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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81화. 진짜 보호자의 이름과 우산 없는 날의 이관 코드 일러스트

180-181화. 진짜 보호자의 이름과 우산 없는 날의 이관 코드

180-181화. 진짜 보호자의 이름과 우산 없는 날의 이관 코드

180화. 진짜 보호자의 이름

[보호자: KDW가 아님]

그 문장이 망막을 할퀴고 지나갔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발밑의 그림자가 늪처럼 일렁이며 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보관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강도원이 내 보호자가 아니라고?

내 세계의 시작점이었던 이름이다. 내가 ‘0번’이라는 지옥 같은 번호표를 달고도 사람 흉내라도 낼 수 있게 붙잡아준 유일한 닻. 그 형이 나의 법적, 행정적, 그리고 실질적 보호자가 아니었다면 대체 나는 누구의 책임 아래 방치되어 있었던 걸까.

“어, 이거…… 냄새가 변하는데요?”

가온이 코를 찡그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시선이 내가 쥐고 있는 문태식의 장갑 안쪽으로 향했다.

“형님, 그 장갑에서 아까 그 낡은 냄새 말고 다른 게 섞여 나와요. 비 오는 날의 새 금속…… 아니, 그보다 더 독한 거. 새로 지급받은 S급 팀 장비 보관함에서나 날 법한 냄새예요. 방탄 섬유 코팅액 냄새 같기도 하고.”

나는 가온의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장갑 안감을 더 깊숙이 파헤쳤다. 문태식의 투박한 필체가 잉크와 소독약에 젖어 번져 있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가 아니라,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의 파편들이었다.

[……보호자 변경 반려.]

[……최초 보호자 권한 외부 이관 완료.]

찢어진 종이 조각 사이로 단어들이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외부 이관’이라는 글자 위에 젖지 않은 검은 우산에서 떨어진 듯한 물방울 자국이 번져 있었다. 누군가 비 오는 날, 문태식의 코앞에서 이 신청서를 강제로 수정한 흔적이었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이름……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서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형체가 다시 흐릿해지고 있었다. 이름의 ‘서’ 자가 겨우 돌아오는 듯하더니, 다시 주변의 어둠에 침식되어 경계선이 뭉개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웠다. 사람의 온기가 아니라 잘 닦인 유리창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윤서하. 여기 봐. 당신 이름, 윤서하야.”

“알아요. 아는데…….”

서하는 신음하며 내가 들고 있는 장갑 안쪽을 가리켰다. 수사협조관으로서의 본능이 그녀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거, 형식 오류예요. 보호자란에 줄을 긋고 새로 쓴 게 아니라…… 처음부터 ‘KDW’라는 이름을 덮어쓰기 위해 만들어진 양식이에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록을 오염시켰어요. 도시형 던전 피해자 명부에서나 쓰는…… 강제 말소 방식이라구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관실의 정적이 깨졌다.

끼이익, 끼이익.

수천 개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벽면을 가득 채운 검은 철제 서랍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서류가 아니었다.

수많은 번호표였다.

[0142-4], [0988-1], [1205-0]…….

나와 비슷한 체계로 분류된 번호표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금속음을 냈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처럼 들렸다.

“와아, 형아. 저것 봐.”

KDW-0가 내 옷자락을 당기며 천진하게 웃었다. 녀석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눈앞의 광경을 중계하는 녹화 장치 같았다.

“형이 보호자가 아니면, 형도 맡겨진 애였던 거야? 우리 다 똑같이 주인 없는 물건이었네?”

“……닥쳐.”

“주인이 없으면 버려지는 건데. 아, 아니다. 주인이 없으니까 아무나 집어 가도 되는 건가?”

아이의 말이 송곳처럼 가슴을 찔렀다. 강도원이 나를 보호한 게 아니라, 나를 ‘보관’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면? 문태식이 그 사실을 숨기려 했던 이유가 단순히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검은 코트를 입은 형체가 서서히 다가왔다. 얼굴이 없는 관리자. 소거 절차를 멈춘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단계로 손을 뻗었다.

[보호자 재확인 절차를 실행합니다.]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보관실 전체에 공명했다. 바닥에 떨어진 번호표들이 자석에 이끌리듯 내 발치로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마치 굶주린 생물처럼 내 구두등을 타고 올라와 내 손목의 [KDW] 낙인을 갉아먹으려 들었다.

그때였다. 내 안의 잔향청취가 비명처럼 날카로운 주파수를 잡았다.

문태식의 장갑, 찢어진 신청서, 그리고 내 손목을 파고드는 번호표의 냉기.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하나의 기괴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내게 건네는 마지막 농담 같았다.

— 「보호자란 아이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 소재를 던져버릴 쓰레기통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쓰레기통에 담겨 있습니까?」

실소조차 나오지 않는 블랙코미디였다. 그래도 그 비틀린 농담 속에 섞인 뜻은 선명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 ‘진짜 이름’을 억지로 파헤치려 든다면, 대가는 내가 지불해야 한다.

서하의 남은 이름선이 완전히 지워지거나, 아니면 내 손목에 남은 강도원의 흔적이 통째로 뜯겨나가거나.

“……도윤 씨, 안 돼요.”

서하가 내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가 먼지처럼 증발했다.

“지금 저 이름을 읽으면, 당신은 돌아갈 곳을 잃어버려요. 문 팀장님도…… 그걸 원해서 숨긴 게 아닐 거예요.”

가온도 절박하게 소리쳤다.

“형님! 여기 냄새가 너무 심해요! 잉크가 아니라 진짜 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고요! 일단 나가야 해요!”

검은 코트의 관리자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인장이 들려 있었다. ‘반려’ 혹은 ‘소거’. 그 인장이 내 손등에 찍히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강도윤으로 남지 못할 것이다.

나는 문태식을 보았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보관실 한편에 유령처럼 누워 있는 그의 잔향. 그의 호흡권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진짜 보호자의 이름을 알아내 이 행정 절차를 종결짓지 못하면, 그는 영원히 이 서랍 속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태식의 장갑 안쪽에서 딱 하나, 가장 단단하게 굳어 있는 조각을 뜯어냈다.

[외부 이관 코드: S-……]

그건 진실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을 빠져나갈 유일한 ‘반칙’이었다.

“……퇴근하지.”

나는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직장에 계속 붙어 있을 생각 없으니까.”

나는 서하의 어깨를 감싸고, 가온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KDW-0의 머리 위로 내려앉던 그림자는 발로 걷어찼다.

보관실의 서랍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기 시작했다. 관리자의 붉은 인장이 허공을 갈랐다.

탈출하는 찰나의 순간, 내 오른손목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번쩍였다.

강도원의 약호인 [KDW] 아래로, 푸르스름한 빛의 새 글자가 아주 잠깐 겹쳐 보였다.

그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다.

[S-RAIN]

차가운 빗줄기가 내리쬐는 환각과 함께, 보관실의 검은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를 찌르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였다.

“……하아, 하아…….”

내 가슴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KDW]라는 낙인은 예전보다 더 짙게 타들어 가 있었고, 그 아래에 보였던 푸른 글자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상태였다.

옆 침대의 문태식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그의 가슴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계가 대신 밀어 넣는 숨이 아니라, 사람이 악착같이 붙잡은 숨이었다.

서하는 내 옆 의자에 쓰러지듯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돌아왔지만, 손 끝부분은 여전히 종이처럼 얇고 투명했다. 이름 침식의 후유증이었다.

가온은 병실 구석에서 헛구역질하며 생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살았네요.”

서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주머니 속에 쥐고 나온 작은 종이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보관실에서 뜯어낸 외부 이관 코드의 파편.

그걸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잔향청취가 마지막 남은 속삭임을 건넸다. 그것은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훨씬 젊고, 훨씬 죄책감에 젖은 목소리.

— 「미안하다, 도윤아. 하지만 네 보호자는 그 녀석이어야만 해. 그래야 네가 ‘도구’가 아니라 ‘동생’으로 살 수 있으니까.」

손바닥 안의 종이 조각이 바스러져 가루가 되었다.

내 보호자는 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숨긴 사람은, 나를 살리려던 문태식이었다.

181화. 우산 없는 날의 이관 코드

기계적인 호흡음이 규칙적으로 병실의 정적을 갈랐다.

치익, 후우. 치익, 후우.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문태식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살아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조용했고, 죽었다고 하기엔 여전히 온기가 남아있는 상태. 병실 안은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비상등 불빛, 그리고 방금 전 보관실에서 묻혀온 기괴한 냉기가 뒤섞여 묘한 압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침대 옆 스툴에 앉아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각인된 [KDW] 글자 아래, 아주 잠깐 덧씌워졌던 [S-RAIN]이라는 잔상이 아직도 망막에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도윤아.”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간이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컵을 집으려 손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이 컵 홀더에 닿는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마치 노이즈가 낀 영상처럼 지직거리며 투명하게 변했다.

툭.

종이컵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쏟아진 커피가 하얀 타일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아…….”

윤서하가 당황한 듯 자신의 손을 감싸 쥐었다. 이름 침식의 후유증이다. 존재의 기록이 오염된 대가는 생각보다 깊고 날카롭게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닦아내며 짐짓 가벼운 말투를 던졌다.

“와, 윤 협조관님. 이제 마술까지 배우신 거예요? 컵을 통과하는 마술이라니, 이거 나중에 길거리 공연이라도 나가야겠네.”

“농담할 상황 아니야, 강도윤.”

윤서하가 창백한 안색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자신이 세상에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공포. 나는 걸레를 던져두고 그녀의 앞에 섰다.

“알아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고요. 커피는 내가 먹여줄 테니까.”

“됐어. 그보다 아까 그 종이 조각…….”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조각을 꺼냈다. [외부 이관 코드: S-……]. 그리고 내 눈에만 보였던 그 잔상, [S-RAIN].

“S-RAIN이라. 무슨 아이돌 그룹 이름 같기도 하고. 아니면 기상청 산하 비밀 조직인가? 슬로우 레인(Slow Rain)? 비를 천천히 내리게 하는 그런 건가 봐요. 아주 평화롭고 좋네.”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오는 농담을 씹어뱉으며 가온이를 보았다. 가온이는 병실 구석에 코를 킁킁거리며 서 있었다. 녀석은 문태식의 상태를 살피는 게 아니라, 병실 안의 ‘냄새’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형. 이거 그냥 비 냄새 아니야.”

가온이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비 냄새면 흙냄새나 비린내가 나야 하거든. 근데 이건…… 장비창고 냄새야. 그것도 아주 관리가 잘 된 S급 팀 전용 창고에서나 나는 냄새. 새 금속이랑 방탄 섬유, 그리고 특수한 보존액 냄새가 섞여 있어.”

“S급 팀 장비?”

윤서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가슴팍에 모은 채 기억을 더듬었다.

“S-RAIN……. 협회 공식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코드야. 하지만 도시형 던전 사고 당시에 임시로 만들어진 프로젝트명이나, 외부로 인원을 빼돌릴 때 쓰던 위장 명칭일 가능성이 있어. 그 당시엔 워낙 혼란스러워서 정식 절차를 무시한 기록들이 많았으니까.”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병실 밖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구두 굽 소리가 여러 명의 발소리와 섞여 다가오고 있었다. 평소의 간호사나 의사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절제되고, 위압적인 보폭.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협회 보안팀 인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 하나가 걸어 나왔다. S급 팀 소속의 현장 관리직이었다.

“윤서하 협조관님.”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서류 패드를 내밀었다.

“현 시간부로 윤 협조관님의 현장 접근 권한 및 내부 데이터 열람 권한이 임시 정지되었습니다. 이름 침식 후유증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 및 보안 유출 우려가 사유입니다.”

“뭐라고요? 지금 이 상황에 권한 정지라니, 누가 결정한 거죠?”

윤서하가 벌떡 일어났지만,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해 다시 주저앉았다. 남자는 그녀의 상태를 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의 지시입니다. 그리고 강도윤 씨.”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를 보는 눈빛은 마치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보는 듯했다.

“당신은 F급 프리랜서에 불과합니다. 보호자 자격도 불분명한 상태에서 관리 구역인 이 병실에 계속 상주하는 건 곤란합니다. 당장 퇴실해 주시죠.”

“보호자가 불분명하다니요? 여기 누워있는 문태식 씨가 제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는데요.”

“그 데이터 자체가 오염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확인 절차가 끝날 때까지 당신은 ‘외부인’입니다.”

S급 팀의 내부 균열이 이미 시작된 걸까, 아니면 나를 격리하려는 누군가의 의도일까. 권한이 없다는 건, 주인공 흉내를 내고 싶어도 발목을 잡는 현실적인 벽이다. 나는 속으로 욕을 삼키며 병실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였다.

[잔향청취가 활성화됩니다.]

손바닥을 통해 서늘한 감각이 타고 올라왔다. 병실 문고리, 그리고 남자가 들고 있는 방문자 명부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사물에 맺힌 기억의 비명에 가까웠다.

― “오늘 가장 많이 죽은 사람은 환자가 아니라 방문 기록입니다.”

비릿한 웃음소리가 섞인 농담 같은 잔향.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문자 명부의 잔상을 읽어 내려갔다. 명부의 타임라인 일부가 마치 칼로 도려낸 듯 텅 비어 있었다.

‘지워졌어.’

기록이 소거된 시간대는 약 세 시간 전. 밖에는 해가 쨍쨍했는데, 잔향 속에서는 축축한 물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인데도 불구하고 ‘우산 반입 기록’이 남은 이상한 시간대.

“가온아.”

나는 낮게 속삭였다.

“냄새 맡아봐. 우산 냄새. 근데 젖지 않은 우산이야.”

가온이의 눈동자가 가늘어지고 코끝이 실룩거렸다.

“……찾았어. 복도 끝, 물류 엘리베이터 쪽이야. 거기서 그 장비창고 냄새가 아주 진하게 나.”

윤서하가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강도윤, 가지 마. 이건 함정일 수도 있어. 내 권한이 정지된 타이밍에 맞춰서 이런 단서가 나온다는 게…….”

“함정이면 밟아줘야죠. 그래야 누가 팠는지 보일 거 아닙니까.”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여전히 그녀의 손끝은 반투명했다.

“윤 협조관님은 여기 계세요. 권한 정지된 사람이 움직이다 걸리면 진짜 잘려요. 이건 F급 백수인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걱정 마요. 나 도망 하나는 S급이잖아요.”

나는 가온이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보안팀 인원들이 우리를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잔향청취로 읽어낸 복도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교묘하게 그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병원의 지하 물류 엘리베이터 앞. 일반 환자들은 이용할 수 없는, 폐기물이나 대형 의료 장비를 옮기는 거대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가온이가 문틈에 코를 박고 말했다.

“여기야. 이 안에서 그 ‘S-RAIN’ 냄새가 진동을 해. 근데 형, 조심해. 냄새가…… 너무 차가워. 생명체한테서 나는 냄새가 아니야.”

나는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에 손을 올렸다. 금속의 차가운 감촉과 함께 잔향이 다시 머릿속을 때렸다.

― “외부 이관자 0000-0, 탑승을 대기 중입니다.”

무감각한 기계음 같은 목소리.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판이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B1, B2, B3…… 그리고 나타나지 않아야 할 문자가 붉은 LED로 떠올랐다.

[ S-RAIN ]

띵-.

철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금속판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젖지 않은 검은 우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우리를 초대했다는 듯이.

“가온아, 준비됐지?”

“응. 형 뒤에 딱 붙어 있을게.”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리가 타자마자 버튼 패널의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 외부 이관자 0000-0 탑승 확인. ]

[ 목적지 : S-RAIN 물류 관리층으로 이동합니다. ]

엘리베이터가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몸이 붕 뜨는 부유감과 함께, 나는 바닥에 떨어진 우산을 집어 들었다. 우산 손잡이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보호자 재확인 실패 시, 폐기 처분할 것. ]

그것은 내 형, 강도원의 필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씨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문태식의 병실에 놓여있던, 오래된 작전 보고서의 서명과 똑같은 필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며 나타난 풍경은 병원의 지하실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보관함이 끝도 없이 늘어선, 거대한 금속의 숲이었다.

그리고 그 숲의 입구에서, 한 남자가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0000-0.”

남자의 목소리가 보관함 사이로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쥐고 있던 우산을 고쳐 쥐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 참 성의 없게 부르시네. 통행료는 우산으로 대신해도 될까요?”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긴장감 때문이 아니라, 내 손목의 각인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진짜 내 기원의 단서가 있다. 그 막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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