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97화. 본명 삭제 예약과 세 번 눌린 호출벨
제목: 96화. 본명 삭제 예약
‘본명 삭제 후 개체 자동 폐기 절차 진입.’
차트 뒷면에 타이핑되는 문구를 보는 순간, 심장 부근에서 싸늘한 한기가 솟구쳤다. 마치 누군가 내 가슴팍에 드라이아이스를 한 포대 들이부은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이 타이밍에 “폐기라니, 분리수거는 제대로 해주는 거냐?”라든가 “나 재활용 가능한 몸인데.” 같은 농담이 튀어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뇌가 농담을 출력하는 속도보다, 시스템이 내 존재를 지워나가는 속도가 미세하게 더 빨랐다.
“강…, 강…!”
반가온이 다급하게 내 어깨를 흔들었다. 분명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은데, 첫 음절 뒤의 글자들이 치직거리는 스피커 노이즈처럼 뭉개졌다.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 중 ‘도윤’이 공기 중으로 휘발되는 감각. 코끝을 찌르던 병원의 찌든 소독약 냄새가 사라지고, 대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건조한 향이 감돌았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이현우의 목소리는 들렸지만, 그가 나를 ‘대상’으로 인식하고 부르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내 시야에 들어온 윤서하의 옆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차트에 적힌 ‘윤 ○ ○’라는 이름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름의 빈칸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마치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그 위로 번진 것처럼, 보려고 하면 할수록 검은 잉크가 번져 나갔다.
윤서하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녀가 가문의 봉인명이나 금기를 떠올리고 있다는 건 굳이 잔향청취를 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거칠어질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질렀다.
“자동 폐기…….”
이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차트의 문구를 읊었다.
“도윤 씨, 이거 단순한 살인 예고가 아니에요. 협회 기록망에서 도윤 씨라는 ‘개체’의 정의를 지우겠다는 뜻입니다. 육체가 죽는 게 아니라, 현실이라는 시스템이 도윤 씨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뭔 소리야. 투명인간이라도 된다는 거야?”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내 뱉었다. 내 목소리조차 내 귀에는 낯설게 들렸다.
“투명인간보다 더 나빠요. 사람들은 당신을 기억하겠지만, 세상의 ‘규칙’은 당신을 거부할 겁니다. 던전에 들어가도 입장이 안 되고, 게이트 보상을 받아도 소유권이 안 생겨요. 국가 행정 시스템상 존재하지 않는 존재, 즉 ‘미접수자’가 되는 겁니다. 헌터로서의 모든 권한이 박탈되는 건 물론이고, 이 세계의 물리 법칙조차 당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삭제’를 선택하게 되겠죠.”
말보다 증거가 빨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헌터 단말기를 꺼냈다. 그리고 기록보관소 입구에 놓인 간이 조회기에 단말기를 갖다 댔다.
삐익-.
기분 나쁜 경고음이 울렸다. 화면 속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칸이 백지로 깜박이더니, 그 위로 선명하고 붉은 체크 표시가 그어졌다.
[상태: 미접수 개체(처리 대기 중)]
사망 플래그가 물리적인 데이터로 구현된 순간이었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차트 조각이 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낡은 종이 주제에 비릿한 웃음소리를 내며 내 귓가바닥에 대고 속삭였다.
이름 지우기는 화이트보다 검은 우산이 잘합니다. 단, 지우개 값은 생명으로 청구됩니다. 조심하세요, 고객님. 삭제 절차는 ‘보호자’의 최종 서명이 필요하거든요. 서명란에 잉크가 닿는 순간, 당신은 영원히 퇴근할 수 없습니다.
서명. 제갈후가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지지직, 천장에 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노이즈가 섞인 방송이 흘러나왔다. 제갈후의 목소리였다.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 특유의 나른하고 오만한 공기가 기록보관소 전체를 짓눌렀다.
「강도윤 씨. 당신은 이미 10년 전, 이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름을 담보로 삼았습니다.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당신의 본명은 이미 이 보관소의 깊은 곳에 저당 잡혀 있죠. 내일 0시, 보호자 변경 예약이 확정되면 저는 당신의 ‘주인’으로서 그 계약서를 파기할 겁니다.」
“주인 좋아하시네. 난 개 키울 생각 없거든?”
나는 허공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었지만, 내 손가락 끝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윤서하가 갑자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칼날로 살짝 그었다. 붉은 선혈이 솟구쳤다. 그녀는 그 피 묻은 손으로 내 손목에 새겨진 낙인, 그 검은 우산 무늬 위에 자신의 피를 덧칠했다.
“서하 씨! 뭐 하는 거예요!”
“조용히 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피가 내 살갗에 닿자, 사라져가던 감각이 비명을 지르며 되살아났다. 그녀의 피가 일종의 ‘현실 좌표’ 역할을 하며 나를 이 세계에 억지로 붙들어 매고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윤서하의 안색이 순식간에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나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었다.
“……빚이 또 늘었네.”
“나중에 갚으세요. 살아서.”
윤서하가 짧게 내뱉으며 비틀거렸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며 차트 조각을 움켜쥐었다. 제갈후의 서명을 막으려면, 1순위 보호자인 ‘윤 ○ ○’의 권한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거나, 그가 권한을 정지당한 정당한 사유를 찾아내야 했다. 아니면 최성국이 남긴 출근 기록 원본을 찾아 제갈후의 예약을 덮어쓰거나.
그때, 내 발등 위로 딱딱한 물체가 툭 떨어졌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굴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것은 10년 전 병원 보안실이나 간호사 스테이션에서나 썼을 법한, 녹슨 ‘비상 호출 벨’이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내 기록 말고, 네 출근 목격자를 찾아라.
최성국의 목소리였다. 잔향은 짧고 강렬했다. 목격자? 이 폐쇄 병동에 나를 본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다들 죽거나 미쳤을 텐데.
목격자는 꼭 사람일 필요는 없지.
호출 벨이 내 손바닥 안에서 기분 나쁘게 진동했다. 그리고 벨 상단에 달린 작은 디지털 액자에 붉은 숫자가 떠올랐다.
[00:00]
내일 자정. 제갈후가 보호자 서명을 완료하기로 예약된 바로 그 시간이었다.
딸깍.
호출 벨이 스스로 눌렸다.
윤 ○ ○가 아이를 데려온 날, 나는 세 번 눌렸다.
벨이 잔향으로 말을 이어갔다.
첫 번째는 아이의 이름을 지울 때. 두 번째는 보호자가 사라질 때.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지금처럼, 누군가 ‘진짜 기록’을 열려고 할 때지.
벨의 뒷면에서 낡은 태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보관소 바닥 한쪽이 소리 없이 아래로 꺼졌다. 10년 동안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았던, 병원 지하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비밀 계단이었다.
계단 아래에서는 썩은 물 냄새와 함께, 수천 개의 우산이 비에 젖어 말라가는 듯한 비릿한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호출 벨을 꽉 쥔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가자고. 내 퇴근 카드에 도장 찍어줄 목격자 찾으러.”
나는 윤서하를 부축한 채, 내 이름이 완전히 삭제되기 전 마지막 승부처가 될 지하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편 복도에서 검은 우산살들이 바닥을 긁으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목: 97화. 세 번 눌린 호출벨
발밑이 꺼지는 감각은 언제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어둠 속으로 추락하던 우리는, 이내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먼지 구덩이 속에서 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0층 기록보관소 아래, 이곳은 지도에도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코끝을 찌르는 냄새는 지독하리만큼 익숙했다. 낡은 포르말린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그리고 오래된 쇠붙이가 부식되는 비린내.
10년 전, 이 병원 지하 보안실과 간호사 스테이션이 뒤섞인 듯한 기괴한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들, 무사해?”
내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윤서하의 거친 호흡음이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흐른 피가 내 손등 위 낙인을 덮고 있었지만, 그 붉은 좌표가 점차 말라붙고 있었다.
치익, 치이익.
시야가 노이즈 낀 텔레비전처럼 깜빡였다. 벽면에 붙은 비상구 유도등에 내 얼굴이 비쳤다. 아니, 얼굴은 있는데 그 옆에 붙어야 할 ‘강도윤’이라는 이름표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굴러다니는 환자 명부, 벽면의 안내판, 심지어 내 헌터 단말기의 상태창까지.
[ 상태: 미접수 개체 (처리 대기 중) ]
[ 성명: ( ) ]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는 마치 누군가 칼로 파낸 것처럼 매끄러운 빈칸이었다. 존재의 뿌리가 뽑혀 나가는 감각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세금이 면제되는 혜택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세상에서 지워지는 건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피가…… 좌표가 흐려지고 있어.”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냉정함은 간데없고, 뭔가를 숨기려는 듯한 초조함이 역력했다.
딸깍.
내 주머니 속에서 녹슨 호출벨이 스스로 진동했다.
“……아.”
윤서하가 멈춰 섰다. 호출벨이 그녀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벨 위에 낀 녹이 부르르 떨리며 금속 마찰음을 냈다.
[ 윤…… 윤…… ]
벨에서 스며 나온 잔향이 그녀의 성씨를 집요하게 맴돌았다. 윤서하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가문의 누군가가 이 일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이미 직감하고 있는 듯했다.
“이거, 보통 물건이 아닌데요.”
반가온이 조심스럽게 호출벨을 넘겨받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벨의 표면을 훑었다. 직업병인지, 아니면 공포를 이겨내려는 방어기제인지 그녀의 눈빛이 감정사 모드로 변했다.
“금속 피로도가 임계치를 넘었어요. 10년 전 물건이 맞아요. 그런데 단순히 낡은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세 번, 아주 강하게 눌린 흔적이 각인되어 있어요. 누군가 아주 절박하게, 혹은 아주 잔인하게 이 벨을 눌렀다는 뜻이죠.”
반가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독설을 내뱉는 대신 벨의 밑바닥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보안실-01’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현우 씨, 저기 좀 봐요.”
내가 가리킨 곳은 보안실 벽면의 낡은 호출 로그 패널이었다. 이현우가 안경을 고쳐 쓰며 패널 앞으로 다가갔다. 먼지 쌓인 유리판 너머로 붉은색 잉크 기록들이 점멸하고 있었다.
“……시스템 로그가 살아있습니다. 아니, 잔향이 로그를 흉내 내고 있군요.”
이현우의 손가락이 빠르게 허공을 저었다.
“세 번의 호출입니다. 첫 번째 호출 기록은 ‘개체 식별 코드 삭제’. 즉, 이름 삭제입니다. 두 번째는 ‘법정 보호자 권한 강제 정지’. 그리고 세 번째는……”
이현우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에 의혹이 서렸다.
“‘원본 기록 개방’. 누군가 이 시스템의 가장 깊은 곳을 열려고 했습니다.”
그때였다. 내 손바닥에 쥐여 있던 호출벨이 차갑게 식더니, 강렬한 잔향이 내 뇌를 직접 때렸다. 시야가 뒤집히며 과거의 파편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첫 번째 호출: 딩동―]
어린 내가 병원 침대에 묶여 있다. 하얀 시트 위로 그림자가 드리운다. 검은 우산 끝이 날카로운 바늘처럼 내 손목의 환자 팔찌를 긁는다.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검은 잉크에 먹혀 지워진다.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두 번째 호출: 딩동―]
보안실 문밖. 누군가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다. 가운을 입은 뒷모습. ‘윤’이라는 명찰이 보일 듯 말 듯 흔들린다. 하지만 그 위로 그림자가 덮인다. 최성국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위에 손을 얹는다. 보호자 서명란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다.
[세 번째 호출: 딩동―]
현재의 우리다. 보안실 문 앞에 서 있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잔향 속에서 겹쳐 보였다. 누군가 진짜 기록을 열기 위해 이 벨을 누르고 있다.
“으윽!”
머리를 감싸 쥐며 현실로 돌아왔다. 계단 위쪽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슈슉, 슈르륵!
검은 우산살들이 거미의 다리처럼 계단 벽면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제갈후. 그놈이 보낸 그림자들이 호출 로그를 없애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우산살들이 벽면을 긁을 때마다 기록보관소의 문서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안 돼, 저걸 뺏기면 끝장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호출 로그 패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산살 하나가 내 어깨를 스치며 옷감을 찢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 이 기록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영원히 ‘미접수 개체’로 남게 된다.
내 손바닥이 뜨겁게 달아오른 패널을 덮었다.
“막아……!”
치이익!
낡은 기계의 열기와 잉크 냄새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낙인이 찍히는 듯한 통증. 하지만 덕분에 제갈후의 우산살은 패널을 부수지 못하고 내 손등 위를 헛돌았다.
잠시 후, 내가 손을 떼었을 때 패널의 유리는 박살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던 세 개의 호출 시각이 내 손바닥에 문신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도윤 씨, 손바닥에……!”
윤서하의 외침에 손을 확인했다.
첫 번째 시각: 10년 전 오늘, 23:50.
두 번째 시각: 10년 전 오늘, 23:55.
그리고 세 번째 시각.
그곳에는 불가능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 00:00 ]
그 옆에 표기된 날짜는 ‘10년 전 오늘’과 ‘내일’이 기괴하게 겹쳐서 번지고 있었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한 점으로 수렴하는 순간.
철컥.
굳게 닫혀 있던 보안실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지만, 그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고, 생기 넘치며, 동시에 지독하게 건조한 목소리. 10년 전의 최성국이었다.
“늦었어, 도윤아.”
어둠 속에서 구둣발 소리가 다가왔다.
목이 말랐다. 아니, 이름이 말라붙는 느낌이었다.
“네 보호자는 이미 한 번 죽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