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35화. 한 번 죽은 사람의 녹음과 사망 접수자
제목: 34화. 한 번 죽은 사람의 녹음
“[강도윤 씨. 만약 당신이 이 녹음을 듣고 있다면,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면…. 저는 이미 한 번 죽은 겁니다.]”
지하 2층 민원감사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액체 질소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선반에서 튀어나온 낡은 보관함, 그 안의 빛바랜 음성 기록기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분명 내 옆에 선 한지율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보다 훨씬 더 지치고, 체념에 절어 있으며, 동시에 기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 옆의 한지율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잘게 떨렸다. 입술은 하얗게 질려 반쯤 벌어졌지만,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녹음기 속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생전 처음 듣는 괴물의 울음소리처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이 녹음의 존재는 없었다. 오직 본능적인 공포와 위기감만이 그녀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너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검은 흔적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예요? 내가… 왜….”
한지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녹음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라는 것만은 직감하고 있었다.
감사관의 무표정한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노파의 흉측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규정 위반. 증빙 서류 HJY-01의 생존 상태는 ‘폐기 완료’로 기록되어 있다. 이 녹음은 불법 증축된 잔향이다. 회수한다.”
감사관이 앙상한 손을 뻗어 보관함으로 향했다. 녹음을 중지시키고 기록기를 압수하려는 몸짓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왼손을 뻗어 보관함 앞바닥을 짚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손등의 KDY-02 도장 밑에 끼워 넣었던, 한지율이 찢다 남은 영수증 조각을 바닥에 밀착시켰다.
“아윽!”
비명이 터질 뻔한 것을 이악물고 참았다. 손등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KDY-02라는 검은 잉크가 내 피부를 뚫고 뼈에 새겨지는 느낌. 영수증 조각에 남은 내 기억의 잔향과 담당자 도장의 권한이 충돌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검은 잉크가 내 혈관을 타고 역류하는 듯했고, 손등 위로 붉은 피와 검은 잉크가 뒤섞여 걸쭉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감사관의 손이 공중에서 멈칫했다.
[시스템 대기. 담당자 KDY-02의 우선 권한 행사 중. 증빙 서류 회수 명령 지연.]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고작 몇 초, 길어야 몇 분짜리 임시방편이었지만, 지금은 그 시간이 절박했다.
“이봐, 405번 증빙 보관자.”
나는 일부러 차갑게, 한지율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번호로 불렀다. 이곳에서 이름을 불리는 순간, 그녀는 서류가 아닌 ‘사람’으로 인지되어 더 가혹한 폐기 절차를 밟게 될 테니까. 말은 가볍고 시니컬하게, 하지만 행동은 묵직하게. 그게 이 하드보일드한 미궁에서 살아남는 법이다.
“정신 차려. 네 목소리가 하는 말, 똑바로 들어. 네가 살길이 거기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말에 한지율이 멍하니 나를 보다가, 다시 녹음기로 시선을 옮겼다.
녹음기 속 지친 한지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마 이 녹음을 재생한 건, ‘확인자 YSH’라는 라벨 때문이겠죠. 서하가… 서하 언니가 저를 죽였다고 생각하나요? 아니에요. 이 녹음은 유언이 아닙니다. 이것은… ‘접수 보류 사유서’입니다.]”
접수 보류 사유서? 유언이 아니라?
방향이 틀어졌다. 죽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어떤 상태로 죽었다고 접수했는가’가 핵심이라는 소리였다.
“[서하 언니는… 무언가를 숨기려 했어요. 나를 폐기 목록에 올림으로써, 오히려 나를 지키려 했던 걸지도 몰라요. 하지만 언니의 판단이 맞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들이… 그들이 언니의 권한까지 이용하고 있으니까. 서하 언니를 원망하지 마세요. 언니는 단지….]”
녹음 속 목소리가 울컥하며 잦아들었다. 윤서하가 배신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숨겼는지, 누구에게 이용당했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미스터리는 더 깊어졌다.
그때, 녹음에서 아주 짧지만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었다.
“콜록, 컥! …젠장, 이딴 걸 남겨서 뭐 하겠다고. 꼬마야, 빨리 끝내.”
익숙한, 지독하게 걸걸하고 담배 냄새 나는 목소리. 문태식이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 영감의 기침 소리와 욕설이 녹음에 담겨 있었다. 이 영감, 이 현장에 있었던 거다. 이 기록의 존재를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나한테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단 말이지? 나중에 만나면 진짜 영수증으로 싸서 화장해버려야겠다.
감사관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그녀는 지연 명령을 무시하듯, 보관함 내부 깊숙한 곳에서 검은 봉인지와 둔탁하게 생긴 도장을 꺼냈다. 도장 면에는 ‘폐기 확인’이라는 글자가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HJY-01의 생존은 명백한 기록 오류다. 녹음의 내용과 무관하게, 현 상태는 폐기 대상이다. 즉시 집행한다.”
감사관이 도장을 들어 한지율의 가슴팍에 달린 번호표를 겨냥했다. 그 도장이 찍히는 순간, 한지율은 정말로 이 세상의 기록에서 지워질 것이다.
나는 이를 갈며 잔향청취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손등의 통증은 이미 감각을 넘어섰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잡음, 그 미세한 균열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지지직 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아주 희미하지만 어떤 정보의 파편이 잡혔다.
‘…검은 우산… 사망을 만드는… 아니, 아니다….’
‘…순서… 접수 순서를 바꾸는 장치….’
검은 우산. 그 도장이 찍히면 기록이 꼬인다고 했다. 그들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조직이 아니었다. ‘사망 접수’라는 시스템 자체를 조작하는 자들이었다. 죽은 사람을 산 사람으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기록을 뒤바꾸는 장치.
녹음 속 한지율의 목소리가 마지막 문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강도윤 씨. 이것만은 알아주세요. 당신이 만난 ‘첫 번째 강도윤’은….]”
그 순간, 옆에 있던 한지율이 비명을 지르며 내 귀를 막으려 들었다. 그녀의 검은 손목 흔적이 꿈틀거리며 내 시야를 가렸다. 본능적인 거부감. 그녀는 나에게 그 뒷내용을 들려주고 싶지 않아 했다.
하지만 늦었다. 나는 그 문장의 일부를 듣고 말았다.
“[…당신을 살리려고 죽은 게 아닙니다. 당신을….]”
치익!
녹음이 거기서 뚝 끊겼다. 감사관의 도장이 보관함을 내리쳤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손등에 끼워져 있던 영수증 조각이 한계에 다다라 하얗게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시스템 위기. 담당자 권한 유실. KDY-02 도장 회수 절차 시작.]
감사관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끝이다. KDY-02. 네놈의 권한도, 저 증빙 서류도, 모두 폐기한다.”
내 손등의 KDY-02 도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피부에서 떨어져 나가려 했다. 검은 잉크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한지율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끝인가? 이대로 지하 2층의 거름이 되는 건가? 퇴근은커녕 영원히 잠들게 생겼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 하나. ‘접수 보류 사유서’.
나는 흩어지는 권한의 잔해를 쥐어짜듯, 마지막 민원을 제기했다.
“잠깐! 이의 제기한다!”
내 목소리가 감사실을 울렸다. 감사관의 도장이 멈칫했다.
“이 목소리는… HJY-01 본인의 목소리다. 그리고 그녀는 이 기록을 ‘접수 보류 사유서’라고 명시했다! 규정 제3조 14항, 증빙 본인의 자필(혹은 음성) 보류 사유서가 제출될 경우, 해당 민원은 ‘즉시 폐기’가 아닌 ‘보류 민원 재심’으로 전환된다!”
이건 꼼수였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시스템의 허점을 찌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민원 접수 분석 중….]
[…규정 부합. 절차 변경. ‘폐기’에서 ‘보류 민원 재심’으로.]
[집행 임시 정지. 대기 시간 10분 설정.]
시야 한구석에 10:00이라는 붉은 타이머가 뜨기 시작했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고작 10분. 10분 뒤면 다시 감사관의 도장이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10분은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는, 그리고 반격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윽….”
나는 안도감과 함께 밀려오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 머릿속에서, 아주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기억 하나가 통째로 하얗게 지워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소중한 것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상실감만이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찔렀다. 이게 잔향청취와 권한 행사의 비용이었다.
감사관은 분노로 몸을 떨었지만, 시스템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녀는 대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책상 위에서 새로운 서류 한 장을 꺼내 내 앞에 거칠게 내던졌다.
“좋다. 10분. 그 10분 동안 너희는 더 끔찍한 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의 제목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보류 민원 재심 대상: 원본 KDY 사망 접수자]
원본 KDY.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존재했던, ‘진짜’ 강도윤의 사망을 접수한 자. 그 이름 칸에 적혀 있는 세 글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었다.
[접수자: 강도윤]
…뭐? 내가 나를 죽였다고 접수했다고?
속았다. 나는 원본을 지키기 위해 분리된 증인이라는 말조차, 이제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원본을 죽였다는 뜻인가. 아니면 누군가 내 이름으로 사망을 접수했다는 뜻인가.
붉은 타이머는 무정하게 09:55를 가리키며 줄어들고 있었다.
작가의 말: 도윤 씨, 퇴근은 멀었고 진실은 더 멉니다.
제목: 35화. 사망 접수자 강도윤
[보류 민원 재심 대상: 원본 KDY 사망 접수자]
종이 쪼가리 주제에 냄새가 났다. 낡은 한지에서 풍기는 퀴퀴한 곰팡이 내와 코를 찌르는 혈흔의 쇠 맛.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름 칸에 박혀 있는 세 글자.
[접수자: 강도윤]
내 이름이었다. 주민등록증에, 헌터 자격증에, 그리고 월급 통장에 박혀 있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바로 그 이름.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종이 가장자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어 쩍 소리가 났다. 이 이름을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이 민원감사실의 기괴한 시스템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른다. '이름을 부르면 더 위험해진다'는 한지율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아 진정시켰다.
"왜 그러십니까, 강도윤 씨? 본인의 성함이 낯설기라도 한 겁니까?"
감사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유흥이 서려 있었다. 어둠 속 감사관의 눈동자가 휘어지는 게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는 마치 쥐새끼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은 고양이처럼, 내 동요를 즐기고 있었다.
"절차에 따라, '접수자 본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서류에 적힌 이름을 직접 낭독해 주시지요."
감사관의 손가락이 종이 위 '강도윤' 세 글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가 마치 사형 집행인의 발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
나는 숨을 고르고, 서류를 응시했다. 이름을 읽는 순간 게임 끝이다. 하지만 읽지 않으면 재심 절차는 진행되지 않고, 10분 뒤 내 권한은 날아간다. 외통수였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굴러먹은 짬밥이 어디 가진 않는다. 나는 시선을 서류 하단으로 내렸다.
"……문서 번호 KDY-DR-990815. 절차명, 원본 KDY 사망 보류 민원 재심. 접수자 확인은 서류상의 기재 사항과 본인의 영혼 각인 일치 여부로 대체할 수 있는 규정이 있는 걸로 압니다. 민원실 관리 규정 3조 4항에 따르면 말이죠. 제 이름이 여기 적혀 있다면, 제 각인과 대조하면 될 일 아닙니다?"
목소리는 최대한 건조하게, 마치 귀찮은 행정 절차를 처리하는 공무원처럼 내뱉었다.
감사관은 잠시 침묵했다. 감사관 뒤의 낡은 환풍구이 끼익, 비명을 질렀다. 감사관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으리라. 감사관은 잠시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꼼수에는 능하시군요. 좋습니다. 하지만 접수 내용 확인은 피할 수 없을 겁니다."
[08:45]
초록색 형광등이 타이머의 숫자처럼 깜빡였다. 지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신경에 거슬렸다. 철제 선반 위에 쌓인 먼지 쌓인 서류 박스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지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서류의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다 다시 찢어진 기억의 파편 아래로 가라앉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신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현재 기억은 엉망진창이었다.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 그럼 '사망 접수자 강도윤' 씨가 제출한 원본 접수 양식을 확인하시죠."
감사관이 다른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불에 그을려 가장자리가 까맣게 타들어 가 있었고, 잉크가 번져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핵심 항목 일부만 겨우 식별할 수 있었다.
[대상: 원본 KDY]
[사유: 보존 불가]
[동의: 본인 서명]
[첨부: 검은 우산 도장]
나는 '본인 서명'란을 응시했다. 거기에 적힌 필체는 분명 내 것이었다. 내가 평소에 휘갈겨 쓰는,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듯하면서도 끝이 뭉툭한 그 필체. 하지만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잔향청취'를 가동했다. 시각 정보 너머의, 이 종이가 머금고 있는 과거의 흔적을 읽어내기 위해.
'아이구, 뜨거워라! 왜 날 태우고 난리야, 징징징….'
종이 쪼가리가 투덜대는 소리가 뇌리에 울렸다. 민원 서류답게 지독하게 억울해하는 잔향이었다. 나는 그 투덜거림 속에서 '서명'의 순간에 집중했다.
'윽! 손가락 부러지겠네! 왜 이렇게 꾹꾹 눌러쓰는 거야? 그리고 피 냄새! 으악, 더러워!'
서명은 분명 내 필체였다. 하지만 잔향 속에 느껴지는 압력의 방향과 잉크가 번진 모양새가 이상했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쓸 때의 자연스러운 압력 이동이 아니었다. 마치 왼손으로 억지로 쓴 듯, 아니면 누군가 내 손을 억지로 붙잡고 강제로 쓰게 한 듯, 압력이 불안정하고 잉크가 부자연스럽게 사방으로 튀어 있었다. 망설임의 흔적과 함께, 피가 번진 방향도 오른손잡이가 자연스럽게 쓸 때와는 반대였다.
내가 직접 쓴 게 아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내 필체를 흉내 내어 강제로 쓴 흔적.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서명 확인은 끝났습니까? 본인의 필체가 확실하군요. 그렇다면 이제 절차대로 이름을 낭독…."
감사관의 목소리가 다시 내 추리를 끊고 들어왔다. 감사관이 손을 뻗자, 공중에 '강', '도', '윤' 세 글자가 검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 글자들이 내 목을 조여오는 듯한 기괴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안 돼…!"
한지율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내 가슴팍에 매달려 있던 녹음기로 손을 뻗었다. 다시 그 녹음을 재생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녹음기에 닿기 직전, 감사관의 손에서 튀어 나간 검은 봉인지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증빙 보관자는 증빙 역할만 하면 됩니다. 절차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감사관의 차가운 일갈. 한지율은 검은 봉인지에 묶여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를 보호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405번 증빙 보관자'라고 부를 때마다, 나는 그녀를 인간이 아닌 서류 취급하는 이 시스템의 모순에 치를 떨었다.
[05:30]
타이머는 사정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이름을 낭독하면 감사실의 규정에 묶여 '사망 접수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이 판을 뒤흔들 한 방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불에 탄 접수 양식을 쏘아보았다.
[첨부: 검은 우산 도장]
그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씨익 웃었다. 하드보일드하게, 하지만 가볍게.
"잠깐. 이 접수, 일반 사망 접수가 아니잖습니까? '외부 첨부물'이 포함된 민원이네요. '검은 우산 도장' 말입니다."
나는 감사관을 똑바로 응시했다. 어둠 속 감사관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
"규정집 7조 2항에 따르면, 외부 첨부물이 포함된 민원의 경우, 재심 절차에서는 반드시 그 첨부물 '원본'을 제출하여 대조 확인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불에 탄 사본 말고요. 검은 우산 도장 원본, 지금 이 자리에 제출해 주시지요."
이것은 도박이었다. 이 민원감사실 안에 그 도장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만약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도장이 아닐 것이다. 한지율의 녹음에서 들었던, '사망 접수 순서'를 바꾸는 장치.
감사관은 잠시 당황한 듯 침묵했다. 낡은 환풍구가 요란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저었다.
"…규정이 참으로 번거롭군요. 알겠습니다. 대조 확인을 위해 제출하지요."
감사관이 벽면 가득한 선반 중,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있는 작은 철제 금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금고는 녹슬고 낡아 있었지만, 기괴한 마력이 느껴졌다.
[딸깍]
금고의 비밀번호가 맞춰지는 소리. 그 순간, 내 왼손등이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뜨거워졌다. [YSH-00] 태그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동시에, 검은 봉인지에 묶여 있던 한지율의 손목에서도 기괴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윤서하. 그녀의 이름은 직접 부르지 않았지만, 그녀와 관련된 [YSH] 코드가 이 금고의 개방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와 이 도장, 그리고 YSH는 대체 어떤 관계란 말인가.
[끼이익-]
녹슨 금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는 검고 묵직한, 손잡이가 우산 모양으로 조각된 도장이 들어 있었다. 도장 자체에서는 아무런 잔향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사망의 순서라는, 이 거대한 시스템의 논리를 뒤트는 장치라는 것을. 아직 작동 원리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02:50]
타이머의 숫자가 빨간색으로 변하며 깜빡였다. 그와 동시에, 지난번 대가로 치렀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 그 하얗게 지워진 빈자리가 갑자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잃었는지, 그 기억의 내용은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아주 소중하고, 따뜻했던 것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상실감만이 가슴을 후벼 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자, 검은 우산 도장 원본입니다. 접수자 확인과 도장 대조를…."
감사관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통증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금고 안을 응시했다. 감사관이 도장을 꺼내려는 순간, 도장 밑에 깔려 있던 작은 종이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 민원실의 규격 봉투가 아니었다. 찢어진 수첩 종이 조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필체는, 삐뚤빼뚤하고 투박한, 하지만 낯익은 필체였다. 문태식이었다.
[도윤아, 네가 이걸 보면 절대 찍지 마라.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
문태식의 마지막 유언 같은 경고가, 내 번져가는 시야 속에서 선명하게 박혀왔다.
작가의 말:
도윤이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통증과 함께 밝혀지는 문태식의 경고. 다음 화, 도장은 누가 찍게 될까요?
✦ 작가의 말
민원감사실은 이름보다 무서운 것을 꺼냈습니다. 도장 한 번이 원본을 바꾼다면, 누가 두 번째로 찍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