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157화. 보호자 면담실의 형과 소각로 앞의 뒷모습
제목: 156-157화. 보호자 면담실의 형과 소각로 앞의 뒷모습
제목: 156화. 보호자 면담실의 형
유리벽이 스르륵 열리고 드러난 공간은 기괴했다.
분명 헌터협회 민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었지만, 벽지는 오래된 소아과 병원의 그것처럼 유치한 동물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천장에는 헌터협회 마크가 찍힌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소독약 냄새를 뿜어냈다.
병원, 민원실, 그리고 어린이 상담실을 한데 짓이겨 놓은 듯한 풍경.
그 기묘한 공간의 중심, 낡은 상담용 책상 뒤에 ‘그’가 앉아 있었다.
“늦었잖아, 도구리.”
익숙한 목소리. 내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든든했던 울타리이자 나를 이 지옥 같은 시스템에서 빼내기 위해 스스로를 지웠던 나의 형, 강도원.
그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입꼬리는 다정하게 올라가 있는데, 눈동자는 초점 없이 나를 관통해 뒤편의 벽을 보는 것 같았다.
“서명은 잘 봤다. 근데 너, 아직 사람 냄새가 덜 나는데?”
그가 한 걸음 내디뎠다. 구두 굽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쩍, 쩍 소리가 났다. 바닥의 타일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검은 우산 살대들이 뱀처럼 꿈틀대며 솟아올랐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 멈췄다. 내 뒤에는 서하 씨와 가온이가 있었다.
“형? 아니, 강도원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퇴사하고 여기서 투잡이라도 뛰어?”
농담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 고질적인 방어기제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손끝이 떨릴 때마다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곤 했다.
강도원의 고개가 기우뚱하게 꺾였다.
“도구리 1순위 보호자 강도원입니다. 퇴실 심사를 시작합니다. 대상자의 상태… 양호하지 않음. ‘도구’의 흔적이 여전히 피부 아래에 박동하고 있군요.”
방금까지 다정했던 목소리가 갑자기 기계적인 안내음처럼 변했다. 소름이 돋았다. 진짜 형의 목소리와, 이 시스템을 만든 강도지의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섞인 듯한 톤이었다.
“윽…!”
옆에서 가온이가 입을 틀어쥐며 비틀거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온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냄새가… 냄새가 너무 이상해요, 아저씨. 담배 냄새랑 싸구려 자판기 커피 냄새가 나는데… 그 밑에 포르말린이랑, 차가운 쇠 냄새가 썩어서 같이 나요. 꼭 살아 있는 사람한테 방부제를 들이부은 것 같은… 우욱!”
가온이는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형의 냄새와 시스템의 냄새가 한 몸에서 나고 있다는 뜻이다.
서하 씨가 내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검 끝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녀의 목 주변으로 희미한 균열 같은 붉은 선이 일어났다. ‘증언자’의 권능을 억누르며 내게 힌트를 주려는 몸짓이었다.
책상 위에는 세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불에 타서 일부분만 남은 노란색 병원 팔찌 조각.
검은 우산 살대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듯한 만년필.
그리고 삐뚤삐뚤한 필체로 그려진 도화지 한 장.
“심사를 통과하고 싶으면 증명해라. 네가 수집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걸.”
강도원, 혹은 강도원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이 물건들 속에 네가 버리고 간 진실이 있어.”
나는 침을 삼키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강도원의 형태를 한 남자의 눈이 나를 집요하게 쫓았다. 저 눈이 진짜 형의 것인지, 아니면 나를 감시하는 렌즈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우선 손을 뻗어 타버린 노란 팔찌 조각에 손을 댔다.
[잔향청취를 시도합니다.]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불꽃 소리와 함께 아주 짧은 속삭임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 아직 냄새나지? 형, 나 여기서 나가기 싫어.
등골이 오싹했다. 내 목소리였다. 아주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가 팔찌에 눌어붙어 있었다. 이건 형이 나를 대신해 시스템의 불길 속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차고 있던 팔찌의 잔해다.
팔찌의 잔향은 불쾌한 농담처럼 내 뇌를 긁었다. ‘나 아직 냄새나지?’라는 말은 질문이 아니라 조롱 같았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타다 만 기록물에 불과하다는 조롱.
“그림을… 봐.”
서하 씨가 작게 읊조렸다. 그 한마디에 그녀의 입술에서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 시스템이 그녀의 발언을 ‘증언’으로 간주하고 대가를 집행한 것이다.
나는 급히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아이가 그린 전형적인 가족 그림이었다. 커다란 집, 해님, 그리고 손을 잡고 있는 두 사람.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작았다. 강도원과 강도윤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림 속 키 큰 사람(강도원)의 손에는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 우산은 단순히 비를 피하는 용도가 아니라, 작은 아이(나)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어 누르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림 속 아이의 손은… 다섯 손가락이 아니었다. 나뭇가지처럼 뾰족하게 갈라진 여섯 개의 검은 선.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야.”
나는 확신했다. 나는 어릴 때 그림을 못 그리긴 했지만, 내 손을 괴물처럼 그리지는 않았다.
“아니, 네가 그린 게 맞다, 도구리.”
강도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올리려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손을 쳐냈다. 내 손에 닿은 그의 피부는 온기가 있었지만, 동시에 서늘한 대리석 같았다.
“기억 안 나? 네가 이 방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그렸잖아. 너를 지켜주는 우산과, 너를 특별하게 만들어줄 ‘도구’에 대해서.”
“개소리하지 마. 우리 형은 나한테 이딴 거 안 시켰어.”
“형? 아아, 강도원 말인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기계적으로 변했다.
“보호자 면담 기록 재생합니다.”
치익, 하는 노이즈와 함께 대기실 벽면의 낡은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도원: 얘는 도구가 아니라고요, 국장님! 0번 방에 가둘 게 아니라 병원에 보내야 한다고요!]
[강도지: 표본의 안정성이 우선이다. 도원은 네가 이해해라. 저 아이는 인간의 피보다 시스템의 잉크가 더 많이 흐르고 있어. 퇴실은 불가능하다.]
[강도원: 그럼 내가 대신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그 잉크를 다 뒤집어쓸 테니까, 도윤이는…!]
치익, 하고 녹음이 끊겼다. 가장 중요한 뒷부분이 잘려 나갔다.
“형은 나를 구하려고 했어. 근데 너는 지금 그걸 이용해서 나를 여기 묶어두려는 거지?”
나는 책상 위의 우산 살대 펜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사람 냄새? 그딴 건 모르겠고. 내가 아는 건 하나야.”
나는 펜 끝을 내 손목의 흉터, 아까 피를 흘려 ‘인간’임을 증명했던 그곳에 갖다 댔다.
“우리 형은 나를 ‘도구리’라고 부르긴 했지만, 한 번도 나를 ‘도구’ 취급한 적은 없어.”
나는 펜을 돌려 그림 위로 내리꽂았다. 목표는 그림 속 강도원의 손에 들린 ‘검은 우산’이었다.
서하 씨가 가리켰던 것, 가온이가 느꼈던 그 모순된 냄새의 근원. 이 공간에서 유독 이질적인 농도로 고여 있는 검은 잉크의 덩어리.
펜촉이 도화지를 뚫는 순간, 찌르르한 진동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잔향청취가 강제 발동됩니다!]
[대상: 숨겨진 기록층]
“도윤아,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너를 데리러 오면….”
환청처럼 들리는 형의 목소리. 하지만 아까 스피커에서 나오던 것보다 훨씬 낮고, 절박한 목소리였다.
“그때의 내 눈을 봐. 내 눈에 네가 비치지 않으면, 그건 내가 아니야.”
나는 펜 끝으로 그림 속 우산을 미친듯이 긁어내기 시작했다. 검은 색연필 자국이 벗겨지자,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진짜 필체가 드러났다.
강도지의 깔끔한 글씨도, 시스템의 인쇄된 폰트도 아니었다.
형이 다급하게 손톱으로 눌러 쓴 듯한, 종이가 파여서 만들어진 문장.
나는 그 문장을 읽자마자 숨을 멈췄다.
[ 도구리, 나를 믿지 마. ]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던 ‘강도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가 마치 깨진 유리구슬처럼 금이 가더니, 그 틈새로 검은 액체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심사… 실패.”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등 뒤로 수천 개의 검은 우산 살대가 날개처럼 펼쳐졌다.
“보호자 면담을 종료합니다. 대상자 강도윤, 강제 보관 절차로 전환.”
민원실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 조각을 움켜쥐었다. 형이 남긴 메시지 뒤에 아주 작은 숫자들이 좌표처럼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믿지 말라며, 형. 근데 이렇게 단서를 남겨두면… 안 믿을 수가 없잖아.”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서하 씨와 가온이를 향해 외쳤다.
“뛰어요! 여기 면담실 아니야, 도살장이지!”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우리를 덮치기 직전, 나는 형이 남긴 좌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강도원’의 목소리는 더 이상 형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낡은 기계가 끼익거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우리가 뛰어든 어둠 너머, 또 다른 기록의 방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보았다.
수많은 ‘강도윤’의 기록물들이 태워지고 있는 거대한 소각로와, 그 앞에서 우산을 든 채 뒷모습만 보이고 서 있는 진짜… 혹은 진짜일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제목: 157화. 소각로 앞의 뒷모습
숨이 막히는 열기였다. 단순히 온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산소가 있어야 할 자리를 무언가 타들어 가는 비릿한 연기가 대신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좌표를 따라 뛰어내린 끝에 발이 닿은 곳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재의 늪이었다.
"커헉, 콜록! 이거 무슨……."
입을 열자마자 까끌까끌한 재가 목구멍으로 들이쳤다. 반가온이 코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매를 끌어올려 입을 막았다.
공간은 기괴한 형태로 뒤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헌터협회 기록 보관실에서나 볼 법한 형광등 케이스가 매달려 있었고, 벽면은 오래된 어린이집 보일러실처럼 붉은 벽돌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거대한 소각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화구 안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은 푸른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기분 나쁜 색이었다.
"형, 이거 냄새가…… 너무 심해요."
가온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녀석의 코는 이미 한계를 맞이한 듯했다.
"무슨 냄새인데?"
"태운 플라스틱, 소독약, 그리고…… 상한 우유 냄새요.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 안에서 형 냄새가 나요. 아주 많이요."
가온이의 손가락이 소각로 앞에 쌓인 산더미 같은 쓰레기 더미를 가리켰다. 아니, 그건 쓰레기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된 물건들이 내 시야를 때렸다. 'KDY'라는 이니셜이 적힌 노란 병원 팔찌 수천 개가 엉겨 붙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내 어린 시절 그림들이 종이비행기처럼 접힌 채 불길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고, 낡은 녹음 테이프들이 마치 내장처럼 길게 뽑혀 나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수천, 수만 명의 '강도윤'이 이곳에서 재가 되고 있었다. 시체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내 기록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갈라져 있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그녀의 목등에 돋아난 시스템의 균열에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그녀는 말을 아끼는 대신, 내 손목을 가리켰다.
내 손목에서 흐른 피 한 방울이 바닥의 검은 재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마치 기름이라도 부은 듯, 피가 떨어진 자리를 중심으로 재들이 밀려나며 바닥에 새겨진 글자들을 드러냈다.
[기록 번호: KDY-0 - 폐기 진행 중]
[상태: 본체 이탈로 인한 동기화 오류]
그 글자 위로 그림자가 졌다.
소각로 바로 앞, 화염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검은 코트, 그리고 이 지옥 같은 열기 속에서도 전혀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있는 뒷모습.
"……형?"
내 목소리가 떨렸다. 강도원. 그토록 찾아 헤매던 형의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방금 전 긁어냈던 문장이 이명처럼 울리고 있었으니까.
[도구리, 나를 믿지 마.]
저건 형일까, 아니면 형의 탈을 쓴 시스템의 기록일까. '나'를 믿지 말라는 말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저 존재를 부정하라는 뜻일까.
우산을 든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까딱였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소각로의 레버를 당겨 불길을 더 키우고 있었다.
"돌아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 형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계적인 건조함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네 기록을 다 태우면, 네가 살아남은 이유도 같이 사라진다. 도윤아, 너는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형이 여기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와?"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발밑에서 '파직' 하고 무언가 밟히는 소리가 났다. 반쯤 탄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희미한 연기 같은 잔향이 갇혀 있었다.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잔향을 낚아챘다. 내 고유 능력, 잔향청취가 강제로 가동됐다.
(―불에 구우면 보호자 도장도 바삭해져요. 먹어볼래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소름이 돋았다. 그건 내 목소리였다. 대략 일곱 살 무렵의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농담. 하지만 그 농담의 대상이 '보호자 도장'이라는 점에서 뒤틀린 공포가 밀려왔다.
"형, 지금 뭘 태우고 있는 거야? 왜 내 기록들을 지우고 있는 건데?"
"지우는 게 아니다."
남자가 드디어 고개를 약간 돌렸다. 옆얼굴의 윤곽이 드러났지만, 소각로의 강렬한 역광 때문에 눈매는 보이지 않았다.
"지키는 중이지. 기록되지 않은 것은 수집될 수 없으니까."
그의 말은 모순적이었다. 존재를 증명하는 기록을 다 태워버리는데 어떻게 지킨다는 말인가. 하지만 가온이가 내 옆에서 짧게 숨을 들이켰다.
"……달라요."
"뭐가?"
"냄새가 달라요. 저 사람이 태우고 있는 건 '진짜'가 아니에요. 형의 냄새가 나긴 하는데, 이건 마치…… 누군가 흉내 내서 만든 가짜를 태워서 진짜인 것처럼 속이는 냄새예요."
가온이의 눈이 번뜩였다.
"형을 살리려고, 가짜 기록들을 대신 태우고 있는 거라구요!"
그 순간, 시스템 창이 내 눈앞에서 광분하듯 점멸했다.
[경고: 관리자 권한 침해 감지!]
[보관소 내 '불순물' 소각 효율 44% 하락.]
[좌표: 44-12-09 지점의 데이터를 즉시 회수하십시오.]
좌표. 그림 뒤에서 찾아냈던 그 숫자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각로 바로 옆, 타지 않은 서류 뭉치 하나가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저건 소각 대상이 아니라 '보관' 대상인 모양이었다.
나는 달려나갔다. 우산을 든 남자가 움찔하며 손을 뻗었지만, 나는 구르듯이 바닥을 훑으며 서류를 낚아챘다.
"안 돼, 도윤아! 그걸 열면―!"
형의 외침이 들렸지만 늦었다. 나는 이미 서류의 첫 페이지를 넘긴 뒤였다.
그것은 [보호자 면담 동의서]이자, 동시에 [보호자 교체 신청서]였다.
종이는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지만,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은 방금 쓴 것처럼 선명했다.
[피보호자: 강도윤 (KDY-0)]
[기존 보호자: 강도원 (권한 박탈 예정)]
그 아래, '신규 보호자' 칸이 보였다. 나는 당연히 강도지의 이름이 적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노인네가 나를 자기 소장품으로 만들려고 이 모든 미친 짓을 벌였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서명란에 적힌 이름은 강도지가 아니었다.
낡은 잉크가 번진 자리에,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박혀 있었다.
[대체 보호자: 윤서하]
"……뭐?"
내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서 있는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이름 옆에 붙은 기괴한 주석을 보고 있었다.
[상태: 등록 예정 (증언자의 대가로 확정)]
"이게…… 이게 왜 네 이름이야?"
윤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핏기를 잃었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균열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입을 열려 하자, 시스템의 경고음이 고막이 터질 듯 울려 퍼졌다.
[알림: '증언자'의 계약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보호 대상 'KDY-0'의 소유권이 이전됩니다.]
소각로 앞의 남자가 우산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건 우산이 아니라 날카로운 메스였다. 그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너를 이 안으로 끌어들였구나."
남자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일렁이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형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형이 남긴 마지막 잔향이 실체화된 보초병이었을 뿐이다.
바닥의 재들이 소용돌이치며 윤서하의 발치를 휘감았다. 그녀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더니, 내 발밑까지 뻗어와 내 그림자를 잡아삼키려 했다.
윤서하가 고통스러운 듯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게 손을 뻗으며, 시스템의 제약을 뚫고 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도윤 씨…… 도망쳐요. 내가…… 당신을 '소장'하게 두지 마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머릿속의 시스템 창이 피처럼 붉게 물들며 완전히 새로운 문구를 띄웠다.
[메인 시나리오 갱신]
[새로운 보호자가 당신의 기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현재 진행률: 1%……]
소각로의 불길이 거세게 치솟으며 우리를 덮쳐왔다. 나는 타들어 가는 서류를 품에 안은 채,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나의 새로운 보호자' 윤서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형이 나를 믿지 말라고 했던 건, 어쩌면 나를 구하려던 윤서하조차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뜨거운 재바람 속에서,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