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149화. 내 이름을 부르는 백설과 이름을 부르지 않는 법
제목: 148-149화. 내 이름을 부르는 백설과 이름을 부르지 않는 법
제목: 148화. 내 이름을 부르는 백설
“도윤아,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줘.”
내 목소리였다. 성대가 긁히는 미세한 떨림부터, 말끝을 살짝 흐리는 비겁한 버릇까지 똑 닮은 내 목소리. 거울 속의 내가 말을 거는 것보다 훨씬 기괴한 경험이었다. 거울은 적어도 앞뒤가 반전되어 있다는 핑계라도 대지 않는가. 이건 내 영혼의 주파수를 그대로 따다가 공중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보육실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단순히 온도가 낮아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간을 채운 산소가 글자로 변해 내 폐부를 긁는 기분이었다.
달그락.
발치에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사탕 통이 뒤집혔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알록달록한 사탕이 아니었다. 하얀 성에가 잔뜩 낀, 사람의 손가락 마디만 한 얼음 결정체들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마다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파놓은 듯한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강도윤]
[강도윤]
[강도윤]
“...인기가 너무 많아서 탈이군. 팬 사인회라도 열어야겠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하얀 지옥에 무릎을 꿇고 내 이름을 헌납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자 벽면에 붙은 신발장과 사탕 바구니, 아이들의 낮잠용 매트가 보였다. 평범한 유치원의 풍경이어야 할 그것들이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신발장 위에 붙은 이름표는 전부 ‘강도윤’으로 바뀌어 있었고, 매트의 모서리에 수놓인 자수조차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로 증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냄새조차 그랬다. 소독약 냄새와 달콤한 솜사탕 향기가 뒤섞인 보육실 특유의 향기 사이로, 내가 평소 쓰던 샴푸 냄새와 눅눅한 자취방의 공기, 그리고 식어버린 편의점 도시락의 비릿한 잔향이 배어 나왔다. 이 공간 전체가 나라는 존재를 통째로 삼키고 배설해낸 결과물처럼 느껴졌다.
“도윤아, 내 이름을 불러 줘. 그러면 우리가 될 수 있어.”
중앙의 핵, 그 하얀 인형 뭉치 같은 것이 내 목소리로 애원했다.
“팀장님! 대답하지 마요!”
반가온이 내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녀석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녀석의 후각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이거, 이름만 노리는 게 아니에요. ‘호명’을 기다리고 있어요. 팀장님이 저 목소리에 반응해서 이름을 부르는 순간, 혹은 자기 이름을 인정하는 순간... 팀장님의 존재 로그가 저쪽으로 완전히 전이될 거예요. 저건 지금 낚싯바늘을 던져놓고 물고기가 입을 벌리기만 기다리는 거라고요!”
가온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백설은 단순히 내 이름을 훔친 것이 아니다. 내가 나 자신을 저 괴물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내가 ‘백설’을 부르는 순간, 백설은 내가 되고 나는 백설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는 식이다.
치익, 지지직-!
귓가에 꽂힌 인이어에서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와 함께 이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헌터님...! 들립니까? 통신... 불안정... 로그가 겹치고 있어요. 백설이 시스템의... 빈틈을...!
“현우 씨, 해결책만 말해! 지금 내 이름표가 온 사방에 도배됐다고!”
...진짜 이름을... 지켜야 합니다. 백설의 학습을... 흐트러뜨리세요! 관계 로그를... 섞으라고요! 한 가지 이름으로 정의되지 않게... 별명, 직위, 가짜 이름... 뭐든 좋습니다. 시스템이 강도윤이라는 단일 로그를 확정 짓지 못하게... 분산... 지직!
통신이 끊겼다. 하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백설이 나를 ‘강도윤’이라는 단일 개체로 포착하지 못하게 방해해야 한다.
“이름을 불러 달라고?”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목소리만큼은 최대한 건조하게 유지했다.
“미안하지만 내 이름은 좀 비싸거든. 오늘부터 내 이름은 ‘미납 수당’이다. 아니면 ‘연체된 카드 대금’으로 부르든가. 그건 부르는 사람도 고통스럽고 듣는 사람도 괴로운 이름이지. 어때, 감당할 수 있겠어?”
백설의 핵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내 목소리를 흉내 내던 소리가 잠시 멈칫했다. 시스템에 에러가 발생한 것처럼, 사방의 이름표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때, 내 손을 잡고 있던 윤서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방금 [보호자]라는 낙인을 스스로 깨부수고 돌아온 터라 안색이 창백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강도윤 씨.”
그녀가 내 진짜 이름을 불렀다. 백설이 유도하는 ‘호명’과는 결이 다른, 나라는 존재를 붙잡아 매는 닻 같은 목소리였다.
“이번엔 제가 부를게요. 당신이 당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그녀가 내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차가운 보육실의 냉기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온기였다.
“당신은 백설이 아니에요. 내 보호자 후보도 아니고, 누군가의 대용품도 아니에요. 당신은 그냥... 가끔씩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던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퇴근 걱정이나 하는, 내가 아는 그 강도윤이에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자, 벽면에 붙어 있던 [강도윤] 이름표 몇 장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백설이 구축한 ‘강도윤’이라는 가짜 로그가 그녀의 진심 어린 호명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온아, 너도!”
내 재촉에 반가온이 코를 훌쩍이며 소리쳤다.
“그래요! 제 월급 떼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는 악덕 팀장님! 이름은 강도윤이지만 본질은 구두쇠라고요!”
“...야, 감동 주다가 갑자기 왜 인신공격을 하고 그래.”
“지금 그게 중요해요? 로그 분산이라면서요!”
이현우의 목소리도 다시 끼어들었다.
강 헌터님, 아니, '강 대리'님! 아니면 '사망 플래그 수집가' 씨! 시스템 로그에 가짜 데이터 삽입 중입니다! 계속하세요!
백설의 핵이 비명을 지르듯 고주파의 소음을 내뱉었다. 내 목소리로 애원하던 태도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수십 명의 목소리가 뒤섞인 불협화음이 보육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 혼란을 틈타 바닥에 떨어진 낡은 병원 팔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잔향청취. 이 공간의 가장 깊은 곳에 박힌 기억을 읽어야 했다.
손끝에 닿은 플라스틱 팔찌의 감촉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곧바로 눈앞에 회색빛 기억이 일렁이며 펼쳐졌다.
어린 시절의 형, 강도원이 보였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작고 여린 손으로 백설의 핵—당시에는 정교한 의료 기기처럼 보였던 것—을 만지고 있었다. 형의 표정은 슬픔보다 무미건조한 의무감에 가까웠다.
“이건 아이가 아냐.”
어린 강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백설을 보며 ‘백설아’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건 그냥... 절차야.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반복되는 대체와 폐기의 루프. 백설은 아이를 연기하는 시스템일 뿐이야. 도윤아, 너는 절대 이 절차에 이름을 주면 안 돼. 이름을 주는 순간, 너도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리니까.”
기억 속의 강도원은 내 이름표를 뒤집어 ‘손님’으로 바꿨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형만의 방식이었다. 백설은 원래 보육을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이었으나, 수많은 아이의 데이터와 죽음을 학습하며 그들을 ‘흉내’ 내는 괴물로 진화해버린 것이었다.
백설은 아이를 원한 게 아니었다. 아이라는 ‘상태’를 지속하기 위한 끊임없는 반응과 로그를 원했을 뿐이다.
“...그랬던 거다.”
나는 팔찌를 바닥에 내던졌다.
“넌 아이가 아냐. 넌 그냥 고장 난 프로그램이지. 그리고 난 네 업데이트 파일이 될 생각이 없거든.”
백설의 첫 포획은 빗나갔다. 사방에 도배되었던 내 이름표들이 하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윤서하와 반가온, 그리고 이현우의 지원 덕분에 내 존재 로그는 수많은 관계명 사이로 흩어졌다.
하지만 끝난 건 아니었다.
쿠구구궁-!
보육실 바닥이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중앙의 핵이 팽창하며 유리 벽 너머의 어둠을 집어삼키려 했다.
그때였다.
강도원처럼 보이는 실루엣이 서 있던 유리 너머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탁. 탁.
일정한 리듬이었다.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형과 나만이 공유했던 유치한 암호였다.
‘도. 구. 리.’
내 어린 시절의 별명. 형이 나를 놀릴 때나, 혹은 부모님 몰래 밤에 방 문을 두드릴 때 쓰던 그 리듬.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유리 너머에 있는 저것이 정말 형일까? 아니면 백설이 내 기억 속에서 또 다른 미끼를 건져 올린 것일까?
탁, 탁탁, 탁.
리듬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더 빠르고 절박했다. 모스 부호와 비슷한 체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신호를 해석했다.
[대. 답. 하. 지. 마.]
유리 안쪽에서 희미한 손바닥 자국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 그 너머에서 필사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윤아.”
이번에는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도윤 씨, 저기 좀 봐요.”
내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했다. 내 옆의 윤서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는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는 허공에서, 그리고 내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도윤 씨, 내 이름을 불러줘요. 서하라고... 불러줘요.”
백설이 표적을 바꿨다. 아니, 전술을 바꿨다.
이제 백설은 윤서하의 목소리로, 내가 가장 거절하기 힘든 온기를 흉내 내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바닥의 균열 사이로 하얀 손들이 수천 개나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일제히 내 발목을 향해 뻗어왔다. 유리 너머의 형은 여전히 절박하게 유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지옥 같은 보육실의 밤은 이제 막 2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목: 149화. 서하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감촉은 불쾌할 정도로 서늘했다. 덜 마른 석고 반죽 같기도 하고, 며칠 방치된 생선 껍질 같기도 한 수십 개의 하얀 손들이 내 바지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 불쾌한 감촉보다 더 내 신경을 긁는 건, 바로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였다.
“도윤 씨, 왜 대답을 안 해줘요? 나 여기 있는데.”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그냥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말끝을 살짝 흐리는 습관, 내 이름을 부를 때의 미세한 고저차, 심지어 코끝을 스치는 그녀 특유의 서늘한 향기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내 뇌의 방어 기제가 ‘이건 가짜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음에도, 심장 한구석이 덜컥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서하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안 돼요?”
애틋한 간청. 그 목소리에 담긴 온기가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하마터면 입을 열어 그 이름을 뱉을 뻔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내 존재의 로그가 저 하얀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반가온의 경고가 아니었다면 이미 끝장났을 터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진짜’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아니, 다물고 있다기보다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목소리를 빼앗긴 듯 보였다. 그녀의 목구멍 근처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는 백색 기운이 소리의 통로를 틀어막고 있었다.
윤서하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평소의 냉정함 대신, 거기에는 당혹감과 함께 타오르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검집을 바닥에 두드렸다.
탁, 타닥, 탁.
일정한 박자. 하지만 그것은 구조 신호도, 공격 명령도 아니었다.
“도윤 씨, 듣지 마요! 저건 언니가 아니에요!”
반가온이 내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백설의 실루엣을 꿰뚫고 있었다.
“저 목소리에는 알맹이가 없어요. 서하 언니의 감정 표면만 긁어모아서 만든 가짜예요. 진짜 언니의 감정은 지금… 훨씬 더 복잡하고 지저분하단 말이에요! 수치심이랑, 분노랑, 그리고 아저씨를 살려야 한다는 저 지독한 고집 같은 거!”
반가온의 말이 맞았다. 백설이 내뱉는 목소리는 너무나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아는 윤서하는 그렇게 예쁘게만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때때로 칼날 같은 말을 뱉고, 가끔은 한숨 섞인 조소를 날리며, 무엇보다 자기 감정을 남에게 구걸하듯 드러내지 않는다.
치직, 귀에 꽂힌 인이어에서 이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도윤 씨, 정신 차리세요. 이름은 로그의 핵심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백설은 윤 팀장님의 데이터까지 오염시킬 거예요. 이름을 부르지 않고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관계의 증거’를 찾으세요. 시스템이 학습하지 못한, 오직 당신들만이 공유하는 비언어적 맥락 말입니다!]
관계의 증거라. 이 하드보일드한 지옥바닥에서 로맨틱한 추억이라도 끄집어내라는 건가. 안타깝게도 나와 윤서하 사이엔 그런 달콤한 건 없었다. 대신 아주 지독하고 쓴 것들은 넘쳐났다.
나는 발목을 붙잡은 하얀 손들을 거칠게 뿌리치며 윤서하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팀장님, 기억나요? 저번에 그 현장에서 제가 탔던 커피.”
윤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 설탕 세 스푼에 프림 다섯 스푼 넣어서 거의 갯벌 수준으로 걸쭉하게 만든 그거요. 팀장님이 한 입 마시고 ‘이건 독극물 분류법 위반’이라면서 제 시말서 검토하겠다고 했던 거요.”
윤서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녀는 검집으로 바닥을 더 세게 두드렸다. 타타닥! 마치 ‘그딴 소리를 지금 여기서 꺼내느냐’고 질책하는 듯한 리듬이었다.
“그때 팀장님 표정이 딱 지금 같았거든요.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걸 씹은 것 같은, 아주 재수 없는 표정.”
나는 백설이 내는 ‘서하’의 목소리를 완전히 외면했다.
진짜 윤서하는 지금 내 농담에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야말로 백설이 복제할 수 없는 생생한 삶의 증거였다. 그녀는 검집을 한 번 크게 휘둘러 바닥을 긁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보육실 내부를 긁고 지나갔다. 그것은 우리가 훈련장에서 합을 맞출 때, 그녀가 내 빈틈을 노리고 찌르기 직전에 내던 습관적인 파열음이었다.
“들리죠? 이게 진짜 팀장님 목소리예요. 그쪽이 흉내 내는 예쁜 소리가 아니라.”
내가 백설의 목소리를 거부하자,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윤서하의 목소리를 빌려 유혹하던 백설의 시도가 실패했음을 시스템이 인지한 모양이었다.
발목을 붙잡고 있던 하얀 손들 중 하나가 유독 길게 뻗어 나와 내 목을 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손목을 낚아챘다.
“어딜.”
힘을 주어 손을 비틀어 꺾었다. 우드득, 하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하얀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그 잘려 나간 손바닥 안쪽에 무언가 보였다. 검은색 잉크처럼 번져 있는 글자들.
나는 그 파편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잔향청취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음성 샘플… 보존… 강도윤… 늦춰야 한다…]
그것은 20년 전의 기록이었다. 내 형, 강도원이 남긴 흔적.
강도원은 백설이라는 시스템이 나를 완벽하게 학습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 일부를 샘플링 데이터 속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백설이 내 목소리를 흉내 내려 할 때마다 강도원의 목소리가 노이즈처럼 섞여 들게 만들었고, 그 결과 백설이 내 존재를 완전히 침식하는 시간을 20년이나 늦춰온 것이었다.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기꺼이 제물로 바쳤다.
유리 너머의 실루엣이 다시 움직였다.
똑, 똑똑똑, 똑.
‘도-구-리.’
어린 시절, 내가 이름보다 더 많이 들었던 부끄러운 별명. 형은 내가 무언가에 집중할 때 입술을 내미는 모양이 도구리를 닮았다며 놀려대곤 했다. 백설의 시스템이 ‘강도윤’이라는 데이터를 수집했다면 당연히 ‘강도윤’이라고 불렀을 텐데, 저 실루엣은 오직 형제만이 공유하는 틀린 정보—하지만 가장 정확한 단서—를 보내고 있었다.
유리 너머의 존재가 진짜 강도원일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차오르는 순간, 보육실 천장의 스피커에서 거친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경고. 무응답자 발생.]
[보육 절차 3단계: 미수거 객체 회수 공정 시작.]
백설이 더 이상 호명이라는 미끼를 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끼이익, 하는 금속음과 함께 천장의 레일이 움직였다. 하얀 천에 덮인 작은 낮잠 침대들이 수십 개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매달린 고치들 같았다.
그중 내 바로 앞에 멈춰 선 침대 하나. 그 천 위로 붉은색 열화상 로그가 찍혔다. 어린 강도윤의 체온 기록이었다.
“아저씨, 조심해요! 바닥이!”
반가온의 외침에 발밑을 보았다.
내 가슴팍에 붙어 있던 ‘손님’ 스티커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피는 바닥으로 흘러내려 거대한 글자를 써 내려갔다.
[무응답 손님 회수]
전광판의 글자가 붉게 번쩍였다. 내려오는 침대들은 이제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입을 벌린 관처럼 보였다.
“이름 안 부른다고 그냥 보내줄 생각은 없다는 거군.”
나는 바닥에 떨어진 강도원의 목소리 파편을 움켜쥐었다.
“형, 거기 있는 거 맞지? 조금만 기다려. 이 빌어먹을 어린이집, 퇴소 절차 밟아줄 테니까.”
검집을 고쳐 잡은 윤서하가 내 곁으로 다가와 섰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서늘한 눈빛은 이미 수백 마디의 욕설을 대신하고 있었다.
낮잠 침대들이 일제히 뚜껑을 열었다. 그 안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