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155화. 그림 뒤의 방 번호와 인간으로 퇴실하는 법
제목: 154-155화. 그림 뒤의 방 번호와 인간으로 퇴실하는 법
제목: 154화. 그림 뒤의 방 번호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는 비명보다 날카로웠다. 산산조각이 난 강화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며 기록 보관소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내가 찢어버린 '손님' 스티커의 잔해와 함께, 시스템의 통제 아래 놓여 있던 공간의 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가요. 여기 있으면 박제당하기 딱 좋으니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혀끝에서 쇳물 맛이 났다. 가슴팍의 스티커를 강제로 뜯어낸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심장이 뛸 때마다 가슴 안쪽에서 누군가 도장을 찍어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쿵, 쿵, 하는 박동음이 아니라 '체크인, 체크인' 하는 기계음이 고막 안쪽을 긁어댔다.
상태창이 눈앞에서 점멸했다.
[경고: '손님' 권한이 훼손되었습니다.]
[사용자의 '소장품' 등급이 상승합니다. 현재 소장 등급: 희귀(Rare) → 유물(Relic) 진행 중.]
[영구 보존 절차 가속화: 74%...]
내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손톱부터 시작해 손등까지, 피부가 투명한 에폭시 수지를 부어 놓은 것처럼 매끈하고 딱딱하게 변하고 있었다. 감각이 죽어갔다. 내 몸이 나라는 생명체가 아니라 전시실의 낡은 도자기처럼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걱정보다 더 깊은 경계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목에 새겨진 검은 우산 문양, 그 균열이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벌어지며 검은 연기 같은 것을 내뿜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그녀에겐 영혼을 갉아먹는 칼질이나 다름없을 텐데도, 그녀는 굳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무료 관람권 대신 몸으로 때우는 중이니까. 그보다 가온 씨, 냄새는?"
유리장 뒤, 그림이 걸려 있던 벽면이 기계적인 마찰음을 내며 양옆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그 너머로 드러난 것은 어둠이 아니라, 불쾌할 정도로 하얀 빛이 쏟아지는 좁은 통로였다.
반가온이 코를 찡그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이상해요. 아까까진 노란 크레파스랑 피 냄새뿐이었는데... 지금은, 으윽."
"무슨 냄새인데 그래요?"
"갓 태운 비닐... 그리고 아주 독한 소독약 냄새요. 병원 냄새 같기도 한데, 그 아래에 깔린 게 너무 비릿해요. 오래된 우유가 썩은 것 같은..."
반가온의 설명에 내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태운 비닐과 소독약, 그리고 우유. 그 조합은 내 기억의 아주 먼 구석, 곰팡이 핀 서랍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던 감각을 자극했다. 어릴 적, 형의 손을 잡기 전의 내가 머물렀던 장소. 기억나지 않지만 몸이 기억하는 장소였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통로로 발을 들였다.
통로는 기묘했다. 바닥은 헌터협회 본부의 차가운 대리석인데, 벽면은 폭신한 소재의 벽지가 발린 어린이집 낮잠방 같았다. 그런데 천장에는 수술실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무영등이 달려 있었고, 벽면 곳곳에는 은행 금고에서나 볼 법한 육중한 다이얼식 잠금장치들이 돌출되어 있었다.
보육실과 병원, 그리고 창고를 한데 뒤섞어 놓은 공간.
"서하 씨, 저기."
내가 가리킨 곳은 통로 중간, 덩그러니 놓인 구식 우산꽂이였다. 검은 우산 세 자루가 나란히 꽂혀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우산이었고, 오히려 이 기괴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물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 가슴속에서 형의 필체가 경고하고 있었다.
'진짜 출구는 우산꽂이가 아니라 그림 뒤야.'
무심코 우산꽂이에 손을 뻗으려던 반가온의 소매를 내가 낚아챘다. 그 순간, 내 시야에 붉은색 시스템 메시지가 강제로 삽입되었다.
[알림: '보관자' 위임 절차가 감지되었습니다.]
[우산을 집어 드는 즉시, 당신은 이 구역의 영구 보관자로 등록됩니다.]
[퇴실 권한이 영구 소멸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건드리지 마요. 저거 잡는 순간 평생 여기서 우산이나 지키는 귀신 되는 거니까."
내 말에 가온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우산꽂이는 덫이었다.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이용해 또 다른 감옥의 간수로 주저앉히려는 시스템의 장치.
우리는 우산꽂이를 지나쳐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통로의 끝에는 육중한 철문이 하나 있었다. 문 위에는 낡은 아크릴 판이 붙어 있었고, 거기엔 검은 매직으로 갈겨쓴 글씨가 보였다.
[KDY-0]
형이 남긴 단서 속의 그 번호였다.
"사람 이름이 아니라, 방 번호라고 했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다. 소장품화가 진행 중인 손가락에는 문고리의 차가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느낌뿐이었다. 문은 의외로 힘없이 열렸다.
치익, 하고 가압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은 작은 방이었다. 사방이 투명한 강화유리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중앙에는 아주 작은 보육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링거 거치대가 서 있었는데, 거기 걸린 봉투 안에는 투명한 액체 대신 검은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뭐야?"
가온이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방 안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잔향청취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한 공간이 아니었다. 관찰하고, 기록하고, 보존하기 위한 실험실이었다.
그때, 방 구석에 놓인 낡은 스피커에서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려왔다.
...들리나?
낮고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손톱만큼도 섞여 있지 않은, 서늘한 이성만이 담겨 있었다. 조금 전 잔향 속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 강도지였다.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은 죽고 썩지만, 기록된 존재는 영원히 마모되지 않지. 나는 아이들을 살리려 했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가장 안전한 형태인 '정보'로 변환하여 이곳에 안치하려 했지.
목소리는 담담하게 자신의 광기를 설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록에는 '기준점'이 필요하다. 0번. 모든 데이터의 근간이 될 첫 번째 소장품.
내 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 소리가 이제는 기계음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체크인. 체크인. 체크인.
윤서하가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그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내게 전달되었다. 그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은 내게 묻고 있었다. 이 목소리가 하는 말이 당신과 무슨 상관이냐고.
"나도 몰라요. 모르고 싶은데..."
나는 홀린 듯 중앙의 보육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 머리맡에는 헌터협회 초창기 로고가 박힌 플라스틱 이름표가 꽂혀 있었다.
손끝의 감각은 없었지만, 시각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그 이름표에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식별 번호: KDY-0]
[대상: 강도윤]
그 아래에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덧쓰인, 소름 끼치는 문구가 내 망막을 찔렀다.
[상태: 강도원(보호자)의 보호 실패 후 재등록 대상.]
[특이사항: 본체 유지 불필요. 잔향 기록체로의 완전 전환 권고.]
"아..."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강도원의 친동생으로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아주 오래전, 이 시스템의 '0번 소장품'으로 내정되어 있었던 존재였다. 형은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데리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린 나를 훔쳐냈던 것일까?
그때, 보육 침대 밑에서 검은 액체가 울컥하며 쏟아져 나왔다. 바닥을 적시는 그 액체는 순식간에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알림: '0번 소장품'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시스템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강도윤 씨! 위험해요!"
윤서하가 비명을 지르며 나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녀의 목에서 검은 균열이 터져 나오며 피가 섞인 연기가 뿜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내게 닿기 전, 침대 안쪽에서 아주 작은, 하지만 명확한 잔향이 내 귓가를 때렸다.
그것은 강도지의 녹음도, 시스템의 메시지도 아니었다.
아주 어린 아이의, 공포에 질린 숨소리였다.
형, 나 여기 있기 싫어. 냄새나.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젊은 시절 형의 목소리.
걱정 마, 도구리. 넌 사람이 될 거야. 내가 널 꼭 사람으로 만들 거야.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가슴속의 '체크인' 소리가 멈췄다. 대신, 찢어진 스티커 자국 아래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히든 조건 충족: '인간'으로의 퇴실을 희망합니까?]
나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인지 진득한 액체인지 모를 것이 뺨을 타고 흘렀다.
"사람이 되는 게... 조건이라니. 장난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 중 가장 날카로운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장품화되어 딱딱해진 내 왼쪽 손목을 그대로 그어버렸다.
피가 나와야 했다. 기록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나, 퇴근할 거야."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KDY-0의 방 전체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대 밑에서 솟구치던 검은 액체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발목을 꽉 움켜잡았다.
그것은 아이의 손이 아니었다.
수많은 검은 우산의 살대가 얽혀 만들어진, 거대한 괴물의 손이었다.
제목: 155화. 인간으로 퇴실하는 법
“아, 진짜 더럽게 아프네.”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신음이 아니라 투덜거림이었다. 왼쪽 손목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쏟아졌다. 유리 파편으로 자기 살을 긋는 건 영화에서나 멋있지, 실전에서는 미친 짓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하지만 이 미친 짓이 아니면 답이 없었다.
내 심장 박동에 맞춰 시스템의 ‘체크인’ 비프음이 고막을 찔러댔다.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감각. 내 피부가 살점이 아니라 전시용 도자기나 박제 인형의 표면으로 변해가는 공포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때였다. 침대 밑, 검은 액체 속에서 솟아오른 그것들이 내 발목을 낚아챘다.
드드득,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렸다. 수십 개의 검은 우산 살대가 기괴하게 얽히고설켜 거대한 손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몬스터라기보다는, 서류 뭉치를 정리하는 집게나 박제용 고정 핀에 가까운 서늘한 감각이었다.
“강도윤 씨!”
반가온의 비명이 들렸다. 녀석이 달려오려 했지만, 바닥에서 솟아오른 우산 살대들이 장벽처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놈은 나를 ‘KDY-0’라고 적힌 그 낡은 보육 침대 안으로 끌고 가려 하고 있었다.
[보관 절차를 시작합니다.]
[대상: KDY-0(강도윤)]
[상태: 파손 위험 감지. 즉시 안치 권고.]
시스템 메시지가 망막을 도배했다. 내 몸을 ‘파손된 소장품’으로 인식한 모양이었다. 우산 살대 손가락이 내 종아리를 파고들었다. 살이 씹히는 고통과 함께 몸이 침대 쪽으로 질질 끌려갔다.
“이거 놔, 이 고철 덩어리들아. 난 오늘 연차도 안 썼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힘의 격차가 너무 컸다. F급 헌터의 근력으로는 시스템의 ‘정리’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흘린 피가 바닥에 닿았다.
치이익.
기묘한 소리가 났다. 검은 액체로 가득 찼던 바닥에 붉은 피가 떨어지자, 마치 기름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피가 겉돌기 시작했다. 붉은 선이 검은 수면 위를 가로지르며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렸다.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잔향청취’의 감각이 손목의 통증을 타고 예민하게 살아났다. 내 피가 닿는 곳마다 바닥에 새겨진 전시물 번호와 관리 코드들이 지직거리며 깨져 나갔다.
[오류: 기록되지 않은 유기 물질 유입.]
[데이터 오염 발생. 해당 구역의 전시물 번호를 식별할 수 없습니다.]
“도윤 형, 저거!”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소리쳤다. 녀석은 겁에 질린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냄새를 맡고 있었다.
“피 냄새가 아니에요! 피 냄새 밑에… 엄청나게 오래된 종이 냄새랑, 우유, 그리고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어요! 그리고 이건…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
“플라스틱?”
“네! 병원 가면 채워주는 노란 팔찌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불로 지져서 억지로 끊어낼 때 나는 지독한 냄새가 형 피에서 나요!”
가온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말은 단서가 되어 내 머릿속을 스쳤다.
강도원. 우리 형.
형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 말은 즉, 내가 원래는 사람이 아니었거나, 혹은 사람이 아닌 무언가로 기록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형은 내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식별 팔찌’를 태워버렸던 걸까?
시스템이 나를 기록체로 분류하려 할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가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으윽!”
우산 살대 괴물이 내 허리를 감아 올렸다. 침대 안쪽의 검은 구멍이 아가리를 벌리듯 열렸다. 저 안에 들어가면 끝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기록물이 되어 선반 위에 놓이게 될 터였다.
그때, 은색 섬광이 내 시야를 가로질렀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나를 붙잡고 있던 우산 살대 몇 개가 힘없이 잘려 나갔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창백한 안색으로 내 앞을 막아섰다. 검을 쥐고 있지 않은 그녀의 왼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을 하면 안 된다. 서하 씨가 여기서 입을 열 때마다 시스템은 그녀를 ‘증언자’로 확정 지으며 옭아맬 것이다.
서하 씨는 내게 짧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더니 내 손목에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공중에 떠 있는 시스템 창에 거칠게 뿌렸다.
치지직!
붉은 피가 닿은 시스템 창이 비명을 지르듯 점멸했다. 서하 씨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피가 섞여 걸걸해진 목소리로, 시스템의 금기를 정면으로 돌파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주변 공간이 압축되는 것처럼 뒤틀렸다. 시스템의 간섭이 그녀의 목구멍을 조이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도구가 아니야.”
[경고: ‘증언자’의 권한 남용. 로그 기록 중단.]
[시스템의 객관성을 훼손하는 발언이 감지되었습니다.]
서하 씨의 코에서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한 문장을 내뱉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깎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주문처럼 작용했다.
[히든 조건 충족: 존재의 정의를 거부함.]
[‘인간’으로의 퇴실 절차를 진행합니다.]
[단, 퇴실을 위해서는 보호자의 최종 서명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 대신,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기괴한 중저음. 강도지의 목소리가 섞인 안내였다.
내 앞에 반투명한 서류 한 장이 떠올랐다. <퇴실 확인서>. 보호자 서명란은 공백이었다.
보호자?
웃기는 소리였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에 돌아가셨고, 유일한 혈육인 강도원은 지금 이 미친 공간 어딘가에 처박혀 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서명을 해줄 보호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보호자가 없으면 퇴근도 못 하는 거야? 무슨 유치원도 아니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우산 살대 괴물들이 서하 씨의 기세에 눌려 잠시 주춤거리고 있었다. 나는 내 손목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는 피를 내려다보았다.
반가온이 말했던 태운 플라스틱 냄새. 강도원이 내 기록을 지우며 남겼던 그 흔적.
형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형이 내 곁에 없더라도, 내가 내 발로 걸어 나갈 수 없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서명… 내가 한다.”
[거부: 본인 서명은 보호자 서명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누구 맘대로? 내가 내 보호자라는데 왜.”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오른손으로 왼손목의 피를 듬뿍 묻혔다. 그리고 시스템 창의 서명란에 내 이름을 써 내려갔다.
강. 도. 윤.
정갈하게 쓰이지도 않았다. 삐뚤빼뚤하고 뭉개진 붉은 글씨. 하지만 그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내 가슴 안쪽에 숨겨져 있던 ‘손님’ 스티커의 잔향이 뜨겁게 타올랐다.
강도원이 내게 남겼던 권한.
헌터협회 창고에서 뜯어냈던 그 스티커는 단순히 출입증이 아니었다. 형은 알고 있었던 거다. 언젠가 내가 이 방에 올 것을.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할 순간이 올 것을.
[예외 규칙 확인.]
[‘손님’ 권한 소지자가 자신을 보호 대상자로 재지정했습니다.]
[기존 관리자 ‘강도지’의 설정과 충돌합니다…….]
[충돌 해결 중…….]
방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하게 흔들렸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링거 병들이 떨어져 박살 났다. 검은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바닥으로 꺼져 내려갔다.
“도윤 형! 저기요!”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침대 뒷벽이었다.
매끄러운 유리벽이었던 그곳에 균열이 가더니, 서서히 옆으로 밀려나며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낡은 황동 표지판이 하나 붙어 있었다.
<퇴실 심사실>
(구: 보호자 면담실)
그 안쪽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기괴한 보관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누런 전구 하나가 깜빡이는, 80년대 병원 대기실 같은 공간.
그리고 그 대기실 의자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구부정한 어깨, 무릎 위에 올린 투박한 손, 그리고 특유의 나른한 실루엣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형……?”
내 목소리가 떨렸다.
반가온과 윤서하도 멈춰 섰다. 그 실루엣이 내뿜는 압도적인 잔향 때문이었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무겁고, 기록체라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깜빡이는 전구 빛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잖아, 도구리.”
내 별명을 부르는 그 목소리.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말은, 내가 알던 다정한 형의 것이 아니었다.
“서명은 잘 봤다. 근데 너, 아직 사람 냄새가 덜 나는데?”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대기실의 바닥이 검은 우산 살대로 변하며 요동쳤다.
“인간으로 퇴실하고 싶으면, 심사를 받아야지. 안 그래?”
그는 강도원일까, 아니면 시스템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가짜일까. 내 손목의 상처가 다시 한번 거세게 요동쳤다.
진짜 퇴근은 아직 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