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8-279화. 누구 이름으로 살아갈래와 네가 아닌 것을 선택했겠지
278화. 누구 이름으로 살아갈래
짤랑, 챙그랑.
녹슨 금속 조각 두 개가 젖은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소독약 냄새와 비릿한 금속 향이 섞인 공기 속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 방금까지 귓가를 간지럽히던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잔향처럼 바닥을 훑었다.
— 형, 이번에는 누구 이름으로 살아갈래?
그 질문이 천장에 맺힌 물방울처럼 내 머리 위로 툭 떨어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두 개의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하나는 내 이름, ‘강도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겉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긁혀 있었지만 뒷면에는 ‘가온’이라는 글자가 비뚤비뚤하게 남아 있었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멀게만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손끝이 ‘강도윤’이라고 적힌 플라스틱 이름표에 닿았다. 차가워야 할 표면이 이상할 정도로 뜨거웠다.
닿는 순간, 머릿속에서 필름이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탁!)
누군가의 손목에 억지로 채워지는 이름표. 고무줄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걸친 코트 자락과 굳게 다문 입술만은 선명했다. 문태식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젊고, 훨씬 지독해 보이는 얼굴의 문태식.
— 오늘부터 네 이름은 이거다. 알겠니?
남자가 말했다. 아이는 대답 대신 웃었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한 이름표를 만지작거리며, 아이는 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아저씨. 그럼 원래 내 이름은 누가 가져가?
— 그건…… 주인이 찾아가겠지.
철컥, 육중한 금속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됐다.
“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손가락 끝이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나자,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윤서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뭘 본 거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잠깐 현기증이 나서.”
농담이라도 던져야 했다. 이럴 때일수록 실없는 소리를 해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입술이 경련을 일으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 이름표를 만졌는데, 왜 내가 아닌 다른 아이의 감각이 느껴지는 거지? 아니, 그 아이가 나였나?
윤서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의 이름표를 집어 들려 했다. 그녀의 손이 닿으려던 찰나,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헌터용 단말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경고음이 울렸다.
[삐비빅! 경고. 소유권 충돌 발생.]
[데이터 정합성 오류: 등록된 사용자와 물리적 객체의 식별 정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윤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말기 화면에는 붉은 노이즈가 지지직거리며 정체 모를 코드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스템이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처럼, 혹은 이 이름표가 가진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뒤에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백연이었다.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카메라 액정 화면을 넘기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강도윤 씨, 뒤로 조금만 물러나 봐요.”
“왜요? 내 뒤태가 사진 찍기엔 너무 치명적인가?”
“아니요. 그림자가 이상해서요.”
그녀가 보여준 카메라 화면 속에는 방금 찍힌 세 사람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 발치에서 뻗어 나간 그림자 옆에, 아주 작고 가느다란 발자국 하나가 겹쳐 있었다. 맨발이었다.
백연이 사진을 한 장 더 넘겼다. 이번 사진에서 그 발자국은 내 그림자의 발등 위로 올라타 있었다. 마치 아이가 어른의 발등을 밟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하지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 형, 이름은 빌렸는데 그림자는 못 빌렸나 봐.
어린아이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잔향청취. 이 방 전체에 눌러붙은 과거의 찌꺼기들이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기록자 후보로서 말하는데, 이건 그냥 잔상이나 유령으로 넘기기 어려워요.”
백연이 카메라 렌즈를 조절하며 건조하게 덧붙였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기록의 공백’이에요. 이 공간 자체가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다른 사람으로 덮어씌우는 거대한 세탁기처럼 굴러간 흔적이 있어요.”
그녀의 시선이 벽면 한구석을 향했다. 낡고 부식된 금속판 하나가 비뚤게 걸려 있었다. [임시 소유자 반납 절차]라는 제목 아래로 조각난 글자들이 보였다.
[……원본명 미등록 상태인 경우……]
[……회수 실패 시 대체명 승인 절차에 따라……]
[……최종 확인자: 문태식……]
‘대체명 승인.’
그 단어가 심장을 찔렀다. 헌터 협회 사망 접수처에서 내가 처리했던 수많은 서류들, 주인을 잃고 떠돌던 이름들, 그리고 내 이름으로 도착했던 그 수많은 사망 플래그들. 그 모든 조각이 이 지하실의 습한 공기 속에서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려 하고 있었다.
“문 실장님이…… 도대체 여기서 뭘 한 거지?”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문태식을 신뢰했다. 나 또한 투덜거리면서도 그 영감탱이가 나를 정말로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 믿어왔다. 하지만 이 안내판에 적힌 이름은 너무나 명확했다. 문태식은 관리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방의 규칙을 알고 있었고, 누군가를 그 규칙 안에 밀어 넣었다.
“글쎄요. 보험금이라도 타 먹으려고 내 이름을 가라로 등록했나 보죠. 아, 생각해보니 내 몸값이 그렇게 높지도 않은데.”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윤서하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옷자락을 꽉 쥐며 나직하게 물었다.
“도윤 씨는 알고 있었어요? 당신 이름이…… 진짜 당신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서하 씨, 지금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하기엔 상황이 좀 거시기하지 않나요? 이름이 누구 거면 어때요. 지금 이렇게 숨 쉬고 말하는 건 나인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그때였다.
구구구궁—!
지하 공간 전체가 거대한 기계 장치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의 젖은 금속판들이 레일처럼 맞물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가 들어온 입구 쪽 문이 순식간에 폐쇄되었고, 바닥에 그어진 노란 선들이 붉은색으로 변하며 점멸했다.
[임시 소유 기간 만료.]
[자동 분류 절차를 재가동합니다.]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천장에서 울려 퍼졌다.
“분류라니? 우리가 쓰레기도 아니고!”
내가 소리쳤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바닥이 갈라지며 강한 흡입력이 우리를 안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붉은 레이저 선들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우리 몸을 스캔했다.
“위험해요!”
윤서하가 검을 뽑아 휘둘렀지만, 물리적인 타격이 먹히는 적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우리를 뱉어내려 하고 있었다.
“백연 씨!”
“알고 있어요!”
백연이 카메라 플래시를 연속해서 터뜨렸다. 강력한 광원이 쏟아지며 공중에 떠다니던 기록의 파편들을 강제로 고정시켰다. 순간적으로 센서가 교란되었는지 붉은 선들이 파르르 떨리며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윤서하가 내 허리를 낚아채 레일 밖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도윤 씨, 우선 피해요!”
“잠깐, 이름표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두 개의 이름표가 움직이는 레일을 타고 안쪽의 어두운 구멍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저걸 놓치면 끝이다. 내 과거든, 가온의 진실이든, 영영 찾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몸을 날렸다. 바닥을 굴러 레일 끝자락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레일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두 개의 이름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벌어지며 심연 속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하나만 잡을 수 있었다.
내 인생을 증명해줄 ‘강도윤’이라는 이름표인가, 아니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점일지도 모르는 ‘가온’이라는 이름표인가.
— 형, 나를 잡을 거야? 아니면 가짜를 잡을 거야?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웃음 섞인 채 들려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내 직감이 가리키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닿은 것은 투박하고 긁힌 감각. ‘가온’이라고 적힌, 버려진 이름표였다.
그걸 움켜쥐는 순간, 내 이름이 적힌 이름표는 검은 구멍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지만 돌아볼 틈은 없었다.
[분류 대상 확정: 대체명 ‘가온’.]
[소유권 확인 절차를 종료합니다. 내부 보관함 개방.]
치이익—!
정면의 벽면이 좌우로 갈라지며 비밀스러운 공간이 드러났다. 그 안은 분류함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의 개인적인 서재처럼 꾸며져 있었다. 곰팡이 냄새 사이로 익숙한 담배 냄새가 섞여 나왔다.
안쪽 벽면에는 수많은 서류 뭉치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그중 정중앙에 자리 잡은 누런 종이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것은 누군가 급하게 휘갈겨 쓴 손글씨였다. 필체를 보는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문태식의 글씨였다.
[도윤아.]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네 이름은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너는 결국 네가 아닌 것을 선택했겠지. 그것만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나는 움켜쥔 ‘가온’의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땀 때문에 이름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영감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벽면 너머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맨발이 젖은 금속 바닥을 밟는, 눅눅한 소리였다.
279화. 네가 아닌 것을 선택했겠지
손안의 금속 조각이 살을 파고들 듯 차가웠다. [가온]. 방금 내가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린 이름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원래 내 것이어야 했을, 혹은 내가 당연히 쥐었어야 했을 [강도윤]이라는 이름표는 이미 저 아래, 바닥도 보이지 않는 검은 구멍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파고드는 매캐한 담배 향이었다. 이 비릿하고 축축한 금속 방에서 날 리가 없는 냄새. 하지만 나는 이 냄새를 알았다. 지독할 정도로 익숙한, 문태식 아저씨의 냄새였다.
“도윤아, 물러서.”
윤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는 이미 검 손잡이를 꽉 쥔 채 내 앞을 막아선 상태였다. 평소라면 날카롭고 단단했을 그녀의 호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시선은 벽면에 붙은 곰팡이 핀 종이, 문태식의 필체가 남겨진 그 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하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녀가 문태식을 그냥 헌터 선배로만 여긴 적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눈앞의 필체는 우리가 알던 ‘관리자’ 문태식이 아니라, 훨씬 더 젊고, 동시에 훨씬 더 위태로운 시절의 흔적이었다.
[도윤아. 네 이름은 처음부터 네 것이 아니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너는 결국 네가 아닌 것을 선택했겠지. 그것만이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편지지의 모서리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핏자국인지 잉크인지 모를 얼룩이 번져 있었다. 나는 손바닥 안의 ‘가온’ 이름표를 꽉 쥐었다. 금속의 각진 테두리가 손바닥을 눌러 통증을 유발했지만, 그 감각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붙들 수 있었다.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아저씨는 꼭 이렇게 사람 기분 찝찝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다니까.”
입 밖으로 나온 농담은 방어기제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을지도 모른다.
“이름표가 반반이면, 나중에 주민등록증 발급은 누가 해준대요? 구청 가서 ‘저 사실 반가온인데 강도윤으로 살고 있거든요’ 하면 바로 수갑 찰 텐데.”
농담은 공허하게 흩어졌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서하는 검 손잡이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고, 백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 렌즈를 조절하고 있었다.
철벅.
그때, 등 뒤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들렸다. 젖은 맨발이 차가운 금속 바닥을 딛는 소리.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텅 빈 레일과 붉은색 경계선뿐이었다. 그런데 바닥을 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없던 젖은 바닥에 아이의 맨발 자국이 하나씩 찍히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것처럼. 발자국이 찍힐 때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물속에서 글자들이 검게 번졌다.
‘이…’, ‘한…’, ‘설…’.
누군가의 이름이었을 조각들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수면 아래로 녹아 사라졌다. 발자국은 내 그림자 근처까지 다가와 멈췄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바로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압박감이 공기 중의 산소를 뺏어가는 것 같았다.
“기록자가 아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백연의 목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치익, 하는 기분 나쁜 소음과 함께 인화지 위로 형상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부 보관함 벽면에 붙은 낡은 서류들을 하나하나 찍어 내렸다.
“강 도윤 씨, 이걸 보십시오.”
백연이 내민 사진 속에는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문장들이 형광색으로 떠올라 있었다.
[보호 관찰 대상자: 무명(無名)]
[임시 소유자: 강도윤]
[대체명: 반가온]
[반납 절차: 실패]
[주의: ‘검은 우산’ 접근 금지. 발견 즉시 폐기 절차 이행할 것.]
검은 우산.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틈도 없었다. 귓가에 이명이 일었다. 아니, 이건 이명이 아니라 잔향이었다.
“이 아이를 살리려면 이름을 둘로 찢어야 한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 그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훨씬 거칠고 절박함이 묻어나는 어조.
“그럼 남은 쪽은 뭘로 살지? 이름도, 기록도, 존재도 없이 남겨진 그 반쪽은?”
상대방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마치 쇠를 긁는 듯한 불쾌한 음색. 문태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무겁게 가라앉은 숨소리만이 잔향 속에 섞여 들었다.
“아저씨…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편지에 손을 뻗으려 했다. 하지만 서하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 기록의 왜곡이 심해. 이 방 자체가 지금 도윤 씨를… 잡아먹으려 하고 있어.”
“이미 반은 먹힌 거나 다름없어서요. 이름표도 뺏겼는데.”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문태식이라는 이름을 믿고 싶어 하면서도, 이 방이 내민 증거 앞에서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문태식 씨는 보호자였을까요, 아니면 공범이었을까요?”
백연이 무심하게 던진 질문이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번에는 우리 세 사람의 뒤편, 허공을 향해서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확실한 건 아저씨가 우리를 이 방까지 오게 만들었다는 거야. 이 지옥 같은 이름표 뽑기 게임을 시키려고.”
나는 손에 쥔 ‘가온’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가온. 내가 버린 줄 알았으나 결국 다시 쥐게 된 이름.
그때 백연의 카메라에서 셀프타이머 비프음이 들렸다. 삐, 삐, 삐—.
우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카메라가 스스로 작동하고 있었다. 백연조차 당황한 듯 카메라를 고쳐 쥐었지만, 셔터는 이미 내려갔다. 폴라로이드 사진이 지익 소리를 내며 뱉어졌다.
백연이 사진을 낚아채 확인했다. 그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진 속에는 우리 세 사람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네 번째 그림자가 찍혀 있었다. 형체도 불분명한 그 그림자는 마치 안내자처럼, 내 손안에 있는 ‘가온’ 이름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편지 뒷면이… 바뀌었어요.”
백연의 지적에 나는 다시 벽면의 편지를 보았다. 곰팡이 핀 종이 위에 새로운 문장들이 핏빛으로 스며 나오고 있었다.
[가온을 잡은 순간부터 너는 반납 대상이 아니라 회수자다. 뺏긴 것을 찾아라. 그것만이 네가 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회수자…?”
내가 그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보관함 끝에 처박혀 있던 낡은 단말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켜졌다. 지직거리는 브라운관 화면 위로 녹색 글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시스템 재가동…]
[권한 확인 중…]
[인증 완료.]
화면에 뜬 글자를 본 순간, 서하가 숨을 멈췄다.
[회수자 인증: 강도윤]
[대체명: 가온]
[회수 대상: 원본의 조각]
그리고 그 밑에, 마치 사형 선고처럼 붉은 글자가 점멸하며 나타났다.
[다음 회수 대상: 윤서하]
“서하 씨?”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서하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은색 팔찌에서 새빨간 경고등이 터져 나왔다.
위잉! 위잉!
[경고: 소유권 분쟁 발생. 강제 회수 절차를 시작합니다.]
“으윽…!”
서하가 비명을 삼키며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팔찌가 살을 파고들 듯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초점을 잃고 흐려졌다. 평소 그녀를 지탱하던 단단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기괴한 진동이었다.
“도윤아… 도망쳐….”
그녀가 쥐어짜듯 내뱉었지만, 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내 손안의 이름표가 공명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부 보관함의 철문이 덜컹거리며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서류 뭉치가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이름표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바닥을 메웠다.
철벅, 철벅.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하나가 아니었다. 수많은 맨발이 젖은 금속 바닥을 밟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서하의 어깨를 잡았다. 하지만 내 손이 닿는 순간, 단말기 화면의 문구가 바뀌었다.
[회수 진행률: 1%]
[대상 ‘윤서하’의 기록을 ‘가온’에게 통합합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단말기를 향해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서늘한 기계음뿐이었다. 백연은 필사적으로 셔터를 누르며 이 왜곡된 기록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카메라 렌즈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문태식의 편지 마지막 문장이 내 망막을 때렸다.
[도윤아, 너는 살기 위해 네가 아닌 것을 선택했다.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나는 이름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아저씨가 말한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이딴 삶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의 무언가가 서하를 향해 굶주린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이름을 뺏는 자. 회수자.
그게 지금 이 방이 나에게 부여한 새로운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