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177화. 서명자의 손목과 검게 탄 두 번째 팔찌
176-177화. 서명자의 손목과 검게 탄 두 번째 팔찌
176화. 서명자의 손목
“번호표, 주셔야죠. 대기 시간이 끝났거든요.”
문틈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맑았다.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곳, 한 번도 꺼내 본 적 없는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그 미성이 B4 보관실의 눅눅한 공기를 차갑게 갈랐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건 검은 코트 자락과 젖지 않은 검은 우산 끝뿐이었다. 지하실 냄새가 벽지처럼 들러붙은 공간인데도, 그 우산만은 방금 포장지를 뜯은 물건처럼 매끈하고 건조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우산이 아니라 손목에 박혔다.
문틈을 잡은 손목에는 내가 방금 벽에서 떼어낸 것과 같은 형태의 흰색 비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니, 팔찌라기보다 ‘흰 고리’에 가까웠다. 살을 파고들 듯 조여 있는, 병원 물품과 족쇄의 중간쯤 되는 물건.
“번호표?”
나는 주머니 속에서 조금 전 엘리베이터 틈새에서 꺼낸 낡은 번호표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없으면 접수가 안 되나 보지? 여기는 절차가 참 까다롭네. 공무원 준비라도 하셨나 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상대는 대답 대신 손을 조금 더 내밀었다. 창백하다 못해 푸른 혈관이 비치는 손등. 그 손목에 채워진 흰 고리에서 기분 나쁜 광택이 돌았다.
“보호자님이 늦으셨거든요. 늦은 시간만큼 보호 대상의 호흡권이 차감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요.”
호흡권 차감.
그 단어가 들리는 순간 병실에 누워 있을 문태식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산소마스크 아래로 간신히 오르내리던 가슴, 윤서하가 겹겹이 쳐둔 선, 내가 담보로 걸었던 첫 번째 사망 농담. 그 모든 게 초 단위로 닳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윤 형, 저 사람…… 냄새가 이상해.”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던 반가온이 코를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네가 ‘이상해’라고 하면 보통 내 보험료가 올라가던데.”
“농담할 때 아니야. 팔찌에서는 오래된 보호자 서류 냄새가 나. 그런데 저 문틈 너머에서는 타버린 플라스틱 냄새랑 비에 젖지 않은 천 냄새가 섞여 있어. 그리고 형의 첫 사망 농담 냄새도.”
내 농담의 잔향을 저 자가 가지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하지만 가온은 곧바로 덧붙였다.
“강도원 냄새랑 완전히 같지는 않아. 같은 절차에 묶인 냄새야. 같은 사람이라고 단정하면 안 돼.”
이럴 때는 가온의 코가 내 머리보다 훨씬 믿음직했다. 슬픈 일이다. F급 헌터의 인생이란 대체로 남의 코에 의지하는 형태로 굴러간다.
그때 윤서하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있던 선들이 허공에서 맥없이 풀렸다. 현실과 이면을 잇던 유일한 생명선이 보관실의 공기에 조금씩 먹히고 있었다.
“강……도…… 씨.”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가운데 글자가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이름의 침식이 그녀에게도 깊게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너무 차가워서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라기보다 오래된 수술 도구를 잡은 기분이었다.
“윤서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윤. 서. 하. 내 눈 봐.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은 윤서하야. 협회 수사협조관 윤서하. 커피 취향은 재앙이고, 능력은 말도 안 되게 성가시고, 지금 내 손목 부러뜨릴 힘도 아직 남아 있는 사람.”
“……그 설명, 앞부분은 빼도 됐잖아요.”
“미안. 현실감이 필요한 순간이라.”
서하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잡혔다. 그녀는 숨을 억지로 고른 뒤 문틈을 향해 은색 선을 던졌다. 선은 허공을 갈라 검은 코트 인물의 손목으로 향했다.
하지만 흰 고리 근처에 닿기도 전에 선이 기괴하게 휘었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부딪힌 듯 반사되어 천장 형광등을 스치고, 선반 위 빈 서명철 하나를 반으로 잘랐다.
“소용없습니다.”
문틈 너머의 목소리가 비웃듯 낮게 깔렸다.
“여기는 서명되지 않은 구역입니다. 서명되지 않은 것은 끊을 수도, 취소할 수도 없죠.”
“서명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강도윤 씨. 이제 연체 처리에 들어갑니다. 보호자가 권리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누가 포기했다고 그래?”
나는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팔찌를 들어 올렸다. 안쪽에 `[강도원 - 위임 철회 불가]`라고 적힌, 그리고 젊은 강도원과 한 어린아이의 사진이 붙어 있던 그 팔찌였다.
“여기 증거가 있는데.”
문틈 너머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나는 사진을 그쪽으로 돌렸다. 흐릿한 흑백 사진 속 어린아이는 왼쪽 손목에 흰 팔찌를, 오른쪽 손목에는 검게 그을린 정체불명의 팔찌를 차고 있었다.
“이 사진 봐. 여기 애 손목. 팔찌가 하나가 아니잖아.”
보관실 천장의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한 사람에게 두 개의 팔찌. 두 명의 보호자. 아니면 두 번의 서명. 절차상으로 보면 이건 중복 위임이거나 권한 충돌 아닌가? 민원 넣기 딱 좋은 상황인데.”
그 순간 보관실 전체가 낮게 진동했다. 선반 위에 걸린 수천 개의 흰 팔찌가 일제히 떨리며 잔향을 토해냈다.
[……대리 서명 확인 불가.]
[……미성년자 보호자 중첩.]
[……위임 철회 불가 구역.]
[……두 번째 팔찌의 행방을 찾으십시오.]
핵심 명사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빈칸 주변의 단어가 충분히 날카로웠다. 대리 서명. 미성년자 보호자. 두 번째 팔찌.
문틈 너머의 검은 코트 인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우산 끝으로 바닥을 두 번 쳤다.
툭. 툭.
젖지 않은 우산 끝이 바닥에 닿았는데도, 발치에는 동그란 빗물 자국이 생겼다. 물방울 하나 없는 우산이 남기는 빗물. 그것도 검은색에 가까운 자국.
“절차의 허점을 찾으셨다니 칭찬해 드려야겠네요.”
그가 문틈 사이로 얼굴의 일부를 드러냈다. 그림자에 가려 이목구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미소만은 느껴졌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장난을 들켰을 때 지었을 법한, 그래서 더 불쾌한 미소.
“그럼 어느 손목으로 서명하실 건가요?”
“뭐?”
“서명은 종이에 하는 게 아닙니다. 이 보관실의 규칙이죠. 서명자의 손목이 인증되어야 절차가 완료됩니다. 그런데 당신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나는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했다. 헌터용 보호구를 제외하면 어떤 팔찌도, 고리도 없었다. 적어도 현실의 내 손목에는.
그 순간 금속 선반의 매끄러운 옆면에 내 모습이 비쳤다. 거울처럼 왜곡된 반사 속에서 나는 지금의 강도윤이 아니었다. 낡은 티셔츠를 입은 작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의 왼쪽 손목에는 흰 팔찌가, 오른쪽 손목에는 검게 그을린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현실의 나에게는 없고, 이면에 비친 나에게만 있는 것.
“형.”
KDW-0가 0000 섹션 서랍장을 가리켰다.
“저 안에서 다른 소리도 들려. 형 목소리 말고 다른 애도 있어. 다들 기다리래. 아니, 서명해 달래.”
그 말이 끝나자마자 보관실 벽의 호출벨이 다시 울렸다.
똑, 똑똑, 똑.
이번엔 문태식의 리듬이 훨씬 급했다. 숨이 끊길 듯 이어지는 노크 사이로 단어가 박혔다.
[오른쪽.]
[탄 것.]
[두 번째.]
사진 속 아이의 오른쪽 손목. 검게 그을린 두 번째 팔찌.
문태식은 병실에서 사투를 벌이며 그 단서 하나를 여기까지 밀어 넣고 있었다.
“서명하시겠습니까?”
검은 코트 인물이 다시 물었다. 그의 손이 문틈을 넘어 내 쪽으로 뻗었다. 흰 고리가 채워진 손목이 내 손목을 낚아채려는 찰나, 나는 번호표를 뒤로 뺐다.
“아니.”
나는 0000 섹션의 서랍, `첫 농담 미수령`이라고 적힌 그 칸을 바라보았다.
“서명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거야. 그리고 내 서명은 좀 비싸거든.”
“보호자님.”
“접수처 바꿔.”
나는 서랍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보호자 변경 신청하러 왔으니까.”
그 선언과 동시에 0000 섹션에 정렬되어 있던 수백 개의 서랍이 동시에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보호자 변경 접수.”
“보호자 변경 접수.”
“보호자 변경 접수.”
수많은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들이 보관실 가득 밀려들었다.
활짝 열린 서랍들 사이로, 한 번도 빛을 보지 못한 검은 잔향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연기 너머, 0000-1번 서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번쩍였다.
사진 속 아이가 차고 있던, 검게 그을린 두 번째 팔찌였다.
나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팔찌가 혼자 움직였다.
아니, 팔찌 안쪽에서 아주 작은 손가락 하나가 내 손목을 향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손가락은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엔 네가 보호자야?”
177화. 검게 탄 두 번째 팔찌
서랍 안쪽에서 뻗어 나온 것은 사람의 것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가늘고 창백한 손가락이었다. 아니, 손가락이라기보다 뼈 위에 얇은 막을 씌운 잔상에 가까웠다. 그것이 검게 탄 팔찌의 틈새를 비집고 나와 내 손목 쪽으로 더듬거렸다.
“이번엔 네가 보호자야?”
내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먼 과거의 내가 냈을 법한 목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뺐다. 겁이 나서만은 아니었다. 이 보관실에서 무언가를 ‘잡는다’는 행위가 어떤 계약으로 바뀌는지, 이제는 모르면 양심이 없는 수준이었다. 내 손목은 지금 비어 있다. 하지만 금속 선반에 비친 내 잔상은 여전히 왼손에 흰 팔찌를, 오른손에 검게 탄 팔찌를 차고 있었다.
거울 속 나와 현실의 내가 맞물리지 않는 기괴한 불균형 속에서, 등 뒤의 KDW-0가 작게 중얼거렸다.
“……형이 아니야.”
녀석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0000-1번 서랍 속 그 손가락을 빤히 보던 아이가 덧붙였다.
“근데 형이랑 같은 번호야. 이상해. 서랍 안에 형들이 너무 많아.”
한 사람에게 부여되어야 할 관리번호 0000. 그런데 그 번호가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공정, 혹은 상태를 뜻한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속이 싸늘해졌다.
“도윤 형, 조심해.”
반가온이 코끝을 찡그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후각이 공기 중에 흩어진 정보들을 긁어모으고 있었다.
“냄새가 섞여 있어. 탄 플라스틱 냄새, 낡은 병원 담요 냄새, 아까 검은 코트한테서 났던 젖지 않은 우산 천 냄새도 나.”
“이쯤 되면 병원 향수 브랜드 하나 내도 되겠다. 이름은 ‘절차상 사망’.”
“웃기지 마. 제일 이상한 건 이거야.”
가온이 검게 탄 팔찌와 금속 반사 속 흰 팔찌를 번갈아 보았다.
“둘 냄새가 반대야. 하나는 먹이는 쪽이고, 하나는 먹히는 쪽 같아. 환자랑 보호자처럼.”
환자와 보호자.
병원에서 가장 가까이 붙어 있으면서도, 권한의 방향은 완전히 다른 두 존재.
그때 옆에 서 있던 윤서하가 휘청거리며 내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이름 침식. 자신의 존재를 붙잡는 글자들이 지워지며 현실과의 접점이 닳아 없어지는 증상.
“……도윤 씨?”
그녀가 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런데 시선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내 뒤쪽, 검은 코트 인물이 서 있는 문틈에 닿아 있었다.
“당신, 왜…… 강도윤 씨 목소리로 말하는 거야? 도윤 씨는 어디 갔어?”
“윤서하. 정신 차려요.”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나 여기 있어. 월급 루팡 하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던 당신 협조 대상자, 강도윤 여기 있다고요.”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닌데요.”
“현실 복귀용 앵커로는 꽤 쓸 만하죠.”
서하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돌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내 귓가에도 이명이 들렸다. 내가 방금 내뱉은 말이 내 입에서 나온 게 아니라, 서랍 속 작은 손가락이 대신 뱉은 것처럼 겹쳐 들렸다.
내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감각.
나는 그게 싫었다. 죽는 것보다 싫었다고 말하면 과장일까. 아니, 지금 상황에서는 꽤 정직한 표현이었다.
문틈 너머의 검은 코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보호자 변경 신청은 접수되었습니다. 다만 규정에 따라 기존 보호 대상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권한을 넘겨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호흡권을 전량 차감하시겠습니까?”
그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흰 고리가 걸린 손목으로 우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나는 서랍 속에서 기어 나온 손가락을 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이번엔 네가 보호자야?”라고 묻고 있었다. 내가 저 손가락을 잡거나 팔찌를 내 손목에 채우면, 나는 문태식의 보호자가 되는 걸까. 아니면 저 팔찌 속에 갇힌 무언가의 새 관리자가 되는 걸까.
똑, 똑똑. 똑. 똑똑똑.
벽 너머에서 다시 노크가 들렸다. 문태식의 호출벨 소리였다. 이번에는 리듬이 급했다. 잔향청취를 억지로 끌어올리자, 단순한 소음이 단어가 되어 내 머릿속에 박혔다.
[빌려주지 마.]
[손목은 도장.]
[아이 이름.]
빌려주지 마.
뭘. 내 손목을?
‘손목은 도장이다.’
그 문장을 곱씹는 순간, 머릿속에서 기억 한 조각이 번쩍였다.
낡은 병원 대기실이었다. 색이 거의 빠져나간 풍경 속에 어린 내가 앉아 있었다.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고, 무릎 위에는 낡은 담요가 반쯤 흘러내려 있었다. 내 앞에는 강도원이 서 있었다.
그는 내 오른쪽 손목을 잡아끌며 낮게 말했다.
“잠깐만 빌리는 거다. 네 이름으로 서명만 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어린 나는 겁에 질린 채 오른손을 내밀었다. 강도원은 내 손목을 인장처럼 사용해 어떤 서류, 아니면 어떤 경계 위에 찍어 눌렀다. 그때 오른손목의 팔찌가 검게 타들어 갔다. 누군가의 업보를, 혹은 누군가의 권한을 강제로 떠맡는 대가로.
“동의 안 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검은 코트의 요구에 대한 거절이었다.
“내가 왜 네 규정에 따라야 하지? 여긴 미성년자 보호자 중첩 구역이라고 아까 팔찌들이 그랬어. 그렇다면 서명은 손목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름으로 하는 거겠지.”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번호표가 손에 잡혔다. 하지만 이걸 직접 쓰면 위험하다. 내 손, 내 손목, 내 지문. 이 보관실에서는 전부 도장이 될 수 있다.
나는 윤서하의 손끝을 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끊어진 채 바르르 떨리는 투명한 실 조각들.
“윤서하. 선 조각 하나만 빌려줘요. 아주 짧아도 돼.”
서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쥐어짜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을 내밀었다.
그 대가로 그녀의 이름 중 한 글자가 흐려졌다.
윤, 하.
가운데가 비었다.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서하.”
나는 다시 이름을 불렀다.
“서하. 윤서하. 아직 여기 있어요. 내가 기억하고 있어.”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손끝이 내 손등을 한 번 눌렀다. 들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실 조각을 낚싯줄처럼 이용해 0000-1번 서랍 속 검게 탄 팔찌를 건드렸다.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피하면서, 팔찌의 잔향만 끌어오려는 시도였다.
팔찌와 실이 닿는 순간 보관실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서랍 속 목소리가 터졌다. 동시에 내 시야에 더 선명한 과거가 펼쳐졌다. 강도원이 내 손목을 빌려 서명했던 건 문태식의 호흡권이 아니었다. 그는 더 근원적인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이름을 빌려주면, 넌 영원히 내 보호 아래 있게 될 거다. 도윤아.”
강도원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그게 더 끔찍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우산에서는 비가 아니라 붉게 마른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보호자 변경…… 완료되지 않았습니다.”
검은 코트 인물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는 초조해진 듯 문틈을 조금 더 열었다.
얼굴은 여전히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대신 목 아래쪽 피부에 또 하나의 흰색 비닐 팔찌가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우산 손잡이에는 수십 장의 번호표가 부적처럼 지저분하게 묶여 있었다.
저 자도 누군가의 보관물이거나, 번호를 빼앗긴 대리인에 불과하다.
나는 실 끝에 걸린 검게 탄 팔찌를 들어 올렸다. 팔찌 안쪽에서 기어 나왔던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지며 다시 그을린 틈새로 스며들었다.
나는 팔찌를 향해 물었다.
“너, 누구 보호자야? 아니면 누구 보관물이야?”
팔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의 검게 그을린 플라스틱 표면이 부풀어 오르더니, 새 글자를 밀어냈다.
[보관물: 강도윤 이전]
[관리번호: 0000-0]
0000-1이 내가 아니다.
0000-0. 나보다 앞선 번호.
그 번호를 확인하는 순간 손끝을 타고 전율이 올랐다. 번호 옆에는 아주 오래되어 빛바랜 서명이 하나 더 적혀 있었다. 강도원의 필체도, 내 필체도 아니었다.
지금 병실에서 죽음을 유예당하고 있는 문태식의 젊은 시절 서명.
“……도윤 형.”
가온이 문틈을 가리켰다.
검은 코트가 서 있던 문틈 너머, 어둠 속에서 수많은 아이의 눈동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똑같은 검은 팔찌를 찬 채로.
보관실은 물건을 맡기는 곳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삶을 번호로 바꿔, 대대로 물려주며 연명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이제, 0000-0번의 주인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똑. 똑. 똑.
호출벨 소리가 아니었다.
서랍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태식의 젊은 서명이 적힌 검은 팔찌가, 안쪽에서 바깥으로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