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277화.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과 임시 소유자 반납구
276화.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
손끝에 닿는 플라스틱 조각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수천 번은 지갑에서 넣었다 뺐을 법한 낡은 헌터협회 감식반 출입증. 모서리는 하얗게 마모되어 있었고, 비닐 코팅 사이로는 세월의 때가 눅진하게 배어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건 오래된 창고의 퀴퀴한 먼지 냄새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희미한 담배 찌든 내였다. 문태식 아저씨가 늘 달고 살던 그 지독한 ‘디스 플러스’의 향취.
나는 뒤집힌 출입증 뒷면에 휘갈겨진 글씨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도윤아,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겠지.]
[AG-702를 열지 마라. 그리고 만약 열게 된다면, 가장 먼저 나를 의심해라.]
글씨체는 엉망이었다. 급하게 휘갈긴 듯하면서도, 펜촉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 종이가 아니라 플라스틱 위에 매직으로 쓴 글씨라 군데군데 번져 있었지만, 그 문장이 주는 무게감은 번진 잉크 따위와 비교할 게 아니었다.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
내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과 함께 혼잣말이 새어 나갔다.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출입증을 뺏듯 낚아챘다. 평소라면 날카롭게 쏘아붙였을 그녀였지만, 지금의 윤서하는 그럴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출입증을 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검자루를 쥔 오른손엔 핏줄이 돋아 있었다. 그녀는 출입증 사진의 모서리를 엄지로 문질렀다. 오래된 현장에 들어가기 전 문태식이 늘 하던 버릇이었다. 장갑을 고쳐 끼고, 담배 냄새 밴 출입증을 두 번 두드린 뒤, “뒤에 있어라”라고 낮게 말하던 그 사람. 그런 손버릇을 그대로 따라 하던 윤서하가 이제 그 사람의 글씨 앞에서 숨을 삼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윤서하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녀는 출입증 사진 속, 지금보다 조금 더 젊고 고집스럽게 생긴 문태식의 얼굴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나보고, 당신을 의심하라고? 어떻게…….”
“서하 씨, 일단 진정해요. 아저씨 성격 알잖아. 워낙 꼬인 양반이라, 이게 진짜 자백인지 아니면 우리 등 떠밀어서 도망치게 하려는 수작인지 아직은 몰라.”
나는 애써 농담조로 말을 던졌다. 하지만 내 목소리도 생각만큼 가볍게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까끌거렸다.
“아저씨가 성격이 좀 안 좋긴 해도, 자기 조카 같은 사람한테 이런 식으로 빅엿을 먹일 위인은 아니잖아요. 유서치고는 너무 성가신 방식이긴 하지만.”
“농담하지 마요.”
윤서하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쏘아보았다.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평소의 서슬 퍼런 기세와는 달랐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 같은 위태로움.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천 개의 금속 케이스가 잠금 해제음만을 반복하며 기괴한 박자로 덜컥거리고 있었다. ‘철컥, 철컥’ 하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심장의 박동 소리처럼 들렸다.
그때, 백연이 다가와 윤서하의 손에 들린 출입증을 살폈다. 그녀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하지만 기록자 후보 특유의 집요한 시선으로 잉크 자국을 훑었다.
“이거, 그냥 잉크가 아니에요.”
백연의 손가락이 ‘의심해라’라는 문장 위를 스쳤다.
“잔향 잉크예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게 아니라, 특정 조건이 갖춰져야만 발현되는 기록 방식이죠. 도윤 씨가 이 창고의 잔향을 들었기 때문에 비로소 이 글자가 완전히 선명해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출입증의 칩이 내장된 부분을 가리켰다.
“이 글씨, 방금 갱신된 것 같아요. 오래된 기록이 아니라, 이 장소의 시스템과 반응해서 방금 막 떠오른 정보라는 뜻이죠. 이 출입증은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이 AG-702 구역의 인증키예요.”
“인증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바닥을 보았다. 검은 우산이 지나간 자리마다 남아 있던 젖은 자국들. 그 검은 물이 조금씩 번져나가더니, 낯선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니, 문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헌터협회 감식반의 로고였다.
로고는 잠시 형태를 유지하다가 이내 물거품처럼 흐트러졌다. 마치 누군가 우리를 지켜보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도윤아.”
또다시 환청처럼, 혹은 잔향처럼 반가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케이스 안쪽이 아니라, 내 바로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지만, 거기엔 차가운 금속 벽과 먼지 쌓인 라벨들뿐이었다.
아저씨를 의심하라니까 마음이 아프냐? 난 네가 날 의심할 때가 제일 마음 편하던데. 너, 지금 되게 멍청한 표정이야.
“입 닥쳐, 반가온.”
내가 낮게 읊조리자 윤서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출입증을 다시 가져왔다.
잔향청취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기억 조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태식의 출입증을 AG-702라고 적힌 거대한 케이스의 인식 단말기에 가져다 댔다.
순간,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치지직, 하는 노이즈와 함께 과거의 잔상이 현재의 창고 위로 겹쳐졌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이었다. 지금보다 머리숱도 많고, 눈매는 훨씬 날카로웠던 시절. 그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누군가와 은밀하게 대화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문태식의 목소리만이 뚜렷하게 고막을 때렸다.
이 아이 이름은 기록에서 지워. 살아남기 위해선 소유자 항목에 묶어야 한다.
문태식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주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들어갈 법한 크기의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이름이 없으면 추적당하지 않아. 내 이름으로 등록해. 내가…… 이 아이의 임시 소유자가 되겠다.
그 아이가 누구인지, 문태식이 지키려 했던 게 강도윤인지 아니면 반가온인지, 혹은 제3의 존재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조각은 파편화되어 있었고, 문태식의 얼굴에 서린 공포와 결의만이 선명하게 전달될 뿐이었다.
나중에 도윤이가 이걸 보게 되면…… 그래, 차라리 나를 죽이고 싶어 하겠지. 그게 차라리 나아. 진실을 감당하는 것보다는 증오하는 게 쉬우니까.
“……아저씨.”
잔상이 사라졌다.
현실의 창고는 여전히 차갑고 어두웠다. 하지만 방금 본 잔상 때문인지, 내 손에 들린 출입증이 아까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나를 의심하라는 말은 자백일 수도, 차마 말로 못 한 보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문태식답게 지독하게 불친절했다.
그리고 그 불친절의 대가는 바로 눈앞에서 터졌다.
“으윽……!”
옆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었다. 과부하였다. 이 창고 자체가 거대한 마력 증폭기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윤서하 씨!”
내가 그녀를 부축하려 하자, 창고 천장에 달린 센서들이 일제히 붉은 점멸등을 켜며 우리를 조준했다. 침입자로 간주한 모양이었다. 수천 개의 금속 케이스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비켜요!”
백연이 외치며 카메라를 치켜들었다.
플래시!
강렬한 백색광이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기록자 후보로서 그녀가 쌓아온 ‘관측의 데이터’를 순간적으로 방출하여 시스템의 시야를 교란하는 기술이었다. 센서들이 갈팡질팡하며 초점을 잃었다.
“도윤 씨, 지금이에요! 인증 단말에 대요! 시스템이 재부팅되기 전까진 출입증 권한이 최우선이에요!”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게 함정이라 해도, 여기서 윤서하가 쓰러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문태식의 출입증을 단말기에 완전히 밀착시켰다.
[인증 중…….]
[확인자: 문태식(감식반 B-04 소속)]
[권한 확인: 임시 소유자 반납 및 폐기 권한 승인.]
하지만 예상했던 케이스의 개방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창고 가장 깊숙한 곳, 빽빽하게 들어찬 금속 케이스들 사이로 육중한 소음이 들려왔다. 바닥이 진동하며 벽면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곳엔 우리가 들어온 리프트보다 훨씬 더 좁고 음산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문 위에는 빛바랜 라벨 하나가 붙어 있었다.
[감정소 지하 / 임시 소유자 반납구]
반납구. 그 단어가 주는 섬뜩함에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물건을 반납하는 곳인가, 아니면 ‘임시 소유’되었던 생명을 반납하는 곳인가.
윤서하는 거친 숨을 내쉬며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팔찌는 여전히 불길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집스럽게 문 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가야 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다시 단단해져 있었다.
우리는 홀린 듯 그 어두운 입구로 다가갔다. 안쪽에서는 차가운 냉기와 함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향취가 풍겨 나왔다. 약품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비누 향기. 아주 어릴 적,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의 품에서 났을 법한 그런 냄새였다.
한 걸음.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이려는 찰나, 문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지금까지 들었던 반가온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문태식의 지친 목소리도 아니었다.
조금 더 높고, 맑으며, 어딘가 겁에 질린 듯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형.
나는 우뚝 멈춰 섰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목소리를 안다. 꿈속에서 수백 번은 들었던, 거울을 보며 혼자 중얼거릴 때 들리던 나의 목소리. 아니,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과거였다.
형, 내 이름 아직 갖고 있어?
어둠 속에서 들려온 어린 강도윤의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내 심장에 박혔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가진 이름이 정말 내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빌려온 것인지,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윤서하의 눈동자에 어린 공포와 백연의 경직된 표정. 그리고 내 손목에서 미친 듯이 박동하는 맥박.
어둠 너머에서, 무언가 우리를 향해 기어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277화. 임시 소유자 반납구
“형, 내 이름 아직 갖고 있어?”
그 목소리가 고막을 긁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저 환청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가까웠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지독한 한기가 폐부를 찔렀다.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축축하고 무거웠다. 낡은 요양원 복도에서나 날 법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코끝을 아리게 만드는 싸구려 비누 향기가 뒤섞여 있었다.
바닥은 젖은 금속판이었다. 딛을 때마다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났고, 보이지 않는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나는 홀린 듯 그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디려 했다. 저 안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쥐고 있을 것만 같았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어깨가 뒤로 낚여 나갔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손아귀 힘은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아니, 강하다기보다 필사적이었다.
지직, 치지직!
그녀의 손목에 감긴 구속구 팔찌가 과부하로 인해 시뻘건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팔찌에서 튄 불꽃이 그녀의 칼집 끝 금속 접점과 맞물리며 바닥 센서에 불똥을 튕겼다.
“가면 안 돼요. 아직 문태식 씨의 경고가 해결되지 않았잖아요.”
“……서하 씨.”
“이건 함정일 수도 있어요. 아니, 함정이어야만 해요. 저 안에서 나는 소리는 정상이 아니라고요.”
윤서하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문태식을 향한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공포가 들어찬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막아서며 검자루를 꽉 쥐었다. 하지만 그녀조차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발을 들인 이상,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을.
“저기, 이거 좀 봐요.”
백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는 문틀 옆에 붙은 낡은 라벨지를 카메라 렌즈로 확대하고 있었다.
[분류 코드: AG-702]
[용도: 임시 소유자 반납구]
[주의: 반납 절차 미이행 시, 개체 간의 소유권 전이 발생 가능. 기억 및 자아 데이터 소실 주의.]
“물건을 반납하는 곳이 아니에요.”
백연의 손가락이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통로의 단면들이 잔상처럼 박혔다.
“이름, 소유권, 그리고 기억……. 이건 사람을 데이터 취급해서 되돌려 놓는 공정이에요. 감정소 지하라더니, 여기 사실은 공장이었나요?”
백연의 말이 맞았다. 열린 문 안쪽은 감정소의 지하 시설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낡은 감식반 보관실의 철제 선반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로 아이들의 키 높이에 맞춰진 손자국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곰팡이 핀 아이용 담요가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었고, 바닥에는 헌터협회 마크가 찍힌 소독제 통들이 나뒹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잔향청취가 멋대로 발동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해지더니, 두 아이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야, 이거 네 이름이야?
몰라. 아저씨가 일단 이거 달고 있으래.
와, 이름 되게 무겁다. 세 글자나 되네.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한 아이는 조금 겁에 질린 듯했고, 다른 아이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형, 내 이름은 너무 무거우니까 잠깐만 빌리자. 나중에 내가 힘세지면 그때 돌려줘.
이름도 빌려주는 거야?
그럼. 근데 보증금도 안 받았으면 형은 사기당한 거지. 나중에 내가 이자까지 쳐서 갚을게.
반가온의 말투였다. 지금의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앳된 목소리였지만, 특유의 빈정거리는 농담조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농담 끝에 매달린 떨림은 숨길 수 없었다.
이름을 빌려준다니. 애들 소꿉장난 같은 말인데, 이곳에서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름 빌려주는 데 보증금도 안 받다니, 확실히 그놈답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으니까.
“강도윤 씨, 방금 뭐라고…….”
“아뇨, 그냥 아는 놈 목소리가 들려서요. 아주 질 나쁜 사기꾼 놈 목소리가.”
그때였다. 다시 그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저씨는 문을 닫았고, 형은 내 이름을 들고 나갔어. 그래서 나는 여기서 계속 기다렸는데.”
목소리는 통로 깊숙한 곳, 어둠이 가장 짙게 깔린 곳에서 들려왔다. 윤서하가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문태식 씨를 말하는 건가요? 문을 닫았다니, 그게 무슨…….”
“말 그대로겠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이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는 뜻이거나.”
내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태식은 보호자였나, 아니면 이 끔찍한 공정의 공범이었나. 출입증 뒷면에 남긴 ‘나를 의심하라’는 말은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잠시만요. 다들 움직이지 마세요.”
백연이 갑자기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자신의 카메라 액정 화면을 우리 쪽으로 돌렸다.
“지금 우리 세 명이죠? 도윤 씨, 서하 씨, 그리고 저.”
“그렇죠. 왜요?”
“방금 찍은 사진이에요. 바닥을 봐주세요.”
백연이 화면을 확대했다. 젖은 금속 바닥 위에 남은 발자국들.
윤서하의 전투화 자국, 나의 운동화 자국, 그리고 백연의 단화 자국이 선명했다.
그런데 그 세 명의 발자국 사이로, 또 하나의 흔적이 있었다.
작고, 뭉툭한 형태.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의 아이 발자국이었다.
발자국은 우리를 앞서가는 게 아니었다.
바로 내 뒤에서, 나를 바짝 뒤쫓고 있었다.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었네요.”
백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코드 B-Y-09가 다시 반응하는지, 그녀의 눈가에 미세한 노이즈가 스쳤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통로의 끝에는 작은 분류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분류함 위에 붙은 라벨은 빛이 바래 있었지만, 내용은 읽을 수 있었다.
[반납 실패 / 소유자 항목 잔류 / 이름 회수 대기]
서랍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먼지 쌓인 이름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깨끗했다. 정갈한 글씨로 적힌 세 글자.
[강도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다른 이름표.
앞면은 무언가로 날카롭게 긁혀 있어 이름을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 증오를 담아 지워버린 것처럼 처참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훼손된 이름표를 뒤집었다.
뒷면에는 삐뚤빼뚤한 손글씨로 단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가온]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왜 여기에 ‘반납 실패’ 상태로 남아 있는 거지?
그럼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이름은 누구의 것인가.
정적을 깨고, 다시 그 어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번에는 잔향이 아니었다. 마치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에 턱을 괴고 속삭이는 것 같은 선명한 감각이었다.
“형, 이번에는 누구 이름으로 살아갈래?”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내 손에 쥐린 두 개의 이름표가, 차가운 금속 바닥 위로 떨어지며 챙그랑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