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131화. 형의 이름과 삭제된 보호자
제목: 130-131화. 형의 이름과 삭제된 보호자
제목: 130화. 형의 이름이 승인자였다
서류 한 장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A4 용지 한 장 정도의 질량일 텐데, 그 위에 적힌 세 글자가 내 발등을 찍고 바닥으로 가라앉히는 기분이었다.
[신청자 및 최초 오염 승인자: 강도원]
눈이 시렸다. 끄지 못하는 편의점 간판 아래에서 밤을 새운 것처럼 눈앞이 번쩍거렸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입술을 달싹였다.
“형,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아는 형님 인맥으로 낙하산 취업이라도 한 거야? 여기가 월급은 잘 준다는데, 복리후생으로 자아 삭제 같은 걸 끼워 팔아서 문제지.”
목소리가 떨렸다. 농담이라도 던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서류철을 찢어발기거나, 혹은 내가 먼저 찢어질 것 같았다. 농담은 내 유일한 방탄조끼였다. 비록 구멍이 숭숭 뚫려 제 기능을 못 하는 고철덩어리일지라도.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꽂히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내 이름을 부르는 대신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가짜 직함이자 운명인 그 이름을 불렀다.
“숨 쉬세요, 생존자 씨.”
서늘하고 단호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강도원’이라는 이름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굳이 캐묻지 않는 배려가 오히려 바늘처럼 따끔거렸다.
“심박수가 너무 높습니다. 그러다가는 감사관이 아니라 의료진이 먼저 오겠어요.”
“아, 들켰나? 이게 다 사내 복지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탕비실에 청심환 하나 없는 회사가 어디 있어.”
내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내부 감사실의 형광등이 내 맥박에 맞춰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지직, 거리는 소음이 고막을 긁었다.
벽면에 붙은 명패들이 일제히 내용을 갱신했다.
[경고: 대리 응답자 동요 감지]
[항목: 혈연 반응 확인]
[상태: 참고인 감정 간섭 심화]
차가운 기계적 문구들이 공중에 흩날렸다. 비어 있는 감사관의 의자 뒤에서 보관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검은 우산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승인자는 기록의 시작점입니다. 그가 찍은 인장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오염의 시발점이 되었지.”
“오염이라니, 우리 형이 무슨 가습기 살균제라도 뿌렸다는 거야? 행정 용어치고는 너무 자극적인데.”
나는 책상을 짚으며 버텼다. 보관자는 대답 대신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이현우가 옆에서 빠르게 태블릿을 두드리며 로그를 분석했다.
“생존자 형, 이건 단순한 징계 보고서가 아니에요. 기록상으로는 ‘오염’이라고 되어 있지만, 논리 구조를 보면 ‘이머전시 오버라이드(Emergency Override)’에 가깝습니다. 강도원 씨는 권한 밖의 일을 강제로 실행했어요.”
“강제로?”
“보호자 0번이라는 권한을 억지로 개방한 겁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요. 하지만 그 대가로 시스템의 규칙이 깨졌고, 그 자리에 있던 윤서하 수사관님의 이름과 권한이 오염... 그러니까, 시스템 오류 데이터로 묶여버린 것 같습니다.”
이현우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내용은 전혀 침착하지 않았다. 형이 윤서하의 인생에 관여했다고? 그것도 이런 기괴한 방식으로?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꽉 쥔 채 중얼거렸다.
“공포는 아니에요. 형님 이름에서 나오는 건... 엄청난 후회랑, 시간이 없다는 급박함뿐이에요. 누군가를 해치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 급하게 누군가를 구하려고 뛰어든 사람의 감정이에요.”
그때였다. 벽에 걸린 파일 사이에서 이진하가 멍한 눈으로 한곳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회로가 명멸하더니, 과거의 잔상들이 조각조각 튀어나왔다.
“...병원 복도 같아요. 아니, 협회인가? 비가 오지도 않는데 검은 우산을 쓴 사람들이 서 있고... 어린애가 있어요. 아저씨랑 닮은, 하지만 더 작고 마른.”
이진하가 가리킨 허공에는 흐릿한 이미지가 맺혔다. 강도원이었다. 젊은 시절의 형이 서류 뭉치를 든 채 누군가와 다투고 있었다. 그 곁에는 윤희가 있었고, 그들 앞에는 펼쳐진 검은 우산이 거대한 장벽처럼 서 있었다.
그 장면은 찰나에 사라졌지만, 내 가슴에는 납덩이 하나가 더 얹혔다.
“내 이름이 왜 거기 들어있는 거죠?”
윤서하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실내를 얼렸다. 그녀는 감사관의 명패가 놓인 테이블 앞으로 당당히 걸어갔다.
“내 허락 없이 내 인생을 감사 자료로 쓰지 마세요. 난 참고인이 아니라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수사관으로서 여기 있는 겁니다. 오염이 됐든 데이터가 꼬였든, 내 권한은 내가 되찾아.”
그녀의 단호함에 감사실의 공기가 잠시 주춤했다. S급 수사협조관의 기백은 시스템조차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보호자 0번 최초 오염 보고서’의 가장자리에 손을 올렸다. [잔향청취]를 열자, 평소처럼 물건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야, 나도 이 결재 라인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낡은 종이 냄새를 풍기며 보고서가 삐딱하게 말을 걸어왔다.
강도원이라는 인간이 도장 찍은 날부터 내 종이 질이 확 나빠졌거든. 체한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다고. 그거 알아? 이 문서는 승인서가 아니라 ‘취소 불가능한 보호자 지정서’였어.
‘보호자 지정?’
그래. 윤서하 한 명만 지키려고 한 게 아냐. 이 문서의 진짜 수혜자는 ‘이름 없는 모든 생존자’였다고. 형이라는 작자가 시스템을 통째로 속여서 너희를 이 보호구역 안에 처넣은 거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형은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 시스템의 규칙을 어기고 ‘오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건가?
의구심과 믿음이 머릿속에서 전쟁을 벌였다. 형을 믿고 싶다. 하지만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은 형이 감추려 했던 진실의 무게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감사실의 허공을 향해 선언했다.
“승인자 강도원의 기록을 추가 열람하겠다. 대리 응답자로서 요청한다.”
그 순간, 내부 감사실 전체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천장의 형광등이 전부 터져 나가며 파편이 쏟아졌다.
[경고: 요청자의 진명(眞名) 잠금과 승인자 권한이 충돌합니다!]
[오류: 이름이 없는 자는 기록을 열람할 수 없습니다.]
[강제 집행: 출퇴근 기록기가 최종 상태를 갱신합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석에 있던 낡은 출퇴근 기록기가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거기에는 강도원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요청 사항이 붉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강도원 승인 당시 피보호자: 강도윤]
그리고 그 바로 아래, 형의 필체로 적힌 마지막 명령이 뒤따랐다.
[최종 요청: 동생의 이름을 기록에서 완전히 삭제하라. 그는 퇴근하지 못할 것이다.]
제목: 131화. 삭제된 이름의 보호자
[최종 요청: 동생의 이름을 기록에서 완전히 삭제하라. 그는 퇴근하지 못할 것이다.]
출퇴근 기록기가 뱉어낸 문장이 망막을 긁었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선명한 문장 속에서 내 이름이 비명처럼 일그러졌다.
이름을 삭제하라니. 그것도 그냥 지우는 게 아니라, 퇴근조차 하지 못하도록 기록 자체를 파기하라는 명령이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더니, 형은 퇴근길조차 유료로 결제해버렸네.”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샜다.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를 때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농담은 이제 생존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엔 농담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귓가를 울렸다.
그때, 내부 감사실의 벽면을 메우고 있던 명패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뒤집히기 시작했다.
달그락, 달그락.
마치 수천 마리의 벌레가 껍질을 벗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음.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를 띄우려던 시스템이 과부하에 걸린 듯 글자를 깨뜨렸다.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노이즈만 가득 찼고, 결국 남은 것은 단 하나의 태그뿐이었다.
[식별 불가능: 무급 생존자]
“시스템이 당신을 재스캔하고 있어요. 아니, 정확히는 ‘삭제된 데이터’를 억지로 분류하려고 드는 거군.”
옆에 서 있던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차가운 감사실 공기 속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가진 감각이었다.
“당신, 정신 차려요. 저기 적힌 명령, 지금 당신을 묶어둔 보관자의 ‘잠금’과는 결이 달라요.”
“결이 다르다고요? 지워버리라는 건 똑같은 것 같은데.”
“보관자는 당신의 이름을 빼앗아 노예로 부리려 하지만, 이 명령은…….”
윤서하가 기록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을 아예 시스템의 시야 밖으로 던져버리려는 의도였어요.”
이현우가 안경을 고쳐 쓰며 기록기의 로그를 훑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상 키보드 위를 신들린 듯 움직였다.
“서하 씨 말이 맞습니다. 생존자 형님, 이건 단순한 파기가 아니라 ‘추적 회피용 격리’에 가까운 로그예요. 시스템상에서 존재를 지운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그 어떤 시스템 권한으로도 추적할 수 없는 ‘유령’으로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유령이라. 제 월급도 유령처럼 사라진 이유가 그거였나요?”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강도원 씨는 당신을 숨기려 했던 겁니다. ‘검은 우산’으로부터요.”
검은 우산.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그림자 속에 숨어 우리를 지켜보던 그 불쾌한 존재.
반가온이 내 발치에 떨어진 기록기 종이에 손을 얹었다. 감정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회전하다가 북동쪽을 가리키며 멈춰 섰다.
“……살아라.”
가온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강도원 씨의 이름에서 들려요. 아주 강렬하고, 절박한 잔향이에요. 동생을 살려야 한다는 집념이 이 기록기에 박혀 있어요. 그런데…….”
가온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침반 바늘이 다시 반대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그 밑에 다른 감정이 겹쳐 있어요. ‘돌아오지 마라’. 절대로 이 세계로, 이 기록 속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거부감이에요. 이건 보호라기엔 지나치게 날이 서 있어요. 마치…… 감옥의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는 사람 같아요.”
살리려 했지만, 동시에 돌아오지 못하게 막았다. 형은 나를 구원하려 했던 걸까, 아니면 이 지옥 같은 연대기 속에 가두려 했던 걸까.
“미수 기록(未遂 記錄)이 반응하는군.”
이진하가 제 팔에 감긴 붕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데이터의 잔상이 스치는 듯했다.
“원본 KDY가 이 삭제 요청을 나중에 일부 수정한 흔적이 보여. 완전히 지워버리면 네 존재 자체가 소멸할까 봐 두려웠던 거겠지. 그래서 넌 완전히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정상적으로 기록되지도 않은 ‘미퇴근 감사 대상’으로 남게 된 거다. 어중간한 경계선 위에서 말이지.”
그때, 감사실 안쪽의 빈 의자 너머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일렁였다. 검은 우산을 든 보관자의 형상이 공기 중에 번져 나갔다.
“보호는 때로 가장 오래 지속되는 감금이지.”
보관자의 비릿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그는 마치 형의 선택을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강도원은 너를 살리기 위해 네 이름을 지옥의 장부에 바쳤다. 덕분에 넌 죽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증명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지. 그게 네 형이 준 선물이다. 감동적이지 않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가장 깊은 어둠에 처박았다는 사실이.”
“닥쳐.”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윤서하였다. 그녀가 보관자의 투영체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주변으로 [보호자 0번]의 권한을 상징하는 황금빛 문양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여기 있는 게 아냐. 보호자 0번으로서 정식 이의 제기를 신청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감사실 벽을 때렸다.
“강도윤의 이름은 삭제된 게 아니라 유예된 것이다. 그리고 그 권한은 승인자인 강도원이 아니라, 오염된 보호자 0번인 나에게 귀속되어 있어!”
윤서하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내 진짜 이름을 부르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시스템의 제약 때문인지 목소리가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외쳤다.
“생존자 씨. 당신 형이 당신을 숨기려 했다면, 나는 당신을 끌어낼 거예요. 당신 혼자 책임질 사건 아니니까, 그만 어깨에 힘 빼요.”
가슴 안쪽에서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이름을 지워버린 형과, 그 지워진 이름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나를 붙잡아 주는 여자. 죄책감이 발목을 잡았지만, 윤서하의 눈빛이 그 족쇄를 끊어내고 있었다.
“……협회 보너스라도 두둑하게 챙겨주지 않으면 이 빚 다 못 갚겠는데요.”
“이자까지 쳐서 받을 테니 각오하세요.”
윤서하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보호자 0번의 인장이 빛을 뿜었다.
“보호자 0번 권한으로 명한다. 이름 삭제 요청의 원본 사유, 그리고 그 대가로 지불된 ‘최초의 오염’ 기록을 열람하겠다!”
[경고: 해당 데이터는 내부 감사실 1급 기밀입니다.]
[보호자 0번의 권한이 감사실 보안 등급과 충돌합니다.]
[데이터 무결성 검사 중…… 강제 동기화 실행.]
공간이 비틀렸다. 감사실의 회색 벽면이 허물어지고, 그 너머에서 두 번째 파일이 강제로 모습을 드러냈다.
[보고서 번호: 002]
[제목: 최초 점장 사망 예정자 명단]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15년 전의 잔상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협회 지하 격리 병동. 혹은 던전 사고 직후의 임시 수용소. 차가운 철제 침대 위에 어린 내가 누워 있었다. 얼굴을 가릴 정도로 커다란 산소마스크를 쓴 채.
그 침대 머리맡에는 검은 우산이 세워져 있었고, 그 옆으로 젊은 시절의 강도원과 윤희가 보였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 있는 한 남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든 서류철 끝에 선명한 서명이 적혀 있었다.
[최초 점장]
그가 서류의 첫 번째 줄을 가리켰다. 거기 적힌 글자를 본 순간, 내 호흡이 멎었다.
[대상자: 강도윤]
[사망 예정 시각: 15년 전, 던전 붕괴 사고 당시 (이미 경과함)]
보고서는 무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의 인간은, 15년 전에 이미 죽었어야 할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