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227화. 귀가 권한 미수령자의 열차
226화. 귀가 권한 미수령자
[강도윤]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방금 전까지 편의점의 매끄러운 타일을 밟고 있던 운동화 밑창으로 거칠고 축축한 시멘트의 질감이 전해졌다.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매캐한 철가루의 비린내였다. 형광등이 깜빡이던 편의점의 소음 대신, 멀리서 동굴을 울리는 듯한 낮은 진동음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지하철역?”
윤서하 씨의 목소리가 텅 빈 플랫폼에 낮게 깔렸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스크린도어조차 설치되지 않은 구형 지하철 승강장이었다. 천장에는 누렇게 바랜 유도등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고, 벽면의 타일은 군데군데 깨져 검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742일 전, 그러니까 세상이 이토록 망가지기 전의 서울 어딘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
하지만 평범함 속에 섞인 이질감은 가온이가 먼저 잡아냈다. 녀석은 코를 찡긋거리며 플랫폼 끝, 어둠이 짙게 깔린 선로 쪽을 가리켰다.
“형, 냄새가 이상해. 여기저기 막 섞여 있어.”
“어떻게?”
“저쪽 선로 쪽은…… 병원 응급실에서 나던 소독약 냄새가 엄청 진해. 그런데 열차 들어오는 쪽은 아까 그 우산 아저씨한테 났던 라벤더 방향제 냄새가 나고…….”
가온이가 움찔하며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리고 우리 발밑이랑 이 공기 중에는 젖지 않은 비닐 냄새가 가득해. 마치 이 공간 전체가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아.”
기록과 사망의 합성. 가온이의 말대로라면 이곳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기록된 장소와, 그 기록을 관리하는 시스템의 의지가 뒤섞여 만들어진 기괴한 아공간이었다.
[ 치이익― 치익― ]
갑자기 머리 위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가 발생했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지만, 방금 전 편의점에서 들었던 그 ‘검은 우산’의 음색임이 분명했다.
― 안내 말씀 드립니다. 현재 742일 전 귀가하지 못한 승객들을 위한 임시 열차가 진입 중입니다.
― 보호자 후보 강도윤 님은 60분 이내에 지정된 ‘집’에 도착해야 합니다.
― 해당 구역은 연산 오류로 인해 경로가 유실되었으므로, 오직 승차권을 소지한 인원만이 이동 가능합니다.
“승차권?”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딱딱하고 둥근 것이 걸렸다. 꺼내 보니 그것은 예전 지하철에서 쓰던 노란색 플라스틱 토큰이 아니라, 500원짜리 동전 크기의 검은색 금속 칩이었다. 칩 앞면에는 내 오른손에 새겨졌던 것과 같은 기괴한 문자열이, 뒷면에는 742일 전의 날짜가 각인되어 있었다.
단 한 장뿐이었다.
[ ※ 주의 : 현재 동반 아동은 ‘미등록 수하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
[ 수하물은 별도의 승차권이 필요하지 않으나, 보관 및 운송 중 발생하는 파손에 대해 시스템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수하물?”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나는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작고 온기 있는 애를 물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파손 주의 스티커조차 붙여주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야, 우산 양반. 듣고 있어? 아무리 그래도 애를 수하물로 부르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요즘 택배도 이렇게는 안 보내. 최소한 뽁뽁이라도 감아주든가, 유모차 요금이라도 깎아줘야 할 거 아냐.”
대답은 없었다. 대신 전광판의 숫자가 [59:42]로 줄어들며 붉게 점멸할 뿐이었다.
불안과 공포가 가슴을 조여왔지만, 나는 억지로 광대 근육을 끌어올려 낄낄거렸다.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가온이도, 서하 씨도, 그리고 이 이름 없는 아이도 길을 잃는다. 농담은 내가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치는 일종의 방어막이었다.
“도윤 씨, 저 전광판 밑에 나오는 문구…… 들리세요?”
서하 씨가 가슴팍의 명찰을 움켜쥐며 물었다. 그녀의 명찰에 간 균열이 파르르 떨리며 보랏빛 빛무리를 내뿜고 있었다.
“아니요, 노이즈 때문에 잘 안 들리는데. 서하 씨는 들려요?”
“전광판의 글자가 아니라…… 안내방송 뒤에 숨겨진 목소리가 들려요. ‘누구를 집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증명하라고…….”
서하 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단순히 지리적인 집을 찾아가는 시험이 아니에요. 시스템은 지금 도윤 씨에게 묻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데려가는 이 아이가 정말로 ‘귀가’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이 아이의 진짜 ‘보호자’인지.”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시선은 텅 빈 선로 너머, 어둠 속을 향하고 있었다.
“……집.”
“응, 우리 집 갈 거야. 금방 가니까 걱정 마.”
“집은…… 불이 꺼져 있어.”
아이가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가온이와 서하 씨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이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운동화가 젖어서, 현관에 두면 축축해.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소리가 안 나. 아무것도 안 나와.”
조각난 기억들. 742일 전, 이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집’의 풍경일 터였다. 젖은 운동화와 소리 없는 자판기, 그리고 불 꺼진 창문.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장소. 혹은 이미 누군가에게 침범당해 온기를 잃어버린 장소.
나는 검은 승차권 칩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뒷면의 약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깨진 타일 사이로 스며나오는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무시했다. 가온이가 말한 ‘비닐 냄새’가 가장 진동하는 곳, 승차권의 아주 미세한 테두리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역시나, 그곳에 숨겨진 문구가 있었다.
[ 이용 약관 제 4조 2항 : 보호자 후보는 동반 개체의 분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가진다. 재분류 신청 시, 해당 개체는 ‘수하물’에서 ‘임시 승객’으로 격상되나, 이에 따른 추가 비용은 보호자 후보의 신체적/존재적 데이터를 통해 즉시 결제된다. ]
“비용? 결제? 하여간 이놈의 시스템은 공짜가 없네.”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흉터 자리에 희미하게 떠올랐던 ‘계산원’이라는 글자가 마치 잉크를 들이부은 듯 검고 선명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으득, 어금니를 깨물었다. 뼈마디가 통째로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도윤 씨! 손이!”
“괜찮아요. 이거 그냥…… 고성능 문신 같은 거니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웃었다.
“애를 수하물 칸에 태울 순 없잖아요. 명색이 헌터인데, 내 짐도 아니고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꼴은 못 보지. 게다가 수하물은 보험도 안 된다며?”
나는 오른손에 쥔 승차권을 개찰구 옆의 낡은 리더기에 갖다 댔다.
[ 띠링― ]
[ 이의 제기가 접수되었습니다. ]
[ 개체 분류 변경 : 미등록 아동 -> 임시 승객 ]
[ 결제가 진행됩니다. 결제 수단 : 보호자 후보의 ‘기록된 시간’ ]
순간, 내 시야가 한차례 크게 뒤흔들렸다. 오른손 등에 새겨진 글자들이 피부를 뚫고 혈관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742일 전의 기억들, 내가 편의점에서 보냈던 무미건조한 시간들, 그리고 퇴근길의 피로감 같은 것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느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감각을 견디며 나는 아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제…… 됐어. 넌 이제 물건 아니야. 정식 승객이야.”
[ 열차가 진입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
어둠을 뚫고 거대한 쇳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전동차였다. 도색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창문 안쪽은 뿌연 습기로 가득 차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열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곳에 승객은 없었다. 텅 빈 객차 안에는 손잡이마다 하얀 종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종이들은 마치 목을 맨 시신들처럼 불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가온이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나는 홀린 듯 열차 안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들은 이름표였다. 742일 전, 이 지하철을 탔으나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과 직업, 그리고 마지막 위치가 적힌 장부의 파편들.
그리고 객차 중간, 가장 심하게 흔들리는 이름표 하나가 내 시야에 박혔다.
[ 성명 : 강도윤 ]
[ 소속 : 24시간 편의점 ‘나이스데이’ 알바생 ]
[ 상태 : 미수령 ]
이름표 아래쪽, ‘귀가 완료’라고 적혀 있어야 할 칸에는 붉은색 도장으로 큼지막하게 [미수령]이라는 글자가 찍혀 있었다.
마치 아직 결제가 끝나지 않은 물건처럼.
“……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내 목소리가 기괴하게 메아리쳤다. 열차 문이 닫히려 움찔거렸다. 시계는 이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가 가야 할 ‘집’은,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227화. 귀가 완료라는 이름의 위조
[강도윤]
“잠깐, 문 닫지 마!”
움찔거리며 맞물리려던 전동차 문틈 사이로 얼른 발을 집어넣었다. 투박한 운동화 밑창이 문 사이에 끼어 비명을 질렀다. 쾅, 쾅, 기계적인 반항이 발목을 타고 전해졌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이 열차를 놓치면, 742일 전의 미완결 결제 속에 영원히 박제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주머니 속의 검은 승차권 칩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화끈거리는 열기와 함께 내 오른손 등에 새겨진 ‘계산원’이라는 글자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마치 자석이라도 된 것처럼, 내 손과 객차 안쪽의 이름표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으윽……!”
오른손의 뼈마디가 비틀리는 감각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덕분에 문은 닫히지 않았다. 아니, 시스템이 내 ‘계산원’으로서의 권한을 인식하고 억지로 문을 열어둔 것에 가까웠다.
“도윤 씨, 괜찮아요? 손이…… 글자가 너무 선명해요.”
윤서하 씨가 내 팔을 붙잡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보호자 후보 명찰이 파르르 떨리며 미세한 보랏빛 스파크를 튀겼다. 그녀는 객차 안에 매달린 수많은 이름표를 보며 안색을 굳혔다.
“이거, 그냥 사망자 명단이 아니에요. ‘귀가 실패 처리된 계약 후보자’ 목록이에요.”
“계약 후보자요? 그럼 이 사람들도 저처럼 무슨 편의점 알바라도 하려 했다는 건가요?”
“그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열차에 타는 순간, 이들은 단순한 승객이 아니라 시스템의 ‘자산’으로 분류된 거예요. 하지만 집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서, 지금은 ‘미수령’ 상태로 창고에 처박힌 물건 취급을 받는 거죠.”
서하 씨의 명찰에 간 균열이 번쩍였다. 그와 동시에 치익거리는 안내방송의 노이즈가 기괴한 변조를 거쳐 우리 머릿속으로 직접 꽂혔다.
[ ― 지연된 화물의 재배송을 시작합니다. ]
[ ― 현재 구간은 ‘분류 및 검수’ 단계입니다. ]
[ ― 수령인이 확인되지 않은 품목은 다음 역에서 폐기 절차를 밟게 됩니다. ]
폐기. 그 단어에 가온이가 내 옷자락을 더욱 꽉 쥐었다. 녀석은 코를 찡긋거리며 객차 안의 공기를 예민하게 훑었다.
“형, 냄새가…… 아까보다 더 복잡해졌어. 그런데 이상해.”
“뭐가?”
“아까 그 우산 아저씨한테 났던 라벤더 방향제 냄새 말이야. 그게 저쪽 이름표들 사이에서 나는데, 문태식 아저씨 이름표가 아니야.”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객차 구석, 노약자 보호석 근처에 매달린 몇 개의 이름표였다. 나는 아이를 한 팔로 안아 든 채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 M-17 담당자 ]
[ 라벤더 관리자 ]
[ 대리 정산자 ]
이름이 아니었다. 직함, 혹은 일련번호 같은 것들.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그중 ‘M-17 담당자’라고 적힌 이름표를 지목했다.
“여기야. 여기서 그 소름 돋는 라벤더 냄새가 제일 진하게 나. 문태식 아저씨한테서 났던 것보다 훨씬 더…… 썩은 꽃 냄새 같아.”
M-17. 내 품에 안긴 이 아이의 코드명과 일치했다. 이 이름표의 주인이 이 아이를 관리하던 ‘담당자’였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그 검은 우산의 정체는…….
생각이 꼬리를 물기도 전에, 내 품 안의 아이가 몸을 떨었다. 아이의 시선은 내가 방금 전 발견했던 내 이름표, [성명: 강도윤 / 상태: 미수령]이라고 적힌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저씨.”
“응, 왜 그래?”
“아저씨도…… 집에 못 갔어?”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에 공포와 슬픔이 동시에 서렸다. 아이는 마치 나 또한 자기처럼 버려진 존재라는 걸 확인한 것마냥, 작은 손으로 내 옷깃을 파고들었다.
“아저씨도 여기 갇히는 거야? 나처럼…… 누가 올 때까지 계속?”
그 말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742일 전의 나는 정말로 집에 가지 못한 걸까?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나는 분명 그날 퇴근을 했고, 지루한 일상을 보냈었다. 이 이름표가 거짓인 걸까, 아니면 내 기억이 조작된 걸까.
나는 홀린 듯 내 이름표를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도윤 씨, 함부로 건드리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서하 씨의 경고가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계산원’의 낙인이 새겨진 내 손가락이 종이 이름표 바닥에 닿는 순간, 찌릿한 전기 충격과 함께 환청 같은 잔향이 고막을 두드렸다.
[ ― 야, 강도윤. 너 오늘 일찍 들어가냐? ]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의 비굴한 목소리가 아니라, 742일 전 편의점 점장이었던 시절의 무심하고도 칼칼한 목소리.
[ ― 아, 예. 점장님. 비도 오는데 얼른 가야죠. ]
[ ― 그래, 조심해서 가라. 세상이 흉흉해. ]
기억 속의 대화다. 평범했다. 그런데 그 뒤로 이어지는 소리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 틱, 티틱― ]
일회용 라이터를 켜는 소리.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누군가의 낮은 웃음소리.
[ ― 귀가 완료 도장을 찍어야겠군. 이 친구는 너무 많이 알았어. ]
잔향 속에서 ‘나’는 열차를 타지 못했다. 누군가 내 뒷덜미를 붙잡았고, 내 주머니에서 승차권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름표 위에 붉은 도장을 찍으려던 손.
그 손목에는 기괴한 바코드 낙인이 찍혀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서는 진득한 라벤더 향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문태식의 목소리와 비슷했지만, 어조는 훨씬 더 정중하고 차가웠다. 마치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직처럼.
[ ― 자, 이제 강도윤은 집에 간 겁니다. 기록상으로는요. ]
쾅! 도장이 찍히는 소리와 함께 잔향이 끊겼다.
현실의 나는 숨을 몰아쉬며 이름표에서 손을 뗐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742일 전, 누군가 내 ‘귀가 기록’을 가로챘다.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는데, 시스템상으로는 ‘귀가 완료’로 처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내 눈앞의 이름표가 [미수령]과 [완료] 사이에서 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었다.
“누가…… 내 대신 도장을 찍었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문태식의 라이터를 들고 있었지만, 문태식은 아니었다. 라벤더 냄새와 바코드. 그 ‘검은 우산’의 무리 중 누군가였을 터다.
[ 덜컹― ]
열차가 비명을 지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광판의 역 안내 문구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 이번 역은 ‘보관함’ 역입니다. ]
[ 다음 역은 ‘폐기 예정’ 역입니다. ]
역 이름들이 현실의 지명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물류 센터의 공정 단계처럼 바뀌어 있었다. ‘폐기 예정’이라는 글자가 붉게 번쩍이자 가온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형, 열차가 점점 빨라져! 이대로 가면 우리 다 폐기되는 거야?”
나는 머리를 굴렸다. 742일 전의 나는 미수령 상태다. 그리고 내 품의 아이는 ‘임시 승객’이다. 시스템은 이 불안정한 조합을 ‘오류’로 인식하고 폐기하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류가 아니게 만들면 된다.
“서하 씨, 혹시 펜이나 끈 같은 거 있어요?”
“네? 아, 여기 제 머리끈이랑 볼펜이…….”
나는 서하 씨에게서 물건을 받아 낚아챘다. 그리고 내 이름표를 거칠게 떼어냈다. [미수령]이라는 붉은 글자가 내 손바닥을 태울 듯이 뜨거웠지만 참아냈다.
나는 아이의 옷깃에 붙어 있던 ‘임시 승객권’ 종이와 내 이름표를 머리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볼펜으로 그 사이에 큼지막하게 글자를 적어 넣었다.
[ 보호자 동행 미수령 ]
내 오른손의 ‘계산원’ 글자가 다시 한번 강하게 진동했다. 시스템의 규칙을 내 임의대로 재정의하는 행위. 이건 일종의 억지 결제였다.
[ 띠링― ]
[ 데이터 수정 시도 감지…… ]
[ 승인 권한 확인 중…… ‘계산원’ 권한 인정. ]
[ 항목 재분류 : 미등록 수하물(M-17) + 귀가 권한 미수령자(강도윤) -> ‘보호자 동행 미수령 화물’ ]
[ 폐기 절차가 일시 중단됩니다. 배송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
열차의 속도가 미세하게 줄어들었다. ‘폐기 예정’으로 가득 찼던 전광판이 지직거리더니 새로운 목적지를 띄웠다.
“후우…… 일단 시간은 벌었네요.”
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서하 씨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녀는 창밖을 가리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윤 씨, 저걸 보세요. 우리가 정말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을까요?”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지하철 터널의 어두운 벽면이 서서히 걷히고,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곳에는 건물이 있었다.
낡은 빌라촌,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골목길.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솟은 익숙한 건물 하나.
내가 3년째 자취하고 있는, 바로 그 원룸 건물이었다.
“내 자취방……?”
반가움보다는 소름이 먼저 돋았다. 742일 전 내가 도착했어야 할 ‘집’이 창밖으로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결정적으로 잘못되어 있었다.
건물의 모든 창문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창문 밖으로, 마치 누군가 내걸어 놓은 깃발처럼 검은 우산들이 하나씩 걸려 있었다.
비도 오지 않는 아공간의 하늘 아래서, 수십 개의 검은 우산들이 젖지 않은 채 축축하게 늘어져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딩동― ]
무미건조한 안내방송이 다시 울려 퍼졌다.
[ 이번 역은 ‘불 꺼진 창문’, ‘불 꺼진 창문’ 역입니다. ]
[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본인 확인이 완료된 승객만 ‘투척’ 됩니다. ]
열차의 속도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창밖의 그 검은 우산들이 우리를 빨아들이려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