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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285화. 윤으로 시작하는 이름과 백연의 필름이 탄다 일러스트

284-285화. 윤으로 시작하는 이름과 백연의 필름이 탄다

284화. 윤으로 시작하는 이름

비는 내리는데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모든 소리가 한 점으로 응축되어 고막 안쪽에서만 웅성거리는 기분이었다.

“형. 이번엔 누굴 살릴래?”

검은 우산 안쪽, 우산살 사이로 번지는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 굴절되어 들렸다.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다가도, 저 멀리 셔터 너머 깊은 수렁에서 올라오는 소리처럼 아득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이 떨리는 걸 숨기려 우산 손잡이를 더 꽉 쥐었다. 이놈의 세상은 도무지 가성비라는 걸 모른다. 선택지를 내밀 거면 차라리 ‘부먹’이냐 ‘찍먹’이냐 같은 평화로운 걸 줄 것이지. 이건 객관식도 아니고, 인질식 아닌가.

“질문 수준하고는. 야, 요즘 애들은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보지 ‘누가 살래’ 같은 섬뜩한 소리 안 해. 너 학부모 상담 좀 받아야겠다.”

농담이라도 뱉지 않으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빈정거림은 빗방울 하나 튕겨내지 못했다. 목소리는 대답 대신 웃었다. 아주 작게, 마치 젖은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로.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손이 내 코트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본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 보였다.

“도윤 씨, 가지 마요. 저 아이… 쫓아가면 안 돼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단호했다. 윤서하는 무언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방금 ‘증인 권한’을 강제로 만들어내며 지불한 대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골목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날짜를… 알아요. 저 장부에 적힌 날짜.”

그녀가 우산 천에 비친 글자를 가리키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공중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팔찌 흉터에서 검은 액체가 울컥 솟아올랐다.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쏟아진 잉크처럼, 혹은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원념처럼 시커멓게 번지며 그녀의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윽…!”

윤서하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방송 사고라도 난 것처럼 그녀의 주변 공간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투명한 유리문 잔상이 그녀의 얼굴 위를 덮쳤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진실을 말하려 할 때마다, 시스템이 그녀의 ‘입’을 강제로 편집하고 있었다.

“서하 씨! 진정해요. 말 안 해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그녀를 부축하려던 찰나, 옆에서 백연의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도윤, 이거 봐.”

백연은 빗속에서도 전혀 젖지 않은 인화지 한 장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한 손에는 깨진 카메라 렌즈 조각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렌즈 조각을 인화지 위에 겹쳐 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기록이 중첩되어 있어. 이 사진, 단순히 나중에 찍힌 게 아니야.”

“무슨 소리야?”

“사진 속에 찍힌 이 검은 장갑 낀 손. 아까는 우리가 보지 못한 ‘네 번째 인물’이 뒤늦게 나타난 거라고 생각했지? 아니야. 렌즈 굴절을 맞춰보니까 보여. 이 손은… 이 사진을 찍은 사람 바로 옆에 있었어.”

백연의 손끝이 인화지의 구석, 아주 미세한 그림자를 짚었다.

“누군가 기록을 편집하기 위해 나중에 들어온 게 아냐. 처음부터 현장에 있었어. 기록이 만들어지는 그 순간, ‘최초의 목격자’ 옆에 앉아있던 감시자라는 뜻이지.”

백연의 말은 서늘했다. 편집자가 나중에 나타난 불청객이 아니라, 사건의 설계 단계부터 함께했다는 뜻이니까.

나는 다시 우산을 들어 올렸다. 빗방울이 장부 위에 떨어질 때마다 글자들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최초 대리 결제자: 윤…]

그 뒤의 글자를 읽으려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름은 고정되지 않았다. 윤서하였다가, 윤서에서 멈췄다가, 다시 윤…으로 돌아가며 빈칸이 생겼다. 마치 누군가 이 자리에 앉을 ‘윤 씨’를 여러 명 준비해두고, 상황에 맞춰 이름을 갈아 끼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날짜… 사고 난 날이 아니에요.”

윤서하가 고통을 참으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녀의 눈가에 검은 잉크 같은 눈물이 고였다.

“내가 S급으로 판정받은 날도, 협회에 들어간 날도 아니에요. 이건… 우리 가문의 기록이, 어머니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진 날이에요. 내가 절대 기억하면 안 된다고 배웠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골목 반대편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검은 우산을 쓴 아이의 실루엣이 움직였다. 아이는 편의점 셔터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골목 끝자락에 덩그러니 놓인 오래된 공중전화 부스 쪽으로 걸어갔다.

부스는 녹슬고 유리가 깨져 있었지만, 그 안에 매달린 작은 이름표 하나만은 비에 젖지 않은 채 선명했다. 이름표는 칼로 긁힌 듯 훼손되어 있었다. 반가… 혹은 강도…. 내 이름 같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이름 같기도 한 교묘한 흔적이었다.

따르릉-.

정적을 깨고 공중전화가 울렸다. 이 폐허 같은 기록의 골목에서, 연결될 곳 없는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는 비명보다 날카로웠다.

나는 홀린 듯 부스로 다가갔다. 백연이 내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이미 수화기에 손을 뻗고 있었다. 잔향청취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과열되며 뇌를 찔렀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들려온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수증 프린터가 돌아가는 듯한 기계적인 마찰음이었다.

지지직… 고객님. 최초 결제 내역 열람은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차가운 안내 멘트 뒤로, 아주 낮고 어린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까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형은 그때도 대답 안 했잖아. 그래서 내가 대신 한 거야.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본 적 없는 기억의 파편이 튀어 올랐다.

물웅덩이에 거꾸로 박힌 작은 우산.

누군가의 젖은 외투 자락.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피로 얼룩진 이름표 조각.

나는 누군가를 살릴 수 있었던 순간에 침묵했었나? 아니면 선택을 회피했었나?

기억은 선명해지려 할 때마다 비릿한 철분 냄새와 함께 흩어졌다.

현재 증인 권한을 사용하여 기록을 열람하시겠습니까? 주의: 열람 시 증인의 모든 데이터가 휘발됩니다.

시스템의 경고였다. 수화기를 계속 들고 있으면 내 과거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윤서하다. 그녀가 억지로 만들어낸 ‘증인’으로서의 존재 자체가 지워질 것이다. 그녀의 희생을 발판 삼아 진실을 보겠느냐는, 악질적인 질문이었다.

윤서하는 비틀거리면서도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딛고 일어서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이니까.

“강도윤, 방법이 없어. 끊어!”

백연이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수화기를 놓지 않았다. 대신, 내 품 안에서 아직도 미세하게 진동하는 깨진 렌즈 조각과 윤서하의 손목에서 흐르는 검은 잉크를 보았다.

“아니, 방법은 내가 만들어.”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백연에게 손을 뻗었다.

“백연 씨, 그 렌즈 이쪽으로. 서하 씨, 손목 좀 빌릴게요.”

“뭐 하려는 거예요?”

“전화는 원래 혼자 받는 게 아니거든. 삼자통화라는 좋은 기능이 있잖아.”

나는 수화기의 송화구 부분에 백연의 렌즈 조각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윤서하의 팔목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잉크가 렌즈 표면에 닿게 했다.

내 잔향청취가 매개체가 되었다. 수화기 너머의 기계음과 렌즈에 투영된 기록의 잔상, 그리고 윤서하의 피 묻은 증언이 하나로 엮였다.

이것은 ‘녹음’이 아니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결제’를 우회하여, 기록 자체를 현재의 공간에 ‘증언’으로 강제 소환하는 방식이다. 윤서하를 소모하지 않고도 정보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틈새였다.

수화기에서 비명 같은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곧이어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창에 글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장부가 아니라, 누군가의 승인 서류가.

[최초 보호자 동의: 문태식]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보호자 동의 대리 서명: 문태식]

아저씨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그는 나를 거두어준 은인이자, 퇴근 후의 안식처였던 ‘기록상’의 주인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 과거의, 혹은 이 모든 비극의 ‘보호자’로서 서명을 했다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까의 기계음도, 어린아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너무나 익숙해서 더 낯선, 지금보다 훨씬 젊고 힘 있는 목소리.

도윤아.

문태식 아저씨였다.

그 우산 절대 펴지 마라. 펴는 순간, 기록은 확정된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우산을 펼친 채 이 골목의 빗방울을 받아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 검은 우산 안쪽에 새로운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붉은색도, 검은색도 아닌, 마치 타버린 재 같은 색의 글자였다.

[다음 사망 예정자: 백연]

우산살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백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젖지 않던 그녀의 옷이, 그 지점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채 굳어버렸다. 셔터 안의 아이가 다시 웃었다.

“거봐, 형은 아무도 못 살려.”

285화. 백연의 필름이 탄다

검은 우산 안쪽, 빗물로 적힌 글자가 일렁였다.

빗물도 잉크도 아닌 검은 농도가 우산 천 안쪽에 고였다. 누군가의 생애를 억지로 짓이겨 짜낸 것 같은 색이었다.

[다음 사망 예정자: 백연]

심장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공중전화 수화기가 미끄러질 듯 흔들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빗소리가 갑자기 거대한 비명처럼 고막을 때렸다.

“거봐, 형. 형은 아무도 못 살려.”

수화기 너머, 아이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웃음 끝에는 아주 오래된, 곰팡이 핀 지하실에서나 날 법한 서러움이 묻어 있었다.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이 비에 젖은 아이를 안아줘야 할지 헷갈릴 만큼 이상한 슬픔이었다.

“……이게 뭔 개소리야.”

나는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며 빈정거렸다. 손끝이 떨리는 걸 숨기기 위해 수화기를 더 꽉 쥐었다.

“누가 죽는다고? 백연이가? 야, 쟤는 이름부터가 ‘연기’ 같아서 잘 잡히지도 않는 애거든? 네가 장부에 적는다고 뭐 어떻게 될…….”

“도윤 씨.”

차분한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백연이었다. 그녀는 내 시선이 머문 우산 안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이름이 ‘사망 예정자’라는 딱지 뒤에 붙어 있는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카메라 렌즈처럼 차갑고 정교하게 빛났다.

“봤어. 내 이름 맞네.”

백연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소매를 들어 올렸다. 젖지 않는 재질이라던 그녀의 방수 재킷 위로 검은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불길이 닿아 타는 것이 아니었다. 인화지가 현상액에 잠겨 서서히 이미지를 드러내듯, 그녀의 옷자락 끝에서부터 눅진한 검은 물이 차올랐다.

“백연, 너……!”

“당황하지 마.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녀는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며 주머니에서 인화지 한 장을 꺼냈다. 아까 네 번째 인물의 손이 찍혔다던 그 사진이었다. 그녀는 얼룩이 번지는 자신의 옷 소매에 그 사진을 가져다 댔다.

치익,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얼룩, 우산을 펼쳐서 생긴 게 아니야.”

백연이 날카롭게 분석을 토해냈다. 그녀는 얼룩이 묻은 인화지 부분을 거침없이 찢어냈다. 찢어진 틈새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렌즈를 통해 그 흐름을 추적했다.

“내가 ‘네 번째 인물’의 손을 사진으로 끌어낸 대가야. 기록되지 말아야 할 존재를 억지로 현상했으니까, 그 기록이 나를 지우려 드는 거지.”

“그게 그거잖아! 뭐가 됐든 네가 위험하다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윤서하를 돌아봤다. 그녀의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서하의 팔찌 근처 흉터에서는 검은 잉크가 줄기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억지로 증인 권한을 유지하며 백연의 이름이 장부에 완전히 고정되는 걸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도윤 씨…… 장부를 봐요.”

윤서하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백연이라는 글자가…… 번지고 있어요. 이건 이름이 아니라 ‘기록명’이에요. 이 이름을 지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기록이 조준하고 있는 건 ‘그 사진을 찍고 현상한 존재’ 자체예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잔향청취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백연이 들고 있는 카메라 렌즈, 그리고 우산 안쪽의 글자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빗소리 너머, 아주 먼 과거에서 온 것 같은 기계음이 들렸다.

철컥.

찰칵.

백연의 셔터음이 아니었다. 좀 더 무겁고, 기름때 묻은 구식 카메라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백연의 렌즈 안쪽에 잔상처럼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 소리의 궤적을 쫓아 렌즈의 굴절된 단면을 파고들었다.

그곳에, 아주 미세한 숫자가 비쳤다.

[B-04]

[보관실]

[02:17 AM]

“……B-04 보관실. 새벽 2시 17분.”

내가 뇌까리자, 공중전화 부스 안의 작은 이름표가 거세게 흔들렸다. 빗물에 씻겨 내려간 이름표 밑바닥, 긁힌 글자 아래에 숨겨져 있던 문구가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보호자 부재]

그 문구를 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타올랐다. 이건 나에게 붙은 말인가, 아니면 저 수화기 너머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붙은 말인가. 혹은, 우리가 지금 찾고 있는 그 ‘가온’이라는 아이의 낙인인가.

“형은 그때도 대답 안 했어. 그래서 내가 대신 한 거야.”

아이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분노보다는 지독한 피로감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이번엔 누굴 버릴 거야? 저 누나? 아니면 팔에서 피 흘리는 누나?”

“입 닥쳐. 아무도 안 버려.”

나는 수화기를 꽉 쥐고 백연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백연, 사진 태워. 아니, 역광을 만들어.”

백연은 내 의도를 즉시 파악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자기 필름 끝단에 불을 붙였다. 불꽃은 평범한 주황색이 아니었다. 인화액과 섞이며 푸르스름한 안개를 만들어냈다.

“검은 얼룩에 불을 먹여서, 이 사망 플래그가 어디서 인쇄되는지 역추적하라는 거지?”

“그래. 네 능력이잖아. 기록을 보는 게 아니라, 기록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찍는 거.”

백연은 망설임 없이 타오르는 필름을 검은 얼룩이 번지는 사진 위에 겹쳤다. 순간, 강렬한 빛이 번쩍이며 사진 속 ‘네 번째 손’의 윤곽이 도드라졌다.

윤서하가 비명을 참으며 자신의 잉크를 그 빛 속에 던졌다. 증인의 권한이 빛의 산란을 막고 초점을 고정했다.

“보여요!”

윤서하의 외침과 함께, 사진 속 검은 장갑의 디테일이 살아났다.

장갑 손등 부분. 단순한 빗방울 자국인 줄 알았던 무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에 눌려 찍힌 인장이었다. 톱니바퀴와 날개가 교차하는 모양, 그리고 그 아래에 새겨진 작은 코드.

헌터 협회 감식반의 내부 인장이었다.

“협회……? 문태식이 아니라 협회 놈들이라고?”

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태식이 보호자인 줄 알았는데, 그가 소속된 조직이 이 현장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가 이 손의 주인인지, 아니면 이 손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려 했던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백연의 몸을 타고 올라오던 검은 얼룩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장부에 적힌 [백연]이라는 글자가 다시 진해지기 시작했다.

“도윤 씨, 우산 접어야 해요!”

윤서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기록이 확정되려고 해요! 우산을 접으면 이 장부가 닫힐 거예요!”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문태식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했다.

‘펴는 순간 기록은 확정된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접는 순간 그 기록은 수정 불가능한 상태로 보관함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지금 접으면 백연의 이름은 영원히 이 우산 속에 박제될 것이다.

“접지 마. 오히려 열어둬야 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공중전화 수화기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수화기 줄을 우산살 사이에 교묘하게 꼬아 걸었다.

“뭐 하는 거야?”

백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전화, 아까부터 ‘보호자 동의’니 뭐니 하면서 통화 상태 유지 중이잖아. 이 수화기를 우산에 걸어두면, 이 시스템은 지금 ‘열람 중’인 상태로 고정돼. 기록이 최종 저장되지 못하게 페이지를 붙잡아 두는 거라고.”

내 억지 논리가 통했는지, 우산 안쪽에서 꿈틀거리던 글자들이 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확정되지 못한 운명이 허공에서 겉돌기 시작했다.

“하…… 진짜 죽겠네.”

나는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백연의 옷에 묻은 얼룩은 여전히 기분 나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윤서하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그때였다.

공중전화 부스 바닥, 빗물이 고여 웅덩이가 된 곳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진흙과 오물에 절어 있는 낡은 플라스틱 카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헌터 협회 출입증이었다. 사진 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사진 속 인물이 끼고 있는 장갑은 방금 우리가 사진에서 본 그 인장과 일치했다.

그리고 출입증 뒷면, 비에 젖어 번진 글씨 위로 새로운 기록이 덧씌워졌다.

[B-04 보관실 최종 반납자: 문태식]

“……문태식 아저씨.”

내가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철컥, 하는 거친 기계음이 고요한 골목을 갈랐다.

소리가 난 곳은 편의점 셔터 안쪽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셔터 너머, 아무도 없어야 할 편의점 내부에서 노란 전등불이 하나 켜졌다.

그리고 끼이익, 하며 아주 오래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 이제 들어올 거야?”

수화기에서 들려오던 아이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편의점 안쪽 어둠 속에서 직접 들려왔다.

“문 열어뒀어. 보호자가 왔으니까.”

나는 우산에 걸린 수화기를 힐끗 본 뒤, 백연과 서하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도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검게 타들어 가는 백연의 필름 조각을 챙겨 들고, 열린 문을 향해 발을 뗐다.

비는 여전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굵어진 빗줄기가 우산 위를 두드리며, 누군가의 마지막 기록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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