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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29화. 야근만 허용된 문과 미퇴근 감사 대상 일러스트

128-129화. 야근만 허용된 문과 미퇴근 감사 대상

제목: 128-129화. 야근만 허용된 문과 미퇴근 감사 대상

제목: 128화. 야근만 허용된 문

검은 퇴근 카드가 출퇴근 기록기 입구에서 툭, 떨어졌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온 카드의 질감은 서늘했다. 아니, 차갑다기보단 물리적인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공허했다. 그 위로 붉은색 잉크가 번지듯 글자가 떠올랐다.

[경고: 퇴근 경로가 영구 폐쇄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야근'만 허용됩니다.]

“...야근?”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헌터 생활을 하면서 온갖 기괴한 게이트와 괴물을 마주했지만, 시스템이 대놓고 노동법을 위반하며 연장 근로를 강요하는 상황은 또 처음이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치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점장실 천장의 형광등이 일제히 점멸했다. 평소보다 세 배는 더 밝고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이 시릴 정도의 백색광이 시야를 갉아먹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의 분침이 미친 듯이 회전하더니, 11시 59분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숫자를 돌파해버렸다.

24:00.

25:00.

26:00.

숫자는 멈출 기미 없이 올라갔다.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이 현실의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우리가 들어왔던 문을 보았다. 문손잡이는 이미 벽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진 뒤였다. 대신 그 자리에 빽빽하게 들어찬 서류 보관소의 철제 캐비닛들이 솟아올랐다.

퇴근할 방법이 사라진 게 아니라, 퇴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 공간에서 삭제되었다.

“강... 강...”

윤서하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이름을 부르려던 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꺽꺽대며 막혔다. 마치 투명한 손이 그녀의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처럼,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보호자 0번 권한으로 스스로 채운 자물쇠. 그 대가는 즉각적이고 잔인했다.

“서하 씨, 괜찮아요. 굳이 안 불러도 나 여기 있는 거 다 알잖아요.”

나는 애써 어깨를 으쓱하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지만, 지금 여기서 내가 인상을 쓰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질 게 뻔했다. 공포를 견디는 데에는 실없는 소리만큼 좋은 방패가 없다.

윤서하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당신.”

“네, 그 ‘당신’ 여기 있습니다.”

“그쪽, 진짜... 바보 아니에요?”

이름 대신 돌아온 호칭은 낯설고도 아팠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고 해서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게서 지워진 건 아니었다. 인식의 권한은 박탈되었을지언정, 쌓아온 시간까지 부정당한 건 아니니까.

물론, 시스템은 내 긍정적인 회로를 비웃듯 다음 단계를 뱉어냈다.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출퇴근 기록기에서 기다란 종이 한 장이 뽑혀 나왔다.

[야근 사유서 발급 중...]

[사유 항목:]

자발적 잔류

대체 승인 거부

호명 권한 잠금

보호자 0번 권한 남용

“이건 또 뭐야. 무슨 사유서가 이렇게 공격적이야?”

내가 사유서를 집어 들자, 옆에서 로그를 분석하던 이현우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단순히 가둔 게 아닙니다. 도... 아니, ‘그분’의 말씀대로 이건 야근 모드예요. 정확히는 ‘퇴근 경로 폐쇄 후 내부 감사 절차’에 돌입한 겁니다.”

“내부 감사?”

“네. 시스템은 지금 이 공간에 있는 인원들이 왜 퇴근하지 못했는지, 어떤 결격 사유가 있는지 전수 조사를 시작하겠다는 뜻입니다. 감사가 시작되면 각자의 이름표가 숨기고 싶어 하는 기록들이 강제로 공개될 겁니다. 결재 반려된 기억, 미수된 기록, 대체된 인격 같은 것들 말이죠.”

이현우의 말에 반가온이 들고 있던 감정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나침반의 바늘은 윤서하가 아니라, 내 발치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향해 격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상해요.”

반가온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건 서하 언니의 죄책감이 아니에요. 아저씨... 아니, ‘그쪽’ 뒤에 있는 그림자. 원본 KDY의 잔향 쪽인데... 감정이 미안함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안도감이에요. 마치... 누군가 이 야근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처럼.”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원본 KDY, 혹은 최초의 점장이 이 폐쇄된 상황을 원했다고?

부서진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벽에 기대어 있던 이진하가 손을 뻗어 바닥의 검은 퇴근 카드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은 카드를 허무하게 통과해버렸다.

“이건 카드가 아니야.”

이진하가 쿨럭거리며 뱉어냈다.

“이건 ‘야근 배정표’다. 예전에 보관자가 했던 말이 기억나. 퇴근하지 못한 자들은 기록의 거름이 되어 영원히 사무실을 떠돌게 된다고. 이건 우리를 내보내지 않겠다는 선언이야.”

그때, 점장실 한가운데 놓인 빈 회의실 의자가 스르르 돌아갔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지만, 그 위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보관자의 목소리가 아닌, 사물들이 부딪히는 듯한 기괴한 변조음이 점장실 전체를 울렸다.

[야근자는... 퇴근자를 심사할 수 없다.]

[기록되지 않은 자는... 발언권이 없다.]

보관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오직 명패와 서류철의 떨림만으로 압박감을 선사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야근이라는 굴레에 갇혀 서로를 의심하게 되는 이 과정을.

윤서하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려 시도했다.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오지 못한 음절들이 공중에서 파편처럼 부서졌다. 그녀의 고통을 더는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결심한 듯 시스템 화면 앞으로 다가갔다.

“좋아. 이름이 문제라면 내가 새로 지어주지.”

“...네?”

이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 시스템은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잠근 거잖아? 그럼 시스템이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임시 콜사인을 등록하면 되지. 어차피 야근인데, 직책 하나 더 만든다고 문제 되겠어?”

나는 출퇴근 기록기 옆의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윤서하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서하 씨, 이제부터 나를 그렇게 불러요. 그게 편할 테니까.”

나는 거침없이 야근 사유서 비고란에 글자를 적어 넣었다.

[임시 별칭 등록: 무급 생존자]

순간, 시스템이 삐 소리를 내며 멈칫했다.

[신규 데이터 입력 중...]

[‘무급 생존자’ 항목이 야근 명부에 등록되었습니다.]

[식별 권한이 임시 복구됩니다. 단, 해당 명칭은 ‘내부 감사’ 대상에 한정됩니다.]

“무급... 생존자요?”

윤서하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슬픔이 서려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잠깐이나마 황당함이 감돌았다. 성공이다.

“왜요? 지금 상황에 딱 맞잖아. 돈도 안 주는데 살아서 나가야 하니까. 자, 이제 불러봐요. 무급 씨라고 하든가, 생존자 님이라고 하든가.”

“...진짜 못 말려, 생존자 씨.”

그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록 내 진짜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 순간 꽉 막혀 있던 공기가 조금은 순환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시스템에 임시 별칭이 등록되자마자, 점장실 안쪽 B-04 구역의 벽면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창고 문이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새로운 공간을 드러냈다.

그것은 출구가 아니었다. 더 깊은 심연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저건... 숨겨진 통로인가요?”

이현우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새로 열린 문 위에는 낡은 황동 문패가 하나 붙어 있었다. 형광등 빛을 받아 번들거리는 그 문패에는 윤서하의 이름도, 내 이름도 아닌 예상치 못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원본 KDY - 미퇴근 감사 대상]

[최초 점장 대리 감사관 상주 중]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반가온의 나침반이 비명을 지르듯 회전하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차가운 바람과 함께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야근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수십 년간 끝내지 못한 ‘마지막 업무’에 강제로 투입된 것이었다.

나는 무급 생존자라는 우스꽝스러운 직함을 달고, 이제 막 열린 내부 감사실의 문을 응시했다.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퇴근하지 못한 자들의 주인일지도 몰랐다.

제목: 129화. 미퇴근 감사 대상

또각, 또각.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꽉 막힌 점장실 안쪽, 숨겨진 통로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치고는 지나치게 평범하고 사무적이라 오히려 등골이 서늘했다.

내 가슴팍에는 방금 전 출퇴근 기록기가 뱉어낸 '무급 생존자'라는 해괴망측한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이름 석 자를 빼앗기고 얻은 별칭치고는 지나치게 솔직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무급'과 '생존'만큼 처절한 단어 조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생존자 씨."

옆에서 윤서하가 나를 불렀다. 호명 권한이 잠긴 탓에 내 진짜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라면 "그 별명 진짜 구리네요"라고 한마디 해줬을 텐데, 지금은 그녀의 눈에 서린 걱정이 너무 무거워 농담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예, 부르셨습니까. 무급이라 연장 수당은 안 나옵니다만."

나는 짐짓 어깨를 으쓱하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B-04 구역의 벽면이 갈라지며 드러난 통로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식도처럼 보였다.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발목을 휘감았다.

내부 감사실.

그곳은 현대적인 사무실과 중세의 심문실을 기괴하게 섞어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과하게 밝은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신경을 긁었고, 벽면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하게 출퇴근 카드와 결재 서류철, 그리고 주인을 잃은 명패들로 가득 차 있었다.

특이한 점은 B-04의 벽면에서 뻗어 나온 푸른빛 회로들이 혈관처럼 벽을 타고 흐르며, 그 위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시스템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강제로 뒤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지나치게 긴 회의용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데, 갑자기 테이블 상석의 육중한 가죽 의자가 스르륵 뒤로 밀려났다. 누군가 앉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의자 위에는 오직 정적만이 감돌았다.

탁.

공중에서 나타난 것처럼, 책상 위에 묵직한 명패 하나가 놓였다.

[최초 점장 대리 감사관]

글자는 선명했지만, 그 뒤에 앉아 있어야 할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비어 있는 의자와 그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검은 우산만이 그 자리에 누군가 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철커덩!

뒤따라온 출퇴근 기록기가 감사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동했다. 기록기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붉은 글자를 띄웠다.

[감사 대상: 원본 KDY]

[대리 응답자: 무급 생존자]

[참고인: 윤서하]

"참고인……?"

내 눈이 가늘어졌다. 윤서하가 참고인으로 묶였다는 건, 이 미친 내부 감사 결과에 따라 그녀 역시 책임을 물 수 있다는 뜻이다. '보호자 0번'이라는 권한이 그녀를 방패로 만들어준 줄 알았는데, 시스템은 오히려 그 권한을 빌미로 그녀를 이 지옥 같은 감사실에 함께 가둔 셈이다.

"같이 가요, 생존자 씨."

윤서하가 내 소매를 붙잡았다. 내가 제지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발을 내디뎠다.

"위험해. 이건 내 이름값에 대한 문제야. 윤서하 씨가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이유는 아까 제가 직접 만들었잖아요. 당신 보호자라고."

그녀는 단호했다. '생존자 씨'라고 부르는 목소리에는 어색함보다 강한 유대감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내가 혼자 저 비어 있는 의자 앞에 서는 꼴을 절대 보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동료로서, 혹은 그 이상의 무언가로서 그녀는 자기 선택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로그를 분석하던 이현우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강도윤 씨, 아니 생존자 씨. 여기 적힌 '미퇴근 감사 대상'이라는 용어에 주목하십시오. 이건 시스템상에서 죄인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야근 수당 떼먹으려는 경리팀의 수작인가?"

"아니요. '퇴근 판정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즉, 원본 KDY라는 존재는 이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배신한 게 아니라,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미결' 상태로 남겨뒀다는 의미죠. 원본은 이 감사가 언젠가 열릴 것을 알고 설계를 남겼습니다. 위험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원본 KDY. 내가 마주해야 할 내 과거이자, 혹은 타인일지도 모르는 그 이름.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난장판을 수습하지 않고 떠난 걸까.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든 채 조심스럽게 안쪽을 살폈다.

"도윤 아저씨…… 아니, 생존자 아저씨. 이상해요. 이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이요."

"무서워 죽겠지? 나도 그래."

"아니요. 미안함이나 공포가 아니에요. 저 감사관의 빈 의자에서 느껴지는 건…… '안도감'이에요. 누군가 아저씨가 여기까지 오기를, 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한 그런 기분이요."

누군가 나를 기다렸다? 이 살벌한 감사실에서?

불안감은 이진하에게서도 나타났다. 그는 벽면을 가득 채운 서류철 중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가자 서류철 사이에서 빛바랜 종이 조각들이 흐느끼듯 새어 나왔다.

"이 기록들……."

이진하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그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미수 기록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랐다. 기록의 끝부분에 낯익은 필체가 덧씌워져 있었다.

'윤희가 아니었어.'

그가 낮게 읊조렸다. 이진하의 기억 속에서 마지막 순간 그에게 무언가를 맡기고 떠난 건 윤희라고 생각했는데, 감사실의 기록은 다른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원본 KDY가, 이진하의 실패한 기록을 말소하는 대신 어떤 '임무'를 그에게 맡겼다는 흔적이 보였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갑자기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관자의 목소리였다. 여전히 형체는 없었지만, 빈 의자 옆에 걸린 검은 우산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 내부 감사실에서 거짓말은 기록을 더럽히지만, 침묵은 존재 자체를 삭제하는 죄로 다스려진다. 조사가 시작되면, 그대 안의 모든 잔향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감사실의 문턱을 넘었다.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딱딱한 대리석에서 끈적한 유기체처럼 변하는 착각이 들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유일한 무기이자 저주인 '잔향청취'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평소 같으면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이 "나 오늘 점심 뭐 먹었게?"라며 실없는 소리를 던지거나, 낡은 볼펜이 "잉크가 부족해, 켁켁" 거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부 감사실 전체가, 그 수만 장의 서류와 회로들이 한목소리로 내 머릿속에 고함을 질렀다. 아니, 그건 통곡에 가까운 거대한 울림이었다.

[감사 대상은 원본이 아니다.]

[원본을 대신하여 살아남은, 이름 없는 모든 '생존자'들이 진정한 감사 대상이다.]

뇌가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테이블 위의 서류철 하나가 거칠게 펼쳐졌다. 강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종이들이 파닥거렸다.

그것은 원본 KDY의 첫 번째 감사 파일이었다.

서류의 첫 장, 굵은 적색 글씨로 쓰인 제목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보고서 번호: 001]

[제목: 보호자 0번 최초 오염 보고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윤서하의 이름이 '오염'이라는 단어와 결합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를 진정으로 얼어붙게 만든 건 그 밑에 적힌 승인권자의 이름이었다.

윤희도, 원본 KDY도, 보관자도 아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믿었던, 그러나 지금은 죽어 사라진 내 형의 이름.

[신청자 및 최초 오염 승인자: 강도원]

내 눈앞의 세계가 미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형,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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