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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9화. 한 번 죽은 보호자와 내일 날짜의 손도장 일러스트

98-99화. 한 번 죽은 보호자와 내일 날짜의 손도장

제목: 98화. 한 번 죽은 보호자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 온 것은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종이가 썩어가는 악취였다.

분명 0층 기록보관소 아래의 비밀 공간이었을 텐데, 문 너머는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10년 전의 낡은 보호자 대기실 의자들이 삐딱하게 놓여 있고, 그 위로 헌터 협회의 임시 기록실 선반들이 층층이 겹쳐진 기괴한 중첩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 낡은 사무용 책상 뒤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늦었어, 도윤아. 네 보호자는 이미 한 번 죽었거든.”

최성국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 넉살 좋고 능구렁이 같은 중년의 최성국이 아니었다. 10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 잔뜩 찌든 피로와 숨길 수 없는 죄책감이 눈가에 매달린 과거의 최성국이었다.

그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그는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 자리에 서 있어야 할 어떤 기록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최 국장님?”

내가 한 걸음 내딛자, 최성국의 형상이 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마치 전파가 고르지 못한 구형 브라운관 화면처럼.

“아직…… 이름이 안 돌아왔군. [ ]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노이즈가 귀를 때렸다. 단말기 상태창이 빨간색 경고등을 띄우며 비명을 질렀다. 공간 자체가 내 이름이라는 데이터를 거부하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거 실체 아니야. 로그 잔향이야.”

옆에서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으며 낮게 말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최성국의 뒤편, 벽면 게시판에 붙은 어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거기엔 ‘윤’ 자로 시작하는 누군가의 명찰이 반쯤 찢긴 채 걸려 있었다.

“보호자가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부모님은 10년 전에…….”

“법적으로는 생존, 절차적으로는 소멸. 기록상의 모순이지.”

잔향 속의 최성국이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사망 처리 도장을 만지작거렸다.

“사망 처리된 보호자 권한으로는 이 아이를 데려갈 수 없어. 그래서 내가…… 내가 서명해야만 했지. 그게 유일하게 이 아이의 [ ]를 보존하는 방법이었으니까.”

말이 이어질 때마다 공간이 울컥거렸다. 최성국은 나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10년 전의 나를 보고 있었다.

“가온아, 저거 좀 봐.”

내 부름에 반가온이 조심스럽게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환자 팔찌 묶음을 집어 들었다. 눈이 가늘어졌다.

“도윤 오빠, 이거 이상해. 오빠 거랑 같은 재질인데…… 이름칸이 다 비어 있어. 하나가 아니야. 수십 개라고.”

반가온이 감정 결과창을 띄웠다.

[아이템: 식별 불능의 환자 팔찌(복제품)]

[특이사항: 고의적인 데이터 소거 흔적. ‘존재의 공백’을 담기 위해 제작됨.]

내가 유일한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인가? 10년 전 이 병원에서는 이름 없는 아이들을 대량으로 처리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병원에서 아이들 팔찌를 대량 생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데, 거기에 ‘공백 맞춤 제작’이라는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서비스 정신이 아주 지옥 프리미엄이다.

이현우는 벽면에 설치된, 반쯤 파손된 CCTV 모니터들에 매달려 있었다. 화면에는 10년 전의 대기실 모습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도윤 씨, 여기 화면 좀 보세요.”

그가 가리킨 화면 속에는 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옆에는 누군가 서 있는 듯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검은 우산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침대 위에 있어야 할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데요?”

“아뇨, 침대 시트가 눌려 있어요. 누군가 누워 있는데, 화면에만 안 잡히는 겁니다. 마치 존재 자체가 디지털 정보에서 누락된 것처럼요.”

이현우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드르륵, 드르륵.

보안실 문틈과 환풍구 사이로 날카로운 쇳소리가 파고들었다. 제갈후의 검은 우산살이었다. 그는 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절차가 승인되지 않아 거부당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우산살은 포기하지 않고 벽면을 긁으며 이곳의 기록들을 강제로 열려 시도하고 있었다.

방 안의 서류들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사망 처리 도장이 스스로 들썩이며 쾅, 쾅 소리를 냈다. 출근 카드 리더기가 미친 듯이 붉은 불을 내뿜으며 에러음을 토했다.

“서하야, 저 명찰…… 아는 사람이야?”

내가 묻자, 윤서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이름을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분이었어. 가문 기록에서 지워진, 태어난 적도 없는 사람처럼 다뤄졌던…….”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윤○○’이라는 이름의 앞글자만 남은 명찰이 있었다.

나는 문득 내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까 패널에서 새겨진 세 개의 호출 시각.

[00:00]

[00:00]

[00:00]

이게 단순히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홀린 듯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출근 카드 리더기로 향했다.

“도윤 씨! 위험해요!”

이현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인처럼 박힌 손바닥의 세 번째 [00:00]를 리더기의 인식창에 가져다 댔다.

띠링-!

기계적인 비프음과 함께 리더기의 액정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출근 시간: 인식 불가]

[퇴근 시간: 인식 불가]

[보호자 사망 접수 시간: 00:00]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00:00은 출근도 퇴근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난 지점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던 사망 처리 도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듯 허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했다.

쾅-!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빈 서류 한 장에 선명한 붉은 인영이 찍혔다.

[보호자 대체 승인: 최성국]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원래 보호자가 서명해야 했을 칸에 피처럼 붉은 잉크가 번져 나갔다. 윤이라는 성이 먼저 나타났고, 그 뒤의 이름 두 글자는 누군가 손으로 짓이긴 듯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졌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그 잔인한 서명보다 더 아래쪽에 찍힌 것이었다.

성인 남성의 서명과 대비되는, 아주 작고 서툰 아이의 손바닥 자국.

10년 전의 내가, 자신의 보호자가 죽었다는 서류 위에 직접 찍었을 손도장이었다.

그 손도장 위로 잉크가 아닌 진짜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잔향 속의 최성국이 울고 있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 입을 뗐다.

“가라, [ ]아. 네 진짜 보호자가 널 기다리고 있어.”

그와 동시에 보안실의 모든 모니터가 일제히 터져 나갔다. 파편이 튀는 와중에, 나는 서류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문구를 발견했다.

[피신청인: 강도윤]

[상태: 영구 삭제 대기]

그리고 내 손바닥의 화인이 미친 듯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0년 전 오늘이 아니라, 내일의 날짜가 붉게 점멸했다.

제목: 99화. 내일 날짜의 손도장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화끈거리는 통증보다 더 기괴한 건, 내 살갗 아래에서 맥동하는 붉은 숫자였다.

[00:00]

10년 전 오늘이 아니다. 내일.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숫자가 내 피부를 뚫고 점멸하고 있었다.

“……미친.”

욕설이 채 입 밖으로 다 나오기도 전이었다. 치직, 하고 고막을 긁는 노이즈와 함께 주변의 풍경이 뒤틀렸다. 10년 전의 낡은 보호자 대기실이 아니었다. 벽면의 곰팡이가 순식간에 번져나가더니, 형광등이 보라색으로 점멸하며 공간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딩동―.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지극히 사무적인 알림음이 정적을 깼다.

“고객님, 대기 번호 0번. 0번 고객님은 지금 바로 창구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자, 서류 뭉치가 가득했던 대기실은 어느새 불 꺼진 관공서 같은 창구로 변해 있었다.

[사전 사망 접수 창구]

플라스틱 의자들이 삐딱하게 놓여 있고, 한쪽 구석에는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문서 분쇄기와 정체 모를 주사약이 가득한 냉장고가 보였다. 창구 유리 너머는 암흑이었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 펜을 굴리는 소리만은 선명했다.

“사전 사망 접수? 무슨 죽음을 예약제로 받아? 여기 맛집이었나 보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온 농담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도윤 씨, 손목이…….”

서하의 목소리에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내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가이드 라인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피신청인’이라는 딱딱한 활자가 돋아났다.

“현재 미접수 상태입니다. 고유 식별 명칭 ‘강도윤’의 유효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고객님, 절차를 서두르지 않으시면 영구 삭제 대기로 전환됩니다.”

창구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를 더 이상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사물들이 나를 물건 취급하며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거 놔, 서하 씨. 당신까지 휘말려.”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서하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강하게 힘을 주었다.

“안 놔요. 절대로.”

하지만 그녀의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서하의 가슴팍에 달린 ‘윤서하’라는 이름표의 글자가 물에 젖은 듯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태창 속 이름조차 한 글자씩 흐려졌다. 나를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존재가 깎여 나가고 있었다.

“반 팀장님! 이거 좀 봐요!”

이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주변을 훑던 가온이 바닥에 흩어진 환자 팔찌들을 들어 올렸다.

“이거 10년 전 게 아니에요. 이 시리얼 넘버, 작년 협회 신입 헌터들한테 발급된 거랑 일치해요. 일부는 심지어…… 지난달 실종 신고된 랭크 C 헌터들의 것이고요.”

“뭐? 그럼 이 미친 짓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었다는 거야?”

내 물음에 가온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전의 망령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공장이다. 죽지 않은 사람을 사회적으로, 혹은 물리적으로 미리 죽여버리는 거대한 행정 시스템.

그때, 깨진 CCTV 모니터를 복구하려 애쓰던 현우가 외쳤다.

“형! 이거 단순한 기록 재생이 아니에요. 로그를 강제로 긁어냈는데, 보호자 대체 승인 리스트가 갱신되고 있어요!”

“최성국 다음이 누구인데?”

현우가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이즈 섞인 화면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대체 승인자 예약: 제갈후]

“……씨발, 그럴 줄 알았지.”

제갈후. 그 노회한 여우가 내 보호자 권한을 승계하려 대기 중이다. 내가 여기서 사망 처리되는 순간, 내 모든 권한과 존재의 소유권은 합법적으로 그에게 넘어간다.

치익, 치직―.

갑자기 창구 옆에 놓인 문서 분쇄기가 발작하듯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넣지 않았는데도 기계는 뭔가를 씹어 삼키며 쿨럭거렸다.

젊은 모습의 최성국 잔향이 그 분쇄기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입을 벙긋거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분쇄기의 전원 버튼을 미친 듯이 눌러댔다.

[잔향 청취를 시작합니다.]

기계가 삼키다 만 종이 조각들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파편들이 내 망막에 잔상을 새겼다.

어린 내가 울면서 인주를 묻힌 손가락을 종이에 누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한 여자의 손이 내 손을 감싸 쥐려 했다. ‘윤○○’. 그녀의 얼굴은 안개에 가린 듯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나를 지키려 했다는 것만은 느껴졌다. 하지만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가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이어지는 장면. 최성국이 떨리는 손으로 내 출근 카드를 대신 리더기에 찍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강도윤 군.”

창구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익숙하고도 역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갈후였다.

“이건 아주 정상적인 승계 절차란다. 최성국이 했던 것처럼, 나도 너를 보호하려는 것뿐이야. 네 손목의 화인을 봐라. 넌 내일이면 사라질 존재야. 하지만 지금 당장 ‘최성국 승인’을 무효화하고 내게 권한을 넘기면, 네 이름 뒤에 숨겨진 ‘윤○○’의 사망 처리도 풀릴 수 있지. 어떻겠니?”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최성국의 승인을 무효화하면 윤 씨 가문에서 지워진 그 여자를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가는 명확했다. 내가 제갈후의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는 것.

“도윤 씨, 대답하지 마요…….”

서하의 목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녀의 이름 중 ‘서’자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나는 창구 앞에 섰다. 무효화 버튼과 승인 유지 버튼이 내 눈앞에서 깜빡였다. 제갈후는 내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버튼 대신, 분쇄기가 뱉어낸 종이 더미 속으로 손을 뻗었다.

“제갈 부회장님. 당신은 행정을 참 좋아하시죠? 절차, 서류, 근거.”

나는 바닥에서 튄 종이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근데 말이야. 행정의 기본은 원본 확인이거든. 당신이 휘두르는 그 권한, 애초에 가짜라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최성국이 대리 출근을 했다고? 아니. 기록은 그렇게 되어 있겠지. 하지만 잔향은 거짓말을 안 해.”

내가 집어 든 것은 찢기다 만 출근 카드의 하단부였다.

거기에는 최성국의 정갈한 글씨가 아니라, 삐뚤삐뚤하게 쓰인 어린아이의 글씨가 남아 있었다.

[나는 오늘 출근했다.]

글씨 위로 내 어린 시절의 손도장이 겹쳐 있었다. 그리고 카드 뒷면, 기계가 강제로 찍어 누른 출근 위치가 드러났다.

[출근 위치: 옥상 격리 병동]

최성국이 나 대신 출근한 게 아니다.

나는 그날, 10년 전의 ‘내일’ 날짜로 이미 출근 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이 건물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으로.

“선택은 보류다, 영감탱이야. 난 내 눈으로 원본 출근부 찍으러 가야겠거든.”

나는 서하의 손을 고쳐 잡았다. 내 손바닥의 숫자가 00:00에 멈춘 채 격렬하게 진동했다.

“현우야, 가온 씨. 준비해. 우리 옥상 간다.”

창구 스피커 너머로 제갈후의 낮게 깔린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찢어진 카드 조각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눈앞의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10년 전 내가 ‘출근’했던 그곳, 옥상 격리 병동으로 향하는 계단이 피처럼 붉은 빛을 내뿜으며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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