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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화. 열지 말라는 이름표 일러스트

20-21화. 열지 말라는 이름표

제목: 20화. 열지 말라는 이름표

지직, 지지직.

습기로 가득 찬 세탁실 스피커가 비명을 질렀다. 낡은 배관들이 공명하며 내는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 일부러 주파수를 뭉개버린 듯한 기괴한 잡음이었다.

그 노이즈 너머로, 목소리가 뚫고 나왔다.

[…강도윤 씨. 제 이름표를 열지 마세요.]

얼어붙었다.

내 이름, 강도윤.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KDY-불완전 복구 개체’로 떨어진 지 한 시간도 안 된 이름이, S급 수사협조관 윤서하의 목소리로 불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하지 않았다. 물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먹먹했고, 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 공포인지 급박함인지 알 수 없는 떨림이 세탁실의 습기와 같이 살에 달라붙었다.

한지율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윤서하의 원본 태그 데이터가 복사된 단말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방금… 저 목소리….”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글쎄. 진짜 윤서하일까, 아니면 이 죽어가는 태그가 내뱉는 마지막 헛소리일까.”

“열지 말라고 했잖아요.”

한지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그녀가 열지 말라고 하면, 이유가 있는 거예요. S급의 경고는 F급이 무시해도 되는 성질의 게 아니라고요.”

“S급의 경고라서?”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한지율 씨. 난 반대로 생각하는데.”

나는 단말기의 화면을 톡톡 쳤다. 여전히 그곳엔 [YSH 원본 태그 / 동시 호흡 감지 / 보조명: HJY...]라는 텍스트가 깜빡이고 있었다.

“협회에서 ‘봉인’이니 ‘폐기’니 하는 건 전부 ‘열어봐야 할 것’들이었어. ‘열지 마라’는 건, 그 안에 그들이 숨기고 싶은 치명적인 사망 플래그가 들어있다는 뜻이거든.”

지금 내 꼴을 봐라. KDY 원본 태그를 단말에 꽂았다가 존재 불안정이 심해져서 손끝이 흐릿해지고 있다. 협회는 내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이터를 인질로 삼고 나를 지우려 한다.

그런 협회의 핵심 전력인 윤서하가 열지 말란다. 그렇다면 이건, 반드시 열어야 한다. 그 안에 그녀의 약점이든, 협회의 치부든,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든 뭐가 있을 게 분명하니까.

“고집부리지 마요! 이거 열었다가 정말로 감당 못 할 일이 터지면, 그땐 복구고 뭐고 다 끝장이에요!”

한지율이 내 손을 낚아채려 했다.

“이미 끝장났어!”

나는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저기 밖에서 BG-04들이 분류표 들고 우리 기다리는 거 안 보여? 지금 안 열면, 우린 그냥 ‘분류 미지정 폐기물’로 끝나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거면, 나를 이 지옥으로 몰아넣은 윤서하의 비밀이라도 알고 죽을래.”

“당신, 정말…!”

한지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시선은 나를 향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단말기 화면의 ‘HJY’라는 글자를 향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지만, 대신 아주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그 침묵은 포기가 아니었다. 겁을 오래 삼켜본 사람의 침묵이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단말기를 쥐었다.

이 데이터는 단순한 0과 1이 아니다. 태그는 이름표이자,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식별 코드다. S급 윤서하의 태그라면, 그 안에는 그녀가 거쳐온 수많은 게이트와 죽음의 잔향이 압축되어 있을 것이다.

이걸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들을’ 수 있다.

내 초능력, 잔향청취.

하지만 평소처럼 물건에 남은 마지막 순간을 듣는 게 아니다. 이건 태그 데이터의 원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복사된 데이터 속에 잠재된 과거의 기억을 ‘역방향’으로 청취해야 한다.

이건, 아주 비싼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단말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으드득.

뇌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다. 데이터의 파동이 내 정신을 뒤흔들고, 내 식별 코드(KDY)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손끝이 더 흐릿해졌다. 마치 내 몸이 이 세탁실의 습기 속으로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내 이름이, 내 존재가, 이 S급의 잔향 속에서 휘발되고 있었다.

‘참아. 여기서 멈추면 진짜로 지워져.’

나는 정신을 다잡고 깊은 연못으로 가라앉듯, YSH 태그의 잔향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지직, 지직….

소리가 들린다. 세탁실의 소리가 아니다. 아주 차갑고, 소독약 냄새가 날 것 같은, 정막한 공간의 소리.

S급 수사협조관 대기실.

시야가 열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관함 7번이 보였다.

누군가 보관함 앞으로 걸어왔다. 실루엣으로 보아 윤서하다. 그녀는 자신의 태그를 보관함에 태그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몇 분의 정적.

다시 보관함 문이 열렸다.

이번엔 다른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 윤서하와 같은 키, 같은 몸집, 그리고 가슴팍에는 같은 YSH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처음 들어간 실루엣은 빳빳하게 마른 방호복을 입고 있었지만, 지금 나온 실루엣은… 축축했다.

‘…검은 우산?’

그 실루엣의 손에는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이 들려 있었다. 그자는 보관함 앞에서 우산을 천천히 접더니, 대기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이름표는 하나인데, 들어간 사람과 나온 사람이 다르다. 아니, 같은 이름표를 달고 다른 존재가 나왔다. 그럼 지금 협회에서 돌아다니는 윤서하는 누구지?

그때, 잔향의 심연 속에서 새로운 소리가 섞여 들었다.

단말기 화면에 떴던 [보조명: HJY]에 해당하는 데이터가 소리로 변환되어 내 뇌리로 쏟아졌다.

‘HJY….’

나는 내 존재가 흐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그 이니셜의 전체 이름을 들으려 애썼다. 내 이름,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S급 태그의 잔향에 밀려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두통이 극에 달했을 때, 아주 희미하고 단절된 목소리가 들렸다.

[…한…지….]

“헉!”

나는 단말기를 떨어뜨릴 뻔하며 잔향청취에서 튕겨 나왔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내 코에선 검붉은 코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내 손은 거의 반투명해져서 세탁실 불빛이 비쳐 보였다.

“도윤 씨!”

한지율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내 시선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지만, 내 머릿속은 방금 들은 목소리와 단말기에 떴던 이니셜로 가득 찼다.

한지….

나는 한지율의 손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작은 흉터. 그녀가 태그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 몸을 미끼로 썼을 때의 그 단호함. 협회 내부 사정을 너무 잘 알던 그녀의 지식.

그녀는 대체 누구를 위해 나를 돕고 있는 거지?

그때였다.

위이잉—!

세탁실 천장의 환풍구가 거꾸로 돌기 시작했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아주 농도가 짙은, 정화되지 않은 게이트의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동시에 바닥의 배수관들이 일제히 닫혔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치직.

스피커가 다시 노이즈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번엔 윤서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KDY-불완전 복구 개체 및 동행 개체의 생체 반응 확인. 봉인 절차 3단계로 격상. 세탁실 내부 공간의 멸균 및 완전 폐쇄를 시작합니다.]

BG-04의 기계적인 목소리.

그와 동시에 세탁실 안의 거대한 드럼 세탁기들이 한꺼번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빨랫감도 없는 세탁조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세탁실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굉음을 냈고, 세탁 세제 투입구에선 알 수 없는 부식성 액체가 흘러나왔다.

BG-04는 폭력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절차와 분류로 사람을 지운다.

“가요!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한지율이 나를 이끌고 점검구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환풍구에서 쏟아지는 독기 때문에 눈 앞이 흐려졌다.

내 이름은 더 흐려지고, 퇴로는 막혔고, S급의 비밀을 여는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한지율의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진퇴양난이라는 말은 원래 이렇게 눅눅하고 시끄럽고 독한 냄새가 나는 단어였나 보다. 사망 플래그가 사방에서 내 목을 조였다.

그 순간, 세탁실의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아니, 이번엔 스피커가 아닌 내 등 뒤, 점검구 안쪽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 연 사람, 누구예요?]

아주 차분하고, 첫 번째 목소리보다 훨씬 더 서늘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목소리.

진짜 S급이 문틈으로 손을 넣은 것 같은 목소리였다.

작가의 말: 열지 말라는 경고를 열었더니, 이번엔 진짜 목소리가 돌아왔습니다.

제목: 21화. 두 번째 윤서하

“[그걸 연 사람, 누구예요?]”

그건 첫 번째 경고와 달랐다.

처음 들었던 목소리는 비명에 가까웠다. 다급함과 분노, 아주 약한 공포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점검구 깊은 곳에서 올라온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했다. 물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는 지하 호수처럼, 아무 파동 없이 머릿속에 박혔다.

그 고요함이 비명보다 무거웠다.

내 왼쪽 손목의 KDY 태그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잉크가 번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글자 주위의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꺼멓게 변색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경고창이 시야를 가렸다.

[경고: 존재 등급(Existence Grade) 불일치 개체와의 접촉.]

[경고: 당신의 ‘이름’이 외부 압력에 의해 침식되고 있습니다. 즉시 거리를 두십시오.]

이름이 망가지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서 있는지에 대한 감각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어지러웠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등 뒤에 있던 한지율이 움직였다.

그녀는 나보다 빨랐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비명을 지르거나, 내 뒤로 숨거나, 도망쳐야 정상이다. 하지만 한지율은 달랐다.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겁에 질렸다기보다는…… 아주 오랜, 지긋지긋한 악연을 다시 마주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가 내 팔을 거칠게 낚아채 옆으로 밀쳤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지금 멍 때릴 시간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단호했다. 그녀는 나를 밀어낸 반동으로 점검구 입구를 등지고 섰다. 마치 그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올 무언가를 온몸으로 막아서겠다는 것처럼.

그때, 세탁실의 멸균 절차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멸균 프로토콜 3단계 가동. 대상: 침입자 및 비인가 잔향. 수단: 완전 소각 및 부식성 세척.]

BG-04의 기계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탁실은 거대한 용광로 겸 세척조로 변했다. 천장의 환풍구들이 일제히 역방향으로 돌며 게이트 내부에서나 맡을 법한, 썩은 유황 냄새가 섞인 독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바닥의 배수구에서는 소독액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투명하고 무거운, 모든 걸 녹여버릴 듯한 부식성 액체가 차올랐다.

“젠장, 진짜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만!”

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내 목소리조차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게 들렸다.

벽면에 붙어 있던 낡은 근무복들이 멸균 가스에 닿자마자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그 순간, 근무복들의 잔향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아악! 내 퇴직금! 아직 서명도 안 했는데!』

『이봐, 거긴 오염구역이 아니라고! 난 어제 세탁했단 말이야!』

가장 무서운 건 중앙에 있는 거대한 공업용 세탁기들이었다. 드럼들이 미친 속도로 회전하며 방패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세탁기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압의 온수가 멸균 가스와 만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다시 그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내 귓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태그를 닫으면, 너는 살 수 있다.]”

나에게 주는 제안. 아니, 협박이었다.

“[태그를 열면, 네 이름은 더 망가진다. 대신…… 내가 문을 열 수 있다. 선택해.]”

친절한 설명은 없었다. 결과만 던지는 목소리였다. 내가 복사 장치에 걸어둔 역방향 잔향 청취를 중단하고 ‘YSH’ 태그를 닫아버리면, BG-04의 멸균 절차가 멈추고 나는 살 수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S급 대기실 7번 보관함의 비밀은 영원히 묻힌다. 윤서하의 비밀도, 내가 이 미친 루프에 갇힌 이유도.

반대로 태그를 계속 열어둔다면, 내 KDY 이름은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그 대가로 어둠 속의 ‘그녀’가 이 공간의 지배권을 쥐고 BG-04의 시스템을 뚫어 ‘문’을 열어주겠다는 말이다.

망가진 내 이름이 더 망가진다고? 여기서 더 망가질 게 있나?

나는 흐릿해지는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이미 반투명하게 변해 세탁실의 스팀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여기서 멈추면 살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정말 ‘강도윤’으로서 사는 것일까?

그때, 천장에서 녹아내린 쇳덩어리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조심해!”

한지율이 내 몸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녀가 대신 내 위치에 섰고, 뜨거운 쇳덩어리가 그녀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윽!”

그녀가 신음하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어깨의 방호복이 찢어지고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났다.

나는 멍하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HJY. 한...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인가? 잔향 속에서 본, 윤서하의 뒤를 쫓던 그 검은 실루엣이 그녀였을까? 나를 감시하기 위해 투입된 문태식의 첩자? 아니면……

내 의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지율은 타들어 가는 어깨를 움켜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보다 분노에 가까웠다.

“뭐 해? 선택은 네가 하는 거라며! 죽고 싶으면 혼자 죽어, 남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그녀의 일갈에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그래, 선택은 내가 한다. 죽어도 강도윤으로 죽는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욱 흐려진 오른손을 복사 장치 위 YSH 태그로 뻗었다. 그리고 내 남은 존재력을 쥐어짜 내 잔향 청취의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더 열어. 더 깊게, 더 과거로!’

[경고! 사용자 이름 침식률 80% 돌파! 영구적인 자아 소실 위험!]

시스템 경고는 무시했다.

그때 세탁실 난장판 속에서 이질적인 잔향 하나가 걸렸다. 벽면의 소각구 근처에 버려져 있던, 반쯤 녹아내린 오래된 번호표였다.

『……아, 오늘도 늦었네. 그 애는 또 보관함 앞에서 울고 있겠지? 하진… 지…』

이름이 겹쳐 들렸다. 하진? 한지? 번호표의 기억 속, 누군가가 부르던 그 이름은 지금 내 앞에 있는 한지율을 향한 것일까, 아니면 어둠 속의 두 번째 윤서하를 향한 것일까?

단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멸균 가스와 소독액이 세탁실의 모든 곳을 부식시키고 있었지만, 단 한 곳, 점검구 입구 주변의 바닥은 기묘할 정도로 보송보송했다. 마치 투명한 우산이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처럼.

잔향 청취를 최대로 높이자, 그 마른 바닥 위로 검은 형체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형체는 아주 자연스럽게, 접힌 검은 우산을 점검구 안쪽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우산 손잡이가 점검구 안쪽, 깊숙한 곳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건 함정이었다. 멸균 절차를 피해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아가리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한지율, 뛰어!”

나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한지율은 내 의도를 알아챈 듯, 어깨의 통증을 참고 달리기 시작했다.

세탁기 드럼들이 우리를 막아서려 했지만, 나는 내 흐려진 손을 이용해 드럼의 회전축을 통과해 비상 정지 버튼을 눌렀다. 반투명해진 몸이 이럴 땐 도움이 됐다.

우리는 미친 듯이 쏟아지는 부식성 소독액을 뚫고 점검구로 다가갔다.

어둠 속의 목소리가 비웃는 듯했다.

“[결국, 제 발로 함정에 들어오는구나.]”

“함정인지 아닌지는 들어가 봐서 결정해!”

나는 점검구 안쪽, 그 검은 우산 손잡이가 걸려 있던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곳은 잔향 속에서 본 S급 대기실 7번 보관함으로 이어지는, 비인가 정비 통로를 여는 스위치였다.

쿵!

우리는 점검구 안쪽의 마른 바닥에 나뒹굴었다. 등 뒤로 세탁실이 통째로 붕괴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스르륵 하며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우산 손잡이가 걸려 있던 스위치가 작동하며, 벽면의 비밀 통로가 열린 것이다. 그 너머로는 7번 보관함이 아닌, 그 너머의 아주 은밀하고 이질적인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S급 헌터들만이 드나드는 대기실의 가장 깊숙한 곳, 지도에도 없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중앙, 차가운 금속 테이블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우산은 없었다. 대신 그녀는 피 묻은 사냥용 나이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서하였다.

하지만 내가 알던, 항상 피곤에 절어 있으면서도 서류 뭉치를 안고 다니던 그 퇴근광 윤서하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고, 입가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내 손목의,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KDY 태그를 보았다.

그리고 혀를 차며, 아주 낮고 매혹적인, 그래서 더 끔찍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 아직 네 거예요?”

작가의 말: 이름이 아직 내 것인지 묻는 순간, 제일 무서운 건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작가의 말

열지 말라는 이름표를 열었고, 이름이 아직 자기 것인지 묻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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