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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59화. 미완성 계약과 결석자 405 일러스트

58-59화. 미완성 계약과 결석자 405

제목: 58화. 내가 버린 적 없는 나의 기록

종이는 가끔 면도칼보다 치명적이다.

누렇게 변한 서류철의 모서리가 엄지손가락 끝을 스쳤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붉은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종이는 내 피를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빨아들였다. 잉크처럼 번지는 핏자국 위로 [피보증인: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기분 나쁘게 도드라졌다.

“채무자 본인의 자가 열람은 추가 이자 발생 사유입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서늘했다. 쇠를 긁는 듯 건조한 음성.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선 수금원이 그림자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원본 대조 전의 무단 열람은 채권 추심 절차에 대한 방해 행위로 간주하여 가산 금리가 부과될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금리? 지금 나한테 대출 상담해주는 거야? 고맙기도 해라. 이왕이면 저리 상품으로 추천해주지 그래.”

나는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대꾸했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까지 들려왔다. 무서워 죽겠는데 입은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공포는 인간의 지능을 떨어뜨린다는데, 내 경우에는 그 지능이 전부 농담 쪽으로 몰린 모양이었다.

수금원은 내 농담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연 보상금은 시간당 이름 침식률 0.5%로 산정됩니다. 현재 침식률 47%. 자정까지 원본 대조를 완료하지 못할 경우, 담보물인 ‘존재’에 대한 전면적 압류가 집행될 예정입니다.”

압류. 이름이 압류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강도윤’이라는 명찰이 떨어진 자리에 남는 건 그냥 고깃덩어리일까, 아니면 누군가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검은 연기일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의 첫 장을 넘겼다.

[사망 플래그 회수 동의서]

제목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살면서 수많은 계약서에 사인을 해봤다. 근로계약서, 월세 계약서, 하다못해 헬스장 3개월 할부 계약서까지. 하지만 죽음을 회수하겠다는 동의서라니. 보험사에서도 이런 상품은 안 팔 거다.

“이봐, 이현우 씨. 이거 보여?”

옆에서 서류를 같이 들여다보던 이현우에게 물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내가 짚은 곳을 응시했다.

“……제목 말고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냥 백지인데요.”

“백지라고? 여기 이렇게 ‘사망 플래그’ 어쩌고 적혀 있잖아. 아래쪽엔 깨알 같은 약관도 있고.”

“제 눈에는 그냥 낡은 종이 한 장입니다. 잉크 자국도 없어요.”

관측 불가 특성 때문인가. 아니면 이 계약 자체가 오직 ‘당사자’와 ‘수금원’에게만 유효한 기록인 걸까. 이현우가 보는 세상과 내가 보는 세상이 이 좁은 서류철 안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고 다음 장을 넘겼다. [보증인 지정 기록]이라는 소제목 아래,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보증인: 박철수]

박 씨 아저씨. 내 첫 사수이자, 헌터 관리국 감식반의 고인물. 술만 마시면 “도윤아, 인생은 한 방인데 그 한 방이 너한테 터질지 네 머리통에 터질지는 아무도 모른다”며 낄낄대던 아저씨.

서류 하단에는 아저씨의 서명이 있었다. 삐뚤삐뚤하고 거친 필체. 그런데 이상했다.

나는 위화감을 확인하려고 손을 뻗었다. 서류철을 고정한 낡은 금속 클립과 스테이플러 침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잔향청취.’

귓가에 찢어지는 듯한 고음의 비명이 들려왔다.

— 아악! 허리야! 나 원래 여기 박힐 몸이 아니라고!

스테이플러 침의 투덜거림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 야근 수당도 안 주면서 억지로 찍어 누르니까 이 모양이지! 원래는 저기 세 번째 줄에 박혔어야 했다고. 아, 아파. 필압은 또 왜 이래? 이 인간, 서명할 때 손 엄청 떨었네.

스테이플러 침의 앙칼진 잔향 사이로 박 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아니, 목소리라기보다 그가 남긴 감정의 찌꺼기에 가까웠다.

— ……이게 최선이다, 도윤아.

아저씨의 환청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아저씨의 서명을 다시 뚫어지게 쳐다봤다.

필압이 불규칙했다. 아저씨는 평소 서명할 때 마지막 ‘수’ 자의 획을 아래로 길게 빼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서류 위의 ‘수’ 자는 획이 말려 올라가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손목을 비튼 것처럼, 혹은 서명하는 본인이 ‘이건 가짜다’라고 온몸으로 외친 것처럼.

“조작됐어.”

내 입에서 확신에 찬 말이 나갔다.

“뭐라고요?”

이현우가 되물었다.

“이 서명, 아저씨 습관이랑 달라. 아저씨는 술에 취해도 자기 이름 끝 자는 똑바로 썼거든. 이건 일부러 틀리게 쓴 거야. 아니면 누군가 아저씨 손을 잡고 강제로 쓰게 만들었거나.”

수금원의 검은 우산 끝이 바닥을 툭, 쳤다.

“서류의 진위 여부는 집행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원본 보존 구역 B-04에 보관된 기록은 그 자체로 확정된 채권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채무자가 동의한 적도 없고, 보증인 서명까지 의심스러운데 이게 어떻게 확정 채권이야? 이건 사기 대출이라고!”

“이의 제기 절차는 자정 이후, 담보물 압류가 완료된 뒤에나 가능합니다. 현재 시각 23시 10분.”

수금원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 서고의 천장까지 닿은 그림자가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처럼 우리를 덮쳐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붉은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폐기 예정 원본: 강도윤]

[사망 플래그 회수율: 0%]

[회수 예정 시각: 금일 자정]

회수율 0%. 내가 지금까지 모았던 그 수많은 사망 플래그들은 어디로 간 걸까? 퇴근 후에 목숨 걸고 주워 담았던 그 불길한 징조들은 다 어디로 증발했기에, 여기 적힌 숫자는 0%인 걸까.

“잠깐, 이현우 씨. 여기 이 포켓 안에 종이가 하나 더 있어.”

파일의 가장 안쪽, 겉장과 속지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틈이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넣어 그 안에 숨겨진 쪽지를 꺼냈다.

종이는 다른 페이지들과 달리 깨끗했다. 방금 찢어 넣은 것처럼 하얗고 빳빳했다.

그리고 그 종이 위에는, 박 씨 아저씨의 필체도, 수금원의 기계적인 잉크도 아닌 문장이 적혀 있었다.

등줄기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소름이 돋았다.

그 필체는 너무나 익숙했다. 매일 아침 업무 일지를 쓸 때, 편의점 영수증 뒷면에 살 리스트를 적을 때 보던 바로 그 글씨체.

내 필체였다.

[나는 이 계약을 기억하지 못한다.]

심장이 멈출 듯 크게 뛰었다. 내가 쓴 적 없는 내 글씨가 종이 위에서 번득이고 있었다. 문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아니면 이 미친 상황을 뒤집을 유일한 치트키처럼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그러므로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고, 나는 아직 죽을 이유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 아래, 내 지장이 찍혀 있었다. 핏자국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선명하고 짙은 인주 자국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수금원을 보았다. 그의 보이지 않는 눈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것처럼 느껴진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봐, 수금원.”

나는 쪽지를 흔들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입안은 바짝 말라붙었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단단하게 나갔다.

“너네 장부에 구멍 났는데. 이거, 분식 회계 아니야?”

제목: 59화. 미완성 계약의 이의 제기

수금원의 뒤편에서 검은 비 냄새가 피어올랐다. 장부를 넘기는 손가락 끝에서 잉크가 썩은 물처럼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놈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그 그림자 안에서 수십 개의 수갑과 쇠사슬이 짤랑거리는 환청이 들렸다.

“채무자 강도윤. 변제 기한 만료. 현재 회수율 0%.”

수금원의 목소리는 고장 난 ARS 기계처럼 지직거렸다. 놈이 장부 위로 손을 뻗자, 폐기금고 B-04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담보물, 영혼 및 육신의 소유권을 즉시 압류합니다. 집행 절차에 협조하십시오.”

“잠깐, 잠깐만. 상담원 연결 안 끝났잖아. 왜 마음대로 결제를 승인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방금 파일 포켓 안쪽에서 뜯어낸 쪽지를 놈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내 필체지만 내가 쓴 기억이 없는, 그러나 내 지문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 한 장.

[나는 이 계약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계약은 성립되지 않았고, 나는 아직 죽을 이유를 승인하지 않았다.]

수금원의 펜촉이 멈췄다. 놈의 텅 빈 안구 속에서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쳤다.

“……이의 제기입니까?”

“그래. 소비자 보호원에 신고하기 전에 약관 다시 확인해 봐. 계약 당사자가 계약 내용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체결된 보증 계약은 무효야. 특히 ‘본인 미인식 조항’에 따르면, 기억의 결손은 계약의 물리적 성립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을 텐데?”

물론 그런 조항이 실제로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박철수 아저씨가 내 서명을 비틀어놓고, 미래의 내가 이 쪽지를 숨겨두었다면 분명 ‘구멍’은 존재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지만, 이 바닥의 계약은 주먹보다 ‘기록’에 더 집착한다. 나는 그걸 감식반 계약직 월급보다 잘 알고 있었다.

수금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놈의 목뼈에서 으드득, 하고 서류 뭉치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계약은 영혼의 각인으로 증명됩니다. 기억의 유무는 변제 의무와 무관합…….”

“아니, 관계있어.”

옆에 서 있던 이현우가 낮게 말했다. 그는 수금원의 장부와 내가 든 파일을 번갈아 보더니, 파일의 특정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윤 씨, 여기요. 이 부분하고 저 수금원의 장부 세 번째 줄. 제 눈에는 아예 안 보입니다. 그냥 뻥 뚫린 백지예요.”

“백지라고?”

“네. 글자가 지워진 게 아니라, 애초에 ‘기록’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공간처럼 보입니다. 관측이 불가능한 빈칸이에요.”

이현우의 ‘관측’은 절대적이다. 그가 보지 못한다는 건, 이 시스템이 해당 데이터를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얼른 쪽지 밑바닥을 손끝으로 훑었다. 잔향청취를 극대화했다. 손끝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진동이 올라왔다.

[쪽지 아래의 인주 지장]: “나는 찍혔다. 하지만 손가락의 주인은 지금의 네가 아니야. 그는 더 늙었고, 더 많은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

[포켓의 접착제]: “끈적끈적해. 나를 붙인 건 너야, 강도윤. 그런데 네 손에서 나는 시간 냄새가 이상해. 이건 ‘과거’의 냄새가 아니야. 1년 뒤, 혹은 2년 뒤의 ‘미래’ 냄새지. 나는 미래에서 온 손길에 붙여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미래의 내가 과거로 돌아와 이 파일을 손질했다고? 아니면 이 금고 자체가 시간의 축이 뒤틀린 공간인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지금은 이 무식한 압류 집행관의 논리부터 깨야 한다.

“들었지? 내 확정 기록에는 구멍이 났어. 관측 불가의 빈칸이 있다고. 이건 시스템 오류야. 원본 대조가 안 되는데 어떻게 압류를 집행해? 너희 회계 팀에선 이런 걸 ‘미확정 채권’이라고 부르지 않나?”

수금원의 장부에서 흐르던 검은 잉크가 멈췄다. 놈이 든 펜대가 미세하게 떨렸다.

“……회수율 0%의 기록은 명백합니다. 채무자는 사망 플래그를 하나도 회수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거짓말이야.”

나는 파일 마지막 페이지, ‘사망 플래그 회수율: 0%’라고 찍힌 도장 바로 아래를 손톱으로 긁었다. 잔향이 비명을 질렀다.

[도장 자국]: “위에 덮어씌워졌어! 0%는 가짜야! 원래는 숫자가 있었어! 99%였나? 아니면 그 이상? 누군가 이 숫자를 지우고 다른 계좌로 이체했어!”

나는 수금원의 멱살을 잡는 대신, 파일 가장 구석진 곳에 숨겨진 아주 작은 깨진 글자들을 가리켰다. 현미경으로 봐야 보일 법한 작은 주석이었다.

[KDY-0 / 대체명: 결석자 405 / 이관 담당: 검은 우산 회계 2과]

“이거 뭐야. 내 이름으로 된 포인트, 다른 놈한테 넘겼지?”

내 목소리가 금고 안에 서늘하게 울렸다.

“내가 그동안 죽을 고비 넘기며 회수한 사망 플래그들, 0%가 아니라 이 ‘결석자 405’라는 계좌로 몽땅 이관된 거잖아. 분식회계 아냐, 이거? 내 실적은 가로채고, 깡통 계좌만 남겨서 날 잡아먹으려 했다고?”

수금원의 형체가 일렁였다. 놈은 거대한 시스템의 말단 집행관에 불과했다. 논리에 모순이 생기자 존재 자체가 노이즈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재확인…… 절차…… 필요…….”

“재확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원본 대조 중지’ 신청 안 해. 대신 ‘원본 본인 확인 재개’를 요구한다. 이 ‘결석자 405’가 누군지, 내 실적이 어디로 증발했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나는 놈의 장부를 거칠게 젖히며 금고 더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를 가리켰다.

“안내해. 내 돈, 아니, 내 목숨값이 들어 있는 진짜 장부가 있는 곳으로.”

수금원은 한참 동안 멈춰 있었다. 그러다 놈의 손에 들린 펜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놈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지더니, 우리가 서 있던 서가 뒤편의 거대한 철문이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압 전기가 흐르는 듯한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도윤 씨, 조심하세요. 저 안쪽…… 공기가 달라요.”

이현우의 말대로였다. 열린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곰팡이 냄새가 아니었다. 병원에서나 날 법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희미한 기계의 비프음이었다.

나는 홀린 듯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B-04 금고의 최심부. 그곳에는 서가가 아니라 수많은 유리관과 홀로그램 패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 405번이라는 라벨이 붙은 서가 앞에 섰을 때 내 심장은 멎는 줄 알았다.

“이건…….”

서가 위로 투명한 라이선스 홀로그램이 명멸하고 있었다. 지직거리며 형태를 유지하기 힘들어 보이는 그 빛의 형상은, 지금 병실에서 버티고 있어야 할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윤서하.

하지만 홀로그램 속의 그녀는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헌터 라이선스가 아니라, 피보증인 란에 내 이름이 적힌 ‘계약서’ 자체를 품에 안고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 아래, 붉은색 글자가 점멸했다.

[결석자 405: 윤서하 (상태: 대위변제 중)]

[경고: 보증인 강도윤의 이의 제기로 인해 변제 효력이 일시 중단됩니다. 채권자는 담보물(윤서하)의 생명 유지 장치를 회수할 예정입니다.]

“미친…… 야! 중지! 이의 제기 취소해!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 주머니 속 핸드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병실에서 서하를 보조하고 있어야 할 한지율이었다.

도윤 씨! 큰일 났어요! 갑자기 서하 씨 바이탈이……! 병원 시스템이 통째로 해킹당한 것 같아요! 생명 유지 장치가…… 장치가 꺼지고 있어요!

동시에, 내 눈앞의 405번 서가가 스르르 열리며 그 안에서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의 제기 접수되었습니다, 채무자 님. 하지만 절차를 멈추면 담보물은 즉시 폐기되는 게 원칙이라서요.”

서늘한 웃음소리가 금고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내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장부의 구멍을 찾아낸 대가는, 내가 믿는 사람이 나 대신 숨을 멈추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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