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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167화. 203호 보호자 대기실과 지우지 않는 서명 일러스트

166-167화. 203호 보호자 대기실과 지우지 않는 서명

제목: 166-167화. 203호 보호자 대기실과 지우지 않는 서명

166화. 203호 보호자 대기실

“도윤아. 이제 네가 누구를 버릴 차례인지 정해야지.”

그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넘어온 순간, 위장이 뒤집히는 감각이 먼저 왔다.

기억은 종종 거짓말을 하지만 신체는 정직하다. 내 몸이 기억하는 강도원은 다정한 형이 아니었다. 그는 늘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밀어붙이던 설계자였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보호받을 자격’을 주던 관리자였다.

목구멍이 꽉 막혔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형?”

대답을 기대하고 부른 게 아니었다. 그저 내뱉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아서 뱉은 신음이었다.

문 너머는 고요했다. 하지만 잔향청취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203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천 장의 서류가 동시에 넘어가는 소리였고, 병원 복도에서 누군가의 임종을 기다리던 보호자들의 짓눌린 숨소리였다.

발을 떼려던 찰나, 소매 끝에 묵직한 힘이 실렸다.

“……안 돼.”

윤서하였다. 그녀는 바닥에 네 번째 선을 그은 직후라 손끝 하나 까닥하기 힘들 텐데도, 내 손목을 으스러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검끝이 바닥을 긁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의 심지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가지 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그녀를 대신해, 맞잡은 손목의 맥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또다시 누군가의 ‘보호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가족 냄새가 아니에요.”

반가온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오며 코를 찡그렸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건…… 오래된 병원 커튼 냄새예요. 그리고 수정액, 젖은 우산…… 억지로 삼킨 알약 냄새도 나요. 도윤 씨, 저 안에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에요. 거대한 보증인 서류가 쌓여 있는 냄새라고요.”

가온의 말은 틀린 적이 없다. 그녀에게 이곳은 기록과 악취의 전장일 테니까.

그때, 등 뒤에서 KDW-0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내 얼굴을 한 그 존재는 호기심 어린, 그러나 본능적인 거부감을 담은 눈으로 203호의 문을 응시했다.

“저 목소리, 너랑 닮았어.”

KDW-0이 무미건조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너보다 훨씬 차가워. 나를 처음 만들 때 들렸던 설계도의 소리 같아. 도윤아, 저 안에 들어가면 너는 또 이름이 지워질 거야.”

“나도 알아, 인마.”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삼켰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형의 이름을 부르며 빌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이 불쾌한 압박감은 어린 시절, 병원 대기실에서 형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있을 때 느끼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복도 끝에 서 있던 검은 우산의 남자가 낮게 킥킥거렸다. 그는 우산 손잡이에 달린 흰색 고리—‘증언자 0’ 혹은 ‘보호자 203’이라 적힌 병원 팔찌 같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왜 망설이지? 네 형이 기다리고 있잖아. 보호자 대기실은 원래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야. 자격이 있는 사람, 즉 ‘남겨진 자’들만이 허락받는 신성한 장소지.”

그는 마치 구경꾼이라도 된 양 여유로웠다. 하지만 그 역시 문턱 안쪽으로는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203호는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성역이거나, 혹은 지독한 덫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윤서하의 손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 걸음, 문턱을 넘었다.

탁.

발바닥이 닿는 감각이 바뀌었다. 차가운 대리석 복도가 아니었다. 낡은 장판 위로 쏟아지는 칙칙한 형광등 불빛.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헌터협회 감식반 사무실 특유의 찌든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공간이 중첩되어 있었다.

정면에는 병원 대기실에서나 볼 법한 딱딱한 연두색 플라스틱 의자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옆에는 헌터협회의 ‘사망 현장 증거물 보관함’이 캐비닛처럼 서 있었다. 벽면에는 장례식장에서 쓰이는 검은 리본이 달린 영정 액자들이 걸려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안은 모두 비어 있었다.

대기표 발권기 한 대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번호표를 뱉어냈다.

[대기 번호: 203]

[보호자: 강도원]

[보호 대상: 강도윤 (확정 대기 중)]

번호표에 적힌 글자를 본 순간, 잔향청취의 이명이 폭발하듯 뇌를 때렸다.

— 도윤아, 사인해. 네가 사인해야 이 순서가 안 바뀌어.

— 팀장님, 이건 조작이에요. 도윤이 이름이 왜 여기에 들어갑니까?

— 비켜, 태식아. 이건 이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소유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으니까.

어린 시절의 내가 보였다. 아니, 이건 잔향이다.

203호 대기실 입구, 서명대 앞에 서 있는 아주 작은 그림자.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진 커다란 그림자. 강도원이었다. 그는 어린 나의 손에 펜을 쥐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서 누군가 필사적으로 그 펜을 뺏으려 하고 있었다.

문태식 팀장이었다.

잔향 속의 문태식은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눈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강도원이 서명한 서류 위로 거칠게 수정액을 칠하고 있었다. 하얀 액체가 강도원이라는 이름을 덮어버릴 때마다, 공간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문태식은 나를 ‘소유된 보호 대상’에서 빼내려 했던 것이다. 형의 설계로부터, 그 지독한 순서로부터 나를 지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경력과 영혼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건가.”

문 팀장이 왜 내 사망 순서를 뒤섞고, 내 기록을 누더기로 만들었는지 이제야 한 조각이 맞춰졌다. 그는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유령으로 만들었던 거다.

“도윤아. 거기서 뭘 보고 있니?”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대기실 안쪽, 유리창 너머로 실루엣이 비쳤다. 반투명한 커튼 너머로 누군가 의자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유리창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나와 닮았으면서도, 결코 내가 가질 수 없는 서늘한 우아함을 품고 있었다.

강도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을 들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문태식은 실패했어. 그는 지우는 법만 알았지, 다시 쓰는 법은 몰랐거든. 덕분에 네 이름은 오랫동안 공란으로 남아서 썩어갔지. 하지만 이제는 채워야 할 때가 왔어.”

강도원의 손끝이 멈췄다.

나는 홀린 듯 서명대로 다가갔다. 그곳엔 낡은 환자 팔찌와 함께 ‘보호자 연대보증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보증서의 [다음 보호 대상] 칸에 서서히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내 이름이 아니었다.

[윤서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서하 씨는…… 건드리지 마.”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강도원은 드디어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로 나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그저 잘 짜인 수식처럼 정교한 의지만이 읽힐 뿐이었다.

“내가 건드리는 게 아냐, 도윤아. 네가 그녀를 증언자로 선택한 순간, 이 규칙이 발동된 거지.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면 그 사람의 주인이 되어야 해. 그게 ‘보호자 203’의 규칙이니까.”

강도원이 만년필을 내밀 듯 손을 뻗었다. 유리창에 비친 그의 그림자가 내 발치까지 길게 늘어졌다.

“이제 네가 지울 차례야. 윤서하의 이름을 지우고 네 이름을 넣을래? 아니면, 그녀를 내 설계의 일부로 기꺼이 바칠래?”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결코 그녀를 소유하려 하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내가 그녀를 버리지도 못할 것임을.

서명란 위에 적힌 ‘윤서하’ 세 글자가 마치 낙인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반가온이 밖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 씨! 서하 언니 몸에서…… 수정액 냄새가 나요! 언니 이름이 지워지고 있어요!”

나는 서명대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강도원의 목소리가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이번에도 문태식처럼 수정액으로 덮어버릴 거니? 아니면…… 직접 네 손으로 끝낼 거니?”

유리창 너머의 형이 비로소 미소 지었다. 그것은 다정한 형제의 재회가 아니라, 완벽한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미소였다.

서명란의 글자가 번지며, 윤서하의 이름 옆에 ‘사망 확정’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명대 위에 놓인 낡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이건 형의 방식도, 문 팀장의 방식도 아니다.

내 방식대로, 이 거지 같은 대기실의 규칙을 찢어발겨야 했다.

167화. 지우지 않는 서명

만년필의 촉이 종이 위에 닿기 직전,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차갑고 무거운 감촉. 이 잉크는 단순히 색소가 아니다. 누군가의 생애를 확정 짓고, 타인의 의지를 귀속시키는 주술적인 무게였다. 내 눈앞의 서류, [보호자 연대보증서]의 다음 보호 대상 칸에는 '윤서하'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옆에는 붉은색 '사망 확정' 도장이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비스듬히 떠 있었다.

유리창 너머, 강도원의 무감각한 시선이 내 손등을 꿰뚫었다.

“지우든가, 아니면 네 이름을 써넣어라. 도윤아. 그게 네가 배운 유일한 방식이지.”

강도원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어린 동생에게 받아쓰기 숙제를 검사하는 형처럼. 하지만 그 평온함 밑바닥에는 거대한 악의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문태식처럼 수정액으로 이름을 지운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유예일 뿐이라는 걸. 그리고 내 이름을 적는다면, 나는 윤서하의 '보유자'가 되어 강도원이 설계한 203호의 규칙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 된다는 걸.

“우리 집안은 명절 선물도 압류장으로 보내나 보네. 형, 이 정도면 정서 학대야. 알아?”

나는 비릿하게 웃으며 만년필을 고쳐 잡았다.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온 농담에도 강도원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내가 선택을 강요받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서하 언니 이름이 흐려져요! 도윤 오빠, 빨리요! 수정액 냄새가…… 아, 아냐. 냄새가 바뀌고 있어!”

유리창 밖, 반가온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코를 킁킁거리던 녀석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렸다.

“비린내가 나요. 젖은 철제 캐비닛 냄새, 그리고…… 비 맞은 검집 냄새랑 찢어진 번호표 냄새!”

가온이가 맡은 건 규칙이 뒤틀리는 냄새였다.

나는 만년필 끝을 윤서하의 이름 바로 위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내 이름을 적지도, 이름을 지우지도 않았다. 나는 서명란의 빈칸을 가로질러 날카롭게 획을 그었다.

[본인 진술 대기 중. 해당 대상을 증거물 0호로 무기한 격리 요청.]

잉크가 종이의 결을 따라 번져나갔다. 그것은 '보호자'로서의 서명이 아니었다. 헌터 협회의 행정 절차 중 가장 까다롭고 지저분한 조항, 수사권이 확립되지 않은 미제 사건의 증거물로 이 상황 자체를 동결시키는 조치였다.

“……증언 거부?”

강도원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우는 법만 아는 게 아니야, 형. 나는 이 서류 자체를 쓰레기통으로 보내는 법도 알거든.”

나는 멈추지 않았다. 윤서하의 이름 주위에 서린 붉은 '사망 확정' 낙인을 향해 펜촉을 휘둘렀다. 잉크가 낙인을 덮는 게 아니라, 낙인의 테두리를 갉아먹듯 '절차상 하자'라는 문구를 덧씌웠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 서 있던 KDW-0가 내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녀석은 멍한 눈으로 서류를 내려다보다가, 자기 손바닥에 매직으로 그어놓은 서툰 선들을 보더니 물었다.

“나도…… 보호자가 될 수 있어? 저기에 내 이름을 쓰면, 나도 누군가를 가질 수 있는 거야?”

무구해서 더 소름 끼치는 질문이었다. 녀석은 '보호'를 '소유'로 배우고 있었다. 강도원이 심어놓은 낡은 관념의 복제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넌 누군가의 칸을 채울 생각 마. 네 이름부터 찾아. 남의 인생에 서명하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니까.”

KDW-0는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녀석은 더 이상 서류에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자기 이름표가 붙어 있어야 할 빈 가슴팍을 멍하니 문질렀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강렬한 잔향이 밀고 들어왔다.

[“도윤아, 이 서류는 너를 지키는 울타리다. 네가 누군지 증명하지 않아도, 이 종이가 너를 증명해 줄 거야.”]

어린 시절의 강도원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인간적인 온기가 남아 있던 시절의 목소리. 그는 어린 나를 203호 서명대 앞에 세워두고 있었다. 그때의 그는 진심으로 나를 살리려 했던 걸까?

아니, 틀렸다.

잔향의 끝에서 나는 보았다. 강도원이 쥐고 있던 서류 뒷면에 적힌 깨알 같은 주석을.

[증언자 0: 잔향의 영구 보존 및 관측을 위한 표본.]

그는 나를 지키려 한 게 아니었다. 나를 가장 완벽한 상태로 '보관'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겪을 죽음과 내가 들을 망자들의 비명이 자신의 설계 속에서 변질되지 않도록.

“도윤아, 너는 여전히 규칙의 바깥을 헤매는구나.”

강도원이 유리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에 맞춰 윤서하의 이름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사망 확정 도장은 보류되었지만, 윤서하의 이름 마지막 글자인 '하'자가 마치 물에 젖은 듯 흐릿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윽…….”

밖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지만,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바닥에 놓인 검 끝을 향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보호받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윤서하의 검끝이 바닥을 긁으며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내가 서류 위에 쓴 '진술 대기'라는 글자와 공명하듯, 그녀의 검기가 203호의 공기를 가르며 네 번째 선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강도원이 정한 규칙의 틈새를 억지로 벌리는 쐐기였다.

“……서하 씨!”

내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대기실의 번호표 발권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종이를 내뿜었다.

[대기 번호: ERROR]

[보호 대상: 확인 불가]

[보호자: 권한 충돌]

타다닥, 소리와 함께 발권기가 과열되어 연기를 내뿜었다. 203호의 견고한 논리가 무너지고 있었다.

대기실 문밖에서 검은 우산을 들고 서 있던 남자의 실루엣이 흔들렸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쥐고 있던 우산 손잡이의 흰 고리가 미세하게 금이 가며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초조한 듯 구두 앞코로 바닥을 톡톡 쳤다.

“재미있군.”

강도원이 입꼬리를 올렸다. 분노가 아니라, 새로운 실험 자료를 발견한 학자의 희열이었다.

“소유하지 않고 유예시킨다라. 하지만 도윤아, 유예는 영원할 수 없다. 이름이 지워지는 속도보다 네가 증언을 완성하는 속도가 빨라야 할 거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의 풍경이 급격히 일렁였다. 병원 대기실의 하얀 벽지가 장례식장의 검은 천으로 뒤덮였다가, 다시 헌터협회의 차가운 취조실로 변했다.

그 혼란스러운 점멸 속에서, 저 멀리 놓여 있던 문태식의 병상이 보였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죽어가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누워 있는 그의 손가락이 침대 난간을 두드리고 있었다.

탁— 탁— 탁탁.

일정한 리듬.

이전의 단순한 노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암호였다. 헌터협회 초창기, 전산화가 되기 전 현장 요원들이 사용하던 긴급 통신 규약.

'서류 함체 확인. 원장(原帳)으로 이동하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강도원이 숨기고 있는 건 이 연대보증서 한 장이 아니었다. 이 대기실 어딘가에, 혹은 이 공간의 더 깊은 핵 속에 모든 보호 관계를 기록한 '보호자 원장'이 존재한다.

“가온아! 서하 씨 데리고 여기서 멀어져! 이 공간 자체가 접힐 거야!”

나는 소리치며 강도원이 서 있는 유리창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내 몸이 유리창에 닿기도 전에, 발밑의 타일들이 종이처럼 말려 올라갔다.

강도원은 여전히 유리창 너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새로운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가죽으로 제본된 낡은 책자. 그 표지에는 금박으로 조잡하게 적힌 글귀가 보였다.

[보호자 원장 / 0번 증언자 후보 명단]

책장이 바람에 날리듯 팔랑거렸다. 강도원의 손가락이 첫 번째 페이지의 이름을 짚었다. 나는 잔향청취의 감각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그 이름을 읽어내려 했다.

당연히 내 이름이거나, KDW-0의 이름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강도원의 손가락 끝이 멈춘 곳, 그곳에 적힌 이름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1순위 후보: 윤서하 (상태: 침식 진행 중)]

그리고 그 밑에, 마치 덧쓰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잉크로 휘갈겨진 문장이 내 망막을 때렸다.

[※ 주의: 강도윤 사망 후 대체 원본으로 활용 가능성 검토 중.]

“……이 미친 새끼가.”

내 욕설을 집어삼키며 대기실의 바닥이 완전히 꺼져 내렸다. 암흑 속으로 추락하며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유리창 너머에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도원의 서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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