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223화. 생존 확인권과 동일인 불일치
222화. 생존 확인권 500원
[강도윤]
그 문장이 망막을 타고 뇌 안쪽까지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742일 전. 내가 이 바닥에 발을 들이기도 전, 아니, 평범한 편의점 알바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시절의 기록 속에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것도 어떤 거대한 계약을 멈춰 세우는 쐐기처럼.
“……생존 확인?”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왼쪽 어깨부터 목덜미까지 이어지는 마비 감각은 이제 턱 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내 존재 자체가 조금씩 흐릿해지는 기분. 이름 석 자 중 ‘도’라는 글자가 마치 처음 보는 상형문자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억지로 혀를 깨물며 정신을 붙들었다.
“이거 완전 그거네. 보이스피싱보다 질이 나빠요. 본인이 본인임을 증명하라니, 거울이라도 보여주면 됩니까? 아니면 여기서 앞구르기라도 한 판 해야 ‘아, 이놈이 살아는 있구나’ 하고 인정해 주는 건가?”
농담을 던졌지만, 목소리는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이 위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내 농담은 방어기제다. 이걸 멈추는 순간, 나는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이 지하철역의 유령 중 하나로 전락할 것 같았다.
“도윤 씨, 농담할 때 아니에요.”
서하 씨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는 장부 위에 올려진 [보호자 후보] 명찰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마치 강력본드로 붙여놓은 듯 장부 표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떨어져요. 명찰이…… 장부랑 연결됐어.”
서하 씨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서도 그녀는 현 상황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명찰에서 흘러나온 푸른 빛이 보조 페이지의 붉은 문구들과 뒤섞이며 기괴한 보라색 화음을 만들어냈다.
장부가 파르르 떨리더니, 새로운 문장이 보조 페이지의 여백을 침식하듯 돋아났다.
[ 검증 단계 이행 : 생존 확인 절차를 시작합니다. ]
[ 대상자의 ‘최초 흔적’을 제시하십시오. ]
“최초의 흔적? 그게 뭔데? 지문이라도 찍으라는 거야?”
내 물음에 대답한 건 서하 씨도, 장부도 아니었다.
“형, 냄새가 나.”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아이 곁으로 다가갔다. 녀석은 아이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올렸다.
“이 아이 손에서…… 아주 오래된 쇠 냄새가 나. 편의점 계산대 밑에 고여 있던 쇳내. 그리고 검은 우산의 그 비린 비닐 냄새도 섞여 있어. 그런데 이상해. 손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진하게 나지?”
가온이의 말대로 아이의 손바닥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가온이가 아이의 손을 펼치자, 그 작은 손바닥 한가운데에 기묘한 자국이 보였다. 흉터라고 하기엔 너무나 매끄럽고, 낙인이라고 하기엔 정교한 둥근 눌림 자국.
마치 아주 오랫동안 무거운 동전을 꽉 쥐고 있었던 것처럼, 아이의 살결에는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원형 자국이 깊게 패여 있었다.
달그락.
그때, 정적을 깨고 장례식장 매점 진열대 안쪽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먼지 쌓인 선반 사이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것은 낡은 플라스틱 장난감 자동차였다. 바퀴 하나가 빠진 채 바닥을 뒹구는 그 장난감 밑으로, 가려져 있던 진열대 하단의 벽면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기계적인 슬롯이 하나 뚫려 있었다. 마치 오래된 오락실 기계의 동전 투입구 같은 모양새였다. 슬롯 위에는 투박한 손글씨로 적힌 쪽지가 붙어 있었다.
[ 생존 확인권 500원 ]
“……와, 진짜 너무하네. 내 목숨값이 고작 오백 원이라고?”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헌터가 되고 나서 잔돈 같은 건 잘 들고 다니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지 주머니 깊숙한 곳을 훑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걸렸다.
100원짜리 세 개와 500원짜리 하나. 언젠가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남은 거스름돈일 터였다. 나는 500원 동전을 꺼내 슬롯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넣으면 끝나는 겁니까? 자, 여기 500원. 내 생존 신고니까 부가세는 별도로 안 받겠죠?”
동전을 투입구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치익, 치이익.
역무실 천장에 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뒤이어 들려온 것은 감정이라곤 한 톨도 섞이지 않은, 하지만 분명히 내 목소리를 닮은 ‘도니’의 음성이었다.
[ 현재 화폐는 반품 절차에 사용할 수 없다. ]
“뭐?”
[ 장부의 기록은 742일 전의 계약. 증명은 ‘최초의 거스름돈’으로만 인정된다. ]
스피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나는 손에 쥔 500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2024년 발행된 번쩍이는 동전. 742일 전의 기록을 증명하기엔 너무나 ‘새것’이었다.
“최초의 거스름돈…….”
그 단어가 트리거가 되어 머릿속을 헤집었다. 비 오는 새벽, 눅눅한 편의점. 검은 우산을 든 손님. 이름도 없던 아이.
아이를 데리고 온 그 손님은 내게 지폐를 내밀었고, 나는 포스기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거스름돈 통 구석에서 유난히 낡고 때가 탄, 발행 연도조차 보이지 않는 500원짜리 토큰 하나를 꺼내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애한테는 거스름돈 말고 이름을 주세요.』
과거의 내가 그렇게 말했다. 무표정한 검은 우산의 손님에게.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영수증 위에 무언가를 적었고, 그때 그의 손목 소매 사이로 언뜻 보였던 것.
문태식이 들고 다니던 그 싸구려 라이터의 로고와 똑같은 흠집. 혹은 낙인.
“아…….”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어느샌가 아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이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작은 손을 뻗어 내 오른손 바닥을 맞잡았다.
순간, 온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이의 체온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손바닥에 패인 둥근 자국에서 뜨거운 진동이 전해졌다. 내 오른손 손등의 바코드가 타오르는 듯한 통증과 함께 붉게 점멸했다.
보이지 않던 실이 연결되는 감각이었다. 아이의 손바닥에 눌려 있던 ‘기억의 토큰’이 내 오른손의 서명과 공명하며 실체화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바닥 위로 희미한 금속 광택이 감돌았다. 존재하지 않던 500원 토큰이, 742일의 시간을 건너뛰어 이곳 장례식장 매점의 슬롯 앞으로 소환되고 있었다.
“도윤 씨! 장부를 보세요!”
서하 씨의 다급한 외침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손과 함께 장부에 박혀 있던 명찰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었다. 보조 페이지의 글자들이 재배열되며 새로운 문구들을 토해냈다. 아이의 손바닥에서 생성된 토큰이 투입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 시스템이 마지막 판정을 내리듯 문장을 완성했다.
[ 생존 확인 대상 : 강도윤 1명 ]
그리고 그 밑에, 이전까지는 없었던 붉은색 경고등 같은 글자들이 장부 전체를 뒤덮으며 박혔다.
[ 경고 : 중복 생존자 감지. ]
[ 현재 구역 내 동일한 개체 식별 정보 2명 존재. ]
[ 생존자(1) : 강도윤 (현재 좌표 : 매점 앞) ]
[ 생존자(2) : 강도윤 (현재 좌표 : 역무실 내부) ]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역무실 내부? 지금 이곳에 있는 나 말고, 또 다른 강도윤이 있다고?
나는 고개를 돌려 역무실 안쪽, 유리창 너머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도니’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퀭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지금 모니터를 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스피커를 통하지 않은, 진짜 사람의 목소리가 역무실의 좁은 틈새를 타고 흘러나왔다.
“……누가 반품될 차례지?”
딸깍.
아이의 손바닥에서 떨어진 낡은 토큰이 슬롯 속으로 떨어지며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장부는 이제 우리 중 누가 ‘진짜 생존자’인지를 결정하라는 듯, 시뻘건 빛을 뿜으며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223화. 동일인 불일치의 역설
[강도윤]
짤그랑.
500원짜리 토큰이 슬롯의 금속관을 타고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정적을 찢는 그 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역무실과 매점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두꺼운 강화유리가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치이익, 하고 습기 찬 성에가 끼는가 싶더니 유리의 질감이 변했다. 투명하던 표면은 어느새 지문과 먼지, 그리고 각종 행사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편의점 계산대의 유리창으로 탈바꿈했다.
그 너머, 역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도니'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무원의 제복이 아니다. 그는 목이 늘어난 회색 후드티 위에 빛바랜 파란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그리고 가장 지긋지긋해하던 그 유니폼. 742일 전, 내가 매일같이 입고 있던 그 옷이었다.
[ 확인 중 : 생존 데이터 중복. ]
[ 시스템 오류 방지를 위해 동일 개체 중 하나를 '반품(Return)' 처리하십시오. ]
[ 반품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생존 확인 승인은 영구 보류됩니다. ]
장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내 망막을 찌르듯 점멸했다. 반품이라니. 편의점 알바하면서 유통기한 지난 우유나 터진 과자 봉투는 질리도록 반품해 봤지만, 내 존재를 반품하라는 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와, 이거 서비스가 너무 엉망인데. 내가 나를 반품하면 셀프 환불이라도 해 줍니까? 아니면 포인트로 적립해 주나? 1플러스 1 행사 상품이라서 하나는 폐기 처분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농담을 던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742일 전의 내가 저기 있고, 현재의 내가 여기 있다. 장부의 논리대로라면 우리 중 하나는 ‘오류’였고, 그 오류는 삭제되어야 마땅한 쓰레기였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서하 씨가 내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장부 위에 고정된 자신의 명찰과 붉게 타오르는 문구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훑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녀의 판단력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이거 이상해요. 장부에 적힌 문구를 잘 봐요. ‘동일한 개체 식별 정보 2명’이라고 되어 있지, ‘동일한 사람’이라고는 안 적혀 있어요. 이건 생물학적인 중복이 아니라 데이터상의 충돌이에요.”
“그게 그거 아닙니까? 어차피 이름표 떼이면 죽는 건 매한가지인데.”
“아니요, 달라요. 도윤 씨는 지금 ‘사람’으로서 여기 서 있지만, 저 안쪽의…… ‘도니’라는 존재는 기록의 잔재에 가까워요.”
그때,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유리창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녀석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역무실 내부의 냄새를 맡았다.
“……형, 저 사람한테는 살아 있는 냄새가 안 나.”
가온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도윤이 형한테는 지금 피 냄새랑, 아까 그 장부에 묻어 있던 낡은 잉크 냄새가 나거든? 근데 저기 저 사람은…… 편의점 비닐봉투 냄새랑, 장례식장에 깔린 가짜 꽃 냄새밖에 안 나. 그리고 엄청나게 매캐한 담배 재 냄새랑…….”
가온이가 말을 멈추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오른손에서만 지독하게 썩은 냄새가 나. 아니, 정확히는 ‘오른손만 남아 있는’ 것 같은 냄새야.”
가온이의 말에 나는 유리창 너머의 도니를 다시 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왼손은 카운터 아래에 숨겨져 있었고, 오직 오른손만이 계산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오른손.
그의 오른손 손등에는 내가 가진 것과 똑같은 바코드가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내 것보다 훨씬 더 짙고, 마치 살점 안쪽까지 파먹어 들어간 것 같은 검은 낙인이었다.
“……계산대의 사람은 가지 말라고 했어.”
품속에 꼭 안겨 있던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아이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깊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아이는 내가 아닌, 유리창 너머의 도니를 바라보며 떨리는 손가락을 뻗었다.
“나를 보내주려고…… 그런데 손만 남았어. 이름 대신 동전을 줬는데, 손은 여기 남아야 한다고 했어.”
머릿속이 번쩍했다. 742일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비 오는 새벽, 그 검은 우산의 손님에게 아이를 건네주던 순간. 나는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다. 이 아이를 이 지옥 같은 루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나는 내 존재의 일부를 담보로 잡혔던 게 아닐까.
그 대가가 바로 ‘오른손’이었다면? 742일 동안 이 지하철역의 잔상 속에 갇혀, 끝나지 않는 편의점 업무를 반복하며 ‘계산원’으로 남겨진 나의 파편.
그때, 유리창 너머의 도니가 입을 열었다. 스피커의 잡음 섞인 소리가 아니라, 내 귓가에서 직접 속삭이는 듯한 선명한 목소리였다.
“오른손을 줘.”
도니가 계산대 위로 오른손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유리창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며 그의 손이 현실 세계로 툭 튀어나왔다.
“네가 가진 그 깨끗한 오른손을 주면, 내가 반품될게. 그럼 너는 살 수 있어. 너는 생존자로 인정받고,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그의 말은 달콤한 유혹처럼 들렸지만,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왼손의 보증 대가가 이미 시작되어 마비가 올라오고 있는 판국에, 오른손의 서명 권한까지 저 잔재에게 넘겨준다면? 나는 이름과 형태를 잃고 정말로 저 유리창 너머의 유령이 될 것이다.
“싫은데요. 내가 왜? 내 몸뚱아리는 내가 알아서 관리합니다. AS 기간 지났다고 부품 교체하라는 소리는 사양이야.”
나는 뒷걸음질 치며 장부를 노려보았다. 시스템은 여전히 [반품 대상 선택]을 종용하며 깜빡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쪽은 기록상의 나고, 이쪽은 현재의 나다. 시스템의 논리로는 둘을 구분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장부의 규칙에는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최초의 거스름돈.’
나는 아까 슬롯에 넣었던 그 낡은 토큰을 떠올렸다.
“잠깐, 서하 씨. 아까 장부가 그랬죠. ‘최초의 거스름돈’으로만 생존 확인이 가능하다고.”
“네, 그랬죠. 근데 이미 토큰은 들어갔잖아요.”
“거스름돈은 누구한테 주는 겁니까? 주인입니까, 손님입니까?”
서하 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도 내 의도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거스름돈의 소유권은…… 돈을 받은 사람에게 있죠.”
“맞아요. 저 토큰은 742일 전, 내가 저 아이에게 준 겁니다. 즉, 저 토큰의 정당한 소유자는 내가 아니라 이 아이라는 소리죠. 서비스업의 기본 아닙니까? 손님이 왕이지. 물건을 반품할지, 교환할지, 아니면 그대로 구매 확정을 할지는 계산원이 아니라 ‘손님’이 정하는 거라고요!”
나는 아이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얘야, 잘 들어. 저기 있는 아저씨랑 나 중에서, 누가 네 ‘거스름돈’을 돌려받아야 할지 네가 정해. 이 토큰은 네 거야. 네가 주는 사람이 진짜가 되는 거야.”
도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무채색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과 분노가 스쳤다.
“내가 먼저였어! 내가 너를 보냈고, 내가 여기서 742일을 기다렸어! 저놈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가짜란 말이야!”
도니의 외침에 역무실 내부의 집기들이 덜컹거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응, 저 아저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기억도 못 하고, 비겁하게 살아남기만 했지. 하지만…….”
나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내 심장 근처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네가 정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줄 사람을.”
정적이 흘렀다.
슬롯 속으로 사라졌던 낡은 500원 토큰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다시 배출구로 굴러떨어졌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 토큰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낡은 금속 조각.
아이는 도니의 내밀어진 오른손을 한 번, 그리고 내 얼굴을 한 번 번갈아 보았다. 도니의 눈에는 절박함이, 내 눈에는 불안을 갈무리한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아이가 마침내 손을 뻗었다.
토큰이 놓인 곳은 도니의 썩어가는 오른손이 아니었다. 아이는 내 투박한 손바닥 위에 그 낡은 동전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가자.”
아이가 속삭였다.
순간, 장부의 붉은 빛이 일순간 청백색의 눈부신 광휘로 변하며 역무실 전체를 휘감았다.
[ 판정 완료 : 소유권 이전에 따른 생존자 확정. ]
[ 반품 대상 변경 : 오른손 계산원 → 원보호자 대리인 ]
“뭐? 반품 대상이…… 바뀌었다고?”
내 경악 섞인 목소리는 거대한 시스템음 뒤로 묻혔다. 도니의 형체가 먼지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강제 소환’되는 것처럼 보였다.
[ 시스템 로그 : 원보호자 대리인(Original Guardian Proxy) 입장 승인. ]
[ 742일 전의 미완결 결제를 재개합니다. ]
역무실 너머, 편의점의 풍경이 뒤틀렸다.
진열대 사이로 짙은 안개가 밀려들더니, 한 번도 열린 적 없던 역무실 배후의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가온이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형! 저기야! 그 냄새가 나! 검은 우산!”
열린 문틈 사이로 빗줄기가 들이쳤다.
742일 전의 그 새벽, 비 오는 거리의 눅눅한 공기가 역무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빗속에서, 검은 우산을 깊게 눌러쓴 누군가의 그림자가 천천히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 결제 대기 중 : 500원. ]
장부의 마지막 문구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드디어, 이 모든 루프의 시작점이자 종착역인 ‘그 손님’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