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74-275화. AG-702의 보관명과 비어 있는 케이스 일러스트

274-275화. AG-702의 보관명과 비어 있는 케이스

274화. AG-702의 보관명

입안에 달라붙은 감각이 지독했다. 혓바닥을 타고 넘어가는 비릿하고 끈적한 맛. 이건 피가 아니었다. 검은 우산의 기록실에서 억지로 삼켰던, 누군가의 기억이 녹아든 시커먼 잉크였다.

"커흑, 퉤! 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차가운 B-04 관리실 타일 바닥에 뺨을 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잉크 냄새와 탄 플라스틱 냄새가 엉망으로 뒤섞여 들어왔다. 죽다 살아났다는 안도감보다는, 방금까지 내 영혼을 갉아먹으려던 시스템의 질척한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남았다.

"강도윤! 정신 차려! 내 말 들려?"

어깨를 세차게 흔드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나를 붙잡은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은 팔찌 슬롯에서 손등으로 번지는 붉은 선을 따라 올라왔다.

"윤... 서하 씨."

그녀의 손목, 팔찌 슬롯이 꽂혀 있는 부근에서 시뻘건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내가 'Code: Origin'으로 동기화되려는 찰나, 그녀가 시스템에 강제로 개입해 나를 끌어낸 대가였다.

"이거 놔요. 과부하 걸렸잖아."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윤서하는 오히려 내 멱살을 잡듯 더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서린 고집이 형광등 불빛 아래 날카롭게 빛났다.

"놓으면, 너 다시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시스템이 널 아직 회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그러다 당신이 '최종 수거자'로 고정되면 어쩔 건데? 나 하나로 족해. 나처럼 재수 없는 놈은 나 하나면 된다고!"

내 외침에도 그녀는 이를 악물 뿐이었다. 팔찌의 붉은 선이 그녀의 손등을 타고 혈관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시스템이 그녀를 매개체로 삼아 나를 다시 끌어당기려 하거나, 혹은 그녀를 새로운 샘플로 등록하려 드는 게 분명했다.

그때, 옆에서 기계적인 셔터음과 함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만하세요. 두 사람 다 여기서 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백연이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소형 카메라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관리실 메인 콘솔의 데이터를 무섭게 스캔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차분했다. 자기 존재의 근간인 기록자 후보라는 낙인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그녀는 그 혼란을 정보 처리의 동력으로 치환하고 있었다.

"백연 씨, 지금 그게 중요해? 서하 씨 팔찌가...!"

"중요해요. 도윤 씨 손바닥을 보세요. 그리고 이 모니터를 봐요."

백연의 말에 내 손바닥을 펼쳤다. 아까 시스템에 입력했던 미완성 이름 조각들. 열두 아이의 파편화된 이름들이 화상 자국처럼 낙인찍혀 있었다.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되어 내 살점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연이 가리킨 모니터. 지지직거리며 꺼져가는 화면 속에는 '3차 반출 경로'라는 타이틀과 함께 복잡한 지도가 떠 있었다.

"로그 확인 완료. 시스템이 도윤 씨를 'Origin'으로 식별하면서 잠시 보안이 풀렸어요. 그 틈에 긁어모은 데이터예요. 보세요. [AG-702 보관명: 반가온(Ban Ga-on)]."

"반가온...?"

내 입에서 그 이름이 튀어나왔다. 얄미울 정도로 유능하고, 속을 알 수 없던 그 감정사 녀석의 이름. 그런데 백연의 표정은 어두웠다.

"단순한 이름이 아니에요. 경로 파일명 끝에 붙은 태그를 보세요. 이건 인명(人名) 분류가 아니라, 보관물 분류 코드예요. 'AG-702'라는 물체 혹은 실험체에 붙은 '보관명'이 반가온이라는 뜻이라고요."

"그게 무슨... 가온이가 물건이라는 거야?"

윤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손목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연은 대답 대신 모니터의 마지막 좌표를 촬영했다.

"좌표는 반가온 씨의 감정소 위치와 일치해요. 하지만 지번이 달라요. 실제 주소가 아니라, 아주 오래전에 폐쇄된 던전 부산물 보관창고의 관리 코드예요. 즉, 우리가 아는 감정소 지하 어딘가에 이 시스템의 '보관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죠."

툭, 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완전히 암전됐다. 관리실의 보조 전력마저 바닥난 모양이었다.

그와 동시에 복도 끝에서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철벙. 철벙.

검은 물이 차오르는 소리. 하지만 아까처럼 우리를 집어삼키려는 기세는 아니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검은 액체는 특정한 방향을 향해 형광색 잔흔을 남기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앞장서서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검은 우산인가?"

나는 신생아 팔찌를 쥔 주먹에 힘을 줬다. 손바닥의 화상 자국이 다시 화끈거렸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잔향청취'가 멋대로 활성화되며 머릿속에 아이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가온 형...

가온이 형, 추워.

저 형은 왜 안 나가? 왜 우리만 가야 돼?

아이들의 목소리 속에 '가온'이라는 이름이 섞여 있었다. 2차 반출. 열두 명의 아이. 그리고 그들을 형이라 부르며 따랐던 존재. 소름이 돋았다. 반가온은 단순한 감정사가 아니라, 이 끔찍한 기록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당사자였던 걸까.

"치익... 도윤아... 강도윤."

관리실 천장의 낡은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태식이었다.

"아저씨! 문 아저씨! 어디예요? 들려요?"

윤서하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스피커 아래로 달려갔다.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대답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송출, 혹은 과거에 남겨진 잔향의 재생이었다.

"AG-702는... 열지 마라. 그건... 보관되어야만 한다. 절대로, 이름을... 불러선 안 돼..."

"아저씨! 지금 어디 있냐고! 대답해!"

윤서하의 외침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잡음 속에서 문태식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게 살아있는 그의 통신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의 잔상인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관리실 더 깊숙한 곳, 우리가 가야 할 경로와 반대 방향이라는 점이었다.

윤서하가 발을 떼려 했다. 문태식을 찾으러, 저 어둠 속으로 다시 뛰어들 기세였다.

"안 돼요, 서하 씨!"

나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 강도윤. 아저씨가 저기 있다고."

"지금 가면 다 죽어요! 백연 씨가 확보한 좌표, 이거 시간 지나면 시스템이 다시 잠가버릴지도 몰라요. 아저씨 목소리... 저거 함정일 수도 있다고!"

"함정이라도 가야 해. 나 때문에 저 안에 들어간 사람이야!"

윤서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팔찌 과부하로 손목은 엉망이 되었는데도, 그녀는 고집스럽게 칼집을 고쳐 쥐었다. 나 역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문태식은 나에게도 단순한 헌터 선배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세요."

백연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시렸다.

"문태식 씨의 로그는 지금 이 경로 지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요. 오히려 저 검은 물이 만드는 길... 저게 문태식 씨가 남긴 마지막 흔적일 가능성이 높아요. 지금 우리가 저쪽으로 가면 좌표를 잃고, 좌표를 잃으면 반가온과 이 모든 일의 원본을 찾을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돼요. 그러면 문태식 씨가 희생한 의미도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무슨... 그런 잔인한 소리가 어디 있어!"

윤서하가 백연의 멱살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녀를 억지로 붙들어 세웠다.

"서하 씨, 제발! 나도 아저씨 구하고 싶어! 그런데... 저 목소리가 하지 말라잖아. 열지 말라잖아. 그건 우리가 지금 가야 할 곳에 답이 있다는 뜻이야. 아저씨를 버리는 게 아니라, 살릴 단서를 찾으러 가는 거라고!"

윤서하는 내 품에서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검은 물이 출렁이며 복도를 메우는 게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퇴로를 골라야만 했다.

"젠장... 진짜 젠장...!"

윤서하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손목에서 흐른 피가 내 옷소매를 적셨다. 우리는 문태식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어둠을 등지고, 백연이 가리킨 반출 경로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복도는 미로 같았다. 천장에서는 정체 모를 액체가 떨어졌고, 벽면에는 'AG'로 시작하는 수많은 일련번호가 낙서처럼 새겨져 있었다. 형광 잔흔을 따라 도달한 곳은 폐쇄된 물류 리프트 앞이었다.

"이거, 작동 안 할 것 같은데."

내가 리프트의 녹슨 버튼을 누르자,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철창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은 곰팡이 냄새와 먼지로 가득했다.

"타세요. 좌표상으론 이 리프트가 지하 보관창고 구역과 연결돼요."

백연이 먼저 리프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나도 서하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리프트가 덜커덩거리며 하강을 시작했을 때,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금속 케이스였다. 겉면은 찌그러지고 여기저기 긁혀 있었지만, 정면에 붙은 배송 라벨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AG-702]

[분류: 영혼 감정 샘플 (Soul Appraisal Sample)]

[보관명: 반가온(Ban Ga-on)]

[상태: 비어 있음]

케이스는 열려 있었다. 안쪽 완충재에는 손바닥만 한 눌린 자국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오래전에 내용물을 꺼내 들고, 케이스만 이 리프트에 던져 놓은 것 같았다.

내 손이 그 금속 케이스에 닿는 순간, 뇌를 관통하는 것 같은 강렬한 공명음이 터져 나왔다.

윙-!

"아악!"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손바닥의 화상 자국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비어 있는 케이스 안에서, 수만 개의 바늘이 튀어나와 내 고막을 찌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음의 숲을 헤치고, 아주 익숙하고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도윤.

반가온이었다. 평소처럼 나른하면서도 뼈가 박힌, 비웃는 듯한 그 목소리.

이걸 듣고 있다는 건, 네가 마침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다는 뜻이겠지.

내 호흡이 멎었다. 리프트는 점점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고 있었다.

지금쯤 머릿속이 꽤나 복잡할 거야. 내가 사람인지, 아니면 저 케이스 안에 담겨 있던 물건인지 헷갈리고 있겠지.

목소리에서 비릿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정답을 알려줄까? 일단 둘 다 아니라고 해두자.

자, 이제 거의 다 왔다. 문이 열리기 전에 선택해. 네가 그토록 찾던 '원본'을 보러 올지, 아니면 여기서 문태식 이름만 붙잡고 같이 가라앉을지.

리프트가 쿵, 하고 멈췄다.

철창문 너머로 어두운 지하 창고의 윤곽이 얇게 드러났다. 수천 개의 금속 케이스가 산처럼 쌓인 듯한 그림자. 그 사이에서 검은 우산 끝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번 울렸다.

아직 문은 반쯤밖에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알았다. AG-702는 장소 이름이 아니었다. 보관실 번호도 아니었다. 우리 셋이 다음 발을 내딛는 순간, 사람의 이름과 물건의 이름이 같은 꼴로 묶여 있던 이유가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바닥의 화상 자국을 감싸 쥐었다.

반가온.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 그 녀석을 담았던 케이스가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아직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275화. 비어 있는 케이스

치익, 기계음보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물류 리프트는 제 위치에 멈추지 못했다. 바닥보다 한 뼘 정도 높은 곳에서 덜컥거리며 멈춘 문은, 마치 누군가 억지로 비틀어 열어젖힌 것처럼 반쯤 어긋난 채 멈춰 있었다. 틈새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수십 년 묵은 먼지와 코를 찌르는 독한 약품 냄새였다.

“……도착한 건가?”

윤서하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왼팔은 이미 엉망이었다. 슬롯 과열로 인해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번진 붉은 선들이 마치 살아있는 실핏줄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고통스러울 텐데도 그녀는 도검의 자루를 꽉 쥔 채 앞장을 섰다.

리프트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듯 빠져나오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반가온의 감정소가 아니었다.

“여기, 창고잖아.”

내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튀어 나갔다.

사방이 온통 금속제 보관 케이스였다. 천장 끝까지 닿을 듯이 층층이 쌓인 케이스들은 거대한 묘비처럼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 선반 위에는 낡은 배송 라벨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바닥에는 누군가 일부러 흘리고 간 듯한 검은 우산의 젖은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리프트 안에 두고 내린, ‘AG-702’라고 적힌 빈 케이스에서 익숙하고도 재수 없는 목소리가 울린 건.

— 거봐, 내가 말했지. 내가 사람인지 케이스 안에 담겨 있던 물건인지 헷갈릴 거라고.

반가온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케이스 안쪽 바닥에 고여 있던 잔향이, 내가 케이스를 만졌던 감촉을 타고 뇌 안쪽으로 직접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 정답은 일단 둘 다 아니라고 해두자고. 내 이름, 그거 내가 고른 거 아니거든. 근데 더 웃긴 건 뭔지 알아? 이 보관명조차도 원래는 내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반가온, 이 자식아.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장난칠 상황 아니라고.”

나는 허공을 향해 꽥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내 목소리의 공허한 메아리와, 옆에서 나를 미친놈 보듯 바라보는 윤서하의 시선뿐이었다.

“강도윤 씨, 누구랑 대화하는 거예요?”

“그… 있잖아요. 재수 없는 목소리. 지금 이 케이스에서 계속 들리는데.”

“들리는 게 아니라, 당신한테만 잔향이 전이된 거겠죠. 제 눈엔 그냥 빈 철통으로 보여요.”

윤서하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는 리프트에서 떨어진 케이스를 발로 툭 차서 멀찌감치 밀어냈다. 문태식 소장님의 경고가 여전히 그녀의 귓가를 맴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윤아, AG-702는 열지 마라.’

그 목소리가 녹음된 것이든 잔향이든, 윤서하에게는 절대적인 명령과도 같았을 터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열지 말라고 해서 안 열었으면, 나는 진작에 이 바닥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잤을 거다.

“강도윤 씨, 건드리지 마세요. 소장님이 경고하셨어요. 이건 위험해요.”

“윤서하 씨, 이미 비어 있다니까요? 열지 않는 거랑 안 보는 거랑은 다르죠. 여기 뭐가 있었는지 알아야 우리가 이 미친 미로에서 나갈 거 아니에요.”

“그게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함정이라도 밟아야 다음 칸으로 갈 거 아닙니까. 여긴 제자리걸음만 하기엔 너무 춥고 냄새나거든요.”

내 빈정거림에 윤서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가 더 반박하려던 찰나, 백연의 카메라 플래시가 연속해서 터졌다.

번쩍, 번쩍.

백연은 무아지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불안을 렌즈 너머로 밀어 넣기라도 하려는 듯, 벽면에 붙은 라벨들을 미친 듯이 찍어대고 있었다.

“……찾았어요.”

백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은 구석진 선반,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은 케이스 더미였다.

“이 번호들, 아까 강도윤 씨 손바닥에 남았던 아이들 이름 조각이랑 일치해요. 초성 코드랑 팔찌 분류 번호가…….”

백연의 손가락이 가리킨 라벨에는 ‘S-102’, ‘K-405’ 같은 기호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작게 적힌 이름의 파편들.

[보관물: ㄱ-ㅇ-ㅎ]

[보관물: ㅇ-ㅈ-ㅇ]

아이들의 이름이었다. 열두 아이의 흔적이 이곳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연이 다음 라벨로 렌즈를 돌리다가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왜 그래요?”

내가 다가가 카메라 액정을 들여다봤다. 거기엔 다른 라벨들과는 조금 다른 형식의 코드가 적혀 있었다.

[분류: B-Y-09 / 상태: 폐기 보류 / 비고: 적합성 검사 대기]

백연의 코드였다. 그녀가 이곳에 실험체로 있었음을 증명하는 낙인. 그녀는 한동안 셔터를 누르지 못한 채 얼어붙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백연 씨, 사진 찍어요. 안 찍으면 저거 다 가짜 되는 거야. 기록해야 진짜가 된다면서요.”

내 말에 백연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셔터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찰칵, 찰칵. 그 소리가 이 정적뿐인 창고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박동처럼 들렸다.

그때,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물이 꿈틀거렸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검은 액체는, 공격적으로 덮쳐오는 대신 아주 천천히 바닥을 적시며 길을 만들었다. 마치 안내자라도 자처하는 것처럼. 물길이 닿는 곳마다 먼지에 가려졌던 라벨들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검은 물줄기는 창고 중앙에 놓인 가장 커다란 케이스 밑에서 멈췄다.

“저거네요. AG-702.”

내가 그 케이스로 다가가자, 잔향청취가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시야가 일그러졌다. 창고의 풍경 위에 과거의 잔상이 겹쳐졌다.

낡은 감정용 장갑을 낀 어린아이의 손이 보였다. 나이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지금의 반가온과 똑같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케이스 안에 앉아 있었다. 무서워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케이스 밖으로 다른 아이들을 한 명씩 밀어내고 있었다.

— 너희는 먼저 가. 난 여기서 할 일이 좀 있거든.

소년의 앞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아이가 서 있었다. 낡은 헌터 코트를 걸친, 하지만 체구는 훨씬 작은 아이. 소년은 그 아이를 보며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우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 네 이름, 내가 빌릴게. 어차피 넌 이제 그 이름 못 쓰게 될 테니까.

— ……그럼 내 진짜 이름도 나중에 찾아줘.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어린 시절의 나인지, 아니면 나를 대신해 죽어간 누군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대화가 끝나는 순간, 소년은 스스로 케이스의 문을 닫았다.

철커덕.

그 소리와 함께 잔상이 흩어졌다. 현실의 내 손은 AG-702 케이스의 뚜껑에 닿아 있었다.

“강도윤 씨! 비켜요!”

윤서하가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그녀의 눈은 케이스 옆면에 붙은 마지막 라벨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연이 플래시를 터뜨리며 그 라벨을 선명하게 포착했다.

[코드: AG-702]

[보관명: 반가온(Ban Ga-on)]

[원본명: 미등록]

[임시 소유자: 강도윤]

[확인자: 문태식]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임시 소유자…… 나?”

내가 반가온의 주인이라고? 아니, 애초에 반가온이 물건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밑에 적힌 이름은 더욱 믿기 힘들었다. 문태식. 소장님이 이 기록을 확인했다는 뜻이다. 그가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나에게 ‘열지 마라’고 했던 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진실을 덮기 위해서였나.

“소장님이…… 왜 여기에…….”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에게 문태식은 단순한 상사 그 이상이었다. 부모 같은 존재이자 길잡이였던 그가, 이런 끔찍한 보관소의 확인자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철컥. 철컥. 철컥철컥철컥!

창고 안에 있는 수천 개의 금속 케이스들이 동시에 잠금 해제음을 냈다.

마치 수천 마리의 금충이 일제히 이빨을 맞부딪치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윤서하가 검을 뽑아 들고 나를 방어했지만, 케이스들은 열리지 않았다. 오직 잠금장치만 풀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던 AG-702 케이스의 틈새에서, 낡은 종이 한 장과 함께 묵직한 물체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굴러 나온 것은 금속제 출입증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것을 집어 들었다.

[한국 헌터 협회 감식반 - 문태식]

소장님의 옛 출입증이었다. 사진 속 소장님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눈매는 날카로웠다. 출입증은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뒷면에는 방금 쓴 것처럼 선명한 볼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출입증을 뒤집었다.

거기엔 소장님의 거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도윤아,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겠지.]

글귀는 다음 문장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AG-702를 열지 마라. 그리고 만약 열게 된다면,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해라.]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소장님의 출입증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경고는 화상처럼 뜨거웠다.

나를 보호하던 세계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내 보호자는 공범인가, 아니면 이 거대한 연극의 연출가인가.

— 어때, 이제 좀 재미있어지지?

반가온의 환청이 다시 한번 귓가를 스쳤다. 이번에는 비웃음이 아니라, 아주 지독한 동정처럼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어둠이 짙게 깔린 창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물은 이제 보관함들 사이로 깊숙이 스며들어, 마치 거대한 아가리처럼 우리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장님…….”

윤서하가 내 손에 든 출입증을 보며 멍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손목에 번진 붉은 선들이 더욱 짙게 타올랐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했다.

그를 믿고 이 자리를 떠날 것인지, 아니면 그가 의심하라고 했던 그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 금기의 케이스를 마저 열 것인지.

나는 천천히 AG-702의 뚜껑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오래 식은 피부처럼 손가락을 감쌌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