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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225화. 미완결된 영수증과 약관의 사각지대 일러스트

224-225화. 미완결된 영수증과 약관의 사각지대

224화. 미완결된 영수증의 행방

[강도윤]

역무실의 낡은 문을 넘어선 순간, 허파를 찌르는 공기의 질감이 바뀌었다.

지하철역 특유의 눅눅한 먼지 냄새와 매점의 기름진 유전자가 뒤섞인 공기가 아니었다. 이건 좀 더 비릿하고, 코끝이 찡할 정도로 인공적인 향이 가미된 냄새였다.

딸랑.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도어벨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시야가 번지듯 선명해졌다.

“……편의점?”

나는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곰팡이 핀 역무실에 서 있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건 2플러스 1 행사 전단지가 어지럽게 붙은 편의점 내부였다. 바깥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가로등 불빛은 742일 전의 그 새벽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구석진 매대에서 풍겨오는 컵라면 국물 냄새, 온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캔커피의 열기, 그리고 비에 젖은 우산 꽂이에서 흘러나온 흙탕물 냄새까지. 모든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형, 여기 이상해. 분명 편의점인데……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아.”

가온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며 속삭였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냉장고의 모터 소리는 일정하게 들렸지만, 시계 초침은 마치 누군가 붙잡고 있는 것처럼 움찔거리기만 할 뿐 한 칸도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계산대 뒤쪽의 진열장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일렁였다.

아니, 내 모습이 아니었다.

[……오른손.]

거울 속의 ‘도니’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 기괴한 기록의 공간, 장부가 보관한 ‘미완결된 장면’의 틈새에 박힌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잃지 마. 저놈에게 서명할 권리를 주지 마…… 도윤아.]

도니의 목소리는 유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비명처럼 낮고 날카로웠다. 그는 계산대 아래로 숨긴 왼손 대신, 짓물러 터진 오른손을 유리에 딱 붙인 채 경고하고 있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손목이라도 걸고 도박하는 줄 알겠네. 걱정 마쇼. 내 손은 소중하니까.”

나는 애써 농담을 던지며 시선을 돌렸다. 등 뒤로 서늘한 한기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철벅, 철벅.

비에 젖은 구두가 타일 바닥을 밟는 소리. 그리고 이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밖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데, 남자가 들고 있는 검은 우산은 물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빗물이 오히려 길을 비키듯 갈라졌다.

“어서 오세요, 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내 물음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우산을 깊게 눌러쓴 채 계산대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은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지만, 우산을 쥔 그의 손목에 새겨진 낙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태식의 싸구려 라이터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흠집. 아니, 그건 낙인이자 바코드였다.

“……문태식?”

내 중얼거림에 가온이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형. 냄새가 달라. 문태식 아저씨는 지독한 담배 냄새가 났는데, 이 사람한테서는…… 아저씨가 제일 싫어하던 방향제 냄새가 나. 그, 싸구려 라벤더 향 같은 거.”

문태식은 생전에 라벤더 향만 맡으면 머리가 깨질 것 같다며 질색하곤 했다. 그렇다면 이놈은 문태식이 아니다. 문태식과 가까운 어딘가에 있었지만, 문태식 본인은 아닌 누군가.

[ 결제 재개 : 500원 ]

[ 품목 : 미등록 아동(ID: NULL) ]

[ 처리 옵션 선택 : 1. 반품(Discard) 2. 보관(Stock) 3. 위탁(Transfer) ]

허공에 붉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검은 우산의 손님은 마치 쇼핑몰 장바구니를 확인하듯, 무심한 시선으로 내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리했어야 할 물건이 아직 남아 있었군.”

남자의 목소리는 감정이 거세된 기계음 같았다. 그는 아이를 ‘물건’이라 칭했다.

“이봐요, 손님. 우리 편의점은 사람 안 팝니다. 그리고 물건이라니, 애가 듣는데 말조심 좀 하시지? 여기 서비스 센터 아니거든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담아 쏘아붙였다. 하지만 남자는 내 말을 무시한 채 허공의 선택지 중 ‘반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만요!”

서하 씨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달린 ‘보호자 후보’ 명찰을 움켜쥐고 있었다.

“현재 이 아동은 ‘보호자 후보’의 관리하에 있습니다. 시스템상 대리인의 권한보다 후보자의 우선권이 앞서요. 결제 프로세스, 잠시 중단합니다!”

서하 씨의 외침과 함께 명찰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남자의 손가락 끝에서 멈춰 있던 화면이 치익, 소리를 내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서하 씨의 명찰에는 쩍, 하고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서하 씨!”

“괜찮아요……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도윤 씨, 저 남자가 아니라 ‘과거’를 봐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계산대 앞이었다.

그곳에는 또 다른 아이가 서 있었다. 지금 내 품에 안긴 아이보다 한 뼘 더 작고, 훨씬 더 창백한 몰골의 아이. 742일 전의 아이다.

과거의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검은 우산의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손등에는 텅 빈 동전 모양의 자국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나야.”

내 품에 안긴 현재의 아이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아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가 과거의 자신에게 손을 뻗으려 했다.

“안 돼, 잡지 마!”

내가 만류하기도 전에 아이의 손끝이 과거의 아이에게 닿았다.

파지직!

공간 전체가 깨진 거울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편의점의 진열대가 뒤틀리고,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며 발생하는 인과율의 불꽃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점멸 속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742일 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애한테는 이름을 주세요.”

계산대 너머의 과거의 내가, 검은 우산의 남자를 향해 악을 쓰고 있었다.

“물건도 아니고, 폐기 예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500원 받고 팔 거면 제대로 된 이름표라도 달아주란 말입니다. 보관명 ‘없음’이라니, 장난해?”

과거의 나는 남자가 들고 있던 영수증을 낚아채려 하고 있었다. 영수증 하단에는 붉은 글씨로 [임시명: 폐기 예정]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왜 이 아이를 위해 내 오른손의 기록까지 넘겨주며 도박을 했는지 그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아이가 ‘쓰레기’로 분류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거다. 이름조차 없이 반품 상자에 담겨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버려지는 것을.

“당신은 그때도 계약 내용을 읽지 않았군요.”

검은 우산의 손님이 처음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산 아래 가려진 그림자 속에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이름을 주라고 한 건 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서명한 것도 당신이지.”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한 장의 길다란 영수증이 출력되어 내려왔다. 742일 전, 내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그날의 ‘결제 명세서’였다.

나는 홀린 듯 영수증 하단의 서명란을 읽어 내려갔다.

[ 서명자 : 강도윤 ]

[ 증인 : 문태식 ]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줄에 적힌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 대리인(Proxy) : 윤서하 ]

“……뭐?”

나는 고개를 돌려 서하 씨를 보았다. 그녀는 균열이 간 명찰을 쥔 채,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영수증의 문구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하 씨, 이게…… 이게 왜 여기 있어요? 742일 전이면 서하 씨는 나를 알지도 못했을 때잖아요.”

서하 씨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기록상 사망 처리일은 742일 전. 그리고 이 영수증이 작성된 날짜도 742일 전이다.

그녀가 내게 말하지 않은, 혹은 그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진실이 이 영수증 한 장에 담겨 있었다.

“난…… 난 모르는 일이에요. 난 그날, 분명히 사고 현장에 있었고…….”

서하 씨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명찰에 생긴 균열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우산의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바닥에 닿자마자 편의점의 타일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계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리인이 이곳에 도착했으니, 이제 남은 결제를 완료해야지.”

남자의 시선이 서하 씨를 향했다.

“서명하십시오, 윤서하. 742일 전 당신이 포기했던 그 권한을.”

편의점의 자동문이 거칠게 열리고, 밖에서 불어온 비바람이 영수증을 내 얼굴 앞으로 날려 보냈다. 펄럭이는 종이 위에서 윤서하라는 세 글자가 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225화. 약관의 사각지대

[강도윤]

“서명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남겨진 의무이자, 이 연산(演算)을 끝낼 유일한 방법입니다.”

검은 우산의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비 내리는 편의점의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것 같았다. 서하 씨의 눈앞에서 펄럭이는 영수증은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녀의 호흡을 옥죄며 서명을 종용하고 있었다.

“……내가, 대리인이라고요?”

서하 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보호자 후보’ 명찰에 간 균열이 번쩍이며 불길한 보랏빛 기운을 내뿜었다. 쩍, 소리가 날 때마다 서하 씨의 미간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아니요, 난 기억나지 않아요. 742일 전, 난 분명 던전 붕괴 사고 현장에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 명찰의 균열을 통해 흘러나온 기억의 파편이 내 눈에도 얼핏 비쳤다.

쏟아지는 폭우.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 사이로 솟구치는 마력의 잔해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서하 씨는 누군가를 쫓고 있었다. 젖지 않는 검은 우산을 쓴 남자, 그리고 그 남자의 뒤를 따르던 문태식. 문태식의 손에는 평소 그가 아끼던 싸구려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 불꽃은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채 기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지금 내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모순이야.’

서하 씨는 누군가를 추적했고, 이 검은 우산과 문태식을 보았다. 그런데 왜 영수증에는 그녀가 ‘대리인’으로 적혀 있는 거지? 그녀는 아이를 본 적도 없는데, 무엇을 대리해서 무엇을 포기했다는 말인가.

“서명하지 마요, 서하 씨!”

내 외침에 검은 우산의 남자가 고개를 아주 천천히 돌렸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계산원. 당신은 이미 742일 전, 당신의 오른손을 담보로 이 아동의 ‘보관’을 연장했습니다. 이제 대리인이 확정 서명을 거부한다면, 계약은 파기됩니다.”

남자의 손가락이 영수증의 [반품] 항목을 가리켰다.

“반품 절차가 시작되면 아동은 즉시 최초의 상태로 환원됩니다. 그리고 당신의 오른손에 기록된 ‘계산원’으로서의 모든 데이터 또한 복원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신의 몸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순간, 내 오른손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에 휩싸였다. 흉터 하나 없던 손등 위로 검은 글자들이 문신처럼 돋아나려 꿈틀댔다. ‘도니’가 거울 너머에서 비명을 지르던 이유가 이거였나. 내가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지불했던 대가가 통째로 돌아온다는 것. 그건 곧 내 존재가 이 기괴한 시스템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는 뜻이었다.

“협박 한 번 고전적이네. 요즘 보이스피싱도 이거보단 창의적일 텐데.”

나는 짓눌리는 압박감을 억지로 밀어내며 낄낄거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쫄면 정말로 인생이 ‘반품’ 처리될 판이었다.

“이봐요, 우산 양반. 우리 집 가훈이 ‘약관을 읽기 전엔 도장 찍지 말자’거든요. 서류 사기를 치려면 적어도 폰트 크기는 좀 키워야 하는 거 아닙니까? 노안 온 사람들은 보지도 못하겠네.”

나는 서하 씨의 앞을 가로막으며 영수증을 빤히 노려보았다. 사실 글자가 너무 작아서 하나도 안 보였다. 시스템 메시지는 공중에 큼지막하게 띄워주면서, 왜 계약서는 이따위로 옹졸하게 뽑아낸 건지.

“가온아, 코 좀 써봐. 이 종이에서 이상한 냄새 나는 데 없어?”

내 말에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영수증 근처로 다가왔다. 녀석은 검은 우산의 위압감에 사르르 떨면서도, 내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집중했다.

“형…… 여기 밑부분, 종이가 접힌 곳에서 냄새가 나. 아까 그 아저씨한테 났던 라벤더 냄새랑…… 병원 소독약 냄새, 그리고 젖지 않은 비닐 냄새가 섞여 있어.”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영수증 하단의 아주 좁게 접힌 뒷면이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구석진 자리.

나는 서하 씨의 떨리는 손을 붙잡아 영수증 뒷면을 뒤집게 했다. 그곳에는 소름 끼칠 정도로 정교하고 작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 특약 사항 : 대리인(Proxy)은 본 물품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

서하 씨의 눈동자가 커졌다.

“보호자가…… 될 수 없다고?”

“그럼 서명하는 순간 서하 씨는 권한만 쓰고 버려지는 거네? 이거 진짜 악질이네. 대리인은 서명만 하고, 아이는 다시 ‘보관’ 상태로 넘어가는 함정이었어.”

검은 우산의 남자가 처음으로 미동했다.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바닥에 닿으며 치익, 소리를 냈다. 불쾌함의 표시였다.

나는 영수증을 더 샅샅이 훑었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모든 악랄한 계약서에는 반드시 출구가 하나쯤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니까.

“찾았다.”

특약 사항 바로 아래, 가온이가 말한 ‘비닐 냄새’가 가장 진하게 풍기는 문구.

[ 단, 대리인은 물품의 의사에 따라 ‘보호자 후보’를 최종 지정할 권한을 가진다. 후보 지정 시, 물품의 ‘보관’ 상태는 해제되며 ‘검증’ 단계로 이행한다. ]

“서하 씨, 직접 보호자가 되려고 하지 마요. 그건 이놈들이 파놓은 함정이야.”

나는 서하 씨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명찰 위로 떨어졌다.

“서하 씨는 ‘대리인’으로서 나를 ‘임시 보호자’로 지정하기만 하면 돼요. 결정은 서하 씨가 하지만, 선택은 아이가 하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렇게 되면 도윤 씨가 위험해져요. ‘검증’이 시작되면 시스템이 당신을…….”

“나 원래 시험 보는 거 체질이에요. 벼락치기 전문이거든.”

나는 짐짓 여유로운 척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등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지만.

서하 씨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떨리는 손가락을 영수증 하단이 아닌, 우리가 찾아낸 특약 사항 문구 위에 올렸다. 그녀의 마력이 펜촉처럼 변해 영수증의 결을 파고들었다.

“나는 대리인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합니다. 742일 전 포기했던…… 아니, 내가 잊어야만 했던 그 권한으로, 이 아이가 선택한 자를 임시 보호자로 지정하겠어.”

[ 경고 : 해당 절차는 권장되지 않는 결제 방식입니다. ]

[ 시스템이 대리인의 권한 범위를 재확인합니다…… ]

공중의 붉은 메시지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편의점 내부의 형광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하나둘 터져 나갔다. 암흑 속에서 오직 서하 씨의 명찰만이 위태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서하 씨에게 손을 뻗었다.

작고 차가운 손가락이 서하 씨의 가슴팍, 균열이 간 명찰을 부드럽게 눌렀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명찰에서 새어 나오던 검은 연기가 잦아들고, 쩍쩍 갈라지던 소음이 멈췄다.

“……아.”

서하 씨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이는 서하 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버린 사람은…… 아니야.”

아이가 전에 했던 말. 그때는 원망처럼 들렸던 그 말이, 지금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742일 전, 비 내리는 그 지옥 같은 현장에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누군가의 뒷모습을. 비록 그 결과가 ‘대리인’이라는 기묘한 직함과 기억의 소멸이었을지라도.

[ 결제 방식 변경 : 위탁(Transfer) -> 검증(Verification) ]

[ 임시 보호자 지정 완료 : 강도윤 ]

[ 증인 문태식의 기록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

영수증이 푸른 불꽃에 휩싸여 타올랐다. 검은 우산의 남자는 서명되지 않은 영수증이 재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분노도, 실망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시선이었다.

“……영리하군. 하지만 편의법은 본질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남자가 우산을 고쳐 쥐었다. 그가 바닥을 우산 끝으로 가볍게 톡, 하고 두드렸다.

“그럼 후보자 검증을 시작하지요. 자격이 없는 자는 결국 스스로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편의점 바닥이 거대한 괴물의 입처럼 쩍 갈라졌다. 진열대에 놓여 있던 컵라면과 삼각김밥들이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떨어진 것은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발밑의 타일이 사라진 자리에,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차올랐다.

차가운 금속 선로, 노란색 안전선, 그리고 매캐한 철가루 냄새.

편의점은 어느새 지하철 플랫폼으로 변해 있었다. 머리 위 전광판에는 붉은 글자가 기차 도착 안내 대신 기괴한 문구를 띄우고 있었다.

[ 후보자 검증 1단계 : 귀가 경로 재현 ]

[ 남은 시간 - 00:59:59 ]

[ ※ 주의 : 막차를 놓칠 시, 귀가 권한이 영구 박탈됩니다. ]

멀리서 끼이익, 하고 쇳소리를 내며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742일 전, 내가 매일같이 퇴근하며 몸을 실었던 그 지겨운 지하철의 소음이었다.

“형, 저거…… 우리 집 가는 열차 아니야?”

가온이가 가리킨 전광판에는 내가 사는 동네의 역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 글자들은 마치 피로 쓴 것처럼 기분 나쁘게 번져 있었다.

나는 아이를 더 꽉 안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742일 전의 내가 아이를 데리고 걸었어야 했을, 그러나 끝내 완결하지 못했던 그 ‘퇴근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가자고요. 우리 집, 전세라 빨리 가봐야 하거든요.”

나는 어둠 속에서 달려오는 열차의 헤드라이트를 노려보며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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