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78-179화. 0000-0번의 서명과 이름을 지우는 방법 일러스트

178-179화. 0000-0번의 서명과 이름을 지우는 방법

178-179화. 0000-0번의 서명과 이름을 지우는 방법

178화. 0000-0번의 서명

똑, 똑, 똑.

노크 소리는 규칙적이었다. 그런데 근원지가 달랐다. 병원 복도도, 호출벨도, 문 너머도 아니었다. 0000-1번 서랍 깊숙한 곳에 놓인 검은 팔찌 안쪽.

서랍 안에서 바깥으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좁은 관 속에 갇혀, 유일하게 남은 출구인 팔찌의 이음새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이런 비유는 보통 보험 상담원 앞에서 하면 안 된다. 상담원이 먼저 도망간다.

“……도윤 형, 이거 이상해.”

반가온이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녀석은 코를 찡그린 채 서랍 안쪽의 공기를 훑었다.

“오래된 서랍 냄새만 나는 게 아니야. 탄 커피 냄새. 아주 매운 소독약 냄새. 낡은 감식반 장갑 냄새도 나. 근데 다 너무 오래됐어. 지금 병실에 있는 문 아저씨 냄새가 아니라, 먼지랑 같이 말라붙은 냄새야.”

탄 커피. 감식반 장갑. 독한 소독약.

문태식 팀장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들이었다. 서류더미 옆에서 믹스커피를 태워 먹고도 “풍미다”라고 우기던 사람. 하지만 가온이 맡은 건 지금 병실에 누운 문태식이 아니었다. 훨씬 전, 아직 눈매가 덜 닳았고 농담을 숨기는 법도 덜 배웠을 문태식의 잔향이었다.

치익.

검게 탄 팔찌의 잠금장치가 좌우로 벌어졌다. 열린다기보다 부서지는 쪽에 가까웠다. 틈새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더니 서랍 위에 사람의 윤곽을 세웠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

빳빳한 정장, 날카로운 눈매, 왼손에 낀 낡은 감식반 장갑. 그는 서랍 위에 걸터앉은 자세로 허공을 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오래된 기록이 잠깐 사람 모양을 빌린 느낌.

-보관물…… 0000-0…….

-최초 접수자…… 확인 중…….

-보호자…… 변경 절차…… 실패…….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끊겼다. 관공서 자동 응답기가 지하실에서 귀신 들린 버전으로 재취업한 것 같았다.

“문 팀장님?”

나는 조심스럽게 불렀다.

잔향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내 등 뒤에 숨은 KDW-0가 팔찌 쪽을 빤히 보며 속삭였다.

“저 아저씨, 형을 부르는 게 아니야.”

“그럼?”

“형 이름을 세고 있어. 하나, 둘, 셋…… 계속. 형이 몇 명인지 세고 있다고.”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형이 몇 명인지 센다. 내가 나라는 사실을 숫자로 검수당하는 기분이었다. 출석부에도 이렇게 모욕적이진 않았다. 적어도 출석부는 사람을 세지,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이름의 개수를 세진 않는다.

문틈이 조금 더 넓어졌다.

검은 코트 인물이 한 발을 안쪽으로 들이밀었다. 젖지 않은 검은 우산 끝이 바닥을 찍었다. 우산 손잡이에 묶인 수십 장의 번호표가 작게 짤랑거렸다. 장례식장 방울 소리처럼 기분 나쁜 소리였다.

“무효 서명입니다.”

어린 내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열람 권한 없음. 보호자 미확정. 절차에 어긋난 접근은 보관물 파기 사유에 해당합니다. 즉시 서랍을 닫고 번호표를 반납하십시오.”

그의 흰 손목에 채워진 고리가 차갑게 빛났다. 목 아래쪽에도 같은 흰 팔찌가 감겨 있었다. 사람이라기보다 절차가 사람 흉내를 내기 위해 임시로 걸친 마네킹 같았다.

나는 윤서하를 돌아보았다.

상태가 나빴다. 그녀의 이름 가운데 글자, ‘서’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녀를 부르면 윤, 하 사이에 검은 빈칸이 끼어들었다.

“윤서하.”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또박또박 말했다.

“윤서하. 협회 수사협조관 윤서하. 커피 취향은 여전히 범죄고, 지금 이 와중에도 나한테 잔소리할 사람. 내 말 들려요?”

“……커피 얘기는 꼭 해야 합니까.”

“현실감 회복용입니다.”

그녀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웃었다기보다 입꼬리가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검은 코트 쪽을 보며 힘겹게 말했다.

“저걸 사람처럼 대하지 마요. 절차예요. 절차는 무섭지만…… 빈틈이 있어요. 사람이 만든 척하든, 사람이 아닌 게 만들었든.”

그녀의 손끝에서 끊어진 선 조각 하나가 다시 떨렸다. 가늘고 약했다. 하지만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빈틈.

나는 검은 코트 인물을 향해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면 두 가지 중 하나다. 정신이 나갔거나, 아직 겁먹을 여유가 남았거나. 나는 둘 다였다.

“무효 서명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하지 않나?”

검은 우산 끝이 멈췄다.

“내 첫 번째 사망 농담까지 담보로 걸고 집행 보류를 따냈는데. 그거 꽤 비싼 물건이거든.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리면 신고는 먹어도 조회수는 나올걸.”

“보호자 미확정.”

“그래. 그런데 그 보호자 확인 절차 말이야.”

나는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윤서하의 선 조각으로 서랍 옆에 떨어진 낡은 번호표를 들어 올렸다. 모서리가 찢어져 있었다. 뒷면에는 오래된 갈색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거 뒷면 봐. 커피 자국이야. 문 팀장이 쏟은 커피 냄새랑 섞여 있어. 그런데 번호표 앞면은 0000-0이고, 뒷면 찢어진 부분에는 다른 대기번호가 남아 있지.”

나는 번호표를 빛에 비췄다.

찢어진 모서리 안쪽에 희미한 숫자 하나가 보였다. 0000보다 앞선 숫자가 아니라, 뒤쪽에서 억지로 끼워 넣은 흔적. 종이 섬유가 반대로 눌려 있었다.

“0000-0번은 내 앞 순서가 아니야. 완전히 이전도 아니고 최초도 아니지. 누군가 대기열 중간에 끼워 넣은 가짜 시작점이야. 병원 접수대에서 이러면 할머니들한테 먼저 혼나. 절차보다 무서운 분들이거든.”

검은 코트 인물의 손이 우산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번호표들이 한꺼번에 떨렸다.

답한 건 그가 아니라 젊은 문태식의 잔향이었다.

-관리 기록…… 수정 중…….

-이전 이름…… 삭제됨…….

-현재 표기…… [KDW]…….

팔찌 안쪽, 지워진 이름 위로 알파벳 세 글자가 떠올랐다.

KDW.

강도원.

내 형의 이니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이 보관실은 사람 이름보다 절차명과 번호를 더 좋아한다. KDW가 꼭 강도원만을 뜻한다고 누가 보장하지? 강도윤이 되기 전의 기록, 강도윤 대기 원본, 혹은 누군가 일부러 둘 사이를 흐리기 위해 남긴 약호일 수도 있었다.

“형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야.”

KDW-0가 다시 중얼거렸다. 아이는 문태식의 잔향이 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서류를 뚫어지게 보았다.

“저 아저씨, 이름을 지우고 있어. 형 이름을 지워야 자리가 난대.”

젊은 문태식의 잔향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초점 없던 눈동자 한가운데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감정이 돌아온 게 아니었다. 기록의 표면에 사람 목소리가 빠져나올 만큼 작은 구멍이 뚫린 것이다.

-……도윤아.

처음으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병실에 누운 문태식의 쉰 잔소리와 닮아 있었다. 다만 훨씬 젊고, 훨씬 절박했다.

-네 이름을…… 되찾으려면…….

검은 팔찌가 다시 연기를 뿜었다. 잔향의 형상이 무너졌다. 검은 코트 인물이 우산을 들어 올리며 서랍 쪽으로 다가왔다.

“열람 중지. 무효 서명. 보호자 미확정.”

-먼저…… 내 이름을 지워라.

“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잊었다.

문태식을 살리려고 여기까지 왔다. 그의 호흡권을 되찾고,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내려고 내 첫 번째 사망 농담까지 담보로 걸었다. 그런데 문태식의 젊은 잔향이 나에게 자기 이름을 지우라고 했다.

이건 구조 요청이 아니다.

아니, 구조 요청일 수도 있다. 그게 더 골치 아팠다.

“잠깐만. 지우라니, 뭘? 이름을 지우면 사람이 사는 쪽입니까, 죽는 쪽입니까? 이 병원은 약관도 없고 고객센터도 최악이네.”

내 외침은 서랍 벽에 부딪혀 흩어졌다.

0000-0번 팔찌가 거칠게 닫혔다. 젊은 문태식의 잔향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랍은 다시 굳게 닫혔다. 복도의 조명이 한 번 길게 깜빡였다.

검은 코트 인물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우산 끝이 내 발등 바로 앞에 닿았다.

“시간이 차감됩니다. 보호자 미확정. 보관물 0000-0번의 소거 절차를 준비합니다.”

동시에 내 오른손목이 뜨거워졌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손목에, 금속 선반 반사 속에서만 보이던 검게 탄 팔찌의 감촉이 생겼다. 환각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가온이 먼저 비명을 삼켰다.

“도윤 형, 냄새가…… 형 손목에서 탄 플라스틱 냄새가 나.”

내 살갗 위에 검은 선 하나가 천천히 그어졌다. 팔찌가 채워진 건 아니었다. 아직은. 하지만 문태식의 젊은 서명 일부가 그 선 위에 옮겨붙고 있었다. 완성되기 전의 낙인처럼.

나는 문태식을 구하러 왔는데, 이제 내가 문태식의 이름표를 달고 보관물 쪽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절차는 빈틈이 있다고?

그래. 빈틈은 있었다.

문제는 그 빈틈이 나를 빠져나가게 하는 구멍인지, 안으로 집어삼키는 함정인지 아직 모른다는 점이었다.

검은 코트 인물이 우산을 들어 올렸다.

“이름을 지우십시오. 그러면 자리가 납니다.”

그 말이 끝나자, 병실 쪽에서 이어지던 문태식의 미약한 호흡 잔향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끊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음 숨이 오기 전에, 나는 선택해야 했다.

문태식의 이름을 붙잡을지.

아니면 문태식의 이름을 지워서,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지.

179화. 이름을 지우는 방법

“아으, 씨…….”

오른손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불에 달군 인장을 생살에 지지는 감각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기분 나쁘고 축축한 통증이었다. 끈적한 잉크가 혈관을 타고 역류해 심장으로 파고드는 느낌. 손등 위로 검은 서명 조각들이 벌레처럼 기어올랐다.

문태식.

오래전 그가 남겼을 필체였다. 정갈하지 않고 투박하게 휘갈겨진 이름 석 자가 내 피부를 종이 삼아 박제되려 하고 있었다. 문 팀장이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문태식’이라는 행정 절차가 내 팔을 소유하려 드는 기분이었다.

“도윤 형, 냄새가 섞여!”

반가온이 내 팔을 붙잡으려다 흠칫 놀라 손을 뗐다. 녀석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커피 냄새랑 소독약 냄새가…… 갑자기 비닐 타는 냄새로 바뀌고 있어. 아까 그 아저씨 냄새가 아니야. 이건 그냥, 엄청 오래된 서류 뭉치에서 나는 썩은 잉크 냄새야!”

가온의 말대로였다. 내 코끝을 찌르는 건 이제 사람의 체취가 아니었다. 젖지 않는 검은 우산 천에서 날 법한 무취에 가까운 건조함, 그리고 숨 막히는 잉크의 비린내였다.

젊은 문태식의 잔향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 이름을 지워라. 그래야 네 이름을 찾는다.

지운다고? 사람 이름을 지우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데.

나는 잉크가 번져가는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름을 지운다’는 말이 이 바닥에서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망각, 혹은 존재의 말소. 만약 내가 여기서 문태식의 이름을 지워버리면, 병실에서 가느다란 호흡기로 연명 중인 그 노병의 생명줄도 함께 끊기는 게 아닐까.

“도윤 씨!”

윤서하가 내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희미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얼굴 왼편, ‘서’라는 글자가 있던 자리가 안개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이름의 침식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눈동자는 여느 때보다 형형했다.

“절차로 대하세요. 사람으로 보지 말고.”

“그게 무슨…….”

“문태식이라는 ‘사람’을 지우라는 게 아닐 거예요. 이 팔찌가 기억하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그가 행사했던 ‘서명자의 권한’이에요. 행정은 이름과 권한을 동일시하지만, 사람은 달라요. 그 빈틈을 찾으세요.”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녀의 흐릿해진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서하 씨, 내 말 들려요? 윤서하! 정신 놓지 마요. 당신 이름 안 지워지게 내가 붙잡고 있으니까.”

내 부름에 그녀의 형체가 아주 조금 진해졌다. 그녀는 짧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발치에서 무감각한 시선이 느껴졌다. KDW-0였다. 내 어린 시절의 껍데기를 쓴 그 존재는 무릎을 싸안고 앉아, 내 손목에서 번져가는 검은 글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이름을 지우면 사람이 없어지는 게 아니야.]

녀석의 무표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그 사람이 들고 있던 열쇠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지. 열쇠가 없어지면 문은 못 열겠지만, 손은 자유로워지잖아.]

열쇠.

나는 시선을 돌려 0000-0번 번호표를 보았다. 커피 얼룩이 묻고 모서리가 찢어진 종이 조각. 이건 단순한 대기표가 아니라, 이 비정상적인 보관 절차에 억지로 끼워 넣어진 ‘오류’였다.

“열람 권한이 없습니다.”

어느새 검은 코트의 인물이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내 손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

“0000-0번은 영구 결번입니다. 보호자 미확정. 서명자 문태식의 기록은 폐기 절차 중입니다. 타인의 개입은 무효 서명으로 처리됩니다.”

“무효?”

나는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보험사 놈들이랑 똑같은 소릴 하네. 약관에 없으면 무조건 안 된다 이거지? 근데 어쩌냐. 난 태생이 보상금 깎으려고 달려드는 놈들하고 싸우는 게 일이라.”

나는 검은 코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왼손으로 주머니 속에 있던 윤서하의 ‘선 조각’을 꺼냈다. 그녀의 이름이 깎여 나갈 때 떨어졌던, 날카롭고 서늘한 존재의 파편이었다.

“사람과 서명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검은 코트가 기계적으로 뇌까렸다. 압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잉크 냄새가 폐부까지 파고들어 정신이 혼미해졌다. 하지만 그 말, ‘분리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주장이 오히려 내게는 가장 큰 거짓말로 들렸다.

만약 정말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왜 이 팔찌 안쪽의 이름은 지워져 있었지? 왜 그 위에 [KDW]라는 성의 없는 약호만 남겨둔 거지?

그때였다. 내 손목을 파고들던 젊은 문태식의 잔향이, 아주 짧고 강렬한 이미지 하나를 내 머릿속에 던져 넣었다.

……장갑 안쪽.

차가운 빗소리와 함께 들려온 목소리였다.

왼손 장갑 안쪽을 봐라.

나는 본능적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환영 속 문태식이 끼고 있었을 ‘낡은 감식반 장갑’의 잔상을 응시했다. 가온이가 맡았던 그 냄새의 근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기억의 공간 속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물건.

나는 0000-0번 번호표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이용해 내 오른손목 위로 떠오른 ‘문태식’이라는 서명의 가장자리를 긁어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긁혀 나가는 건 가죽처럼 질긴 검은 막이었다.

“장갑 안쪽이라…….”

나는 서명의 획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서명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저항했다. 하지만 내가 번호표로 그 획의 끝부분을 건드리자, 검은 코트의 남자가 눈에 띄게 동요하며 다가왔다.

“중단하십시오. 기록 훼손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훼손이 아니라 정정이야, 이 새끼야.”

나는 장갑 안쪽을 뒤집는 상상을 하며, 내 손목에 새겨진 서명의 마지막 글자를 유심히 보았다.

문태식.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상했다. ‘태’ 자의 획 하나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아니, 이건 실수로 틀린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획을 하나 빼먹고, 대신 그 자리에 아주 작은 점 하나를 찍어놓았다.

문태식이 아니라, 문대식. 혹은 이름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

그는 처음부터 이 절차에 자기 진짜 이름을 온전히 넘겨주지 않았다. 서명하는 척하면서 시스템을 속일 수 있는 ‘가짜 이름’을 제출했던 거다.

“가온아! 소독약 냄새, 어디서 제일 강하게 나?”

“어? 어…… 그, 형 손목에 ‘태’ 자 밑부분! 거기서 갑자기 알코올 냄새가 확 올라와!”

찾았다.

나는 윤서하의 선 조각을 쥔 채, 그 틀린 획의 끝부분을 사정없이 긁어내렸다.

서명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검은 코트의 남자가 내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가락은 허공에서 모자이크처럼 흩어졌다.

“사람과 서명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했지?”

나는 이를 악물고 선 조각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맞는 말이야. 그런데 이건 문태식의 서명이 아니거든. 이건 문태식이 너희 같은 시스템을 엿 먹이려고 만든 ‘가짜 권한’이지. 그러니까 이건 지워도 그 아저씨랑은 상관없어!”

치이익, 하고 살이 타는 냄새가 아닌 잉크가 휘발되는 냄새가 진동했다.

내 손목을 감싸던 검은 팔찌의 감촉이 느슨해졌다. 피부를 파고들던 검은 핏줄들이 역류하며 번호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0000-0번 번호표가 검게 물들며 부르르 떨렸다.

“허억……!”

순간, 멀리 떨어진 병실 쪽에서 들려오던 미세한 기계음이 변했다.

단절될 것 같았던 가느다란 호흡 소리.

훅, 하고 깊은 숨이 한 번 들어왔다. 살아났다는 확정은 아니었다. 벼랑 끝에서 굴러떨어지려던 사람이 손톱 하나로 바위를 긁고 버틴 소리였다.

“……멈췄어.”

서하가 창백한 안색으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팔찌는 채워지다 만 채로 내 손목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내 피부를 파고들지는 않았다. 문태식의 이름 중 틀린 획들이 지워지자, 시스템은 ‘서명자 불일치’ 상태에 빠져 일시 정지된 것 같았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낡은 장갑의 잔상을 다시 보았다.

서명이 긁혀 나간 자리, 장갑 안쪽의 가죽이 헤진 곳에서 아까는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문태식이 이름을 틀리게 쓰면서까지 숨기려 했던, 이 절차의 진짜 시작점.

[보호자 변경 신청서]

그 아래, 갈겨쓴 문태식의 진짜 필체가 보였다. 그것은 나를 향한 메시지이자, 이 모든 연쇄의 시작을 알리는 경고였다.

[보호자: KDW가 아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문태식은 아주 오래전부터 기록해두었다. 0000-0번의 최초 접수 당시, 내 형이었던 강도원은 나의 보호자가 아니었다고.

“……형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가 나를 여기에 맡긴 거지?

강도원이 보호자가 아니라면, 내가 알고 있던 ‘강도윤’의 시작은 누구의 손에 의해 작성된 것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검은 코트의 남자는 형체를 잃고 일렁거리고 있었지만, 그의 뒤편 서랍장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번호’들이 눈을 뜨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에 남은 [KDW]라는 약호를 문질렀다.

강도원.

만약 이 이니셜이 형이 아니라면.

그럼 이건 처음부터 형이 아니라, 강도윤이 되기 전의 나를 가리키는 낙인이었나?

“가온아, 서하 씨. 준비해요.”

나는 번호표 뒷면에 새로 떠오른 희미한 층수 표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제 진짜 보호자를 찾으러 가야겠어.”

문태식의 가느다란 호흡이, 어두운 복도 끝에서 다시 한 번 길게 이어졌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