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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273화. 백연 반출 명단과 오리진 회수 절차 일러스트

272-273화. 백연 반출 명단과 오리진 회수 절차

272화. 백연 반출 명단

툭.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비상용 배터리로 버티던 붉은 경고등마저 수명이 다했는지, 관리실은 단 한 뼘의 시야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남은 것은 낡은 구식 서버 팬이 관성으로 인해 ‘히이이익’ 하며 잦아드는 소리, 그리고 발목을 기분 나쁘게 적시는 차가운 물의 감촉뿐이었다.

“……돈 안 냈나 보네. 이놈의 시설은 관리비 미납에 아주 가차 없어.”

내 입에서 나간 농담은 채 1미터도 나아가지 못하고 눅눅한 공기에 먹혔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손바닥에 밴 식은땀이 축축한 서류 봉투의 질감과 섞여 기분 나쁘게 달라붙었다.

“강도윤 씨, 입 다물어요.”

윤서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어둠 속에서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잠긴 철문을 발로 차거나 어깨로 들이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육중한 기계식 잠금장치는 미동도 없었다.

“서하 씨, 태식 형님은요? 상태 보여요?”

“안 보여요. 통신이 완전히 끊겼어. 사망 보류 카운트다운은…… 0이 된 순간 시스템이 강제로 종료됐고요.”

그녀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태식이 죽었는지, 아니면 이 기괴한 시스템의 일부로 흡수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보류 상태가 끝났다는 건, 더 이상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유예 시간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때, 발치에서 작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백연이 들고 있던 소형 카메라의 보조광이었다. 강렬한 화이트 LED가 어둠을 찢어발기며 좁은 공간을 비췄다. 빛의 경로를 따라 먼지가 춤을 췄고, 곰팡이 냄새와 탄 플라스틱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백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B-04 2차 반출 명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표정이었다. 기록자로서 언제나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녀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며 카메라를 놓칠 뻔했다.

“백연 씨?”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하자, 그녀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말도 안 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명단을 집어 들었다. 보조광이 비친 종이 위로 선명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1. 강도윤]

[2. 윤서하]

[3. 백연]

그 아래로는 몇 개의 이름이 더 있었지만, 쏟아진 물에 번졌거나 검은 매직으로 거칠게 지워져 있었다. 백연은 명단을 스캔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손떨림 때문에 초점이 계속 어긋났다. ‘삐빅, 삐빅’ 하며 초점을 잡지 못하는 기계음이 고요한 방안을 날카롭게 찔렀다.

“전…… 전 병원에서 태어났어요. 기록이 다 있다고요. 경기도에 있는 산부인과였고, 제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주셨고…….”

백연이 자기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이 없었다.

“근데 왜…… 왜 백일 사진 배경이 병원 복도 같았지? 왜 우리 집엔 내 신생아 때 사진이 한 장도 없지? 주민등록…… 그래,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왜 다른 애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등록됐던 거야?”

“백연 씨, 일단 진정해요. 이건 그냥 명단일 뿐이에요. 반출이라는 게 꼭 나쁜 뜻은 아닐 수도…….”

말을 내뱉으면서도 나는 내 거짓말이 형편없다는 걸 알았다.

B-04 관리실의 시스템은 이 아이들을 ‘데이터’로 취급했다. 2차 반출이란, 이곳의 실험체 혹은 보호 대상이었던 아이들을 외부로 실어 나갔다는 뜻이다. 입양이나 구조라는 따뜻한 단어 대신 ‘반출’이라는 단어를 쓴 시점에서 이미 목적은 순수하지 않았다.

살아 나간 아이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씌워 협회, 민간 보호가정, 혹은 이름 모를 감정 기관으로 흩뿌린 절차. 그것이 2차 반출의 실체였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젖은 명단에 손을 올렸다.

[잔향청취를 시도합니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머릿속에서 도트 프린터가 종이를 긁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이익, 직, 지이익.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기계음과 사물의 소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복사기가 돌아가는 열기, 신생아 팔찌를 스캔하는 레이저음, 비닐 파일이 서로 스치는 소슬한 마찰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젖은 우산에서 바닥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뚝, 뚝, 뚝.’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이 명단을 검수하고 있었다. 그 잔향 속에서 분류 기호들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기록자 후보 - 대상자 백연. 관찰 기록의 객관성 확인됨.]

[증언자 후보 - 대상자 윤서하. 신체 능력 및 반응 속도 우수.]

[감시자 후보…….]

그리고 내 이름 옆에는 다른 글자가 붙어 있었다.

[보호자 및 회수 대상 - 강도윤. 원본 데이터와의 동기화 필요.]

“기록자…… 후보?”

내가 나지막이 읊조리자, 백연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보조광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였다.

“도윤 씨, 방금 뭐라고 했어요? 제가…… 기록자라고요?”

“명단에 남은 잔향이 그렇게 말해요. 백연 씨가 왜 그렇게 기록에 집착했는지, 왜 모든 걸 스캔하고 저장하려고 했는지…… 그게 본능이 아니라 설계된 거라면요?”

백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연이었다.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에도, 그녀의 손가락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칵.

“설계된 거라면, 끝까지 해줘야죠. 그게 내 역할이라면서요.”

백연이 입술을 깨물며 카메라 설정을 바꿨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지만, 렌즈를 보는 눈은 매서웠다.

한편, 윤서하는 문태식의 단말기를 어떻게든 복구해보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팔찌 슬롯을 열어 문태식의 시스템과 강제 링크를 시도하려 했다.

“안 돼요, 서하 씨!”

내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이거 놓으세요. 태식 씨가 저기 혼자 있다고요!”

“지금 링크하면 서하 씨가 이 시스템의 ‘최종 수거자’로 고정돼요! 그럼 서하 씨도 저 명단의 아이들처럼 데이터로 처리될 거라고요. 경고창 안 보여요?”

실제로 그녀의 팔찌 위로 붉은 시스템 경고가 점멸하고 있었다. [경고: 동일 슬롯 중복 점유 시 관리 대상자로 재분류됨. 수거 프로세스 개시 예정.]

윤서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주먹이 떨렸다. 문태식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과 생존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언니.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기록 언니, 우리 찍어줘.

아저씨, 나 여기 있는 거 적어준다고 했잖아.

무서워. 나 잊어버리면 안 돼.

12명의 아이들. 시스템에서 삭제될 위기에 처했던, 내가 이름을 빌려주겠다던 그 아이들의 잔향이 관리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괴물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들이 여기 존재했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알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속삭임이었다.

백연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도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래. 찍을게. 하나도 안 빼놓고 다 기록할게.”

백연이 카메라의 특수 필터를 작동시켰다. 자외선과 적외선을 동시에 잡아내는 특수 렌즈가 어둠 속을 훑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관리실 벽면에 숨겨진 지도가 떠올랐다. 형광 물질로 그려진 듯한 복잡한 선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반출 경로 지도예요.”

백연의 목소리가 떨림을 멈추고 다시 차분해졌다.

지도의 중심은 이곳 B-04였다. 거기서 세 갈래의 굵은 선이 뻗어 나갔다.

첫 번째는 ‘헌터 협회’.

두 번째는 ‘민간 위탁 보호가정’.

그리고 세 번째는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감정 기관’.

내 시선이 세 번째 경로의 끝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낡은 인장 같은 로고와 함께 낯익은 코드가 적혀 있었다.

[AG-702 : 유물 및 영혼 감정소]

반가온.

그 미친 감정사 녀석의 가게 코드와 일치했다.

“이곳들이…… 우리를 받아간 곳들이라는 건가요?”

윤서하가 지도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가락이 ‘협회’라고 적힌 지점을 스쳤다. 그녀 역시 그곳에서 자랐거나, 그곳의 관리하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연이 카메라를 바닥 쪽으로 내리비추자, 지도 가장 아래쪽에 숨겨져 있던 붉은색 문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 문구를 본 순간, 내 심장은 그대로 멎는 것 같았다.

[3차 반출 예정 리스트]

[대상: 강도윤 (Code: Origin)]

[상태: 관찰 종료 후 회수 및 재배치]

“회수……?”

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탈출한 게 아니었다. 20년 전 이곳에서 나간 것은 자유를 찾은 게 아니라, ‘관찰’이라는 이름의 긴 외출을 허락받은 것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제 그 관찰 기간이 끝났으니, 다시 이 차가운 지하실로 나를 끌어다 놓겠다는 선언이었다.

“도윤 씨, 뒤에!”

윤서하의 외침과 동시에, 관리실의 잠겨 있던 캐비닛 안에서 검은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내 발목을 휘감았다. 그림자보다 짙은 어둠이 내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나 아직 퇴근 안 했어! 이 미친 시스템아!”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검은 액체는 내 입과 코를 막으며 나를 끌어내렸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백연의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여전히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 귓가에 마지막 잔향이 들려왔다. 20년 전의 내 목소리였다.

걱정 마. 어른이 되면, 내가 꼭 데리러 올게.

그 약속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가두기 위한 주문이었을까.

어둠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273화. 오리진 회수 절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지독한 비릿함이었다. 물속이었다. 하지만 폐부로 스며드는 것은 차가운 수분이 아니라, 잉크가 잔뜩 묻은 도트 프린터 리본을 씹어 삼키는 것 같은 텁텁한 금속 맛이었다. 뒤이어 코끝을 찌르는 낡은 젖은 담요의 눅눅함과 소독약 냄새가 섞여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B-04 관리실의 차가운 바닥을 딛고 있었는데, 지금 내 몸은 중력이 거세된 어둠 속에 둥둥 떠 있었다.

“사후세계 고객센터 체험판인가. 인테리어가 너무 성의 없는데.”

목소리를 내뱉자 입안에서 기포 대신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이곳은 현실의 B-04 병동과 서버실, 그리고 내가 한 번씩 들어가곤 했던 그 기분 나쁜 검은 우산의 기록실이 기괴하게 덧칠해진 잔향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노란색 안전선이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고, 천장에서는 링거 줄 대신 구식 랜선들이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발밑으로는 검은 물이 끝없이 일렁였다. 캐비닛에서 쏟아졌던 그 불길한 액체가 이 공간 전체를 채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윤아.”

멀리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인데, 내가 부르는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나’가 있었다. 정확히는 20년 전의 나, 혹은 이 공간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파편. 얼굴은 안개에 가린 듯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이 내밀고 있는 손만은 선명했다.

작은 손목에는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적힌 신생아용 플라스틱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고사리 같은 손은 어울리지 않게 무겁고 투박한, 젖은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경고: 외부 개체 ‘Code: Origin’ 감지.]

[원본 데이터와의 동기화 절차를 시작합니다.]

[현재 진행률: 1.2%...]

허공에 반투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평소 보던 상태창과는 질감이 달랐다. 더 딱딱하고, 더 무미건조한, 마치 기계가 뱉어내는 영수증 같은 글자들이었다.

“오리진? 내가 무슨 멸종 위기종이라도 된다는 거야?”

빈정거려 보았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동기화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 자아가 이 검은 물속에 녹아내려 저 꼬맹이의 잔상과 하나로 합쳐지는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때, 머리 위쪽에서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치직, 도윤 씨! 들려요? 제 목소리 들리냐고요!

백연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 같은 강렬한 빛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왔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물이 비명을 지르듯 증발하며 서버 팬이 돌아가는 불쾌한 잔열을 내뿜었다.

―서하 언니! 좌표 잡혔어요! 방금 터뜨린 광학 스캔 로그에 도윤 씨 신호가 섞여 들어왔어요. 2차 반출 경로랑 겹쳐요!

백연은 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만큼은 지독하리만치 차분했다. 기록자 후보. 시스템이 그녀에게 붙였던 그 이름표가 지금은 오히려 우리를 잇는 생명줄이 되고 있었다.

“백연! 나 여기 있어! 여기 사방이 잉크 냄새야!”

답답함에 소리를 질렀지만, 내 목소리가 바깥까지 닿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공간이 크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외부에서 무언가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도윤아, 비켜.

이번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한 음성.

―슬롯 중복 점유? 수거자 고정? 그딴 거 알 바 아니니까. 내가 너 잡을 때까지 버텨.

금속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윤서하가 자신의 팔찌 슬롯을 완전히 꽂는 대신, 칼집과 금속 장비를 이용해 강제로 접점을 만들어 임시 접속을 시도하는 모양이었다. 시스템의 경고를 우회하면서도 나를 끌어내기 위한 그녀다운 무식하고도 정교한 방법이었다.

공간이 뒤틀리며 내 앞의 꼬맹이가 흔들렸다. 녀석은 대답 대신 내 손바닥을 잡았다. 차가웠다. 죽은 사람의 손처럼, 아니,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죽은 데이터처럼 시린 감각이었다.

녀석이 내 손바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민... 호...]

[지... 수...]

[......]

열두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의 조각들이었다. 2차 반출 명단에서 지워지고 번졌던 그 이름들이 꼬맹이의 손가락 끝을 타고 내 살갗으로 스며들었다. 완전히 완성되지 못한 이름들은 통증이 되어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이게 뭐야? 내가 대체 뭘 약속했던 건데?”

내 물음에 꼬맹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스템 메시지가 더 붉게 타오르며 선택지를 띄웠다.

[선택지를 결정하십시오.]

동기화 수락: 원본 데이터로의 완전한 회귀.

관찰 연장: 현재 상태 유지 (성공 확률 0.03%).

대체 회수자 지정: 인접한 적격자(윤서하, 백연)를 대신 회수.

“미친 새끼들이.”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나 하나로 모자라서 서하랑 백연까지 이 구덩이로 끌어들이겠다고? 대체 회수자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겁이 나는 건 여전했다. 당장이라도 이 검은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질까 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나 때문에 누군가 죽거나 지워지는 꼴은, 20년 전의 나로 족했다.

“야, 시스템. 너 계산 착오야.”

나는 내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의 조각들을 꽉 쥐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얼굴 없는 꼬맹이의 손을 맞잡았다.

“내가 ‘오리진’이라며? 그럼 내 안에 있는 이 데이터들도 다 내 거잖아.”

[데이터 대조 중...]

“내 이름 하나로 퉁칠 생각 하지 마. 네가 지운 이름들, 네가 ‘반출’이라는 이름으로 내다 버린 저 애들의 기록까지 몽땅 다 계산해. 그게 동기화 조건이야.”

나는 억지로 내 의식을 확장했다. 시스템이 나를 ‘회수’하려 한다면, 역으로 내가 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를 붙잡고 늘어지면 된다.

내 손바닥에 적힌 미완성된 이름들을 강제로 시스템 입력창에 밀어 넣었다.

[에러: 정의되지 않은 변수 입력.]

[에러: 시스템 가용 용량 초과.]

[회수 절차에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그래, 먹어봐. 네가 버린 쓰레기들이 얼마나 무거운지 한번 느껴보라고!”

공간이 격하게 진동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랜선들이 엉키며 불꽃을 튀겼고, 검은 물은 소용돌이치며 나를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동시에 바깥에서 백연의 외침이 들렸다.

―찾았어! 좌표 개방됐어요! 언니, 지금이에요!

하얀 섬광이 기록실의 천장을 찢고 들어왔다. 그 틈새로 익숙한 금속의 광택이 보였다. 윤서하의 칼집이었다. 그녀는 팔찌와 칼집 사이의 스파크를 견디며 손을 뻗고 있었다.

“도윤아! 손 잡아!”

검은 물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시스템은 여전히 ‘회수’를 부르짖으며 나를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름 조각들이 내 몸 주변에서 빛나며 방어막처럼 작용하고 있었다. 백연이 찍어댄 사진 속의 잔상들이 데이터의 홍수를 막아서는 방파제가 되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리고 그보다 더 뜨겁고 단단한 윤서하의 손바닥이 닿았다.

“잡았어!”

서하의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내 몸이 수면 위로 낚여 올라가는 대어처럼 솟구쳤다.

하지만 완전히 빠져나가기 직전, 나는 보았다.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어린 나의 잔상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리는 것을.

― 걱정 마. 내 이름 말고, 네 진짜 이름도 꼭 찾을게.

그건 내가 한 약속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들었던 약속이었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망막 위로 마지막 시스템 로그가 스쳐 지나갔다.

[원본명 후보 분석 완료: 반가온]

[AG-702 보관명 일치: 반가온(Ban Ga-on)]

[상태: 회수 일시 중단 및 재관찰...]

“도윤 씨! 정신 차려요! 도윤 씨!”

백연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소독약 냄새가 사라졌다. 대신 코끝을 찌르는 탄 플라스틱 냄새와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바닥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B-04 관리실 바닥.

“허억, 헉...!”

나는 미친 듯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입안에 남아있던 잉크 맛을 뱉어내려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윤서하가 내 멱살을 잡다시피 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팔목에 채워진 팔찌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금속 칼집은 과부하로 인해 푸르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백연은 바닥에 주저앉아 카메라를 품에 꼭 안은 채 떨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했지만, 렌즈를 향한 시선만은 고정되어 있었다.

“...살았냐?”

내 물음에 윤서하가 대답 대신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거의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악력이었지만, 그 통증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아 차라리 안심이 됐다.

“너, 진짜 한 번만 더 마음대로 끌려가기만 해봐. 그때는 내 손으로 회수해 버릴 거니까.”

서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나는 대꾸할 힘도 없어 바닥에 머리를 댔다.

손바닥을 펴 보았다. 꼬맹이가 적어준 이름들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화상처럼 붉은 자국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그 이름.

반가온.

그건 이 끔찍한 실험실의 이름도, 시스템의 코드도 아니었다.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서하야, 백연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우리 아직... 확인할 게 남았어.”

그때, 정전되었던 관리실의 모니터 하나가 지직거리며 다시 켜졌다. 화면에는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3차 반출 경로 지도가 떠올랐고, 그 종착지인 AG-702 감정소 밑에 새로운 주석이 한 줄 추가되어 있었다.

[최종 확인자: 반가온. 위치 동기화 중...]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 문태식의 생사도 확인하지 못했고, 우리의 정체성도 안개 속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제 우리는 누군가가 짜놓은 회수 절차를 따르는 소모품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록하고, 증언하며, 이 기괴한 연극의 설계자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복도 끝에서 다시 한 번, 검은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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