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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283화. 첫 번째 사망 플래그와 폐업 신고는 우산으로 일러스트

282-283화. 첫 번째 사망 플래그와 폐업 신고는 우산으로

282화. 첫 번째 사망 플래그

바닥이 꺼지는 감각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새로운 불쾌함을 선사했다. 위아래가 뒤집히고 위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이 기분. 놀이공원 자이로드롭도 돈 주고는 안 타는 나에게 이놈의 헌터 인생은 너무 가혹했다.

“아니, 퇴직금은커녕 목숨값 영수증이나 던져주고 추락시키는 게 어디 있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농담은 공중에서 흩어지는 낙하 속도보다도 빠르게 힘을 잃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허공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숫자들의 잔상 때문이었다.

숫자들. 날짜였다.

[2024. 05. 14.]

[2019. 11. 02.]

[2015. 08. 21.]

시간을 거스르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추락하는 것처럼, 내가 살아온 날들이, 혹은 살지 못했을 날들이 빗방울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록의 단면들이 날카로운 종이 조각처럼 몸을 긋는 감각이 생생했다.

“도윤 씨!”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팔목에 뜨거운 열감이 느껴졌다. 윤서하였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팔찌 모양의 흉터가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노이즈를 일으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나를 지탱해 줄 든든한 힘이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회수 절차에서 억지로 뜯겨 나온 상태였다. 나를 붙잡은 그녀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지고, 창백한 안색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서하 씨, 놓으세요! 그러다 같이…!”

“못 놓아요. 절대로.”

서하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눈빛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녀의 흉터가 기록의 흔들림과 공명하며 우리가 추락하는 궤적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에서 파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화지 조각들이 나비처럼 날아들었다.

“움직이지 마. 기록의 축이 어긋나면 그대로 소멸이야.”

백연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깨진 카메라 렌즈 조각을 눈가에 가져다 댄 채, 찢어진 인화지들을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인화지들은 추락하는 경로의 벽면에 달라붙으며 미친 듯이 요동치는 날짜들을 고정했다. 편집된 영상이 일시 정지되듯, 요동치던 공간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쾅!

바닥에 처박혔다는 느낌보다는, 딱딱한 현실 속으로 사출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나는 거칠게 기침을 토하며 바닥을 짚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타일 바닥.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전자기기의 타는 듯한 냄새, 그리고 비릿한 물비린내였다.

“여긴….”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오래된 편의점이었다. 아니, 편의점의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천장의 형광등은 수명이 다했는지 지직거리며 불길한 소리를 냈고, 진열대에는 물건 대신 먼지 쌓인 서류 뭉치와 이름 모를 이들의 유품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가장 이질적인 건 소리였다. 웅웅거리는 냉장고 실외기 소리가 마치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편의점치고는 서비스가 최악인데. 알바생도 없고.”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손에 쥐고 있던 영수증을 확인했다. 구겨진 종이 위에는 여전히 [사망 예정자: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도윤 씨, 괜찮아요?”

서하가 비틀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계산대 너머 유리문 밖을 바라보며 멈춰 섰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지만, 그녀의 팔찌 흉터는 그 어둠을 향해 반응하고 있었다.

“나갈 수 없어요. 문이… 안 열려요.”

서하가 문고리를 잡았지만, 유리문은 마치 벽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그녀가 문에 손을 올리자, 유리창 위로 붉은 글자들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공동 결제… 확인 불가…]

[권한… 제한됨…]

“공동 결제자?”

내가 그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계산대 위에 놓여 있던 낡은 영수증 프린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마치 이빨을 가는 듯한 기분 나쁜 기계음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내 안의 잔향청취 능력이 강제로 깨어나 기계의 소리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호갱님.』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뇌를 긁었다. 영수증 프린터의 좁은 입구에서 종이가 조금씩 빠져나오며 말을 이어갔다.

『목숨은 현금 결제가 안 됩니다. 포인트 적립도 불가능하시고요. 아, 대리 결제자 서명이 누락되었네요? 이거 아주 곤란한데.』

“뭐라는 거야, 이 고철 덩어리가.”

나는 빈정거렸지만 손끝이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잔향 속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 기계는 헌터 협회 감식반 사무실에서 봤던 그 사망 접수 단말기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공간의 규칙이 좁은 종이 입구로 이를 갈고 있었다.

『환불은 당연히 안 되고요. 이미 지불된 목숨이니까. 그런데 고객님, 영수증 날짜 좀 보시겠어요? 유효기간이 참 기네요.』

프린터가 뱉어낸 종이를 낚아챘다. 거기에는 내가 문태식을 만나기도 훨씬 전,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날짜가 찍혀 있었다.

그때였다. 계산대 뒤편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젊은 시절의 문태식의 잔향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고, 품에는 검은 우산을 갈무리한 채 단말기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주 작은 아이,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 혹은… 가온이었을 누군가가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취소해.”

젊은 문태식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시렸다.

“이 결제, 지금 당장 취소하라고.”

프린터가 끼익거리며 답했다.

『불가능합니다, 문태식 감식관님. 이미 ‘검은 우산’의 서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죽음은 확정되었고, 소유권은 이전되었습니다.』

문태식은 주먹으로 계산대를 내리쳤다.

“그럼 미뤄. 보류해두란 말이야. 다른 이름으로 덮어씌워서라도!”

『그건 ‘할부’나 ‘대리 결제’와 같습니다. 누군가 대신 이자라도 내지 않는 이상….』

문태식의 잔향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는 단말기에 무언가 복잡한 코드를 입력하더니, 마지막으로 내가 가진 영수증 뒷면에 무언가를 적었다.

[이건 네가 산 게 아니라, 누군가 대신 지불한 목숨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허공을 넘어 지금의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를 구한 게 아니었다. 그저 다가올 죽음을 뒤로 미루고, 그 대가를 누군가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강도윤, 여기 봐.”

백연의 낮은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어느새 구석에 있는 우산꽂이 앞에 서 있었다.

편의점 내부는 온통 눅눅하고 젖어 있는데, 오직 그 우산꽂이에 꽂힌 검은 우산 하나만은 보송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백연이 인화지 한 장을 그 우산 위에 겹쳐 보였다.

“이 기록 속에서 유일하게 ‘편집’되지 않은 물건이야. 그리고 이건….”

백연이 가리킨 우산의 손잡이 부분.

거기에는 흙 묻은 아주 작은 어린아이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이 우산을 뺏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가온이의 이름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이 영수증만 없애면, 이 지긋지긋한 결제도 끝나는 거 아냐?”

나는 홧김에 손에 쥔 영수증을 찢으려 했다. 문태식이 미뤄둔 죽음이든, 검은 우산이 결제한 미래든, 내 방식대로 끝내고 싶었다.

찌이익.

종이가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손안의 종이는 멀쩡했다.

소리가 난 곳은 영수증 프린터였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기계가 미친 듯이 종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것처럼, 붉은색 잉크가 번진 영수증들이 계산대 아래로 쏟아졌다.

“도윤 씨, 조심해요!”

서하가 내 앞을 막아서며 팔찌를 휘둘렀다. 흉터에서 뻗어 나온 쇠사슬 같은 빛의 줄기들이 프린터를 억누르려 했지만, 쏟아져 나오는 종이의 양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발치로 떨어진 새 영수증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름 끼치는 문구가 찍혀 있었다.

[재결제 승인 대기]

[사망 예정자: 윤서하]

[대리 결제자: 강도윤]

“이게… 무슨….”

글자는 완벽하지 않았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찢겨 있었지만, 읽고 싶지 않은 방향만큼은 선명했다.

내가 나의 첫 번째 사망 플래그를 거부하거나 무효화하려는 순간, 시스템은 새로운 제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 결제했다면, 이제는 내가 누군가를 위해 결제해야 한다는 뜻인가?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비웃듯 한 문장을 더 뱉어냈다.

『거래는 공정해야 하니까요.』

“웃기지 마. 누가 이딴 거래를 해!”

나는 프린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편의점의 형광등이 일제히 깨져 나갔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나는 유리문 너머 서하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겁에 질린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자신의 팔찌 흉터에 새겨진 ‘공동 결제자’라는 단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윤 씨, 혹시 알아요?”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우리가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 이미 계산된 거였다면요.”

어둠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백연의 인화지들이 불타오르며 마지막 빛을 냈고, 나는 우산꽂이에 꽂혀 있던 그 검은 우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잡이에 묻은 어린아이의 손자국이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차가운 빗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받은 목숨이 사실은 누군가의 죽음을 담보로 빌려온 것이라면.

그리고 이제 그 청구서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면.

나는 결코 이 영수증을 곱게 접어 주머니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

“환불 안 된다고 했지?”

나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그럼 폐업시켜 줄게. 이 거지 같은 가게.”

발밑이 다시 한번 꺼져 내려갔다. 이번에는 추락이 아니었다.

진짜 첫 번째 사망 플래그가 발행되었던 그날, 그 빗줄기 속으로 내가 직접 뛰어드는 기분이었다.

283화. 폐업 신고는 우산으로

검은 우산 손잡이에 남은 어린아이의 손자국. 그 차가운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세상의 채도가 단숨에 빠져나갔다. 편의점의 형광등 터지는 소리는 비릿한 빗소리로 바뀌었고, 발밑의 타일 바닥은 질척이는 아스팔트의 질감으로 변질되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추락하는 기분은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달랐다. 단순히 기록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거대한 기계 장치의 톱니바퀴 사이에 끼여 강제로 회전당하는 기분이었다.

“윽…!”

신음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쏟아지는 빗줄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어둡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은 잉크를 쏟아부은 것처럼 검었다. 코끝을 찌르는 건 비 냄새가 아니라 오래된 서류 뭉치가 썩어가는 듯한 눅눅한 종이 냄새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방금까지 내가 있던 편의점이 보였다. 아니, 편의점이었던 곳이라고 해야 할까.

간판의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고, ‘24시’라는 글자 중 ‘4’ 자만 간당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셔터는 누군가 억지로 끌어 내린 듯 절반쯤 비뚤게 내려와 내부를 가로막았다. 입구 옆 우산꽂이에는 단 하나의 빈자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내가 쥐고 있는 이 검은 우산의 자리였다.

“사장님, 여기 폐업 신고하러 왔는데요. 서류 양식이 좀 지나치게 입체적이네.”

입술이 떨리는 걸 감추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뒤를 돌아 도망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도망칠 곳 같은 건 없었다. 내 등 뒤는 이미 실체 없는 어둠이 집어삼킨 지 오래였다.

철벅, 소리와 함께 발밑을 보았다.

빗물 고인 웅덩이 위로 작은 맨발 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이의 발자국이었다. 그 옆에는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자세히 보니 플라스틱 이름표의 모서리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간 흔적이었다.

반가온. 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나는 억지로 그 생각을 눌러 참았다. 지금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이 기록의 덫에 완전히 걸려들 것 같았다.

“도윤 씨!”

그때, 허공에서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하였다.

고개를 돌리자, 셔터 너머 허공에 일렁이는 유리문 잔상이 보였다. 서하 씨는 그 유리문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팔찌 흉터가 붉게 타오르다 못해 진득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오지 마요! 여기 이상해!”

내가 소리쳤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손목 흉터를 거칠게 긁어내며 그 피를 유리 잔상에 묻혔다. 연결을 끊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력을 매개로 이 미친 기록의 현장에 강제로 개입하고 있었다.

[공동 결제… 증인 권한 강제 획득…]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 같은 글자들이 노이즈와 함께 명멸했다. 서하 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또렷했다. 그녀는 대리 결제자가 되어 내 죽음을 대신 가져가는 길을 택하는 대신, 이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는 ‘증인’의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혼자… 보내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녀가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이어 백연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뒤를 따랐다. 백연의 손에는 아까 주워 들었던 깨진 렌즈 조각과 인화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강도윤 씨, 이거 봐요.”

백연이 인화지를 내밀었다. 빗속에서도 전혀 젖지 않는 기이한 종이였다. 그 위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골목의 풍경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달랐다.

현실의 우리 세 사람 외에, 화면 구석에 정체 모를 ‘손’ 하나가 더 찍혀 있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내가 들고 있는 우산과 똑같은 우산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교묘하게 앵글 밖으로 숨어 있었지만, 그것이 이 모든 기록을 편집하고 비틀어버린 ‘네 번째 인물’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편집되지 않은 원본 기록입니다. 이 공간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하나 더 있다는 뜻이죠.”

백연의 짧고 서늘한 설명에 뒷목이 오싹해졌다.

그때였다. 내 손에 쥐린 검은 우산이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잔향청취.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감각이 강제로 열렸다.

― 찌르르, 징….

기분 나쁜 기계음이 겹쳐 들렸다. 영수증 프린터의 급지 소리, 편의점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진동, 그리고 우산살이 빗방울에 부딪히며 내는 파열음. 세 가지 소리가 층층이 쌓여 하나의 기괴한 화음을 만들어냈다.

[재결제 승인 대기 중…]

[대상: 윤서하]

[조건: 대리 결제자의 진입 확인 시 확정]

“함정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멈춰 섰다. 셔터 안쪽, 아이의 맨발 자국이 사라진 그 어두컴컴한 편의점 내부로 발을 들이는 순간, 윤서하의 사망 플래그가 확정되는 구조였다. 내가 진실을 알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면 서하 씨가 죽고, 여기서 멈추면 이 비극의 최초 발행자가 누구인지 영영 알 수 없게 된다.

결제창 앞에 선 사람의 목을 죄는, 가장 악랄한 방식의 선택 강요였다.

“도윤아.”

빗줄기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쳤다. 우산살 사이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 아니, 그의 잔향이었다.

“폐업은 물건을 부수는 게 아니다. 장부를 공개하는 거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머릿속을 때리는 충격은 컸다.

나는 멍청하게 셔터 문을 부수거나 영수증을 찢으려 했다. 하지만 이 기록의 주인은 이곳을 하나의 ‘가게’처럼 운영하고 있었다. 계약이 성사되고, 결제가 이루어지며, 장부가 기록되는 곳. 그렇다면 억지로 문을 열 게 아니라,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는 장부 자체를 까발려야 했다.

나는 셔터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쥐고 있던 검은 우산을 하늘을 향해 활짝 펼쳤다.

“우산으로 폐업 신고하는 거 본 적 있어요? 내가 지금 보여줄게.”

우산은 무기가 아니었다. 이건 이 기록의 열쇠이자, 동시에 모든 결제 내역이 적힌 장부 그 자체였다.

쏟아지는 빗방울이 우산의 검은 천 위로 떨어졌다. 평범한 비라면 튕겨 나가야 했을 물방울들이 천에 닿는 순간 글자로 변하며 번져나갔다. 우산 겉면이 거대한 스크린처럼 변하며 무수히 많은 이름과 날짜들이 스쳐 지나갔다.

“백연 씨, 지금 찍어요! 서하 씨,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고 똑똑히 봐요!”

나는 우산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빗줄기가 거세질수록 장부의 글씨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수많은 사망자들의 이름, 그들이 지불한 비용, 그리고 대리 결제자들의 서명들.

[20XX년 5월 14일 - 결제 완료]

[20XX년 11월 02일 - 대리 결제 승인]

정신없이 흐르는 글자들 속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최초’의 기록을 찾았다. 이 모든 미친 짓이 시작된 그날의 기록을.

우산 손잡이의 손자국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빗방울들이 한곳으로 모이며 장부의 가장 아래쪽, 가장 오래된 기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찾았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거기에는 예상했던 이름이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동시에 없었다.

[최초 대리 결제자: 윤……]

글자가 빗물에 번져 뒷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윤서하일까? 아니면 그녀의 가문 누군가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장부에 나타난 날짜와 번진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도윤 씨… 나 이 날짜를 알아요. 이건 내가 사고를 당했던 날이 아니에요. 이건….”

그녀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이었다.

골목 끝, 셔터가 내려간 편의점 모퉁이 그림자 속에서 아주 작은 기척이 들려왔다.

철벅.

맨발로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들려온 것은, 결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그러나 너무나도 익숙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형.”

우산살 아래로 뚝, 뚝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일순간 멈춘 듯했다.

“이번엔 누굴 살릴래?”

어둠 속에서 반쯤 드러난 작은 실루엣. 그 아이의 손에는 내가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그러나 아주 작은 크기의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우산 위로 흐르는 장부의 이름들이 피처럼 붉게 변하며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으니까.

[경고: 장부 열람 권한 초과]

[최초 결제자의 잔향이 동기화됩니다.]

빗소리가 비명처럼 바뀌었다. 우리가 폐업 신고를 하러 온 이 편의점은, 아직 주인의 이름을 한 번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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