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5화. 존재 증명과 보증인
제목: 54화. 반가온의 존재 증명
숨을 쉬는 것조차 행정적인 절차처럼 느껴졌다.
기록 열람실의 무거운 공기를 뚫고 현실의 복도로 발을 내디뎠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한 피로감이었다. 눈꺼풀 위로 수천 개의 서류 뭉치가 올라앉은 기분이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서늘한 병원 공기에 닿아 소름을 돋웠다.
“……일단 퇴근하고 싶네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내 발은 주차장이 아니라 엘리베이터로 향하고 있었다. 퇴근이라는 단어는 이제 나에게 포상 휴가만큼이나 현실감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죽어서 영면에 드는 게 차라리 더 빠른 퇴근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농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말이 씨가 되는 동네니까.
“강도윤 씨,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한지율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반가온을 검은 우산의 첩자로 의심하며 날을 세우던 그녀였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이 ‘죽음의 명단’에 오르자, 그녀는 마치 자기 잘못으로 누군가를 사형대로 밀어 넣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농담 아닙니다. 원래 과로사 직전의 직장인은 유언도 출근 기록부에 남기는 법이거든요.”
나는 대충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옆에 선 윤서하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아직도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출석’ 여부를 두고 시스템과 벌였던 사투의 잔상이 남은 탓이리라.
“나 때문에…… 가온 씨가 죽게 된다면, 저는…….”
“윤서하 씨.”
나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죄책감은 가성비가 떨어지는 감정입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지금 우리가 만든 그 ‘보류’라는 꼼수가 얼마나 버텨줄지나 고민하세요.”
“하지만 시스템이 그랬잖아요. ‘반가……’의 의식이 회복되는 순간 다시 선택해야 한다고. 그건 사실상 사형 선고의 유예일 뿐이에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였다.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이현우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 난 아까 그 명단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어.”
우리 셋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꽂혔다. 이현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이름이 가려져 있었다고? 아니, 내 눈에는 그저 타버린 종이처럼 까맣게 보였을 뿐이다. ‘반’인지 ‘가’인지 하는 글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어. 너희가 보고 있는 그 ‘시스템’이라는 게, 나 같은 관측 불가 대상에게는 정보를 차단하고 있는 건가?”
이현우의 말에 뒤통수가 싸늘해졌다. 관측 불가 대상인 그조차 읽을 수 없는 명단.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 명단이 이 세상의 논리가 아닌, 철저히 ‘대상자’들만을 겨냥한 저주라는 증거였다.
띠링-.
그때 내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비명을 질렀다. 일반적인 벨 소리가 아니었다. 시스템 알림음이었다.
[알림: 보류 대상 ‘반가……’의 상태 변화 감지.]
[현재 상태: 의식 반응 미약하게 감지(0.1%).]
[경고: 환자 명칭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보류 기한이 실시간으로 단축됩니다.]
“벌써?”
한지율이 내 화면을 훔쳐보며 얼굴을 굳혔다.
“아직 중환자실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깨어나려고 한다고요?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자가 호흡도 힘들다고 했는데!”
“누군가 깨우고 있는 겁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복도 끝, 격리 병동으로 향하는 자동문이 보였다.
“시스템은 반가온이라는 이름을 확정하고 싶어 해요. 그래야 윤서하 씨를 출석시키고, 네 번째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지금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 반응은 자연스러운 회복이 아닙니다. 시스템이 억지로 ‘이름의 주인’을 불러내고 있는 거예요.”
나는 병동 대기실 의자에 놓여 있는 익숙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반가온이 평소 입고 다니던 작업용 점퍼였다. 그 주머니 밖으로 낡은 작업용 장갑 한 짝이 삐져나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장갑을 집어 들었다.
[잔향 청취를 시작합니다.]
금속 가루가 묻어 거칠거칠한 가죽의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눈을 감자, 시끄러운 환청과 함께 잔상이 휘몰아쳤다.
아, 진짜. 이놈의 용접기는 맨날 이 모양이라니까.
가온아, 커피 마실래? 믹스커피가 최고지, 응?
반가온의 목소리였다. 특유의 투덜거림과 싸구려 커피 취향이 묻어나는 기억들. 그런데 그 일상적인 기억 너머로, 불쾌하고 끈적이는 소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마치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형체 없는 목소리였다.
……온.
반…… 가…… 온.
네 이름을 말해. 네가 누구인지 증명해. 어서.
장갑이 내 손안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만 불러, 이 미친놈아!’라고 외치는 반가온의 짜증 섞인 영혼의 울림이 들렸다. 누군가, 혹은 어떤 힘이 반가온의 의식 밑바닥을 강제로 헤집으며 그의 이름을 완성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나는 장갑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손끝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름을 부르면 안 돼요.”
내 말에 윤서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그게 무슨…… 가온 씨를 깨우려면 이름을 불러서 자극을 줘야 한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건 일반적인 환자 이야기죠. 지금 반가온 씨는 이름이 완성되는 순간 사망 플래그가 확정되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을 ‘반가온’이라고 불러서 확정하는 순간,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죽일 겁니다.”
윤서하는 내 말을 이해하자마자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 제가 계속 유령으로 남으면 되나요? 제가 ‘출석’하지 않고, 계속 이대로 투명 인간처럼 살면 가온 씨는 살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전 상관없어요. 제 신분도, 권한도…….”
“착각하지 마세요, 윤서하 씨.”
나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유령으로 남는 건 검은 우산이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입니다. 당신이라는 강력한 변수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동시에 반가온이라는 약점을 이용해 우리를 계속 흔들겠죠. 이건 희생이 아니라 함정에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짓입니다.”
“그럼 어떡해요! 이름을 부르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고, 그렇다고 죽게 내버려 두지도 말라니. 도대체 어떻게 증명하라는 거예요?”
한지율의 외침이 복도에 공허하게 울렸다.
나는 대답 대신 격리 병동의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산소호흡기를 낀 채 누워 있는 사내. 그는 아직 ‘반가……’라는 불완전한 상태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매달려 있었다.
그의 존재를 증명하되, 이름을 완성하지 않는다.
이건 행정적인 모순이자, 동시에 이 시스템의 허점을 찌를 수 있는 유일한 틈새였다.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만 알고 있는 ‘결석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시스템이 부여한 이름이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진짜 흔적 말입니다.”
나는 침식도가 45%에서 멈춰 있는 내 상태창을 힐끗 보았다. 내 이름 역시 반쯤은 지워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저 안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내의 고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기름칠이 덜 된 문이 비명을 질렀다. 병실 안은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심박동기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우리가 침대 곁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
반가온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지만, 무언가 간절히 내뱉으려 애쓰고 있었다.
“가온 씨?”
윤서하가 본능적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반가온의 머리맡으로 다가갔다. 그의 의식은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조각배 같았다.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운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건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
“……강…… 훈……?”
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부른 것은 내 이름 ‘강도윤’이 아니었다. 내 이름의 중간 글자가 침식되어 사라진, 시스템상에만 존재하는 기괴한 파편.
[경고: 침식된 이름으로 호칭되었습니다.]
[강도윤 님의 이름이 흔들립니다.]
[침식도: 45% -> 46%]
망할. 이 녀석은 지금 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몸을 갉아먹고 있는 그 ‘공백’을 보고 있는 거였다.
반가온의 감긴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나의 침식된 이름 한 칸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목: 55화. 이름 없는 증명서
“강…… 훈……?”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그 이름이 병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시에 내 시야 한구석에 붉은색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경고: 침식된 이름으로 호칭되었습니다.]
[침식도: 45% -> 46%]
심장 부근이 누군가 송곳으로 찌른 것처럼 따끔거렸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내 존재의 밑바닥, '강도윤'이라는 이름의 귀퉁이가 소리 없이 부서져 나가는 감각이었다.
침대 위에 누운 녀석은 눈을 뜨지 못했다. 하지만 녀석의 정신은 지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 이름을 갉아먹고 들어앉은 그 거대한 공백, 시스템조차 오류로 처리하는 '강훈'이라는 허상을 더듬고 있었다.
“가, 가온아! 정신 들어? 누나 보ㅇ……!”
“입 다물어!”
윤서하가 반사적으로 녀석의 이름을 부르려 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내 서슬 퍼런 기세에 윤서하가 어깨를 움찔 떨며 말을 멈췄다.
“도윤 씨? 왜 그래요, 가온이가 지금…….”
“안 돼. 이름 부르지 마. 절대.”
나는 이를 악물며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보류 대상 ‘반가……’의 상태 변화 감지]
[환자 명칭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보류 기한이 실시간으로 단축됩니다.]
지금 이 공간은 거대한 함정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스템은 녀석의 존재를 '확정'할 것이고, 그 확정은 곧 검은 우산이 설계해둔 사망 플래그의 완성을 의미한다. 이름을 부르는 게 구원이 아니라 사형 선고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이름을 안 부르면 얘를 어떻게 깨워?”
한지율이 당황한 듯 내 팔을 붙잡고 따졌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름이 아니면, 이 애를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그 물음에 대답한 건 내가 아니라 이현우였다. 그는 시스템 메시지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오로지 침대 위 환자의 육체적인 반응만을 관찰하고 있었다.
“맥박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 수치는 여전히 바닥이에요. 마치…… 누군가 억지로 이 환자의 이름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유도하는 것 같습니다.”
이현우의 말이 맞았다. 저 너머에서 누군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녀석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기를, 혹은 우리가 녀석의 이름을 불러서 이 불안정한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삐빅, 비비빅!
갑자기 병실 안의 의료 모니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심박수와 혈압을 표시해야 할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성명 호출 권고]
[환자명 확정 대기 중……]
[남은 시간: 00:09:59]
“이게 뭐야? 왜 기계가 이런 문구를 띄워?”
윤서하가 경악하며 모니터를 바라봤다. 의료 기기가 아니라 행정 시스템의 독촉장 같은 문구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0.1초 단위로 줄어드는 숫자는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 같았다.
“검은 우산의 방식이지. 존재를 행정적으로 말소하거나 고정하는 거.”
나는 녀석의 머리맡에 놓인 작업용 장갑을 다시 쥐었다. 거친 가죽의 질감, 손가락 끝에 묻은 금속 가루의 서늘함. 잔향청취(殘響聽取)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이름이 아니라면, 너를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걸 보여줘.'
이름은 껍데기다. 시스템이 부여하고 타인이 부르는 기호일 뿐이다. 하지만 녀석이 살아온 궤적, 그 손때 묻은 습관들까지 시스템이 마음대로 규정할 수는 없다.
장갑 너머로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형! 믹스커피는 설탕이 밑으로 가야 된다니까요? 그래야 마지막에 단맛이 확 돌지.
이 금속은 마력이 섞여서 일반 용접기로는 안 돼요. 내 손맛이 좀 들어가야지.
감정사한테 이름표가 뭐가 중요해요. 내가 쓴 보증서가 진짜지.
기억 속의 녀석이 투덜거리며 낡은 수첩 하나를 가슴팍에 쑤셔 넣는 장면이 보였다. 협회 공인 물품 보관함? 아니, 녀석은 그런 깔끔한 곳을 믿지 않았다.
“서하 씨, 지율 씨. 시간 벌어줘요.”
“시간이라니, 어떻게?”
“지금 병원 보안 시스템이랑 의료진들이 이쪽으로 올 겁니다. 시스템이 '이름 없는 환자'를 처리하려고 할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주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지금 '결석' 상태다. 여기서 무력을 행사하면 그녀의 헌터 자격뿐만 아니라 존재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윤서하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검자루를 꽉 쥐었다.
“알겠어요. 10분, 아니 5분이라도 벌어볼게요. 대신 가온이를…… 꼭 깨워줘요.”
그녀가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문틈으로 푸른 마력의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다. A급 헌터의 위압감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자신의 존재가 깎여 나가는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그녀는 문 앞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침대 밑, 녀석의 개인 사물함을 거칠게 뒤졌다.
“어디 있어. 네가 말한 그 '보증서'.”
이현우가 내 옆에서 가늘게 떨리는 환자의 손을 붙잡았다.
“도윤 씨, 환자의 체온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사망'이 아니라 '삭제'를 준비하는 것 같아요.”
“삭제하게 안 둬. 이 자식은 나한테 갚아야 할 할부금이 산더미라고.”
나는 농담조로 중얼거렸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물함 깊숙한 곳, 낡은 잡지더미 사이에서 때 묻은 가죽 노트 한 권이 만져졌다. 반가온이 항상 품에 끼고 살던 감정사 노트였다.
노트를 펼치자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감정 기록들이 쏟아졌다. [E급 마석: 순도 낮음, 사기 당함], [강도윤 씨의 부러진 단검: 수리비 청구 예정].
“이건 그냥 일기장이잖아요! 이걸로 어떻게…….”
한지율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외칠 때, 나는 노트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 낡은 영수증 조각 하나가 풀로 붙어 있었다.
[보류 기한: 00:01:12]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모니터의 붉은 문구들이 이제 비명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그 영수증 조각을 낚아채듯 뜯어냈다.
그런데 영수증 뒷면을 본 순간, 내 사고가 정지했다.
그곳에는 '반가온'이라는 이름도, 녀석의 지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대신 검은 우산의 문양이 희미하게 박힌 인장 위로, 익숙한 필체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보증인: 강도윤]
그건 내 글씨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히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뭐?”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녀석이 깨어나기 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맡겼다는 그 '보증서'의 보증인이 나라고?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는 이미 이 녀석의 존재 증명에 깊숙이 엮여 있었던 것이다.
영수증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어 나와 내 손등을 타고 올라왔다.
[시스템 알림: 고유 각인 '보증인'의 권한이 활성화됩니다.]
[대상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존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녀석의 진심 어린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형, 나중에 내가 내가 아니게 되면 말이에요. 이름 말고, 내가 형한테 빌린 그 믹스커피 한 잔으로 나를 기억해 줘요. 그럼 나,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거든.
나는 영수증을 녀석의 가슴팍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야, 임마. 믹스커피 값 떼먹고 도망갈 생각 마.”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병실을 가득 채웠던 시스템의 붉은 노이즈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환자명: (미확정) -> (보증된 존재)]
[사망 플래그 '이름 없는 죽음'의 가동이 일시 중단됩니다.]
삐이이이-!
길게 이어지던 심박 센서의 경고음이 규칙적인 박동 소리로 바뀌었다. 00:00:03을 남겨두고 멈춘 타이머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아…… 하아…….”
문밖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윤서하가 들어왔다. 그녀의 어깨에는 깊은 자상이 입혀져 있었고, 옷소매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보안 팀을 물리적으로 막아낸 대가였다.
“도윤 씨…… 가온이는?”
나는 대답 대신 침대 위를 가리켰다.
녀석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까닥였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올라갔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가, 이내 내 얼굴에 멈췄다.
“……형.”
녀석의 입에서 나온 건 내 이름도, 시스템이 강요하던 가짜 이름도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나를 부르는 무책임하고도 친근한 호칭.
“믹스커피…… 설탕…… 다 넣었죠?”
그 실없는 소리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이 자식아. 네 몫까지 아주 달게 타놨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였다. 녀석의 가슴 위에 놓인 영수증 조각이 검게 타들어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 녀석의 가슴팍에 희미하게 새겨진 '검은 우산'의 낙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경고: 보증은 일시적입니다.]
[검은 우산의 '수금원'이 보증 채무를 확인하러 이동 중입니다.]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막, 우리는 더 거대한 빚더미 속으로 발을 들인 참이었다. 나는 내 손등에 새겨진 침식도 46%의 흉터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이자 치고는 너무 비싼데.”
내가 나지막이 읊조린 농담에 대답하는 건, 복도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구두 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