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내 이름이 회색이 되었다
제목: 11화. 내 이름이 회색이 되었다
세상만사, 대개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차선, 중앙선, 그리고 내 한계선. 특히 협회 단말기 모니터에 떠오르는 내 이름의 색깔은 절대로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강도윤 [F급] - 정상’
늘 그렇듯 밋밋하고, 어딘지 모르게 패배주의적인 초록색 글씨여야 했다. 그래야 내가 내일도 출근해서 콧물을 훌쩍이며 헌터들이 싸지른 똥을 치우고, 월급날이면 편의점 수입 맥주 네 캔을 만 원에 사서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단말기 화면 속 내 이름이 이상했다.
초록색이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영수증 글씨가 햇볕에 바래가듯,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 야, 한지율. 저거… 저거 왜 저러냐?”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웃기게도,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 목숨이 아니라 칠십만 원짜리 수리비였다. 이름 색이 변하면 장비 수리비 할인도 날아가나?
내 이름은 ‘강’ 자부터 서서히 탁해지더니, 이내 ‘도’ 자를 지나 ‘윤’ 자까지 도달했다. 완전히 하얗게 바랜 건 아니었다. 지독하게 애매하고 기분 나쁜, 장마철 먹구름 같은 회색.
“미친…!”
한지율이 단말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협회 신분증 카드 리더기에 꽂혀 있던 내 손을 거칠게 쳐냈다. 그리고 양손으로 단말기 화면 전체를 가려버렸다.
“보지 마요! 강도윤 씨, 그거 보면 안 돼요!”
“뭐, 뭐가. 왜 그래, 무섭게.”
나는 농담을 던지려 했다. ‘내 이름이 회색이 된 건 사실 난 회색도시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거나, ‘이거 단말기 액정 나간 거니까 사장님한테 수리비 청구하자’거나. 하지만 입술이 얼어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시각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었다. 몸 안쪽에서 존재의 심지가 조금씩 꺼지는 느낌이었다. 손끝의 감각이 무뎌졌다. 숨을 들이쉬는데,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그냥 입안에서 겉도는 것 같았다. 주변의 주차장 소음—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자동차 엔진 식는 소리—들이 갑자기 먹먹하게 멀어졌다.
무대에서 조명이 꺼졌는데 나만 그걸 늦게 알아챈 기분이었다. 관객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배경 취급하기 시작했다.
“이거… 이거 지워야 해. 지워야 하는데…!”
한지율은 화면을 가린 채 허둥댔다. 그녀의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단말기 하단의 전원 코드로 옮겼다. 하지만 선뜻 손을 뻗지 못했다. 마치 그 선을 뽑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갈팡질팡했다. 나를 보았다가, 단말기를 보았다가, 다시 지하 주차장의 어둠을 보았다가.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나를 온전히 포착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분명 여기 서 있는데, 그녀는 자꾸만 내 어깨 너머의 허공을 의식했다. 그녀의 공포는 나를 향한 걱정이 아니라, 내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움직여 단말기 플라스틱 테두리를 붙잡았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잔향청취 능력이 마치 기회를 노렸다는 듯 발동했다.
비릿한 금속성 냄새와 함께, 협회 단말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건 규정 위반이야. 절차를 무시하지 마. (사무적이고 건조한 남자 목소리)]
[하지만 데이터 오염이 심각해. 시스템 전체로 퍼지기 전에 격리해야 한다고! (신경질적인 여자 목소리)]
[격리와 삭제는 엄연히 달라. 승인번호 N/A. 고유식별코드 확인 불가. 이 상태로는 최종 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승인번호가 없으면… 죽일 수 없습니다. (다시 남자 목소리, 마지막 문장은 기계음처럼 기괴하게 늘어졌다)]
[젠장! 그럼 어쩌라는 거야!]
[보류(Pending). 승인 대기 상태로 유지합니다. 이 상태는 꽤… 길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그를 잊어버릴 때까지. (남자 목소리가 웃음기 섞인,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톤으로 속삭였다)]
나는 플라스틱에서 손을 떼며 뒷걸음질 쳤다. 잔향은 웃기게도 협회 직원들의 말싸움 같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승인번호가 없으면 죽일 수 없다. 하지만 보류 상태는 길게 유지할 수 있다.
주머니 속의 녹음기가 들려준 내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유: 미확인 시스템 침입 및 데이터 오염. 승인 대기.]
‘데이터 오염’이라는 사유. 그건 아마도 내 ‘잔향청취’ 능력이 협회 시스템의 데이터를 ‘건드렸기’ 때문에 붙은 표현일 것이다. 나는 단순히 시스템을 훔쳐보는 게 아니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데이터에 남은 흔적을 ‘듣는’ 방식으로 시스템에 간섭하고 있었다. 시스템 입장에서는 내가 ‘미확인 바이러스’나 다름없었으리라.
그리고 승인번호가 ‘N/A’. 즉, 아직 그 누구도 최종적으로 나를 삭제하겠다는 승인을 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누군가 권한도 없이 시스템을 찔러서 나를 삭제 대기 목록에 올려버렸지만, 마지막 도장은 찍지 못한 상태.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었다. 회색은, 흰색이 되기 전의 마지막 보루였다.
터벅, 터벅, 터벅.
그 순간, 계단 쪽에서 BG-04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보다 훨씬 가깝고, 빠르고, 규칙적이었다. 더 이상 그들은 우리를 위협하며 놀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절차에 따라 ‘회수’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가요! 여기 있으면 잡혀요!”
한지율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악력이 예전과 달리 터무니없이 약하게 느껴졌다. 내가 세상에서 멀어지는 만큼, 세상도 나를 붙잡는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지하 주차장 출구로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BG-04는 출구 쪽을 이미 장악했을 터였다. 나는 한지율을 이끌고 반대편 어둠 속에 있는 작은 방으로 달려갔다. ‘관리실’이라고 적힌, 녹슨 철문이 달린 좁은 공간이었다.
우리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방재실 겸 관리실로 쓰이는 듯한 그곳은 좁고 퀴퀴했다. 한쪽 벽면에는 낡은 CCTV 모니터 네 개가 지직거리며 주차장 곳곳의 어두운 화면을 비추고 있었다. 먼지 쌓인 책상 위에는 출입 기록 프린터와 고장 난 무전기, 그리고 커피 얼룩이 잔뜩 묻은 근무 일지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내 이름이 시스템에서 흐려지는 동안, 내 몸에 밴 F급 현장 정리 헌터의 습관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본능적으로 방 안의 물건들을 훑었다. 이곳에 남은 기억의 찌꺼기를 찾기 위해.
잔향청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작동했다. 회색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그 감각만은 또렷했다.
내 시선이 책상 위에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멈춘 출입 기록 프린터에 닿았다. 방금 출력된 듯한, 아직 따끈한 종이 한 장이 메롱을 하듯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입차 기록]
[차량번호: 협회 99가 0000]
[입차 시간: 03:15]
[탑승자: 윤서하 (B급 / 감식반 팀장)]
[고유식별코드: YSH-7711-2034]
…윤서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블랙박스 잔향이 들려준 그 발소리, 윤서하와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았던 그 발소리. 그리고 이 출입 기록.
나는 현장 정리 헌터다. 다른 건 몰라도, 헌터들의 고유식별코드 체계는 징그럽게 많이 봤다. B급 헌터의 식별코드는 보통 앞자리 알파벳과 생년월일, 그리고 무작위 숫자 네 자리로 이루어진다.
윤서하 팀장의 생일은 7월 11일이다. 앞자리 코드 YSH-7711은 맞다. 그런데 뒤의 무작위 숫자 2034.
이게 어제, 내 선배가 감식반 지원 요청을 보낼 때 시스템에서 확인했던 윤서하 팀장의 식별코드와 한 자리가 달랐다. 분명 끝자리가 3이 아니라 2였다.
‘윤서하’라는 이름으로 출입했지만, 신분증 고유번호는 한 자리가 다르다.
이건 윤서하가 직접 온 게 아니라는 뜻일까? 아니면 누군가 윤서하의 이름을 빌려, 아주 교묘하게 위조된 신분증을 들고 들어온 것일까?
갑자기 주머니 속의 녹음기가 다시 제멋대로 작동했다. 이번에는 스피커가 찢어질 듯한 잡음과 함께 문태식의 목소리가 아주 짧고, 신경질적으로 끊겨서 터져 나왔다.
[…회색이면 아직 살아 있다. (치직) 흰색이 되기 전에, (치직) 네 이름을 누가 처음 호출했는지 찾아라. (치직)]
그리고 목소리 뒤로, 블랙박스 잔향에서도 들었던 그 묘한 소리들이 섞여 들렸다. 누군가의 얕은 숨소리, 또각거리는 하이힐 소리, 그리고 마치 종이 우산이 접히는 듯한 마른 소리.
또각.
관리실 문 너머, 주차장 통로에서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블랙박스 잔향 속의 그 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젖지 않은, 마른 바닥을 걷는 소리였다.
그녀가 왔다.
“그 녹음기… 증거예요.”
한지율이 내 손에 들린 녹음기를 보며 속삭였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서 이름이 지워진 협회 신분증 두 장을 꺼냈다. 그녀의 것과 문태식의 것. 그녀는 잠시 그 신분증들을 찢거나, 혹은 방구석 어딘가에 던져버리려는 듯 손을 쳐들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지독한 족쇄이자, 동시에 유일하게 남은 정체성의 증거였다.
그녀는 손을 내렸다.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들키면 끝장이었다.
그때, 내 눈에 방재실 책상 위에 놓인 복사기 겸 스캐너가 들어왔다.
“증거는, 원본보다 사본이 더 무서운 법이지.”
나는 한지율의 신분증 두 장과, 내 주머니에 있던 문태식의 녹음기, 그리고 내 회색빛 도는 신분증까지 모두 스캐너 유리판 위에 올려놓았다.
징-
스캐너의 초록색 불빛이 물건들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출력되어 나온 복사본 네 장을 모두 한지율에게 건넸다. 그리고 원본 신분증들은 그녀의 품에, 녹음기는 내 주머니 깊숙이 다시 찔러 넣었다.
“이거 가지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누군가에게 던져요. 협회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니까.”
한지율은 복사본들을 꼭 쥐었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공포가 아닌, 생존을 향한 독기가 서렸다. 아주 작은 성취였다. 그래도 한지율은 그 종이를 쥔 순간, 다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관리실 문 바로 앞까지 와서 멈췄다.
“강도윤 씨. 거기 있는 거 압니다. 협회 규정 제37조 2항, 감식반의 정당한 조사에 불응하는 것은 반역 행위로 간주합니다. 문 열고 나오세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블랙박스 잔향이 들려준, 그 묘하게 가식적이고 즐거워하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지금 이 목소리는 지독하게 사무적이고, 건조하며,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였다.
나는 심장이 쫄깃해지는 것을 느끼며, 내 회색 이름이 쓰인 화면을 보았다가, 관리실 한구석에 있는 대형 소화전 옆의 빨간색 밸브를 보았다.
방재실 스프링클러 점검 밸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화재경보기 버튼.
“규정이라…. 내가 F급이라서 규정을 좀 잘 알지.”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화재경보기의 유리창을 팔꿈치로 내리쳤다.
쨍그랑!
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좁은 방재실이 화재경보음으로 꽉 찼다. 나는 망설임 없이 스프링클러 점검 밸브를 힘껏 돌렸다.
치이익-! 콰아아아-!
스프링클러 헤드가 터지며 지하 주차장 전체에 소방 용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들의 도난 경보기가 동시에 울려 퍼지며 지옥도 같은 소음이 완성되었다.
[화재 발생! 화재 발생! 모든 직원은 즉시 대피하십시오! 스프링클러가 작동 중입니다!]
방재실 스피커에서 자동 대피 방송이 터져 나왔다.
BG-04가 ‘절차’를 중요시한다면, 이 소란은 그들에게 지독한 장애물이 될 터였다. 스프링클러가 쏟아붓는 물 때문에 감식 장비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무엇보다 이 소란을 듣고 지상의 일반 직원들이나 청옥 장비 수리점 같은 상가 사람들이 주차장으로 몰려들거나 경찰에 신고할 가능성이 컸다. 시민들이 섞이면 그들은 대놓고 우리를 ‘회수’할 수 없다.
“가요! 지금이 기회야!”
나는 당황한 한지율을 이끌고 관리실 빗장을 풀었다.
문 밖에는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윤서하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얼굴에 튄 물을 닦아내며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그리고 쏟아지는 물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뒤편으로, BG-04의 슈트 사내들이 무전기를 붙잡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절차 외 상황’에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한지율을 먼저 보내고, 윤서하를 밀치며 어둠 속으로, 소음 속으로, 쏟아지는 물줄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는 대피 방송을 듣고 몰려나온 시민들과 일반 직원들 틈에 섞여 지하 1층 출입구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은 소방차 사이렌 소리와 쏟아지는 물, 사람들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었다. BG-04는 이 혼란을 통제하지 못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쏟아지는 물을 맞아 흠뻑 젖어 있었지만, 내 몸 안의 감각은 여전히 먹먹했다. 회색. 여전히 회색이었다.
나는 인파 속에서 한지율의 손을 놓치고,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비켜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독한 소외감이었다.
그때였다.
“강도윤 씨.”
내 이름을, 지독하게 낮고, 하지만 또렷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수많은 소음 사이로, 내 먹먹한 귀에만 들리는 듯한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인파에서 한 걸음 떨어져, 비를 맞지 않고 서 있는 여자가 있었다.
윤서하였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내 앞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 목소리, 체격은 지하 주차장에서 봤던 윤서하와 똑같았다.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내 발밑의 잔향이 요동쳤다.
또각. 또각. 또각.
그녀가 걷는 하이힐 소리는, 지하 주차장 관리실 앞에서 들었던 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한 박자 빠르고 신경질적인 잔향을 남기고 있었다. 그건 블랙박스 속의 그 소리와는 달랐지만, 내가 아는 윤서하의 것과도 달랐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
그녀의 손에는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이 들려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아주 기묘하게 생긴 우산을 들고 있었다. 비닐도 아니고, 천도 아닌, 마치 종이 우산이 접히는 듯한 마른 소리가 나는 투명 우산. 하지만 그 우산은 젖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도 물기 하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은… 지독하게 비릿했다.
“강도윤 씨, 아직 회색이네요. 다행이다.”
작가의 말: 회색이면 아직 살아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색칠하고 있느냐죠.
✦ 작가의 말
회색이면 아직 살아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색칠하고 있느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