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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159화. 새로운 보호자와 문태식 팀장의 증언 일러스트

158-159화. 새로운 보호자와 문태식 팀장의 증언

제목: 158-159화. 새로운 보호자와 문태식 팀장의 증언

158화. 새로운 보호자가 기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폐부로 스며드는 공기는 달았다. 산소가 달콤하다는 뜻이 아니라, 설탕을 잔뜩 넣고 태운 달고나의 탄내와 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기괴한 풍미였다. 소각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내 피부를 익힐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뺨에 닿은 윤서하의 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투명한 수막처럼 시스템 메시지가 흐르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갱신]

[새로운 보호자가 당신의 기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현재 진행률: 1%……]

“윤서하 씨?”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은 이미 평소의 날카로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라디오 주파수를 잡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그녀의 초점은 내 얼굴을 투과해 그 뒤의 무언가를 향했다.

“도윤…… 씨…….”

윤서하가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가 돌아왔을 텐데도 그녀의 음성은 지독하게 짓눌려 있었다. 한 마디를 뱉을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졌다. 바닥에 고인 타르 같은 그림자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내 그림자와 엉겨 붙기 시작했다.

[진행률: 3%……]

“도망치라고 했잖아요. 왜…… 왜 안 가고…….”

“도망갈 곳이 있어야 가죠. 여기 사방이 소각로인데, 나가다가 웰던으로 익고 싶진 않거든요.”

나는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붙은 게 아니었다. 내 ‘기록’이 붙들린 기분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누군가 내 뇌를 도서관 서가처럼 헤집는 불쾌한 감각이 밀려왔다.

[보호자가 피보호자의 초기 기록을 열람합니다.]

[항목: 7세, 강남 성심병원 302호의 냄새.]

코끝에 훅 끼치는 냄새가 있었다. 지금의 소각로 냄새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된, 식어버린 미역국과 독한 항생제, 그리고 형이 사 왔던 싸구려 초콜릿의 들큰한 향기. 어린 시절, 내가 왜 병실 침대 밑에 숨어 있었는지, 그때 어떤 공포를 느꼈는지에 대한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현재를 덮쳤다.

“으윽.”

신음이 터졌다. 이건 단순한 기억 회상이 아니다. 윤서하라는 매개체를 통해 시스템이 내 존재의 근간을 ‘데이터’로 치환하여 읽어 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읽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나는 강도윤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KDY-0’라는 소장품으로 확정되어 간다.

“윤 요원님! 정신 차려요!”

반가온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려 했지만, 그녀의 걸음은 소각로 보초병이 던진 우산 끝에 막혔다. 강도원의 얼굴을 한 그 괴물은 무심한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온 씨, 오지 마요! 그쪽 냄새 맡지 마!”

나는 가온을 향해 소리쳤다.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창백해진 안색으로 외쳤다.

“아저씨, 이상해요! 윤 요원님한테서…… 평소의 그 시원한 비누 냄새가 안 나요. 그 아래에, 아주 얇고 기분 나쁜 냄새가 덧칠되어 있어요. 비에 젖지 않은 검은 우산, 그리고…… 아주 오래된 종이 냄새요!”

기록의 냄새다. 윤서하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시스템이 그녀를 ‘소장자’라는 껍데기로 덧칠하고 있었다.

강도원의 형상을 한 보초병이 메스로 변한 우산을 들어 올렸다. 그는 나를 공격하는 대신, 바닥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윤서하의 그림자와 내 그림자가 겹쳐져 경계선조차 모호해진 그 지점.

그 순간, 내 고유 능력인 잔향청취가 멋대로 요동쳤다. 물건에서 들려와야 할 목소리가, 이번에는 그림자의 경계선에서 튀어나왔다.

[보호자는 사람을 붙잡는 손이 아니라, 서류를 대신 읽어 주는 눈이었답니다.]

서늘한 여자의 목소리. 강도지 국장의 것인지, 아니면 시스템 그 자체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환청이 뇌를 긁었다.

[읽히는 것을 멈추고 싶나요? 그러면 눈을 가리세요. 하지만 당신의 보호자는 눈이 없어도 당신을 읽을 수 있지요. 그녀의 이름이 당신의 이름 옆에 적혀 있는 한은.]

“제기랄, 이름이 문제였나.”

나는 품 안에서 아까 집어 들었던 [보호자 교체 신청서]를 꺼내려 했다. 하지만 종이는 이미 내 손안에서 소각재처럼 바스러지고 있었다. 실물 서류가 타버려도 시스템상의 등록은 멈추지 않는다.

[진행률: 12%……]

[피보호자 강도윤의 ‘비정상적 능력의 기원’을 읽기 시작합니다.]

“아악!”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에 무릎을 꿇었다. 기억의 파편들이 눈앞을 스쳤다. 형이 내 귀를 막아주던 손길, “듣지 마, 도윤아. 죽은 사람들의 농담 같은 건 듣는 게 아니야.”라고 속삭이던 목소리. 그 모든 따스했던 기억이 차가운 텍스트로 변해 윤서하의 눈동자로 빨려 들어갔다.

윤서하의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았다. 나를 죽이려는 손길이 아니었다. 나를 ‘소장’하기 위해 놓치지 않으려는, 시스템의 강제적인 명령에 따른 악력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입술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도윤 씨, 제발…… 나를 찢어버려요. 내 권한을…… 끊어내요.”

그녀는 싸우고 있었다. 나를 보호자로 등록하라는 시스템의 명령과, 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자신의 의지 사이에서. 그녀는 검을 쥔 손을 바르르 떨며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 고통으로 정신을 유지하려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흩어진 핏물과 소각재를 긁어모았다. 그림자의 경계선을 끊어보려 했지만, 손가락은 그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폭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는 이 연결을 끊을 수 없다. 시스템은 논리와 계약을 우선한다.

그때, 소각재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류의 뒷면 잔상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잔향청취가 그 작은 글자들을 소리로 바꾸어 내뱉었다.

[주의: 보호자의 권한은 상호 인지하에 확정됨. 피보호자가 보호자의 ‘고유한 명칭’을 거부하거나 특정 조건하에 부정할 경우, 등록은 일시 중단됨.]

보호자 철회 조건.

그것은 아주 단순하면서도 잔인한 역설이었다. 피보호자가 보호자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지 말 것. 즉, 내가 그녀를 ‘윤서하’라고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거나 이름을 부르는 행위 자체가 그녀를 내 보호자로 인정하는 서명이 된다는 뜻이었다.

[진행률: 19%……]

윤서하의 눈동자가 완전히 검게 물들려 하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내 심장을 관통하듯 뻗어 나왔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공포를 억누르고,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이 상황을 비틀어야 했다.

“이봐요, 수사협조관님.”

나는 ‘윤서하’라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당신, 지금 내 일기장 몰래 읽고 있는 거 압니까? 이거 엄연히 사생활 침해인데. 헌터 협회 윤리 규정에 안 걸려요? 아, 협회 공무원이라 괜찮나?”

진행률 숫자가 멈칫했다.

“나랑 계약하고 싶으면 정식으로 선이라도 보던가요. 이렇게 무드 없이 소각로에서 남의 과거사나 털고 있으면 정떨어지거든요. 그러니까, 그만 좀 보시죠. S급 헌터팀의 ‘이름 모를 관리관’님?”

[경고: 피보호자가 대상의 신원을 특정하기를 거부합니다.]

[보호자 등록 절차가 지연됩니다. 현재 진행률: 19% (Hold)]

윤서하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서렸던 검은 안개가 잠시 걷히며,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밀쳐냈다.

“도윤 씨…….”

“이름 부르지 마요. 나도 당신 이름 안 부를 거니까.”

나는 씨익 웃으며 피 섞인 침을 뱉었다. 하지만 안도감은 찰나였다. 시스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보초병이 들고 있던 우산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접혔다. 그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소각로 깊은 곳, 타지 않는 쓰레기들이 모여 있는 구덩이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대체 보호자 후보 1번의 자격이 일시 중지되었습니다.]

[시스템이 예비 항목을 검색합니다.]

[대체 보호자 후보 2번을 호출합니다.]

뜨거운 재바람이 소용돌이쳤다. 윤서하의 그림자와 연결되어 있던 내 그림자가 이번에는 소각로 구덩이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곳에서 타지 않은 채 떠오른 것은, 낡고 때 묻은 출입증 하나였다.

[이름: 문태식]

[직위: 서울지역본부 현장조사 2팀장]

“……팀장님?”

내 입에서 신음처럼 이름이 흘러나왔다. 죽은 줄 알았던, 아니, 이 지옥 같은 연극의 희생양이 되었던 문태식 팀장의 출입증이 핏빛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후보 2번의 ‘증언’이 시작됩니다.]

[기록의 다음 장을 넘깁니다.]

소각로 너머에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사람이 걷는 소리라기보다, 거대한 서류 뭉치가 바닥을 긁으며 다가오는 소리에 가까웠다.

159화. 문태식 팀장의 증언

소각로의 열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뜨거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이 타들어 가며 내뱉는 단명한 비명이었고, 누군가의 삶이 데이터로 치환될 때 발생하는 지독한 과부하의 열이었다.

그 아지랑이 너머로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헌터 협회 지급용 전술화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을 짓누르는 소리. 그리고 그 소음 사이로 핏빛 광채가 번뜩였다. 소각로의 불길 속에서도 타지 않고 버티던 물건 하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헌터협회 감식반 팀장 : 문태식]

익숙한 증명사진이 박힌 출입증이었다. 하지만 그 출입증은 누군가의 목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 자체가 심장이 된 것처럼, 주변의 타다 남은 서류 뭉치와 케케묵은 먼지들을 빨아들이며 기괴한 형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팀장님?”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내 입술이 그 고유한 명칭을 뱉는 순간, 귓가에 기분 나쁜 시스템 알람이 꽂혔다.

[피보호자가 대체 보호자 후보 2번의 ‘고유명칭’을 호출했습니다.]

[등록 진행률 : 24%…… 28%…… 상승 중.]

“아차.”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늦었다. 시스템은 굶주린 짐승처럼 내가 던진 이름을 집어삼켰다. 158화에서 윤서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써 간신히 멈춰 세웠던 그 기괴한 ‘보호’의 톱니바퀴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내가 알던 문태식 팀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생동감이 거세된, 오로지 ‘증언’만을 위해 급조된 기록체였다. 형체는 분명 문 팀장의 듬직한 체구였지만, 피부는 낡은 현장 조사 보고서처럼 누렇게 떠 있었고,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감식반 무전기에서나 들릴 법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강도윤. 너 여기서 뭐 하냐.”

목소리가 들렸다. 퉁명스럽고, 담배 찌든 냄새가 섞인, 언제나 마감 기한을 넘긴 나를 타박하던 그 익숙한 말투.

“팀장…… 아니, 감식반 꼰대 영감님. 거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급히 호칭을 바꿨다. ‘팀장님’이라는 명확한 명칭 대신 최대한 무례하고 모호한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 다행히 등록 진행률의 숫자가 31%에서 멈칫하며 홀딩되었다.

기록체 문태식이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몸에서 낡은 종이 냄새와 오래된 무전기 잡음이 흘러나왔다.

“말버릇 보게. 여긴 위험해. 현장 보존도 안 된 곳에서 F급이 알랑거리다간 기록 말살당하기 딱 좋다. 이리 와라. 내가 민원실까지만 데려다줄 테니까.”

그가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가락 끝에는 검은 인주가 묻어 있었다.

“오빠, 조심해.”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반가온이 낮게 읊조렸다. 가온이의 코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감정사로서 기록의 진위를 냄새로 판별하는 녀석의 감각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냄새가…… 이상해. 진짜 팀장님 냄새는 낡은 담배랑 구내식당 된장국 냄새가 섞여 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저 아저씨한테서는 병원 소독약이랑, 억지로 문지른 도장 인주 냄새밖에 안 나. 저건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잘 꾸며진 서류 뭉치야.”

가온이의 말에 기록체 문태식의 고개가 기괴하게 꺾였다. 노이즈 섞인 눈동자가 가온이를 향했다.

“어린놈이 코만 밝아가지고. 도윤아, 내 말 안 들려? 보호자가 가자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보호자 후보 2번이 피보호자의 ‘안전 구역(민원실)’ 이동을 권고합니다.]

[수락 시, 소장품 등록 절차가 가속화됩니다.]

민원실. 협회 지하의 그 따분한 공간이 여기서는 ‘보관 완료 대기실’이라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강도윤이라는 인간이 아니라 KDY-0이라는 품목으로 분류되어 서류철 속에 박제될 것이다.

그때였다. 내 옆에서 서늘한 기운을 내뿜던 윤서하가 움직였다.

그녀는 아직 시스템의 간섭 때문에 입을 열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률을 멈춰놨지만, 그녀 역시 시스템의 감시 아래 있었다. 윤서하는 말 대신 손에 든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칼끝이 가리킨 곳은 기록체 문태식의 가슴팍에 매달린 출입증이었다.

그녀는 검 끝으로 출입증의 특정 부위를 툭툭 쳤다. 나는 잔향청취를 극대화하며 그 시선이 머무는 곳을 쫓았다.

출입증 속의 사진.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사번.

‘……이상해.’

내 기억 속 문태식 팀장의 사번 끝자리는 7-0-5-2-1이었다. 하지만 저기 적힌 숫자는 7-0-5-2-7이었다. 게다가 사진 속 문 팀장의 가슴팍에 달린 감식반 배지의 위치가 반대였다.

사진이 좌우 반전되어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베낀 것처럼. 혹은, 누군가가 문태식이라는 서류를 급하게 위조하며 저지른 사소한 실수처럼.

“이봐요, 옛날 상사 양반.”

나는 짐짓 여유로운 척 뒷짐을 지며 물었다.

“팀장님은 야근하는 거 제일 싫어하셨잖아. 그래서 결재 서류 들어오면 확인도 안 하고 도장부터 찍으셨던 거 기억나? 근데 그 도장 찍는 습관이 좀 독특했지.”

기록체 문태식이 멈춰 섰다. 무전기 잡음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결재는 순서대로 하는 거지.”

“아니지. 팀장님은 결재란을 오른쪽 끝부터 찍었어. 그래야 나중에 반려할 때 위에서부터 한 줄로 긋기 편하다고 말이야.”

내 말에 기록체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잔향청취를 저 기괴한 문태식의 형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지지직, 지직―.

그의 몸 안에서 들려오는 무전기 잔향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야, 강도윤. 너 또 결재란 오른쪽부터 채웠냐? 내가 왼쪽부터 찍으라고 몇 번을 말해. 야근하기 싫으면 규정대로 해, 이 자식아!

진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진짜 문태식은 결재란을 결코 오른쪽부터 찍지 않았다. 그는 철저할 정도로 왼쪽부터 칸을 채우는 원칙주의자였다. 방금 내가 던진 말은 위조된 기록체가 내 기억의 파편을 적당히 짜맞추어 대답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덫이었다.

그리고 이 가짜 문태식은 내 거짓 유도 질문에 걸려들었다. 시스템은 내 기억 속의 ‘팀장님’ 이미지를 복제했지만, 실제 그의 행정적 습관까지는 완벽히 복원하지 못한 것이다.

“거짓말 좀 정성껏 하시지.”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뱉었다.

“팀장님은 결재란을 오른쪽부터 찍는 놈들을 제일 혐오했어. 야근의 근본 원인이 행정 미숙이라고 입에 달고 살던 양반이거든. 당신, 문태식 아니지?”

그 순간, 기록체 문태식의 얼굴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종이들이 펄럭이며 흩어지고, 그 사이로 검은 인주가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

“……기록 불일치. 오류 발생. 피보호자가 보호자의 증언을 거부합니다.”

기계적인 음성이 소각로 내부를 울렸다. 기록체는 나를 덮치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윤서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차가운 냉기가 기록체의 팔을 얼려버렸고, 가온이가 던진 감정용 소금 주머니가 녀석의 몸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짜 주제에 팀장님 흉내를 내?”

나는 발길질로 녀석의 가슴팍에 박힌 위조 출입증을 걷어찼다.

빠각, 하고 플라스틱 케이스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핏빛 광채가 사그라졌다. 형체를 유지하던 서류 더미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위조된 보호자 권한이 파기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 무너진 서류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물건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것은 시스템이 만든 가짜 서류가 아니었다. 낡고 헤진, 진짜 종이의 질감을 가진 메모지 한 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메모를 집어 들었다. 잔향청취를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아주 익숙하고 투박한 필체. 문태식 팀장이 생전에 현장에서 휘갈겨 쓰던 바로 그 글씨였다.

[강도윤, 내가 네 보호자 서류에 사인한 적 없다. 내 이름을 사칭하는 놈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찢어버려. 그리고 네 이름을 그 개 같은 보호자 칸에서 지워라.]

메모 뒷면에는 피 묻은 지문과 함께 짧은 추신이 적혀 있었다.

[놈들이 숨겨놓은 다음 장을 봤다. 순번이 잘못됐어.]

내 손끝이 떨렸다. 메모의 가장 아랫부분, 시스템이 강제로 기입하려 했던 ‘보호자 후보 리스트’가 보였다.

보통이라면 1번 윤서하, 2번 문태식, 3번 강도원 순으로 이어져야 할 리스트였다. 하지만 문 팀장이 남긴 진짜 메모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호자 후보 0번 : 강도윤]

“……이게 뭐야?”

내가 나를 보호한다고? 아니, 시스템의 논리대로라면 이건 보호자가 아니라…… ‘소장품 0번’이 자기 자신을 증언해야 한다는 뜻인가?

모순이었다. 피보호자가 동시에 보호자가 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나 자신의 보호자로 등록된다면, 나는 나를 소유하는 동시에 나에게 소유당하는 영원한 기록의 루프 속에 갇히게 된다는 소리였다.

그때, 소각로 깊은 곳에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대체 보호자 후보 2번의 증언이 기각되었습니다.]

[최우선 순위, 후보 0번의 자격 검증을 시작합니다.]

[피보호자 강도윤은, 스스로가 ‘강도윤’임을 증명하십시오.]

발밑의 그림자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이제는 타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이제 나 자신의 이름마저 부정해야 하는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세상에, 퇴근은커녕 자아비판부터 하게 생겼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 팀장의 메모를 움켜쥐었다. 시스템의 시선이, 이제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을 조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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