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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47화. 직원 전용 통로와 백설 보육실 일러스트

146-147화. 직원 전용 통로와 백설 보육실

제목: 146-147화. 직원 전용 통로와 백설 보육실

제목: 146화. 직원 전용 통로의 백색 경고

상담 부스 뒷벽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졌다기보다는 존재 자체가 ‘로그아웃’ 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벽이 사라진 자리에는 기묘한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한쪽 벽은 고깃집 대형 냉동고의 스테인리스 재질인데, 반대쪽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병원 복도였다. 발밑은 관공서 서고에서나 볼 법한 낡은 리놀륨 바닥이었고, 천장에는 편의점 물류창고의 형광등이 깜빡이며 신경질적인 소음을 냈다. 이질적인 공간들이 누더기처럼 기워진 통로.

바닥에는 희끗한 성에가 끼어 있었고, 그 위로 누군가 젖은 우산을 접어 놓은 것 같은 검은 물자국들이 듬성듬성 번져 있었다.

“……복지 혜택이 엉망이네. 직원 전용 통로라면서 에어컨을 영하로 틀어놓다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농담으로 덮으며 앞장섰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여기서 내가 멈추면 뒤따라오는 이들도 멈춘다. 그런데 내 뒤를 따르던 윤서하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윽, 아…….”

서하 씨가 벽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그녀의 뒷덜미, 아까까지만 해도 [대체 개체 : 03번]이라고 적혀 있던 낙인이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글자들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키더니, 이내 서늘한 백색으로 빛났다.

[대체 개체 : 00번 후보]

그 문구가 뜨는 순간, 서하 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단순히 아픈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규격’에 맞춰 깎아내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시스템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불청객이 아니라, 백설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기 위한 ‘부품’으로.

“서하 씨!”

“오지 마세요, 도윤 씨. 건드리면…… 이 번호가 옮겨갈 것 같아요.”

그녀가 이를 악물며 손을 내저었다.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형을 구하겠다고 발을 들인 이 길에, 결국 서하 씨를 대체물로 밀어 넣고 있는 꼴이니까. 내 죄책감은 이제 만성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번 건은 부작용이 좀 심했다. 속이 뒤틀리고 구역질이 났다.

귓가에서 이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여 있었다.

형, 들려요? 앵커가…… 좌표가 안 잡혀요! 지금 그 통로,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에요. 건물 설계도에도 없어요. 20년 치 시스템 로그 위에 얹혀서 실시간으로 생성되고 있는 데이터 덩어리에 가깝다고요!

“데이터면 삭제해주면 안 되냐?”

삭제 권한이 ‘백설’한테 있어요! 제 접근 권한으로는 형들 위치를 읽는 게 고작…… 아, 안 돼. 연결이 자꾸 끊겨요. 조심하세요. 그 안에서는 존재 자체가 ‘기록’으로 변할 수 있어요!

현우의 목소리가 끊겼다.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아저씨, 냄새가 이상해.”

“뭐가?”

“백설이라는 거, 사람이 아니야. 그냥 잠든 절차의 냄새야.”

가온이가 허공을 더듬으며 덧붙였다.

“차가운 얼음이랑, 유치원에서 쓰는 소독약…… 그리고 아주 오래된 사탕 봉지 냄새. 아, 병원 팔찌 냄새도 나. 이건 사람이 아니라, 누가 만들어놓은 ‘방’ 같은 냄새야.”

복도 옆면에 낡은 게시판 하나가 나타났다. ‘직원 전용’이라는 딱지가 붙은 게시판에는 노랗게 변색한 서류들이 핀으로 꽂혀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20년 전 폐기 일정표’라는 제목이 보였다.

[백설 기동 시나리오 : 보호자 00번의 부재 시 대체 절차]

그 아래로 어린아이의 비뚤비뚤한 글씨가 겹쳐 보였다. 잔향청취가 멋대로 발동했다. 내 눈앞에 20년 전의 환영이 겹쳤다. 작은 손으로 볼펜을 꾹꾹 눌러쓰던 어린 강도원.

‘……내가 직원으로 등록되면, 도윤이는 손님이 되는 거지?’

어린 형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형은 자신의 이름을 직원 명부 가장 깊은 곳에 집어넣었다. 시스템의 톱니바퀴 사이에 제 몸을 끼워 넣어서라도, 동생인 나를 ‘손님’으로 남겨두려 했다. 시스템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형…….”

형은 백설의 기동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보호자 00번’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이 차가운 시스템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시스템은 공석이 된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제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게 지금 내 옆에서 고통받는 윤서하다.

치익, 하는 기계음과 함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자동문이 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문은 내가 아니라 서하 씨가 다가가자 반응했다.

상단 전광판에 무미건조한 붉은 글자가 떴다.

[00번 후보 확인 / 선행 입장 가능]

“안 돼.”

내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서하 씨의 몸은 자석에 끌려가듯 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당신이 대신 들어가면, 강도윤은 살아요.

통로 벽면에 달린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상담 부스에서 사라졌던 그 ‘대체 상담원’의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 아주 다정하고 신뢰감 가는 여성의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본질은 같았다. 유혹하고, 갉아먹는다.

강도원은 당신 같은 후보자를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 강도윤은 이 지옥 같은 연극에서 하차할 수 있습니다. 윤서하 씨, 당신은 원래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잖아요?

“입 닥쳐!”

내가 스피커를 향해 소리쳤지만, 서하 씨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 손을 놓으려 힘을 주고 있었다.

“도윤 씨…… 저 목소리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내가 들어가면, 당신 형제를…….”

“웃기지 마요! 그런 선택은 서하 씨가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녀의 허리를 낚아채듯 끌어안았다. 시스템이 그녀를 부품으로 보든, 열쇠로 보든 상관없다. 나에게 그녀는 내 소중한 동료이자, 이 미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사람이다.

“같이 가요. 내가 형을 데려오겠다고 했지, 누구 하나 갈아 넣어서 바꾸겠다고 한 적 없으니까.”

서하 씨가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검집 끝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서글프게 울렸다.

우리는 함께 열린 문 너머로 발을 내디뎠다.

복도 끝에는 육중한 철문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 위에 붙은 낡은 표지판에는 ‘백설 보육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작게 ‘대기실’이라는 글자가 덧칠되어 있었다.

그 문틈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까르르, 아하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웃음소리를 끊어버릴 듯한, 아주 고통스럽고 젖은 기침 소리.

“콜록! 헉, 후욱…… 오지 마…… 도윤아, 오지 마…….”

형이었다. 20년 동안 들어본 적 없지만, 단번에 알 수 있는 나의 형, 강도원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문 위의 전광판이 요란하게 점멸하며 글자를 바꿨다.

[보호자 00번 입장 대기]

서하 씨의 목덜미에 있던 낙인이 순식간에 차가운 백색 성에로 뒤덮였다. 그녀의 피부 위로 얼음 결정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존재 자체가 얼어붙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처럼.

“아저씨, 저 안에서…… 형 냄새가 너무 심해. 그런데…….”

가온이가 내 손을 꽉 잡으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누가 형을 먹고 있어.”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냉기가 느껴졌지만 놓지 않았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나는 형을 구하거나, 아니면 서하 씨와 함께 이 시스템의 영원한 기록으로 박제될 것이다.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제목: 147화. 백설 보육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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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화. 백설 보육실

문을 박차고 들어선 순간, 내 폐부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영하의 냉기가 아니라 지독하게 비릿한 ‘생활감’이었다.

분명 철문을 열었는데 발 밑은 장판이었다. 그것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푹신한 노란 장판. 하지만 그 위로 쏟아진 것은 햇살이 아니라 형광등의 파르스름한 명멸이었다.

“……여기가 보육실이라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공간은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천장에는 병원에서나 볼 법한 수거용 레일이 깔려 있고, 벽면에는 이름표 없는 신발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낮은 유치원용 침대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포근한 이불이 아니라 시신을 덮을 때 쓰는 하얀 광목천이었다.

침대 머리맡마다 걸린 것은 아이들의 이름표가 아니라, ‘01’, ‘02’ 같은 숫자가 적힌 낡은 병원 팔찌들이었다.

“도윤 아저씨, 조심해. 여기 냄새가 너무 이상해.”

반가온이 내 옷자락을 꽉 쥐며 코를 찌푸렸다.

“얼음 냄새가 나는데, 그 밑에 오래된 사탕 봉지랑…… 소독약 냄새가 섞여 있어. 그리고 이건, 사람이 아냐. 그냥 잠든 기계들이 내는 냄새 같아.”

보육실 중앙, 가장 큰 낮잠 매트 위에는 무엇인가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것은 아이의 형상이었으나 동시에 하얀 성에로 빚어진 인형 같았고, 수만 페이지의 서류 뭉치가 겹쳐진 그림자 같기도 했다. ‘백설’의 핵, 혹은 이 시스템이 20년 동안 덧칠해온 절차의 잔향. 그것이 숨을 쉴 때마다 보육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때, 보육실 안쪽 투명한 강화유리 너머의 ‘직원 휴게실’에서 누군가 벽을 두드렸다.

— 쿨럭, 쿨럭!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유리 너머, 어둑한 조명 아래 휠체어에 앉은 실루엣이 보였다. 야윈 어깨, 익숙한 머리 모양. 그리고 끊이지 않는 기침 소리.

“형? 강도원!”

나는 반사적으로 유리벽을 향해 달려나갔다. 하지만 한 발짝을 채 내딛기도 전에, 내 눈앞에 선명한 시스템 메시지가 경고등처럼 명멸했다. 아니, 그것은 메시지라기보다 이 방의 ‘교구’에 적힌 규칙이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블록들이 제멋대로 정렬하며 글자를 만들었다.

[규칙 1. 보호자 00번은 아동을 깨우지 않는다.]

[규칙 2. 손님은 이곳에서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규칙 3. 대체 후보는 울지 않는다.]

“도윤 씨, 가지 마요! 함정이에요!”

등 뒤에서 윤서하의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돌아보니 서하 씨의 발목부터 하얀 성에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목 위로 떠오른 [대체 개체 : 00번 후보]라는 낙인이 마치 심장박동처럼 붉게 점멸했다.

“서하 씨!”

“괜찮…… 아요. 그냥, 조금 추워서. 그리고 자꾸 누가 머릿속에서 말을 걸어요. 강도윤 씨를 내보내라고. 당신이 나가야…… 당신이 살 수 있다고.”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그녀는 자기 팔을 껴안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백설’이라는 거대한 절차가 그녀를 보호자 00번의 자리에 강제로 끼워 넣으려 하고 있었다.

나는 유리 너머에서 기침하는 형과, 얼어붙어 가는 윤서하 사이에서 멈춰 섰다.

제길, 인생은 언제나 선택지 없는 시험지 같다. 둘 다 구하겠다는 말은 주인공들이나 하는 대사인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농담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현우! 들려? 이거 어떻게 해!”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이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형! 서하 씨 로그가 밀리고 있어요! 시스템이 그녀를 ‘윤서하’가 아니라 ‘보호자 00번’이라는 데이터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어요! 이름을 불러요! 후보 번호보다 이름 로그가 더 강해야 해요!

이름.

이곳에서 금지된 것.

나는 형이 갇힌 유리벽을 한 번 더 바라봤다. 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기침만 내뱉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저 유리를 깨부수고 형을 업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형에게 달려가는 순간, 윤서하는 이 냉동 보육실의 영원한 부품이 될 터였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형이 아니라, 비틀거리는 윤서하에게로.

“서하 씨, 내 말 들려요? 정신 차려요.”

그녀를 붙잡으려 하자, 내 손끝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얼음 결정이 맺혔다. 보육실 중앙의 ‘백설’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보호자는…… 손님을…… 내보내세요.]

그때, 내 발치에 떨어진 낡은 사탕 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지금은 단종된 지 오래된 양은 캔. 반사적으로 내민 손이 사탕 통에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잔향이 폭발했다.

— ‘도윤아, 이건 사탕이 아니라 약이야. 절대 먹으면 안 돼.’

어린 강도원의 목소리였다. 잔향 속에서, 어린 형은 보육실의 이름표들을 미친 듯이 뒤집고 있었다. 형은 내 가슴팍에 붙어 있던 ‘강도윤’이라는 이름표를 떼어내 거칠게 찢어버리고는, 그 자리에 ‘손님’이라고 적힌 스티커를 붙였다.

— ‘도윤이는 깨어 있으면 안 돼. 백설이 도윤이 목소리를 배우면 안 돼. 그러면 널 먹으려 들 거야.’

형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형은 나를 옷장에 밀어 넣으며 속삭였다.

— ‘부르지 마. 내 이름도, 네 이름도 부르지 마. 네가 누군지 잊어버린 척해.’

현실의 내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형은 나를 지키려고 내 이름을 지웠던 거다. 내가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지 않도록, 철저히 ‘손님’으로 남겨두기 위해서.

그런데 지금, 저 유리 너머의 형이 나를 부르고 있다?

“아저씨! 저거 형 아냐!”

반가온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냄새가 변했어! 저 유리 너머에서 나는 건 형 냄새가 아냐. 형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얼음 조각이야! 백설이 아저씨를 부르려고 형의 목소리를 배우고 있어!”

그와 동시에 유리 너머의 실루엣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없었다. 그저 하얀 노이즈로 가득 찬 구멍이 입을 벌리며, 내 형의 목소리로 속삭였다.

— 도윤아…… 나 여기 있어. 구해줘.

소름이 끼쳤다. 저건 미끼다. 나를 규칙 위반으로 유도해 이 방의 일부로 만들려는 덫.

나는 이를 악물고 윤서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저를 버리고 가세요’라고 말하려는 듯이.

“아니, 못 가요.”

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게, 하지만 분명하게 읊조렸다.

“윤서하.”

보육실의 형광등이 요란하게 파편을 튀기며 터져 나갔다.

[경고 : 손님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윤서하 씨, 내 말 똑바로 들어요. 당신은 00번 후보도 아니고, 누구 대신 죽으러 온 소모품도 아냐.”

나는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아 내 가슴에 갖다 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 대한 분노 때문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내 퇴근길 방해한 벌 받아야지, 여기서 잠들면 안 되잖아. 윤서하!”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낙인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00번 후보]라는 글자 위에 [윤서하]라는 세 글자가 겹쳐지며 불꽃을 튀겼다.

— 이현우 : 좋아! 로그 충돌한다! 조금만 더! 그녀가 자기 자신임을 자각하게 만들어!

“서하 씨, 당신 이름은 당신 거야. 누가 준 번호 따위가 아니라.”

나는 짐짓 농담 섞인 말투로 덧붙였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중에 수당 청구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무명씨한테는 입금 안 해준다고, 우리 회사가.”

그 순간, 윤서하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 눈물이 바닥에 닿자마자 하얀 성에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규칙 3 위반 : 대체 후보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류 : 보호자 자격 상실.]

그녀의 목 위를 짓누르던 낙인이 순식간에 변했다.

[윤서하 / 보호자 거부]

“……강도윤 씨.”

그녀의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내 옷소매를 꽉 쥐는 힘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였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냉기가 한풀 꺾이며, 보육실을 가득 채웠던 규칙 문구들이 모니터 노이즈처럼 일그러졌다.

우리가 해낸 건가.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보육실 중앙, 웅크리고 있던 ‘백설’의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섰다. 그것은 더 이상 아이의 형상이 아니었다. 수천 개의 이름표가 이어 붙여진 기괴한 거인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거인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것의 입이 열렸다.

거기서 흘러나온 것은 형의 목소리도, 시스템의 기계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하게 나의 것과 똑같은, 나의 목소리였다.

“도윤아.”

백설이 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내 이름을 불러 줘.”

그 순간, 보육실 벽면에 붙어 있던 수백 개의 이름표가 일제히 뒤집혔다.

앞면에는 모두 똑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강도윤 ]

우리는 ‘백설’이 형의 목소리를 배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그놈은 처음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름을, 내 존재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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