked_out]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바늘이 카드 더미 쪽을 가리키더니, 빙글 돌다 갑자기 아래로 처박혔다.

“아저씨, 저기요.”

“왜요. 또 제 인생 최저점 같은 감정입니까?”

“비슷해요. 그런데 더 축축해요. 저건 첫 출근 카드가 아니에요. 마지막으로 찍지 못한 퇴근 카드예요.”

벽면 전체가 울었다.

명패들이 칼날처럼 날아오지 않았다. 이번엔 더 나빴다. 카드 리더기들이 하나씩 벌어졌다. 플라스틱 틈이 입처럼 찢어지고, 그 안에서 얇은 빛이 혀처럼 꿈틀거렸다.

“이 방은 왜 사무용품이 계속 진화하냐.”

가온의 가슴팍 이름표가 카드 리더기 쪽으로 끌려갔다. 그는 양손으로 이름표를 붙잡고 버텼다.

“으악! 제 이름 빨려요!”

“나이 먹으면 월급명세서에도 빨립니다. 미리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위로 싫어요!”

이현우도 태블릿을 한 팔로 감싸고 책상 다리를 붙잡았다. 그의 사원증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름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를 찢는 소리와 숨을 삼키는 소리 사이. 사람을 기록으로만 남기는 소리였다.

나는 카드 더미로 몸을 던졌다.

수천 장의 카드 사이에 하나만 색이 달랐다. 검정.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검정. 퇴근이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차갑고 무거운 색.

손끝이 닿자 잔향청취가 강제로 열렸다.

[찍히지 않은 퇴근은 결근이 아니라 감금이다.]

혀 밑에서 쇳맛이 났다.

[승인자는 문을 여는 사람이 아니다.]

[남을 사람을 고르는 사람이다.]

이진하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보다 더 낡은 누군가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카드 안쪽에서 피 묻은 손이 보였다. 이진하가 검은 카드를 쥐고 있었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누군가를 내보내기 위해, 자기 이름으로 문을 막았다.

— 그래서 나는 내 이름으로 문을 막았다.

잔향이 끝나자 카드 리더기들이 동시에 울었다.

삐이이익.

[미퇴근자 회수 절차 재개]

[승인자 선택 필요]

윤서하가 숨을 삼켰다. 보관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눌러라. 네가 망설이는 동안 이름들이 사라진다.”

윤서하의 손이 다시 허공으로 올라갔다. 나는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가 내 손을 피해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 옆의 작은 메뉴를 열었다.

[권한 행사: 퇴근 프로세스 보류]

“승인하지 않겠습니다.”

윤서하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퇴근도 진행시키지 않겠습니다.”

카드 리더기들이 동시에 멈췄다. 입처럼 벌어진 틈이 딱딱하게 굳었다. 흡입이 끊기자 가온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현우는 태블릿을 끌어안고 숨을 토했다.

대신 윤서하가 무릎을 꿇었다.

[퇴근 보류 심화]

[침식 가속]

검은 얼룩이 그녀의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번졌다.

“서하 씨!”

“괜찮아요.”

“그 말 금지입니다. 방금 제가 써먹으려다 반려당한 대사라 재활용하면 안 됩니다.”

윤서하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빨리 하세요.”

나는 검은 퇴근 카드를 움켜쥐고 중앙 리더기 앞으로 달렸다. 카드 리더기의 입이 멈춰 있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보관자의 검은 우산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었다.

카드를 꽂았다.

찌직.

손등의 바코드가 타들어 갔다. 만년필 잉크, 멈춘 시계의 잔향, 검은 카드의 미퇴근 기록이 한꺼번에 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원본 근무표 복원 완료]

[기억 조각 3/3 일치]

성공.

그 단어가 머릿속에 뜨기도 전에, 리더기에서 나온 차가운 빛이 내 얼굴을 훑었다.

[사용자 신원 재확인]

[데이터 매칭 완료]

[환영합니다]

점장실의 모든 화면이 켜졌다.

[최초 점장: 강도윤]

제목: 117화. 최초 점장의 첫 출근

화면의 글자는 너무 또렷했다.

[최초 점장: 강도윤]

점장실이 조용해졌다. 방금 전까지 입처럼 벌어지던 카드 리더기들도, 벽에서 떨던 명패들도, 보관자의 웃음도 잠깐 멎었다.

반가온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이현우는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굳었다. 윤서하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현우야.”

내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멀었다.

“이거 시스템 오류지?”

이현우가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 회사 시스템이 가끔 그렇잖아. 퇴사한 사람 이름으로 결재 올라오고, 전임자 계정 살아 있고, 사장님은 비밀번호가 1234고. 내가 십 년 전에 점장이었다는 것도 그런 행정적 귀여움 아닐까?”

말을 뱉고 나서 알았다. 하나도 안 웃겼다.

내 농담은 바닥에 떨어져 조용히 사망했다. 사망 플래그 수집가답게 장례는 셀프로 치르면 된다.

그 순간 뒤통수 안쪽에서 유리가 깨졌다.

[‘최초 점장’ 잔향 감지]

[원본 근무표 기록과 동기화합니다]

“……윽.”

시야가 접혔다. 썩은 벽지와 카드 리더기의 입, 윤서하의 창백한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가 사라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점장실은 아직 점장실이 아니었다.

곰팡이 냄새도 없었다. 젖은 장부 냄새도 없었다. 대신 새 종이 냄새와 덜 마른 시멘트 냄새가 났다. 도배가 끝나지 않은 임시 현장 사무실. 책상은 조립한 지 얼마 안 된 싸구려 합판이었고, 벽에는 빈 근무표 틀만 걸려 있었다.

카드 더미도 없었다.

명패도 없었다.

아직 아무도 갇히지 않은 방처럼 보였다.

책상 앞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였다.

아니, 아니었다.

얼굴은 닮았다. 눈매도, 입꼬리도, 피곤할 때 턱을 만지는 버릇도 비슷했다. 그런데 낯설었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고, 표정은 내가 거울에서 본 적 없는 종류의 차가운 확신을 품고 있었다.

시스템이 내 이름을 껍데기처럼 씌운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원본 KDY가 정말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름을 쓰면 안 됩니다.”

이진하가 말했다.

그도 젊었다. 지금의 점장 잔향처럼 망가지지 않았다. 점장도 아니었다. 현장 기록 담당자처럼 보이는 회색 조끼를 입고, 빈 근무표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강도윤 씨, 이 근무표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 사람은 여기에 묶입니다. 보호 절차가 아니라 감금이 될 수 있습니다.”

책상 앞의 남자, 원본 KDY가 펜을 들었다.

“묶어 두지 않으면 사라진다.”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미 늦었어. 붕괴지 아래 남은 사람들, 이름부터 먹히고 있어. 보관자들이 냄새를 맡았다.”

그는 검은 퇴근 카드를 책상 위에 올렸다. 카드에는 아직 아무 글자도 없었다. 검은 플라스틱 한 장이었는데, 그 작은 물건이 방 안의 빛을 조금씩 빨아먹었다.

“내가 첫 카드를 찍는다. 내 이름을 껍데기로 세워서 사람들을 숨길 거야.”

“그건 대피소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감옥이라도 문이 있으면 나중에 열 수 있어.”

원본 KDY가 이진하를 봤다.

“사라진 사람은 문도 못 두드려.”

그때 문이 열렸다.

비는 오지 않았다. 바깥 복도는 건조했다. 그런데 검은 우산을 든 사람이 들어오자, 벽의 종이들이 젖기 시작했다. 빈 근무표 틀에 물방울이 맺혔다. 잉크병 뚜껑도 열리지 않았는데 검은 잉크 냄새가 퍼졌다.

검은 우산이었다.

“훌륭합니다.”

그는 우산을 접지 않은 채 말했다.

“첫 점장은 자기 이름만 맡는 자리가 아니지요. 모두의 퇴근 시간을 맡는 자리입니다. 누가 나가고, 누가 남고, 누가 이름만 남는지를 결정하는 자리.”

원본 KDY가 펜을 내려놓았다.

“넌 누구지?”

“문을 관리하러 온 사람입니다.”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빈 근무표 위로 번졌다.

“당신이 만든 대피소는 좋습니다. 사람을 보관할 수 있으니까요. 조금만 비틀면 더 좋아집니다. 이름을 보관하고, 시간을 보관하고, 결국 사람 자체를 보관할 수 있죠.”

“손대지 마.”

“이미 손댔습니다.”

검은 우산이 웃었다.

“당신이 첫 출근을 찍는 순간, 퇴근은 제 허락 없이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원본 KDY가 검은 카드를 집었다. 이진하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하지 마십시오.”

“안 하면 윤희가 먼저 사라진다.”

그 이름이 떨어진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멎었다.

윤희.

나는 숨을 삼켰다.

잔향이 찢어졌다.

“강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가 나를 끌어올렸다. 나는 현재의 점장실 바닥에 손을 짚고 있었다. 손바닥에 깨진 플라스틱 조각이 박혀 피가 났다. 현실감이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꿈 같았다.

보관자가 구석에서 낮게 웃었다.

“봤나?”

검은 장부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갔다.

“네가 시작했다. 네가 사람들을 이 방에 묶었다. 네가 만든 대피소가 지금의 감옥이 됐다. 그러니 끝내는 것도 네 몫이지, 최초 점장.”

가슴이 무거워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 혹은 나를 닮은 원본 KDY. 그가 살리려고 만든 절차가 수많은 사람을 잡아먹었다. 변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기억도 없다고. 이름만 같다고.

그런 변명은 편했다.

그래서 더 싫었다.

윤서하가 내 손을 꽉 잡았다.

“흔들리지 마요.”

“서하 씨.”

“시작한 사람과 망친 사람은 달라요. 방금 본 장면이 진짜라면, 그 사람은 살리려고 했어요. 비튼 건 검은 우산이고요.”

“결과가 이 모양인데요.”

“그럼 지금 고치면 됩니다.”

윤서하는 숨을 고르며 나를 똑바로 봤다. 목덜미의 검은 침식이 더 번져 있었지만 눈은 흐려지지 않았다.

“당신은 이 방을 다시 만들러 온 게 아니잖아요. 치우러 온 거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박혔다.

현장 정리 헌터.

웃기는 직함이라고 생각했다. 남이 망친 현장 치우고, 남이 남긴 죽음 수습하고, 남이 숨긴 기록 뒤져서 욕먹는 직업. 그런데 지금만큼은 그게 내 할 일처럼 느껴졌다.

“현우야.”

나는 이를 악물었다.

“복원된 원본 근무표 열어. 해제 조건 있을 거야.”

이현우가 정신을 차린 듯 태블릿을 두드렸다.

“네, 형. 원본 근무표 100% 복원본 접근합니다. 관리자 권한 해제 조건…… 세 개 떠요.”

붉은 글자가 허공에 떴다.

[관리자 권한 해제 조건]

[1. 최초 점장 신원 확인: 완료]

[2. 퇴근 승인자 생존 확인: 완료 - 윤서하]

[3. 보호자 0번의 미퇴근 사유 직접 진술 및 #######]

“세 번째가 깨졌어요. 뒷부분이 안 보입니다.”

“보호자 0번의 미퇴근 사유라.”

내 손등 바코드가 맥박처럼 뛰었다. 내가 왜 퇴근하지 못했는지 직접 말하라니. 회사 면담도 아니고, 던전 시스템이 자기소개서를 요구하고 있었다.

반가온이 바닥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근무표 맨 아래요.”

이현우가 화면을 내렸다.

복원된 원본 근무표 가장 아래. 원래는 빈칸이어야 할 자리. 검은 얼룩에 가려져 있던 한 줄이 천천히 드러났다.

윤서하의 손이 내 손에서 미끄러질 듯 떨렸다. 나는 붙잡은 힘을 조금 더 세게 했다. 이번엔 내가 놓치면 안 될 차례였다.

[최초 퇴근 대상자: 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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