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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175화. 사망 전 보호자 확인과 B4 보관실 일러스트

174-175화. 사망 전 보호자 확인과 B4 보관실

174-175화. 사망 전 보호자 확인과 B4 보관실

174화. 사망 전 보호자 확인

“강…… 님의 사망 전 보호자, 확인 부탁드립니다.”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목소리는 맑다 못해 투명했다.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의 미성. 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강’과 ‘님’ 사이의 공백을 발음하고 있었다. 침식된 내 이름 석 자 중 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탓에, 방송조차 내 이름을 제대로 뱉지 못했다.

나조차 생소한 내 어린 시절의 목소리. 하지만 본능이 뒷덜미의 솜털을 바짝 세우며 비명을 질렀다. 저건 내 목소리다. 내가 잃어버렸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지불’당했던 내 과거의 파편.

“도윤 씨, 듣지 마요!”

윤서하가 내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을 띤 가느다란 ‘선’이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대기실 벽면에 붙은 호출 모니터와 천장의 스피커였다. 물리적인 파괴가 아니라, 그 사물이 가진 ‘현재의 기능’을 절단하려는 의도였다.

치익, 치지직!

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났다. 서하의 선이 모니터 화면에 닿는 순간, 강철보다 단단하던 그 궤적이 엿가락처럼 흐물거리며 화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치 평면적인 영상 속에 블랙홀이라도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휘어?”

서하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선’은 인과율을 건드리는 능력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물건이라면 끊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그 선이 화면 안의 기괴한 중력에 붙잡혀 굴절되고 있었다.

“이건 병원 시스템이 아니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호자 대기번호 시스템…… 아까 그 번호표랑 연결된 ‘다른 층위’의 방송이야.”

현실의 전선과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 덧씌워진 유령 같은 규격이 소리를 내뱉고 있는 것이다. 방송은 멈추지 않았다.

“0000-1번. 사망 전 보호자 확인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지연 시 보호 대상자의 폐기 절차가 가속화됩니다.”

폐기 가속화. 그 단어가 들리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실에 누워 있는 문태식의 심장 모니터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렸다.

“형, 이거 봐.”

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KDW-0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손가락 끝에는 검푸른 연기처럼 일렁이는 작은 조각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조금 전 내 입에서, 혹은 내 존재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목소리 조각’이었다.

녀석은 그 조각을 보석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호출 모니터 화면에 가져다 대었다.

지지직!

화면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붉은색 글자로 가득했던 [0000-1]이라는 숫자가 순식간에 문드러지더니,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다른 텍스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0000-0]

[원본 보호자: 미상]

[대리인 상태: 권한 침식 중]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분명히 보았다. 1번 이전의 0번. 그리고 내 이름 대신 적혀 있던 ‘원본 보호자’라는 기괴한 명칭.

“도윤이 형, 냄새가 하나 더 섞였어.”

반가온이 번호표를 쥔 채 코를 킁킁거렸다. 녀석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아까 맡았던 형의 첫 번째 사망 농담 냄새 밑에…… 아주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깔려 있어. 근데 이건 병실 소독약이 아냐. 죽은 사람을 닦아낼 때 쓰는, 아주 독하고 비릿한…….”

가온이 번호표의 모서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흰 비닐 팔찌 냄새가 나. 형, 이건 살아 있는 환자가 차는 게 아냐. ‘사망 전 보호자 확인용’이라고 적힌 팔찌야. 누군가의 죽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보호자 손목에 채워주는 거 말이야.”

사망 전 보호자 확인용 팔찌. 그 단어가 머릿속의 해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기억의 한 조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 이 대기실과 똑같이 생긴, 하지만 훨씬 더 낡고 침침했던 어느 공간. 형광등은 지금처럼 가물거리고 있었고, 자판기 옆에는 반쯤 마신 종이컵이 버려져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의자에 앉으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그리고 내 왼쪽 손목에는 차갑고 빳빳한 흰색 비닐 고리가 채워져 있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지?’

나는 홀린 듯 대기실 자판기 쪽으로 다가갔다. 자판기 전면 유리창에 내 얼굴이 비쳤다. 아니, 내 얼굴이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어떤 ‘잔향’들이 보였다. 잔향청취 능력이 반토막 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 자체가 머금고 있는 기억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애가 여기서 ……를 기다렸어.]

[보호자는 ……가 아니었어. 그냥 자리를 지키라고 해서 앉아 있었을 뿐이야.]

[손목에 찬 ……이 너무 차갑다고 울었지.]

핵심적인 명사들이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고의로 가위질을 한 것처럼, 중요한 이름과 물건의 명칭만 공백으로 남았다. 하지만 느껴졌다. 그 ‘……’의 자리에 들어갈 말이 무엇인지.

그때, 호출 모니터가 다시 한번 진동하며 새로운 화면을 띄웠다.

[사망 전 보호자 확인 절차를 시작합니다.]

[항목 1: 대상자의 진실된 성명 입력]

[항목 2: 첫 번째 사망 농담의 재현]

[항목 3: 최종 보호자 서명]

화면 밑으로 가상 키보드와 서명란이 나타났다.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곳에 정보를 입력하고 서명하는 순간, 나는 내 과거의 어떤 ‘죽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게 된다는 것을. 그것은 묻어두었던 비극을 들춰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 비극의 마침표를 내 손으로 직접 찍는 행위였다.

“도윤 씨, 안 돼요! 저건 함정이에요.”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 서린 공포는 진심이었다.

“저기에 서명하면 도윤 씨의 본질이 저 시스템에 완전히 귀속될 거예요. 강도원이나 그 검은 우산이 노리는 게 바로 이거라구요!”

“나도 알아. 알겠는데…….”

나는 병실 쪽을 돌아보았다. 서하의 어깨너머로, 그녀가 설치해두었던 ‘선’들이 하나둘씩 힘없이 끊어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문태식의 심장 모니터가 내는 비프음이 급격히 빨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서명하지 않으면 문태식이 ‘폐기’된다. 서명하면 내가 ‘귀속’된다.

강도원, 이 영악한 노인네. 그는 내가 동료를 버리지 못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과거와 동료의 목숨을 저울 위에 나란히 올려놓은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간과한 게 하나 있지.’

나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띄웠다. 유머는 내 방어기제지만, 때로는 공격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주웠던 번호표를 꺼냈다. [0000/보호자 대리]라고 적힌 그 종이 조각. 나는 서명란에 손을 올리는 대신, 번호표를 뒤집어 그 뒷면의 빈 공간을 응시했다.

“서하 씨, 가온아. 잘 봐. 공무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나는 볼펜을 꺼내 번호표 뒷면에 갈겨쓰기 시작했다.

[대리 권한 위임 출처 확인 요청]

[민원 내용: 본인은 해당 번호표의 ‘대리’ 자격으로 호출되었으나, 원본 보호자(0000-0)의 신원과 권한 위임 절차가 불투명함. 절차상 하자가 발견되었으므로, 상위 기관의 명확한 소명 전까지 모든 확인 절차를 거부함. 또한, 연체 자산 회수 및 폐기 감독의 법적 근거 제시를 요구함.]

“……도윤 씨?”

서하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 민원을 넣겠다고요?”

“장난하는 거 아냐. 시스템이 규정을 따진다면, 나도 규정으로 맞서야지.”

나는 번호표를 호출 모니터의 카드 투입구처럼 보이는 틈새에 강제로 밀어 넣었다.

“자, 답변해봐. 내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주제에 무슨 보호자 확인이야? 대리인 부려 먹으려면 최소한 위임장 정도는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모니터 화면이 미친 듯이 떨렸다. ‘사망 전 보호자 확인’이라는 붉은 글자가 깨지며 노이즈가 발생했다. 시스템은 내 예기치 못한 ‘절차적 이의 제기’를 처리하기 위해 과부하가 걸린 듯했다.

삐이이이—!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모니터 화면이 전환되었다. 호출 번호 대신, 병원의 상세 평면도가 나타났다. 일반적인 지도와는 달랐다. 혈관처럼 붉은 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병원의 ‘이면’을 보여주는 지도였다.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세 번째 의자 밑, 그 압흔이 남았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점선이 보였다.

[민원 접수 완료. 소명 자료 확인을 위해 해당 구역으로 이동하십시오.]

[목적지: B4 사망 전 보호자 보관실]

“B4? 이 병원 지하 3층까지밖에 없지 않았나?”

가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는 없겠지. 하지만 ‘시스템’에는 있는 모양이야.”

그 순간, 대기실 바로 앞에 있던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띵—.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은 지독할 정도로 밝은 형광등 빛으로 가득했다. 엘리베이터 내부 뒷벽에 붙은 커다란 거울 속에는 우리 세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거울 속 내 옆에는 윤서하와 반가온이 서 있었지만, 정작 내 모습은 지금의 ‘강도윤’이 아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아주 작았고, 낡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왼쪽 손목에 선명한 흰색 비닐 고리를 차고 있었다. 거울 속의 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손을 흔드는 게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아주 천천히 손짓하고 있었다.

“……가자.”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서 내 민원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직접 확인해야겠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닫힘 버튼 위로 피처럼 붉은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층수 선택 불가: 하강 중.]

우리는 병원의 지반 아래, 소독약 냄새와 죽음의 농담이 가득 찬 심연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175화. B4 사망 전 보호자 보관실

엘리베이터가 하강을 시작했다. 보통의 엘리베이터라면 느껴져야 할 미세한 진동조차 없었다. 마치 중력 자체가 거세된 공간에서 우리라는 덩어리만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숫자판의 숫자가 빠르게 바뀌었다. B1, B2, B3.

현실의 병원이라면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숫자는 멈추지 않았다. 붉은 액정이 지지직거리며 글자를 뭉개더니, 생전 처음 보는 기호들을 내뱉기 시작했다.

[보관]

[확인]

[미수령]

“……이거, 내려가는 게 맞긴 한 거야?”

반가온이 내 옷자락을 꽉 쥐며 물었다. 녀석의 코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냄새에 민감한 녀석에게 지금 이 공간은 지독한 악취의 소용돌이일 터였다.

“내려가는 건 맞는데, 우리가 아는 지하는 아닌 것 같네.”

나는 거울을 응시했다. 엘리베이터 뒷벽을 가득 채운 거울 속에는 여전히 ‘어린 나’가 서 있었다. 녀석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왼쪽 손목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내 손목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거울 속 녀석의 손목에는 빳빳하고 하얀 비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이가 움직였다. 녀석은 자기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더니 ‘쉿’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 아래, 아주 미세하게 벌어진 금속 틈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홀린 듯 그 틈새에 귀를 가져다 댔다. 잔향청취. 비록 반토막 난 능력이었지만, 무기질인 금속은 오히려 인간보다 정직한 기억을 흘려보낼 때가 있었다.

[나도 원래는 사람을 위로 올리는 직업이었는데. 여긴 반대네. 내릴 사람은 많은데, 올라갈 사람이 없어.]

씁쓸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 같은 잔향이 뇌리를 스쳤다. 엘리베이터 자체의 농담이었다.

[한번 ‘미수령’으로 분류되면,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위층은 안 눌리거든. 불쌍한 보호자들 같으니라고.]

“도윤 씨, 저거…….”

윤서하의 떨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에 자신의 ‘선’을 억지로 끼워 넣고 있었다. 푸른 빛의 선이 가늘게 떨리며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게, 혹은 현실과의 연결이 끊기지 않게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가혹했다. 서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섞여 들어오는 노이즈가 아까보다 훨씬 심해졌다.

“윤서하 씨, 그만둬요. 그러다 이름이 정말로 다 지워지겠어.”

“안 돼요. 이거 놓으면…… 우리 정말로 못 돌아가요. 도윤 씨 이름도, 내 이름도…… 여기서 다 0으로 바뀔 거야.”

그녀의 고집은 절박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등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내가 안 잊어버려요. 그러니까 무리하지 마.”

“……말은 잘하면서. 자기 이름도 못 들으면서.”

그녀가 작게 쏘아붙였지만, 다행히 선을 팽팽하게 유지하던 힘은 조금 누그러졌다. 나는 그녀를 현실의 선으로 삼고, 거울 속 아이가 가리켰던 틈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작고 딱딱한 종이 조각 하나가 만져졌다.

끄집어내 보니, 낡은 대기 번호표였다.

[번호: 0000-0]

[상태: 원본 보호자 대기 중]

“형, 이거…… 냄새가 이상해.”

가온이 내 손바닥 위의 번호표에 코를 들이밀었다.

“흰 비닐 팔찌 냄새가 나는데, 이게 문태식 아저씨한테서 났던 냄새랑 똑같아. 아주 얇지만 분명하게 이어져 있어. 아저씨…… 지금 처음 이 사건에 휘말린 게 아냐. 아주 오래전부터 이 ‘보호자 절차’에 묶여 있었던 것 같아.”

문태식이? 그 고지식한 광역수사대 팀장이 이런 기괴한 시스템과 예전부터 엮여 있었다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차가운 냉기와 소독약 냄새였다.

우리가 내린 곳은 병원의 지하라기보다, 거대한 ‘창고’에 가까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금속 선반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천장에는 낮게 가라앉은 형광등이 깜빡이며 불규칙한 빛을 던졌고, 선반 위에는 투명한 비닐 커버에 싸인 무언가들이 가득했다.

벽면 한쪽을 가득 채운 것은 수천, 수만 개의 흰 비닐 팔찌였다. 그것들은 마치 죽은 자들의 영혼을 수거해 걸어놓은 것처럼 기괴한 풍경을 자아냈다.

접수대도, 안내원도 없었다. 그저 정면에 낡은 나무 푯말 하나가 박혀 있을 뿐이었다.

[B4 사망 전 보호자 보관실]

“여기, 시체 보관소 같은 거야?” 가온이 질겁하며 물었다.

“아니.”

나는 선반 사이를 걸으며 주위를 살폈다. 잔향들이 내 발소리에 맞춰 일제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서명만 하면 끝나는 거였는데.]

[나는 못 하겠어. 내 손으로 어떻게…….]

[이름을 남기지 마세요. 보관실에 갇히기 싫으면.]

조각난 목소리들이 공간을 채웠다. 이곳은 죽은 사람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었다. 죽음을 최종적으로 승인해야 했지만, 끝내 그 거대한 상실을 감당하지 못해 ‘서명’을 포기한 보호자들의 흔적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들의 이름, 목소리, 그리고 망설임이 서린 서명란의 공백들이 이곳의 주인이었다.

“형, 여기 좀 봐.”

KDW-0가 앞장서 걸어가다 멈춰 섰다. 녀석이 가리킨 곳은 ‘0000’ 섹션이었다. 다른 곳보다 훨씬 낡고 먼지가 두껍게 쌓인 서랍장이 하나 있었다.

서랍의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0000-1 강___]

[첫 농담 미수령]

[보호자 대리: 미확정]

가운데 글자가 파 먹힌 이름. 누가 봐도 내 것이었다.

“형, 여기 형이 하나 더 있어.”

KDW-0가 무심하게 뱉은 말에 소름이 돋았다. 녀석의 눈에는 서랍 안에 담긴 내 ‘과거의 조각’이 또 다른 생명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서랍 손잡이에 손을 얹으려던 찰나였다.

똑, 똑똑, 똑.

공허한 보관실 내부에 낯익은 리듬이 울려 퍼졌다. 병실에서 들었던 문태식의 심장 모니터 소리, 아니, 그가 나에게 보냈던 그 노크 소리였다.

소리는 서랍이 아니라, 보관실 벽면에 달린 오래된 호출벨에서 나고 있었다. 빨간 불이 깜빡이며 문태식의 리듬을 재현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 신호가 아니었다.

[먼저…… 팔찌…….]

[서명자의…… 손목…….]

단어들이 끊어져 들렸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문태식은 저 서랍을 함부로 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대신 그는 ‘팔찌’를 확인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서랍에서 손을 떼고 벽에 걸린 수많은 비닐 팔찌 쪽으로 다가갔다. 수천 개의 팔찌 중 유독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방금까지 차고 있었던 것처럼 온기가 느껴지는 팔찌였다.

나는 그 팔찌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안쪽을 확인했다.

보통은 환자의 이름이나 병동 번호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날카로운 펜으로 짓눌러 쓴 듯한 글자가 보였다.

[강도원 - 위임 철회 불가]

그 이름이 적힌 팔찌 옆으로, 아주 작은 사진 하나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흑백으로 바랜 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강도원과, 그의 옆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아이의 손목에는 이미 흰 비닐 팔찌가 두 개나 채워져 있었다. 하나는 본인의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검게 그을린 팔찌였다.

“도윤 씨, 저기!”

윤서하가 보관실 안쪽 어두운 통로를 가리켰다.

툭, 툭, 툭.

물기 젖은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올 리 없는 지하 4층 보관실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젖은 우산을 접어 바닥에 탁탁 터는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검은 코트, 그리고 손목에 감긴 선명한 흰색 비닐 고리.

그는 우리 앞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문틈 뒤에 서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거울 속에서 보았던, 하지만 훨씬 더 서늘하게 정제된 ‘나의 목소리’였다.

“이번엔 보호자님이 늦으셨네요.”

문틈 사이로 하얀 팔찌를 찬 손목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손은 내가 들고 있는 번호표를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까딱였다.

“서명할 시간이 지났거든요. 강도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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