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57화. 수금원과 B-04 폐기금고
제목: 56화. 수금원이 병실 문을 두드렸다
수금원.
그 세 글자가 시스템 메시지창에 떠오르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지갑 속의 신용카드를 떠올렸다. 지난달에 무리해서 할부로 긁은 건조기 때문인가? 아니면 며칠 밀린 월세 때문인가?
“무슨 수금원이 이렇게 요란하게 와. 현대 사회는 자동이체라는 훌륭한 시스템이 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농담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가슴속에 들어찬 서늘한 감각을 어떻게든 밀어내보려 던진 농담이었지만, 병실 안의 공기는 내 농담보다 훨씬 빠르게 얼어붙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침대 위의 감정사 역시 굳은 표정으로 병실 문쪽을 응시했다.
방금 깨어난 ‘보증된 존재’의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우산 낙인이 기분 나쁜 박동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똑, 똑.
구두 소리가 멈춘 곳은 병실 문 앞이었다. 하지만 문손잡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병실 문의 작은 유리창 너머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처음에는 그저 누군가 서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유리창에 비친 것은 복도의 풍경이 아니라, 잉크를 쏟아부은 듯한 검은 구름이었다. 그 안에서 서서히 형태가 잡혔다. 길쭉한 실루엣, 그리고 그 위를 덮은 커다란 검은 우산.
[알림: ‘검은 우산’의 수금원이 채무 이행지를 점유합니다.]
[경고: 해당 구역의 행정 정보가 ‘병실’에서 ‘수금 집행지’로 변경됩니다.]
순식간에 병실 안의 의료 모니터가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환자의 심박수와 혈압을 나타내던 그래프가 숫자로 변했다.
[잔금: 이름 없는 영혼 1구]
[이자: 보증인의 존재 인지 0.1%씩 복리 계산]
[연체 기간: 존재 증명 지연으로부터 3분 경과]
“미친놈들이…….”
욕설이 절로 나왔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인간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었다. 회계 장부에 이빨이 달리면 딱 저 꼴일 것이다.
“강도윤 씨.”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의 당당함은 간데없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음성이었다.
나는 급히 문쪽으로 다가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이 흐릿했다. 마치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처럼, 그녀의 윤곽이 미세하게 떨리며 배경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에 걸린 헌터 라이선스의 홀로그램 마크가 점멸하듯 꺼져가고 있었다.
“윤서하 씨! 들어와요! 거기 있으면 위험해!”
“못 가요. 내가 ‘결석’ 상태라…… 지금 문을 열면, 이 병실의 존재 자체가 시스템에서 삭제될 거예요. 내가…… 내가 막고 있을게요.”
그녀의 어깨에 입은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증발하고 있었다. 존재의 휘발.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없다는 ‘결석’의 패널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수금원이 문을 여는 행위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형, 저거…….”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녀석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녀석의 시선은 의료 모니터가 아닌, 바닥의 그림자를 향해 있었다.
“나 기억났어. 저 우산 모양…… 내가 보증서를 쓴 적은 없는데, 저 낙인이 찍힌 물건을 감정한 적이 있어. 협회 놈들이 비밀리에 처리해달라고 가져왔던…….”
“감정사, 일단 움직이지 마. 너 아직 이름도 확정 안 됐어.”
“아니, 들어봐. 그놈들이 그랬어. 이 낙인이 찍힌 물건은 ‘이름’이 아니라 ‘습관’으로 묶여 있다고. 주인님이 죽어도 그 습관이 남아 있는 한 채무는 이어진다고…….”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실 안의 단말기가 거칠게 비명을 질렀다.
[출입 자격 확인 중……]
[경고: 승인되지 않은 ‘보증인’의 점유를 확인.]
[조치: 해당 구역의 출입 권한을 삭제합니다. 보증인 강도윤의 접근 권한을 박탈합니다.]
철컥,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병실이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있었다. 문이 잠긴 게 아니었다. 이 방으로 들어오는 경로 자체가 지워지고 있었다. 이제 밖으로 나갈 수도, 누군가 들어올 수도 없다. 오직 ‘수금원’만이 유일한 집행권을 가지고 이 공간을 허물어뜨릴 것이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주워둔 낡은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반가온의 노트 갈피에 끼워져 있던, 검은 우산 문양이 찍힌 그 조각이다.
손끝에 닿은 영수증 조각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타오르는 불꽃은 없었지만, 종이 끝이 검게 말려 들어가며 기괴한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채무자는 이름이 아니라 습관으로 도망친다.』
『장부에는 오직 지출의 흔적만이 진실로 남는 법.』
『회계상의 오류를 정정하기 위해, 원본을 회수하러 왔노라.』
[잔향청취(殘響聽取)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시야가 뒤틀리며 숫자의 홍수가 쏟아졌다. 영수증 조각에서 흘러나온 기억의 파편들이 내 눈앞에 환영을 만들어냈다. 차갑고 습한 지하 공간. 켜켜이 쌓인 먼지 사이로 철제 금고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하나, 녹슨 문 위에 선명하게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협회 지하 폐기금고 B-04]
그 안에는 수천 장의 종이가 흩날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 단 한 권의 가죽 장부가 공중에 떠 있었다.
[무명 보증서(無名 保證書) 원본]
그것이 이 모든 소동의 시작이자, 침대 위의 녀석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사망 플래그의 본체였다.
“……웃기지 마.”
나는 영수증 조각을 꽉 움켜쥐며 문밖의 그림자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수금원의 실루엣이 유리창을 넘어 문틀 전체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수금원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너희 절차 무시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이 녀석 보증인이라며.”
유리창 너머의 검은 그림자가 잠시 멈칫했다.
[알림: 고유 각인 ‘보증인’의 권한이 충돌합니다.]
“채무자가 깨어났고, 보증인이 여기 있어. 그런데 원본 대조도 안 하고 무작정 수금부터 하겠다고? 이거 금융감독원에 신고하면 너네 바로 영업정지야, 알아?”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하지만 시스템은 논리에 기반한다. ‘보증인’이라는 내 권한이 활성화되어 있는 이상, 놈들도 제멋대로 집행할 수는 없을 터였다.
[보증인 강도윤의 이의 제기를 접수합니다.]
[확인 중…… ‘무명 보증서’의 원본 대조 필요성이 인정됩니다.]
순간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이 느껴졌다.
[위험: 이름 침식률이 상승합니다. 46% -> 47%]
이름을 부르지 않고 존재를 고정한 대가였다. 1%의 상승. 하지만 그 1%가 주는 압박감은 방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내 존재의 밑바닥이 사포에 긁힌 것처럼 꺼끌거렸다.
다행히 수금원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문을 뒤덮었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복도의 평범한 형광등 불빛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은 빈손으로 떠나지 않았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의료 모니터에 새로운 화면이 출력되었다.
[고지서: 원본 대조 출석 요구]
[장소: 관리국 지하 폐기금고 B-04]
[기한: 금일 자정까지]
[미출석 시, 보증인 및 채무자의 존재를 일괄 수금함.]
검은 우산의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지자, 버티고 서 있던 윤서하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급히 문을 열고 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아직은요. 그런데 강도윤 씨, 저 고지서에 적힌 곳…….”
윤서하가 창백해진 얼굴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협회 지하 폐기금고 B-04.
내가 감식반 계약직으로 처음 입사했을 때, 사수가 내게 가장 먼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 강도윤. 넌 계약직이니까 시키는 것만 해. 특히 저 지하 4층 B구역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마라. 거긴 협회가 ‘버린 것’들이 모이는 곳인데, 한 번 들어가면 기록상으로도 존재가 지워지니까.
내가 절대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던 그 금고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감정사 노트를 집어 들었다. 침대 위의 녀석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네 시간.
내 이름값으로 빌린 이 억지스러운 시간을 쓰기 위해,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하지만 가장 가기 싫었던 장소로 다시 발을 들여야만 했다.
퇴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제목: 57화. B-04 폐기금고
“아, 진짜. 이 정도면 근로기준법 위반 아닙니까?”
병실 문을 나서며 내가 뱉은 첫마디였다.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시계를 확인하니 저녁 8시.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단 4시간뿐이었다.
“퇴근 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야근지가 협회 지하 폐기금고로 바뀌었다니. 추가 수당은커녕 목숨 수당부터 챙겨야 할 판이네요.”
내 농담 섞인 투덜거림에 뒤따라오던 윤서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소라면 ‘말조심하세요’라고 핀잔을 줬을 그녀였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그럴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어깨의 상처에서는 여전히 마력의 잔재가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녀의 손목 위에서 명멸하는 헌터 라이선스 홀로그램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강도윤 씨. 농담할 상황이 아니라는 거 알지 않습니까.”
“알죠. 그러니까 하는 소립니다. 안 그러면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질 것 같거든요.”
윤서하가 입술을 짓씹으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창백해진 안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저도 같이 갑니다. ‘수금원’이 남긴 고지서라면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헌터 라이선스가 흐려진다는 건,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시스템에서 누락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무리했다간 윤서하라는 존재가 ‘결석’을 넘어 ‘영구 제명’될지도 모른다.
“윤 팀장님은 여기 남아서 반가온 씨를 지키세요. 수금원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여긴 여전히 ‘수금 집행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팀장님이 없으면 반가온 씨는 그 즉시 이름 없는 영혼으로 압류될 겁니다.”
“하지만…!”
“저 믿으시죠?”
내 물음에 윤서하가 말을 멈췄다. 나는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차가운 한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이건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존재가 깎여 나가는 고통일 터였다.
“팀장님이 여기서 버텨주셔야 제가 돌아올 곳이 생깁니다. 그리고 저 혼자 안 가요. 이현우 씨랑 같이 갈 겁니다.”
내 뒤에서 그림자처럼 서 있던 이현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측 불가 대상인 그는 시스템의 감시를 피하기에 최적의 파트너였다. 옆에 있던 한지율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내 단호한 표정을 보고는 윤서하의 팔을 붙잡았다.
“언니, 도윤 씨 말이 맞아요. 지금 언니 상태로는 지하 4층까지 내려가는 것도 무리예요. 제가 여기서 보조할게요.”
결국 윤서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서린 미안함과 걱정을 뒤로한 채, 나는 이현우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밤의 헌터 관리국 건물은 낮의 기척 하나 없이 비어 있었다. 민원 창구의 모니터는 꺼져 있었고,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기계적인 마찰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낡은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감식반 계약직 시절 쓰던 출입증이다. 이미 계약이 종료되어 폐기되었어야 할 물건이지만, 나는 왠지 모를 이끌림에 이걸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문득, 습관처럼 출입증의 매끄러운 표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강제 잔향청취를 시도합니다.]
[대상: 헌터 관리국 감식반 출입증(만료)]
[잔향의 농도가 짙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출력합니다.]
귓가에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강도윤. 너 내 말 똑똑히 들어. 지하 4층 B구역, 거긴 절대 얼씬도 하지 마.
— 왜요? 거기 뭐 대단한 보물이라도 숨겨놨어요?
— 보물? 흐흐,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거긴 사람이 아니라 ‘기록’이 죽으러 가는 곳이야. 존재가 꼬여서 답도 안 나오는 것들, 협회가 버리고 싶은 오점들… 그런 게 다 거기 처박힌다고. 거기 들어가는 순간, 너라는 인간의 데이터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지도 몰라. 알겠냐?
사수였던 박 씨 아저씨의 목소리였다. 평소엔 술냄새 폴폴 풍기며 실없는 소리만 하던 양반이, 그날만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향 속에서 아저씨의 손이 내 출입증을 낚아채듯 가져가 무언가 조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땀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 혹시 모르니까… ‘보증’이라도 걸어둬야지. 그래야 나중에 네가 거기 들어가더라도, 문이 너를 알아볼 테니까.
잔향이 끊겼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멍하니 내 출입증을 내려다보았다. 박 씨 아저씨는 그때 대체 무엇을 알고 있었던 걸까. 왜 하필 나를 그곳의 보증인으로 등록해 둔 것일까.
“도윤 씨, 타시죠.”
이현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하 1층, 2층, 3층을 지나 버튼 조명조차 들어오지 않는 ‘B4’ 버튼을 눌렀다. 기계가 덜컹거리며 불길한 진동을 내뱉더니, 이윽고 굳게 닫혀 있던 지하 4층의 문이 열렸다.
복도는 어두웠다. 비상등조차 깜빡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 하지만 이현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장섰다. 그에게는 이 어둠이 오히려 익숙한 집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먼지 쌓인 복도를 지나 한참을 들어가자, 거대한 강철 문 하나가 나타났다. 문 앞의 리더기에 낡은 출입증을 갖다 댔다. 원래대로라면 ‘권한 없음’이라는 경고음이 울려야 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보증인 임시 출입 권한이 확인되었습니다.]
[B-04 구역에 입장합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문 위에 붙은 낡은 문패가 보였다. 원래는 글자가 다 지워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내가 다가가자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글자들이 꿈틀거리며 재배열되었다.
<B-04 / 무명 보증서 원본 대조실>
“현우 씨, 저 문패 뭐라고 보여요?”
내가 묻자 이현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답했다.
“글쎄요. 그냥 ‘위험물 보관소’라고 적힌 것 같은데… 글씨가 너무 흐릿해서 잘 안 보입니다. 왜 그러시죠?”
내게만 다르게 보이는 것인가. 역시 이 폐기금고는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났다. 오래된 종이의 퀴퀴한 냄새, 그리고… 조금 전 병실에서 맡았던 그 축축한 비 냄새였다.
툭, 툭.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정적을 깼다. 바닥을 보니 검은 우산에서 떨어진 듯한 검은 물방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금고 내부는 거대한 서고 같았다. 수만 권은 되어 보이는 서류철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누군가 잃어버린 인생 같았다. 나는 홀린 듯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첫 번째 선반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가장 최근에 반입된 기록들을 보관하는 자리인 듯했다. 그리고 그 맨 앞줄, 아직 먼지도 쌓이지 않은 깨끗한 파일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파일의 옆면에는 굵은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피보증인: 강도윤]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서류를 작성한 적도, 버린 적도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버린 적 없는 나의 기록이, 이 세상에서 버려진 물건들 사이에 꽂혀 있는 걸까.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꺼내려던 찰나,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출석 확인되었습니다. 보증인.”
어둠 속에서 검은 우산을 쓴 실물 크기의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금원이었다.
나는 파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놈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출석 체크치고는 환영 인사가 너무 으스스하네요. 근데 이거 어쩌죠? 제 기록은 제가 직접 검수해야 직성이 풀려서 말입니다.”
나는 그대로 파일을 낚아채듯 뽑아 들었다. 이제부터 이 서류가 내 구명줄이 될지, 아니면 내 존재를 지워버릴 사형선고가 될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내 이름이 적힌 낡은 서류철이 손안에서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 안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누군가 억지로 ‘폐기’한 내 진실이 들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