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37화. 두 번째 도장과 원본 확인자
제목: 36화. 두 번째 도장
금고 안쪽, 차가운 철판 위에 놓인 문태식의 쪽지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볼펜 똥이 이리저리 튄, 악필이라면 악필인 그 글씨가 내 망막을 난도질했다.
[도윤아, 네가 이걸 보면 절대 찍지 마라.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
...미친 영감탱이. 죽어서도 퀴즈쇼를 하고 자빠졌네.
머릿속이 핑 돌았다. '원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지하 2층의 희박한 공기를 전부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원본 KDY 사망 접수자, 그리고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는 경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감사관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눈빛만은 기괴할 정도로 형형하게 빛내며 나를, 아니 내 손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도윤 씨. 금고는 열렸습니다. 절차에 따라, 증거물인 검은 우산 도장을 직접 꺼내 서류의 도장 자국과 대조해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지만, 요구는 명확했다. 내 손으로 그 도장을 잡으라는 것.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어 쩍 소리가 났다.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지금 이 도장을 집어 들어 서류에 꾹 누르는 순간, 나는 '진짜 강도윤'으로 확정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두 번째'가 되어 무언가의 제물이 되는 걸까?
어떤 경우든, 문태식의 경고는 명확했다. '절대 찍지 마라'.
하지만 찍지 않으면?
타이머의 숫자는 비정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6분 15초.
"대조를 거부하시겠습니까? 증거 제출 거부는 민원 취하 및 한지율 헌터의 즉각적 폐기 절차 진행으로 간주됩니다."
감사관의 목소리에 섞인 쇳소리가 귀를 긁었다.
이런 씨... 선택지가 없다. 한지율을 살리려면 이 도장을 증명해야 하고, 도장을 증명하려면 내 손으로 직접 만져야 한다. 민원감사실의 규정은 헌터 협회의 그 어떤 법보다 지독했다. '본인 확인'이라는 명목으로 영혼의 각인까지 털어가는 곳이니까.
나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등 뒤에서 한지율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상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력 역류로 인한 청색증이 목까지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으, 윽..."
그녀의 고통 섞인 신음소리가 들리자, 내 뇌의 한구석이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문태식은 왜 이 쪽지를 여기에 남겼을까. 내가 이걸 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쪽지 자체가 힌트다. 단순히 '찍지 마라'는 경고뿐만 아니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도장에 손을 뻗는 척하며, 쪽지를 더 자세히 살폈다.
일단, 필체. 문태식의 것이 맞다. 볼펜 압력이 일정하지 않고 간혹 종이가 찢길 듯 꾹 눌린 자국. 성격 급한 영감이 욕하면서 썼을 게 뻔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글자 간격이 미묘하게 불규칙했다.
[도윤아, 네가 이걸 보면 절대 찍지 마라.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
'두'와 '번째로' 사이의 간격이 터무니없이 넓었다. 마치 무언가를 일부러 띄어 쓴 것처럼.
그리고 찢긴 모서리. 쪽지의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삼각형 모양으로 깔끔하게 찢겨 있었다. 단순한 파손이라기엔 너무 인위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냄새. 지독한 담배 냄새 사이에 섞여 있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탄내. 불탄 접수 양식에서 나던 그 냄새와 비슷했다.
[잔향청취]를 시도했다. 쪽지에서 들려오는 문태식의 마지막 목소리.
─ 새끼,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게 끝이었다. 농담인지 욕인지 모를 한마디.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가벼움이 아닌, 짙은 피로와 걱정이 깔려 있었다.
나는 다시 도장을 바라보았다. 우산 모양의 손잡이는 검게 그을려 있었고, 바닥의 인면은 피처럼 붉은 인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 도장은... 소리가 없다.
[잔향청취]를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건 완벽한 무음뿐이었다. 마치 우주의 심연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은, 지독한 고요.
이건 정상이 아니다. 아무리 오래된 물건이라도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다면 미약한 감정이나 기억의 찌꺼기라도 남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도장은 깨끗했다. 아니, 깨끗하다 못해 무의 상태였다.
마치 죽음의 기록을 너무 많이 먹어치워서, 소리마저 지워진 물건처럼.
이걸 찍으면 안 된다. 직감이 뇌수까지 파고들며 비명을 질렀다. 이 도장은 영혼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강도윤 씨. 시간이 없습니다."
감사관이 내 손목을 홱 낚아챘다. 차갑다. 얼음장 같은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꽉 쥐고 도장 위로 가져갔다.
"직접 찍어 대조하십시오. 그것이 절차입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수축했다. 마치 뱀의 눈처럼.
나는 그녀의 악력에 휘둘리며 도장을 향해 손이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 오른손 검지가 도장의 손잡이에 닿으려는 찰나, 문태식의 쪽지가 다시 머릿속에 스쳤다.
두 번째로 찍는 놈이 원본이 된다.
'두'와 '번째' 사이의 그 넓은 공백. 그리고 찢긴 모서리.
문득, 협회의 구형 도장 규정이 떠올랐다. 원형 도장은 인면의 위아래를 구분하기 위해 손잡이에 작은 홈을 파두거나, 모서리를 약간 깎아낸다. 그게 '첫 번째' 기준점이다.
문태식은 일부러 '두 번째'라는 단어에 공백을 두어, 내가 인면의 기준점을 틀어 생각하게 유도한 것일까?
아니, 그보다 더 직관적인 힌트가 있었다. 탄내. 탄내는 불탄 접수 양식의 잔향이었다. 그 양식에는 [동의: 본인 서명]이 있었고, 나는 그 서명이 내 필체를 흉내 낸 오른손잡이의 자연스러운 압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강제로 쓰게 했거나 왼손으로 쓴 것처럼.
그래, 왼손.
문태식은 쪽지를 찢고 띄어쓰기를 통해, 그리고 탄내를 통해 내게 힌트를 주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찍지 마라.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마지막 도박을 걸기로 했다.
그녀의 악력에 밀려 내 손가락이 도장에 닿는 순간, 나는 오른손의 힘을 완전히 빼버렸다. 그리고 대신, 왼손을 뻗어 감사관의 손등을 덮어씌웠다.
"으, 윽!"
예상치 못한 반격에 감사관의 신음소리가 터졌다.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등을 내 오른손과 함께 도장 위로 꾹 눌렀다. 마치 내가 그녀의 손을 빌려 도장을 찍는 것처럼, 아니, 그녀가 내 손을 이용해 도장을 찍게 만드는 것처럼.
우리의 손이 엉킨 채 검은 우산 도장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금고 안에 놓여 있던 문태식의 쪽지 위, 그 '두 번째로'라는 공백 자리에 도장을 꾹 눌렀다.
콰앙-!
민원감사실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굉음이 들렸다.
도장이 쪽지에 닿는 순간, 핏빛 인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감사관의 피부가, 마치 불에 탄 종이처럼 검게 변하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정장과 피부가 재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민원감사실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혹은 이 도장이 부리는 '무언가'였다.
나는 왼손에 전해지는 소름 끼치는 냉기를 느끼며, 서서히 힘을 풀었다.
도장은 문태식의 쪽지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검은 우산 모양의 문양.
그리고 그 문양 아래,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대조 완료: 원본 확인자 ─ ]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 이름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이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원본 확인자]
이것이 이 미친 시스템의 마지막 단계였다. 누군가 '두 번째'로 도장을 찍음으로써 '원본'이 확정되는 순간. 나는 감사관의 손을 이용해 시스템의 논리를 꼬아버렸다. 내가 직접 찍지 않았으니, 나는 '두 번째'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원본'인가?
그때, 민원감사실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타이머의 숫자가 0으로 변하며 지독한 경보음이 울렸다.
비상벨 소리 사이로, 지하 2층의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두 굽 소리. 또각, 또각, 또각.
규칙적이고, 냉소적인, 그리고 너무나 익숙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검은 코트를 입고 한 손에는 은색 스틱을 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강도윤 씨. 오랜만이네요."
나는 그녀의 이름을 뇌새김했다.
윤서하.
협회 최연소 이사, 그리고 한지율의 'YSH 코드'.
그녀가 내 손에 들린 검은 우산 도장을 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결국, 네가 두 번째 도장을 찾았구나."
그녀의 시선이 내 오른손이 아닌, 내 왼손에 닿았다.
"하지만 원본 확인자는 네가 아니야."
그녀의 스틱이 나를 가리켰다. 아니, 정확히는 내 뒤에 쓰러져 있는 한지율을 가리켰다.
"원본 확인자는, 저기 누워있는 '원본 KDY'의 소유자니까."
...뭐?
충격적인 사실에 내 사고가 정지했다.
원본 KDY가, 한지율의 소유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강도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윤서하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이제, '진짜' 절차를 시작해볼까?"
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 지옥의 밑바닥에서, 나는 또 다른 심연을 마주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도윤의 기지로 위기를 넘긴 줄 알았는데, 더 큰 판이 열렸습니다. 원본 KDY의 소유자라니, 민원감사실은 사람 헷갈리게 하는 데도 공무원급이네요.
제목: 37화. 원본 확인자
"결국, 네가 두 번째 도장을 찾았구나."
윤서하의 목소리는 지하 2층의 습기 찬 공기를 단번에 얼려버릴 만큼 차가웠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한 압박감을 사방에 뿌리며 걸어 들어왔다. 검은 코트 자락이 쓸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오른손에 들린 은색 스틱이 금속 바닥을 가볍게 두드릴 때마다, 민원감사실의 비상등이 깜빡였다.
"하지만 원본 확인자는 네가 아니야."
그녀의 시선이 내 옆,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한지율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오른손목을.
"원본 확인자는, 저기 누워있는 '원본 KDY'의 소유자니까."
나는 침을 삼켰다. 방금 전 감사관을 불탄 종이 쪼가리로 만들어버린 검은 우산 도장의 감촉이 여전히 왼손에 남아 있었다. 쪽지의 공백 위에 선명하게 찍힌 검은 문양. 그 아래로 떠오른 [대조 완료: 원본 확인자 ─ ]라는 시스템 메시지.
방금 내 손으로 찍었는데, 내가 확인자가 아니라고?
"원본 KDY...?"
내가 아는 KDY는 내 이름, 강도윤의 이니셜뿐이다. 그런데 한지율이 그 원본의 소유자라니. 이 여자는 대체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또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윤서하 씨."
나는 도장을 쥐지 않은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최대한 동요를 감추려 애쓰면서.
"퇴근 시간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야근 중이신가 봐요? 특수경비과 팀장님은 수당도 안 나오면서 참 열심이시네요."
"농담할 상황이 아닐 텐데."
그녀는 내 빈정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걸음을 멈췄다. 거리는 약 5미터. 이 거리라면 그녀가 은색 스틱을 휘두르기도 전에 내가 도장을 내던질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내 목이 날아갈 확률이 더 높다.
"네가 한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는 해? '잔향청취'로 죽은 자들의 소리나 주워듣던 네가, 시스템의 원본 기록을 건드린 거야."
그녀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그 안에는 분노도, 경멸도 없었다. 그저 사무적인, 아주 지독하게 사무적인 냉정함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냉정함 이면에 무언가 급박한 것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밟고 선 문턱.
그곳에서 희미한 잔향이 느껴졌다. 내 이능은 소리를 듣는 것이지만, 가끔은 형태가 없는 감정의 파동을 소리처럼 감지하기도 한다. 지금 그녀의 구두 굽이 닿은 그 문턱에서, 아주 미세하지만, 찢어질 듯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안 돼. 너무 빨라. 이번엔, 제발...]
단편적인 소리였지만, 그것은 윤서하의 진심이었다. 그녀는 지금 무언가를 막기 위해 이곳에 왔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에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는 저렇게 차가운 척하면서 속으로는 타고 있는 셈이다.
"무슨 의미인지 가르쳐 주시면 참 고맙겠네요. 저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민원 처리하러 온 하급 공무원이라서요."
"하급 공무원이 감사실 금고를 털고, 소멸한 감사관의 손을 빌려 도장을 찍나?"
"그건... 정당방위였죠. 그리고 이 도장, 소리가 안 나더라고요. 팀장님 코트처럼 완전 쌔까매서 그런가."
나는 농담을 던지며 은근슬쩍 한지율의 앞을 막아서듯 몸을 움직였다. 그녀가 '원본'이니 뭐니 해도, 일단은 내 민원인이다. 폐기 처분되게 둘 순 없다.
"그 도장, 내놔."
윤서하가 스틱을 고쳐 잡으며 명령했다.
"왜요? 이게 그렇게 탐나시면 그냥 가지시지. 근데 문태식 선배 쪽지에는 절대 찍지 말라고 되어 있던데요."
"네가 찍은 건 '두 번째'야. 두 번째 도장은 원본을 확정하는 절차일 뿐이지.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내 왼손에 들린 도장으로 향했다가, 다시 나를, 아니 내 어깨너머의 한지율을 보았다.
"하지만 세 번째 도장이 찍히면, 이야기가 달라져. 세 번째는 '확정'이 아니라 '가동'이니까."
"가동?"
"그래. 이 검은 우산 도장은 단순히 기록을 지우는 물건이 아니야. 지워진 기록의 에너지를 모아, 새로운 '원본'을 강제로 덮어씌우는 트리거지. 세 번째 도장이 이 종이 위에, 혹은 누군가의 몸에 찍히는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민원감사실이 아니라, 서울 전체의 기록망이 반응할 거야. 모든 데이터가 꼬이고, 존재가 뒤바뀌고, 시스템이 붕괴하겠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그거 참 무서운 이야기네요. 그런데, 왜 그 '세 번째'가 찍히는 걸 겁내시는 거죠? 팀장님은 시스템을 지키는 경비과 소속이시잖아요. 시스템이 붕괴하면 퇴직금 안 나와서?"
"강도윤!"
윤서하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의 은색 스틱이 바닥을 강하게 내려쳤고,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의 금속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 충격파에 내 몸이 휘청거렸다.
"지금 당장 도장을 내놔. 이건 경고가 아니야."
"경고가 아니면... 협박인가요?"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슬쩍, 그녀가 내려친 스틱 끝의 잔향을 들었다.
[...늦었어. 그래도 이번엔 죽게 두지 않아.]
또다시 들려온 그녀의 속마음. 이번에는 선명했다. '이번엔 죽게 두지 않아.' 그녀는 이 상황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지금 이토록 필사적인 것이다.
그 '누군가'가 누구지? 나? 아니면 한지율?
"으윽..."
그때, 등 뒤에서 한지율의 신음이 들렸다. 그녀의 몸이 기묘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마치 몸속에 있는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처럼. 그녀의 의식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기억 소리가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과거. 아주 먼 과거의 기억.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파편.
"지율아."
어린 시절의 한지율 앞에, 지금보다 훨씬 젊고 약간은 지쳐 보이는 윤서하가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은색 스틱이 아니라, 기묘한 빛을 내는 데이터 코드가 들려 있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거야. 내 목숨보다, 아니, 이 세계보다 더 중요한 거야."
윤서하의 목소리는 지금처럼 차갑지 않았다. 슬픔과 미안함, 그리고 굳은 결의가 섞여 있었다.
"네 이름에... 이걸 맡길게. 잠시만, 잠시만 보관해 줘. 언젠가 '원본'이 돌아오면, 그때 다시 가져갈게."
윤서하의 손에 들려 있던 데이터 코드가 어린 한지율의 오른손목으로 스며들었다. 그 코드는 아주 잠깐, 선명하게 빛났다.
[KDY-00-ORIGINAL]
이게... '원본 KDY'의 정체? 윤서하가 한지율에게 맡긴 이름?
그럼 나는 뭐지? 나는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지만 진짜 이름은 빼앗긴, 그냥 껍데기일 뿐인가? 윤서하가 말한 '분리된 증인'이라는 게, 이 원본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제본이라는 뜻이었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살아가고 있던 건가.
그때, 민원감사실의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비상사태 발생. 두 번째 원본 대조 완료.]
[원본 확인자 절차를 시작합니다.]
[확인자 호출 중... 확인자 호출 중...]
윤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안 돼. 벌써 시작됐어..."
"뭐가... 뭐가 시작됐다는 거죠?"
"시스템이 '두 번째 도장'을 인식했어. 이제 원본을 확정하기 위해 '원본 KDY'를 호출하는 거야. 한지율의 몸속에 있는 그 코드를!"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지율의 오른손목이 터질 듯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붕대가 감겨 있던 소매가 찢어지고, 그 아래 살결 위에 선명하게 붉은색 글자가 떠올랐다.
[KDY-00-ORIGINAL]
그와 동시에, 내 왼손에 차고 있던 은색 시계형 태그, [YSH-00]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 태그가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워졌다. 마치 등 뒤의 한지율과 내가, 서로를 끌어당기거나 혹은 밀어내려는 것처럼 기묘한 공명이 일어났다.
"강도윤, 도장을 던져!"
윤서하가 은색 스틱을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스틱이 내 목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내 몸은 그녀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아니, 따를 수 없었다. 내 왼손이, 검은 우산 도장을 쥔 그 손이, 윤서하의 공격을 피해 한지율에게로 향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왼손의 태그와 한지율의 손목에 있는 원본 코드가 서로를 부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나는 비명을 질렀다. 내 왼손이 한지율의 손목을 향해, 그 '원본 KDY'라고 적힌 피부 위로, 검은 우산 도장을 내리찍으려 했다.
"안 돼! 세 번째 도장은 안 돼!"
윤서하의 은색 스틱이 내 왼손목을 강타했다. 깡! 하는 금속음과 함께 스틱이 튕겨 나갔지만,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스틱이 닿은 부분의 살점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나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내 왼손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증인'으로서, '원본'을 확정하기 위한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강도윤! 정신 차려! 그거 찍으면 너도, 지율이도, 서울도 다 끝나!"
윤서하가 내 몸을 끌어안으며 막아섰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한 것은, 내 왼손을 움직이는 거대한 시스템의 의지였다.
쾅!
결국, 검은 우산 도장이 한지율의 손목 위, [KDY-00-ORIGINAL]이라고 적힌 그 자리 위로, 정확하게 내려찍혔다.
그 순간.
지하 2층의 모든 불빛이 꺼졌다. 완전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한지율의 손목에 찍힌 세 번째 도장이, 검은색이 아닌, 핏빛보다 더 붉은 기묘한 코드로 변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록이 지워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새로운 기록이,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파괴적인 데이터가, 강제로 덮어씌워지는 소리였다.
직직, 직...
내 귓가에,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지독한 불협화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붕괴 시작.]
[최상위 원본 KDY 가동.]
작가의 말: 세 번째 도장이 결국 찍혔습니다. 도윤 씨, 이번엔 영수증으로도 수습이 어려워 보이네요.
✦ 작가의 말
세 번째 도장이 결국 찍혔습니다. 도윤 씨, 이번엔 영수증으로도 수습이 어려워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