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9화. S급 대기실의 이름표
제목: 18화. S급 대기실의 이름표
빨간색 경보등이 보일러실의 몽글몽글한 스팀을 피바다처럼 적셨다. 시야가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불청객들은 당황이라는 감정을 거세당한 침착한 기계 같았다. BG-04 요원 셋이 스팀을 뚫고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전술 부츠가 바닥의 물기를 밟는 소리조차 규칙적이었다.
"대상 확인. KDY-불완전 복구 개체."
방독면을 쓴 선두 요원의 목소리는 변조기를 거쳐 건조하게 울렸다. 그가 내뱉은 '불완전 복구 개체'라는 말이 내 왼쪽 가슴을 쿡 찔렀다.
제길,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내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꽉 쥔 주먹 안에는 한지율의 복사 장치가 들어 있었다. 윤서하 원본의 위치가 적힌, 그 마지막 희망. 하지만 내 손 자체가 문제였다. 손가락 끝이 시차를 두고 번져 보였다. 내가 주먹을 꽉 쥐었다고 생각한 순간, 0.5초 뒤에야 내 시각 정보가 그 행동을 따라잡았다.
다리 쪽은 더 심했다. 오른쪽 발목이 바닥을 디디고 있는데, 그림자는 엉뚱하게 10센티미터 옆에 떨어져서 미친 듯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몸뚱이가 렉 걸린 서버마냥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KDY 원본 태그를 단말에 꽂아 데이터의 닻은 내렸지만, 내 존재의 껍데기가 여전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뒤로 물러서요."
한지율이 내 앞을 막아서며 낮게 읊조렸다. 그녀는 자기 점퍼 지퍼를 허리춤까지 확 내렸다. BG-04 요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가슴팍, 정확히는 그 안쪽에 붙어 있는 'YSH' 윤서하 라벨 조각으로 쏠렸다.
그녀는 영리했다. 지금 이놈들의 목표는 보일러실의 무단 침입자가 아니라, 사라진 S급 수사협조관의 데이터다. 한지율은 복사 장치가 내 주먹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를 미끼로 던졌다.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했지만, 허리춤에 닿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윤서하 협조관의 잔존 데이터 확인. 절차 1단계 진행."
요원들은 폭력을 쓰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그들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치워야 할 오염 물질이나, 수거해야 할 파손된 증거물로 취급했다.
"민간 협조자 분리. 증거물 1호(KDY) 및 2호(YSH 라벨) 봉인 준비."
두 명의 요원이 양옆으로 찢어지며 우리를 포위했다. 가운데 요원이 허리춤에서 투명한 특수 플라스틱 케이스를 꺼냈다. 저건 비인가 기억 매체를 회수할 때 쓰는, 마나 차폐 쉴드가 겹겹이 두른 물건이다. 저 안에 내 태그가 담기는 순간, 나는 다시 그 지옥 같은 무채색 복도로 사출될 터였다.
두려움이 목을 죄어올 때, 내 빌어먹을 능력은 눈치 없이 터졌다.
(찌이익-! 아야, 야, 살살 좀 뜯어! 이 멍청한 놈들아!)
보일러실 단말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BG-04의 노란색 봉인 테이프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음의 비명이 들렸다. 그 비명 소리 위로, 요원이 든 케이스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쳤다.
(수거 완료. 수거 완료. 규격 외 데이터는 폐기 처분. S급 대기실은 클린 존. 외부 태그 반입 불가. 예외 코드 MTS-7741. 승인자: 관리국 내부 권한.)
나는 숨을 들이켰다. 케이스의 잔향이 내뱉은 정보. S급 수사협조관 대기실은 원래 외부 감식반이나 수사관의 태그조차 들어갈 수 없는 이중 격리 구역이다. 그런데 그곳에 'YSH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누군가 관리국의 최고급 내부 권한을 이용해 그곳에 원본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는 소리다. 예외 코드에 'MTS'가 들어간다. 문태식 팀장. 그의 코드가 이 부정한 격리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한 짓인지, 아니면 누가 그의 코드를 도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이름이 이 은폐의 문고리 어딘가에 걸려 있다는 건 확실했다.
"협조하지 않을 경우, 불완전 복구 개체의 데이터 강제 소각 프로세스를 가동하겠다."
가운데 요원이 차가운 경고와 함께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방독면 렌즈에 내 찌그러진 모습이 비쳤다.
주먹을 펴서 복사 장치를 내주는 순간, 윤서하의 유일한 단서는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하 보일러실에서 BG-04에 의해 '청소'될 것이다. 한지율이 나를 지키려다 같이 쓸려나가는 꼴은 죽어도 보기 싫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내 주먹을 지킬 것인가, 한지율을 지킬 것인가.
내가 겁쟁이인 건 맞다. 죽는 게 무서워서 남의 사망 플래그나 줍고 다니는 놈이니까. 하지만 증거를 눈앞에서 놓치는 건, 죽는 것보다 더 체질에 안 맞았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이 고생을 한 사람을 버리는 건,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아, 진짜... 출력 안정화 코드를 누가 이따위로 짰어!"
나는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의 불안정함을 역이용하기로 했다. 왼쪽 다리의 시차를 억지로 늘렸다. 발목이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의도적으로 왼쪽으로 무너졌다. 내 그림자가 엉뚱한 방향으로 요동치며 요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왼팔을 바닥 쪽으로 세차게 휘둘렀다. 내 왼손이 흐릿하게 번지며 BG-04 요원의 손을 비껴갔다. 목표는 내 발치에 있던, 녹슨 창살로 덮인 바닥 배수구였다.
주먹을 펴는 순간, 시차 때문에 복사 장치가 내 손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깡!' 하는 금속음과 함께 무언가 창살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
요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가 나를 제압하려 손을 뻗었을 때, 내 뒤에 있던 한지율이 움직였다.
"이거나 먹어라!"
그녀가 보일러실 주 배관의 수동 밸브를 발로 걷어찼다. 끼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압력의 고온 스팀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보일러실 전체가 하얀 지옥으로 변했다. BG-04 요원들의 첨단 열감지 센서와 시야가 스팀의 고열과 습기에 짓눌려 무력화되었다.
나는 배수구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복사 장치는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나는 놈이 어디로 가는지 들어야 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30년 만에 움직이려니 관절이 다 비명을 지르네! 임무? 또 무슨 임무야, 이 폐기물 처리반 놈들아!)
배수구 안쪽, 오물과 녹에 절어 있던 아주 오래된 청소 드론 잔해의 목소리였다. 잔향 속에서 드론은 투덜대면서도, 깡통 로봇 특유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바닥에 떨어진 복사 장치를 입에 물었다.
(S급 대기실 폐수 배관으로 우회. B구역 세탁실 뒤편 점검구와 연결됨. 경로 고정. 아, 기름칠 좀 해달라고 했잖아, 진짜!)
폐기물 드론의 찰진 욕설과 함께 복사 장치가 지하 배관의 어둠 속으로, 요원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흘러갔다. 다음 경로가 확보되었다. B구역 세탁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스팀이 조금씩 걷히자, 가운데 요원이 내 왼쪽 가슴의 KDY 태그를 향해 집게 모양의 봉인 도구를 뻗었다.
"증거물 임시 봉인 절차 돌입."
도구가 내 태그에 닿는 순간, 낙인이 찍히는 듯한 극심한 통열이 전신을 때렸다. 태그가 뜨겁게 달아오르며 내 존재의 데이터가 종이처럼 구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복사 장치는 보냈지만, 내가 여기서 완전 봉인당하면 끝이었다.
그때, 한지율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이거 가져가고 싶으면, 나부터 죽여!"
그녀가 자기 가슴팍에 붙은 'YSH' 라벨의 한쪽 귀퉁이를 잡고 신경질적으로 찢어발겼다. 찍-!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라벨의 천 조각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라벨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겉면에 새겨진 데이터 그리드가 뒤틀렸다.
"안 돼! 증거물 2호 훼손 발생! 즉시 수거 및 복구 절차로 변경!"
BG-04 요원들의 행동 양식이 단번에 바뀌었다. 내 태그를 봉인하려던 요원이 즉시 도구를 거두고 한지율에게 달려들었다. 규격 외 데이터(나)의 봉인보다, S급 협조관의 데이터(라벨) 보호가 그들의 프로토콜상 최우선 순위였던 것이다.
그녀가 찢어낸 건 라벨의 겉면, 즉 가짜 데이터 일부였다. 원본 데이터를 담은 핵심 칩은 여전히 그녀의 점퍼 안쪽에 무사했다. 한지율은 자신의 라벨을 찢는 척하며 그들의 절차를 꼬이게 만들었고, 결정적인 시간을 벌었다.
"이 미친... 너 진짜..."
나는 구겨졌던 존재가 다시 펴지는 고통 속에서도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무모함이, 아니 그 과감한 판단력이 우리를 살렸다.
"도망쳐요! 세탁실로!"
한지율이 BG-04 요원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우리는 체포되지도 않았지만, 보일러실에서 완전히 탈출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스팀의 여운을 틈타 요원들을 따돌리고, 배수구 너머 드론이 알려준 세탁실 점검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반쯤 복구된 몸으로, 내 존재가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공포를 빈정거림으로 누르며 뛰었다. 내 이름표는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 의지로 움직이고 있었다.
배수구 안쪽 깊숙한 곳, 청소 드론의 잔향이 멀어지며 마지막으로 투덜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내 귀에 꽂혔다.
(S급 대기실 보관함 7번. 아주 상전이 납셨어. 근데 거기는 참 이상해. 이름표는 분명 하나인데, 숨소리는 둘이거든. 깡통 주제에 귀가 밝아서 탈이야, 에휴.)
나는 달리던 걸음을 멈칫할 뻔했다. 이름표는 하나인데, 숨소리는 둘이라니.
YSH 원본 태그 옆에, 또 다른 무언가가 숨 쉬고 있다.
작가의 말: 이름표 하나에 숨소리 둘, 협회 보관함은 늘 사람보다 수상합니다.
제목: 19화. 세탁실 뒤 점검구
"왼발 놓고, 반 박자 쉬고, 오른발."
나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좁고 어두운 서비스 복도를 기어갔다. 내 몸은 지금 엉망진창이었다. BG-04의 공격에 분해되었다가 급하게 재조립된 탓에, 현실과의 동기화가 자꾸 어긋났다. 눈앞에 손잡이가 보여서 잡으려 하면, 내 손은 이미 0.5초 전에 거기를 지나쳐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내 그림자는 벽에 비치지도 않는데, 발치에서는 낯선 기계음 섞인 코골이 소리가 들렸다.
"강도윤 씨, 좀 속도를 내죠? BG-04는 절차를 따르지만, 그 절차에 '지체 보상'은 포함되어 있지 않아요."
내 미끼를 자처했던 한지율이 내 뒤에서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윤서하의 YSH 라벨 겉면을 찢어 발기는 대담한 연기로 BG-04의 우선순위를 뒤틀어놓았지만,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이게 최고 속돕니다. 안 그러면 제 멘탈이 제 육체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퇴근할 것 같거든요."
나는 빈정거리며, 계단 난간에 어긋나게 걸쳐진 내 팔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복사 장치를 지키기 위해 바닥 배수구로 던져버린 대가는 혹독했다. 잔향청취로 청소 드론의 잔해가 그것을 물고 B구역 세탁실 뒤 점검구로 갔다는 건 알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 자체가 생존 투쟁이었다.
세탁실 문을 열자, 뜨거운 증기와 함께 소독제와 눅눅한 오염물의 악취가 확 풍겨왔다. 협회 지하 직원들과 요원들이 전투와 작업 끝에 묻혀온 온갖 '이물질'들이 여기서 뒤섞여 세탁되는 곳이다.
방호복 수십 벌이 천장에 매달려 대형 세탁기 옆에서 건조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목 매단 시체들 같아서, 나는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젖은 우산꽂이에는 검은색 우산 손잡이 하나가 잠깐 보였다가, 스팀에 가려져 사라졌다.
"칩은 살아 있어요."
한지율이 찢어진 척했던 YSH 라벨의 겉면을 손바닥 위에서 다시 맞춰 보며 말했다.
"하지만 물리적인 손상이 가해졌기 때문에, 라벨 내부의 자체 보호 프로그램이 가동됐어요. 이대로 놔두면 3시간 뒤에 데이터가 자동 소거돼요. 그 전에 원본 태그에 접근해서 동기화해야 해요."
"그 원본 태그가 있는 곳이 S급 대기실 보관함 7번이고, 그리로 연결되는 통로가 이 세탁실 뒤 점검구라는 거죠?"
나는 침을 꿀깍 삼키며, 벽면에 일렬로 늘어선 대형 세탁기들을 바라보았다. 잔향들이 사방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기, 저기요! 제 이름표 좀 떼지 마세요! 저 누군지 알잖아요!"
이름표 없는 근무복 더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서글펐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러웠다.
"어머, 이 방호복은 무슨 냄새래? 헌터님들, 제발 토사물은 좀 털고 오시지."
세탁기 하나는 아예 하이힐을 신은 여자의 목소리로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잔향을 걸러냈다. 정보가 필요했다. 내 능력은 지금 내 몸만큼이나 불안정했다. 목소리들이 섞여들고, 때로는 잡음만 들렸다.
"…7번 배관… 일반 폐수… 아니야… '기억 세척 라인'… 조심해… 태그가 녹아버릴 거야…"
건조기 아래, 오래된 파이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물속에서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기억 세척 라인? 태그의 잔향을 씻어내는 용도라고? 청소 드론이 복사 장치를 그곳으로 가지고 갔다면, 그 안의 데이터도 위험할 수 있었다.
"젠장, 시간이 없어요. 그 배관, 그냥 폐수관이 아니라 태그 데이터를 날려버리는 곳이래요."
내 말에 한지율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세탁기들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나도 몸의 시차를 억지로 맞추며 그녀를 따랐다.
세탁기 뒤편, 수많은 배관과 전선들이 뒤엉킨 벽면에 철제로 된 점검구가 보였다. 손잡이는 없고, 대신 작은 LED 패널과 접촉식 센서가 달려 있었다.
"이거예요."
한지율이 패널을 만져보았지만, 붉은색 불빛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예상대로네요. 생존자 인증 태그가 필요해요. 이 구역에 접근 권한이 있는, 죽지 않은 헌터의 태그요."
그녀의 시선이 내 가슴팍에 달린 KDY 태그로 향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쓰면, 제 태그는 어떻게 되는데요? 지금도 반쯤 복구된 증거물 상태인데, 이거 쓰면 저 진짜로 증거물 임시 봉인함으로 직행하는 거 아닙니까?"
"손상은 피할 수 없겠죠. 하지만 열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죽어요. BG-04가 오고 있어요."
마치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탁실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천장의 환풍구가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단되었다. BG-04는 우리를 직접 쫓는 대신, 이 공간을 봉인하고 통제하려는 것이다. 산소 공급이 끊길 것이고, 배수 흐름이 바뀌어 우리가 있는 곳으로 폐수가 역류할 수도 있다. 이것이 협회의, 절차의 공포였다.
"도윤 씨, 선택해요. 지금 당장 증거물로 분류될 위험을 감수하고 점검구를 열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서서히 질식해 죽을 것인가."
한지율의 목소리는 차가울 정도로 냉정했다. 그녀는 내 두려움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저 현실을 보여줄 뿐이었다.
나는 내 KDY 태그를 만지작거렸다. 이 조그만 플라스틱 조각에 내 목숨과, 내가 지켜야 할 증거들이 달려 있다. 나는 겁쟁이다. 하지만 증거를 눈앞에서 놓치는 겁쟁이는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미끼로 삼으면서까지 나를 지키려 했던 한지율을, 이 눅눅한 세탁실에 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아, 진짜. 선택 비용 한번 드럽게 비싸네."
나는 빈정거리며 KDY 태그를 점검구 패널에 갖다 댔다.
치이익!
뜨거운 증기가 내 손등을 때리는 것 같았고, 동시에 내 뇌가 직접 전기에 지져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 몸의 시차가 갑자기 수백 배로 증폭되는 느낌이었다. 내 오른손은 패널을 누르고 있는데, 내 의식은 이미 10초 뒤의 미래에서 내 시체가 되어 세탁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으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패널을 꽉 눌렀다. 동시에 내 잔향청취 능력이 폭주했다. 세탁실의 수많은 이름 없는 근무복들이 하나같이 내 귓가에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 7번 보관함 봤어!" "나도! 거기서 이상한 냄새 났어!" "이름표는 윤서하인데, 숨소리는 둘이었어!" "아니야, 세 명이야!"
그 와중에, 내 발치에 굴러다니던, 낡고 빛바랜 근무복 한 벌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윤서하가 두 번 퇴근했어."
그게 무슨 뜻이지? 윤서하가 두 명이라는 건가, 아니면 한 명이 두 번 퇴근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건가?
"문이 열려요! 8초! 그 안에 회수해야 해요!"
한지율의 외침에 정신을 차렸다. 점검구가 드디어 크륵거리며 열렸다. 그 안으로는 검은색 폐수관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중 하나가 '기억 세척 라인'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었다.
내 몸은 이미 한계였다. 팔을 뻗으려 해도, 내 팔은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휘어졌다. 시차가 너무 커서,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조차 불확실했다.
"내가 갈게요. 도윤 씨는 태그만 유지해요!"
한지율이 점검구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젖은 방호복을 내 KDY 태그와 점검구 패널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소독액을 들이부었다.
"이게 뭐 하는…?"
"임시 접지 겸 차폐예요. 태그 손상을 줄여줄 거예요. 하지만 오래는 못 버텨요!"
그녀의 말대로, 내 뇌를 지지는 통증이 조금은 잦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몸의 시차는 끔찍했다. 나는 이 끔찍한 순간을 견디기 위해, 또다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협회는 소독액을 이런 데 쓰라고 요원들에게 지급하는 모양이죠? 참 알뜰살뜰한 조직이야."
"시끄러워요!"
한지율이 기억 세척 라인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는 게 보였다.
"찾았어요!"
그녀가 손을 빼내는 순간, 점검구 패널의 LED가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바뀌며 번쩍거렸다. 내 태그의 잔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였다.
"으악, 꺼져! 다 꺼져!"
나는 태그를 떼어내고 바닥에 뒹굴었다. 점검구는 굉음을 내며 닫혔다. 한지율도 내 옆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그녀의 손에는 오물과 소독액으로 범벅이 된 복사 장치가 들려 있었다.
"하… 하하. 해냈네요."
내가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몸의 시차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분해되지는 않았다.
한지율은 곧바로 복사 장치를 가동했다. 장치는 소독액에 절어 있었지만, 기적적으로 작동했다. 화면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데이터가 복구되어 떠오르고 있었다.
[...보관함 7번 / YSH 원본 태그 / 동시 호흡 감지 / 보조명: HJY...]
HJY.
나는 그 이니셜을 본 순간, 몸서리를 쳤다. HJY? 한지율? 아니면 또 다른 인물? 한지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처럼 냉정했지만,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이 이니셜을 보고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한지율 씨, 혹시 이 HJY가…?"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세탁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갑자기 치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우리가 그렇게 찾고 있는, 그리고 나를 이 지옥으로 끌어들인 장본인의 목소리였다.
[강도윤 씨, 제 이름표를 열지 마세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그녀가 지금 내 바로 옆에 서서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그것이 실제 그녀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위조된 녹음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나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스피커를 올려다보았다. 세탁실의 눅눅한 공기가, 갑자기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작가의 말: 열지 말라는 이름표일수록 열어야 할 이유가 생깁니다.
✦ 작가의 말
이름표 하나, 숨소리 둘. 협회가 숨긴 방으로 한 칸 더 들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