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61화. 생명 유지 장치와 내가 모르는 이름
제목: 60화. 생명 유지 장치의 회계 처리
“도윤 씨! 들려요? 갑자기 모니터가 이상해요! 병실에 있는 기계들이 전부……!”
한지율의 목소리가 찢어지는 비명처럼 수신기 너머를 긁었다. 동시에 내 눈앞의 405번 서가에서도 비프음이 터져 나왔다. 평소 듣던 혈압 측정기의 규칙적인 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마트 계산대에서 바코드가 찍히지 않을 때 나는, 불길하고 건조한 거절의 소리였다.
[경고: 보증인 강도윤의 ‘이의 제기’ 접수 완료.]
[채무 이행 거절에 따른 연쇄 반응 개시.]
[담보물(윤서하)의 유지 비용 결제 수단이 소멸되었습니다.]
[회계 처리: 생명 유지 장치(Item-Life Support) 회수 절차를 시작합니다.]
“미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세상은 참 친절하기도 하지. 사람 목숨을 끊으러 오면서도 꼭 이렇게 영수증을 끊어준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홀로그램 패널로.
유리관 너머, 흐릿하게 점멸하던 윤서하의 라이선스 홀로그램이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아니, 수척해졌다는 표현은 틀렸다. 투명도가 낮아지고 있었다. 마치 데이터가 삭제되기 직전의 아이콘처럼.
“한지율 씨, 서하 씨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요! 의사 불러요! 아니, 헌터 관리국 보안팀이라도!”
—안 돼요! 호출 버튼이 안 먹혀요. 문도 안 열리고…… 도윤 씨, 지금 모니터에 글자가 떠요. 의료 차트가 아니라 무슨 세금 고지서 같은 게……!
그때였다.
405번 서가, 깊은 어둠 속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차분한, 아주 잘 교육받은 화이트칼라의 발소리.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은 그림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수금원처럼 누더기를 걸친 괴물이 아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수트, 먼지 하나 없는 구두, 그리고 얼굴 대신 매끄러운 거울 면이 달린 기괴한 형체.
“민원 접수 확인했습니다. 강도윤 고객님.”
그놈이 입도 없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목소리는 고객센터 ARS처럼 부드러웠고, 그만큼 소름 끼쳤다.
“본청 회계 2과, 405번 계정 정산 담당자입니다. 이의 제기를 하셨더군요. ‘죽을 이유를 승인하지 않았다’라…… 꽤 참신한 소명 사유입니다만, 절차상 결함이 발생했습니다.”
“절차?”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 놈을 노려봤다.
“사람 목숨줄을 끊어놓고 절차를 따져? 당장 이거 멈춰. 이의 제기고 뭐고, 일단 그 생명 유지 장치부터 다시 돌려놓으라고!”
“곤란합니다.”
정산 담당자가 우산을 가볍게 돌렸다.
“고객님께서 계약의 효력을 정지시키셨으니, 해당 계약에 묶여 있던 ‘대위변제’ 혜택도 즉시 중단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윤서하 헌터의 생명은 현재 고객님의 미수금을 담보로 연명 중이었으니까요. 담보 가치가 하락했으니, 은행이 저당 잡힌 물건을 회수하는 건 정당한 회계 처리 아니겠습니까?”
“이 개자식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이의 제기를 하면 시간이 벌릴 줄 알았다. 그런데 시스템은 내 예상을 비웃듯 ‘연대 보증’의 굴레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가 나를 지키려고 내뱉은 말이, 윤서하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는 손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취소해! 이의 제기 취소할 테니까 당장 원상복구 해!”
“취소하시겠습니까? 권장하지 않습니다.”
거울 면에 내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이의 제기를 철회하는 즉시, 고객님의 ‘사망 플래그 회수율 0%’는 ‘채무 불이행’으로 확정됩니다. 그럼 고객님은 즉시 압류(사망) 처리되시고, 윤서하 헌터의 대위변제 기록은 ‘근거 소멸’로 인해 폐기됩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둘 다 끝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상담원이 ‘해지하셔도 위약금 때문에 망하시고, 유지하셔도 연체료 때문에 망하십니다’라고 웃으며 말하는 꼴이었다.
그때, 옆에서 죽은 듯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현우가 입을 열었다.
“강도윤 씨.”
“지금 바빠, 현우 씨. 나중에…….”
“저 담당자 뒤에 있는 유리관 프레임 말이에요. 아래쪽 모서리를 보세요.”
이현우의 손가락이 405번 유리관의 금속 이음매를 가리켰다. 내 눈에는 그저 평범한 검은색 프레임으로 보였지만, 이현우의 눈은 달랐다.
“제 눈에는 거기가 안 보여요. 단순히 어두운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누락된 것처럼 ‘공백’으로 보입니다. 마치 장부에서 누군가 화이트로 지워버린 칸처럼요.”
나는 즉시 그곳에 집중했다. [잔향 청취]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병원 모니터의 비프음, 정산 담당자의 기계적인 목소리, 그리고 유리관 프레임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진동이 뒤섞여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치익…… 지익……)
—항목 번호 405. 자산 분류 오류. 현 위치 추적 불가.
—대위변제금 산출 근거: [값 없음].
—시스템 메시지: 해당 생명 유지 장치는 현재 ‘강도윤’의 미수금 계정으로 가계산되어 있으나, 실질적인 소유권 증명이 불분명함.
내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회계. 그래, 이건 회계다.
장부가 꼬였다면, 논리로 이길 수 없다면, 숫자로 들이받아야 한다.
“야, 정산 담당.”
내가 갑자기 말을 걸자 거울 면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정 신청 하나 하자.”
“정정 신청 말씀이십니까? 무의미합니다. 고객님의 채무는 이미…….”
“아니, 내 채무 말고. 그 담보물 분류가 잘못됐다고.”
나는 유리관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소리쳤다.
“지금 저 윤서하라는 ‘담보물’을 내 미수금으로 처리해서 압류하려는 거지? 그런데 방금 네 시스템이 그러더라. 소유권 증명이 불분명하다고.”
정산 담당자의 거울 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게 무슨…….”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나 같은 헌터 등급도 안 나오는 찌끄레기 계좌에, 어떻게 저런 고등급 헌터의 생명 유지 장치 같은 고가 자산이 담보로 잡혀? 이건 명백한 ‘오분류’야. 카드 결제할 때 편의점 금액이 백화점 명품 금액으로 찍힌 거라고, 이 멍청한 시스템아!”
나는 전화기 너머 한지율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외쳤다.
“한지율 씨! 지금 병원 모니터에 뜨는 그 회계 항목들, 제일 밑에 ‘미결재’라고 뜨는 부분 있죠? 그거 클릭해서 ‘항목 이의 신청’ 버튼 눌러요! 사유는 ‘담보물 설정 오류 및 과다 청구’라고 적고!”
—네? 아, 네! 해볼게요! 잠깐만요…… 어, 진짜 버튼이 활성화됐어요!
정산 담당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예의 바른 ARS 톤이 깨지고 있었다.
“……잔꾀를 부리시는군요. 하지만 분류를 정정한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소유권자가 당신이 아니라면, 저 담보물은 즉시 ‘주인 없는 자산’으로 간주되어 소멸할 뿐입니다.”
“주인이 왜 없어? 내가 ‘진짜 주인’ 이름을 입력하면 되잖아.”
나는 이현우가 짚어준 그 ‘공백’의 자리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박철수 사수가 남긴 보증서. 내 이름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잉크.
이 미친 시스템이 나를 ‘강도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나를 ‘임시 계정’ 취급하는 이유.
“강도윤 고객님.”
정산 담당자가 비웃듯 말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습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은 이 서류상에서 가등록된 가명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의 진짜 원본, 이미 오래전에 폐기된 그 이름을 입력하지 않는 한, 정정 신청은 승인되지 않습니다.”
[경고: 생명 유지 장치 회수율 90%.]
[담보물의 호흡 수치가 임계치에 도달했습니다.]
병원에서 한지율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 씨, 서하 씨 숨이……!”
나는 떨리는 손으로 405번 패널의 입력창에 손을 올렸다.
내가 모르는 내 이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원본.
하지만 [잔향 청취]는 알고 있었다. 이 금고실 B-04에 가득 찬, 수만 개의 서류 더미 속에 묻혀 있는 그 낡은 종이의 소리를.
“내 이름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강제로 지워버린 기억의 파편이 날카롭게 뇌를 찔렀다.
패널 위에 낯선 글자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도윤’이 아니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익숙한 어떤 이름.
[확인: 점유자 명의 정정 신청 접수 중……]
[입력된 이름: ■ ■ ■]
패널의 붉은 불빛이 미친 듯이 점멸하며, 405번 유리관의 프레임이 굉음과 함께 뒤틀리기 시작했다.
정산 담당자의 거울 면이 쩍, 하고 금이 갔다.
제목: 61화. 내가 모르는 내 이름
패널에서 점멸하는 세 개의 검은 네모, ‘■ ■ ■’.
그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내 뇌를 직접 조준하고 쏘아대는 고농도 탄환이었다.
눈앞이 지직거렸다. 낡은 브라운관 TV의 주사선이 망막 위를 긁고 지나가는 것처럼 시야가 찢겼다. 머릿속 깊은 곳, 평생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서랍이 억지로 비틀려 열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커헉……!”
무릎이 꺾였다. 바닥을 짚은 손끝에 서늘한 한기가 서렸다.
분명 나는 ‘강도윤’이다. 20대 후반, 빚더미에 앉은 헌터, 퇴근 후엔 사망 플래그나 줍고 다니는 재수 없는 놈. 그게 나라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민등록등본을 떼도, 통신사 본인 인증을 해도 언제나 ‘강도윤’ 세 글자는 나를 증명해 왔다.
그런데 왜.
왜 저 검은 칸을 보는 순간, 심장 박동이 불협화음을 내는 걸까.
[정정 신청을 완료하시겠습니까?]
거울 면이 금이 간 채로 정산 담당자가 물었다. 갈라진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수십 개로 쪼개져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원본 명의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허위 신고로 간주하여 즉시 압류 절차가 재개됩니다. 고객님의 현재 계정 ‘강도윤’은 삭제되며, 담보물인 윤서하의 대위변제 역시 최종 확정됩니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옆에서 이현우가 내 어깨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수면 아래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치익, 치이익! 도윤 씨! 들려요? 서하 씨 바이탈이……!
주머니 속 스마트폰에서 한지율의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현실의 압박은 무거웠다. 병실의 윤서하는 숨을 몰아쉬고 있고, 눈앞의 괴물은 내 존재 자체를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지독한 고객센터 상담도 아니고, 상담원 대신 저승사자가 앉아 있는 꼴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나 지금 본인 인증 비밀번호가 기억 안 나서 그래…….”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뇌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이현우 씨…… 저거, 세 칸 맞죠?”
나는 겨우 고개를 들어 패널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현우의 표정은 묘했다. 그는 내가 가리킨 곳이 아니라, 그 주변의 공백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제 눈에는 세 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윤 씨.”
이현우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패널 하단, 검은 네모의 왼쪽 끝을 짚었다.
“이쪽 프레임에 잔상이 남아요. 이건 세 글자가 아니라…… 앞부분이 통째로 잘려 나간 형태입니다. 성(姓)에 해당하는 칸이 아예 데이터 영역 밖으로 밀려나 있어요. 그리고 남은 이름 두 칸 중에서도 첫 번째 칸은…… 반쯤 폐기된 상태고요.”
잘려 나간 이름.
그 말이 트리거가 되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유리관 프레임에 손을 올렸다. [잔향청취]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웅성웅성.
“이름? 아, 그 자식 이름이 뭐였더라.”
낡은 서류 뭉치가 팔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전, 내가 이 바닥에 발을 들이기도 전의 소리. 아니,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소리일지도 모른다.
“야, 박철수. 저 애 이름 말이야. 이거 기록에 넣어야 하는데.”
“그냥 둬. 어차피 오늘 죽을 놈인데 이름이 뭐가 중요해.”
박철수.
나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였고, 나를 지키다 죽은 나의 사수.
잔향 속에서 그의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그래도 형식은 갖춰야지. 여기 적힌 대로…… ‘ㅁ’으로 시작하는 거 맞지?”
“……아니. 지워. 그 이름은 이제 없어.”
환청 속에서 펜촉이 종이를 거칠게 긋는 소리가 났다. 슥슥,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
“이제부터 저놈 이름은 강도윤이다. 내가 그렇게 정했어.”
“강도윤? 너무 흔하잖아.”
“흔해야 안 들키지. 강하고, 도망치지 말고, 윤택하게 살라고. 됐냐?”
기억의 파편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박철수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이름을 시스템에서 삭제했다. 아니, ‘폐기’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나를 살리기 위해, 혹은 나를 숨기기 위해.
삐이이이이!
도윤 씨! 서하 씨 심정지 왔어요! 제발! 뭐라도 해봐요!
한지율의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패널 위의 ‘회수율’ 수치가 99%에서 멈춘 채 미친 듯이 깜빡였다. 정산 담당자의 손가락이 확정 버튼 위에 올라갔다.
[입력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3, 2…….]
“잠깐!”
나는 비틀거리며 패널 앞으로 다가갔다.
내 이름. 내가 모르는 나의 진짜 이름.
박철수가 삼켰던 그 첫 음절. 이현우가 말한, 잘려 나간 프레임 너머에 숨겨진 그 흔적.
머릿속에서 금지된 구역의 자물쇠가 부서졌다.
박철수의 서명 옆에 번져 있던 잉크 자국. 그가 내 출입증을 만들 때 잠깐 주춤하며 멈췄던 펜 끝의 망설임.
‘강’이 아니었다.
그 이름의 시작은, 훨씬 더 무겁고 서늘한 글자였다.
나는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패널의 검은 네모를 눌렀다.
첫 번째 칸은 건드리지 못했다. 거긴 여전히 공백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박철수가 ‘도윤’으로 덮어쓰기 전의 원본 데이터가 내 손끝에서 진동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듯, 나는 기억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글자들을 타이핑했다.
[■] [신] [우]
“……이거면 되겠지.”
내가 이름을 입력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강도윤’이라는 껍데기가 쩍쩍 갈라지며 속살이 드러나는 기분.
[데이터 대조 중…….]
[원본 명의 ‘■ 신 우’의 일부 일치 확인.]
[임시 정정 승인. 대위변제 절차를 6시간 유예합니다.]
“하아, 하아……!”
패널의 붉은 경고등이 꺼지고, 푸른색 대기 화면으로 돌아갔다.
전화 너머에서 한지율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돌아왔어요. 바이탈, 일단 잡혔어요. 도윤 씨, 대체 뭘 한 거예요?
나는 대답할 기운도 없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현우가 달려와 나를 부축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내 몸에서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도윤 씨, 괜찮습니까? 방금 입력한 그 이름은…….”
“나도 몰라요. 그냥…… 손가락이 가는 대로 쳤을 뿐이지.”
거짓말이었다.
그 이름을 입력하는 순간, 나는 분명히 느꼈다. 그것이 ‘나’였다는 것을.
내가 잊어야만 했던, 혹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지워져야만 했던 진짜 나.
그때였다.
삐빅, 하는 소리와 함께 정산 담당자의 뒤편, 거대한 서가 중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405번 서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번호조차 붙어 있지 않은, 깊숙한 곳에 숨겨진 비밀 수납고였다.
[명의 정정에 따른 연동 기록을 해제합니다.]
[보관함: ‘폐기된 자들의 일지’ 개방.]
서랍이 스르륵 열리며 낡은 파일 하나가 튀어나왔다.
먼지가 자욱한 그 서류 봉투 위에는 낯익은 필체가 적혀 있었다. 박철수의 글씨였다.
[관리 대상: 강도윤 (가명)]
[원본 상태: 사망 처리 완료]
[특이 사항: 1차 기록 말소 및 영혼 대위변제 실패 건.]
파일이 펼쳐지자, 그 안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사진 속에는 아주 어린 나와, 지금보다 훨씬 젊은 박철수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뒷면에는 박철수의 거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놈이 ‘강도윤’으로 죽어야, 진짜 그놈이 살 수 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닮은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 시스템이 토해낸 마지막 메시지가 패널을 가득 채웠다.
[경고: 본인 인증 강도가 부족합니다.]
[‘강도윤’ 계정의 침식률 45%.]
[원본명의 성(姓)을 입력하지 않을 경우, 귀하는 6시간 뒤 ‘실존하지 않는 자’로 처리됩니다.]
내 이름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 강도윤인가, 아니면 강도윤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죽어버린 누군가인가.
정산 담당자의 갈라진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