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191화. 믿지 말라는 아이와 직접 지운 이름
190화. 믿지 말라는 아이
손바닥 위에 놓인 번호표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우산 보관함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겁고, 누군가의 목숨줄이라기엔 너무 가벼운 플라스틱 조각. 그 뒷면에는 정갈하다 못해 서늘한 문태식의 필체가 박혀 있었다.
[도윤아, 네가 데리고 나온 아이를 믿지 마라.]
심장이 엇박자로 뛰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았다. 작은 어깨, 젖은 머리카락, 그리고 필사적으로 소매 아래 감추고 있는 그 가느다란 손목. 아이는 무표정했다. 나를 원망하지도, 그렇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도 않는 눈이다. 그저 거대한 파도 앞에 선 생명체처럼, 자신이 집어삼켜질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초연함만이 감돌았다.
배신감보다 먼저 울컥 치민 것은 억울함이었다. 내가 이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나왔는데. 내 화상 자국이 짓무르고, 윤서하의 존재가 반투명해질 정도로 몰아붙이며 지켜낸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믿지 말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행정 착오가 아닌가.
“……나도.”
아이가 입술을 뗐다. 갈라진 목소리가 잉크 섞인 빗소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나도 날 믿으라고 한 적 없어.”
그건 변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포자기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아이는 한 걸음 물러나 벽에 몸을 붙였다. 벽면에는 여전히 붉은 직인처럼 찍힌 문구가 점멸하고 있었다. [공동 보관 분쟁 당사자: 강도윤 / 윤서하 / ……현]. 이름의 마지막 글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자리가 욱신거릴 때마다 내 팔뚝의 KDW 화상은 타 들어가는 통증을 내뱉었다.
“도윤아, 이거…….”
반가온이 내 손바닥의 번호표에 코를 들이밀었다. 녀석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문태식 아저씨 냄새가 맞아. 잉크 향, 종이 질감, 특유의 결벽증적인 정돈감까지. 그런데 이상해. 그 냄새 밑에…… 아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어. 0층 보관소 깊은 곳에서나 날 법한, 곰팡이와 먼지가 수십 년은 묵은 것 같은 그런 냄새.”
“조작됐다는 거야?”
“아니. 문태식이 쓴 건 맞는데, 그가 직접 들고 있던 종이에 쓴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야. 누군가 보관소에 있던 기록을 꺼내서 그 위에 아저씨의 손을 빌려 쓰게 만들었거나…….”
가온이 말을 흐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타일 너머, 발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끼익, 끼이익. 무거운 구두 굽이 젖은 타일을 짓누르는 소리. 수령인은 아직 우리 머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프링클러에서 떨어지는 검은 물이 바닥에 고여 거울처럼 우리를 비췄다.
“으, 윽…….”
문틈에 끼인 채 반투명해졌던 윤서하가 신음했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푸른 헌터 라인이 과부하 걸린 전등처럼 치익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의식이 돌아오는 모양이었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공동 보관 분쟁]이라는 문구가 그녀의 목을 조르는 밧줄처럼 보였다.
“도윤 씨…… 그 애, 괴롭히지…… 마요…….”
서하가 간신히 내뱉은 말은 시스템 메시지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공동 보관 분쟁 당사자의 발언권이 제한됩니다.]
[신뢰도 검증 단계 진입 중…….]
“서하 씨, 말하지 마요. 일단 거기서 꺼내는 게 먼저니까.”
나는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아이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아이는 여전히 손목을 숨긴 채였다. 나는 억지로 숨을 몰아쉬며 번호표를 꽉 쥐었다. 손바닥의 화상이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지금 당장 이 아이를 추궁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문태식의 경고가 진짜든 가짜든, 지금 내 눈앞에서 떨고 있는 건 살아있는 아이다.
“안 봐.”
내 말에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손목에 뭐가 써 있든, 네 진짜 이름이 뭐든, 지금은 안 봐. 그러니까 그렇게 서 있지 마.”
나는 번호표 0-04를 들어 올렸다. 문태식이 남긴 이 번호가 경고라면, 동시에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이기도 할 터였다. 잔향청취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귀 안쪽에서 이명이 번지며 기계적인 목소리들이 겹쳐 들리기 시작했다.
『보호자 후보 검증 실패……』
『동반자 신뢰도: 계류 중……』
『0층 보관함 04번 열람 권한 일부 승인. 임시 개방을 시도합니다.』
이건 문태식의 목소리도, 시스템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병원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류함이 되어 내뱉는 신음 같았다. 나는 번호표를 병실 한쪽 벽면에 부착된 작은 비상용 보관함 슬롯에 갖다 댔다.
그 순간, 천장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쾅!
타일 하나가 부서지며 검은 우산의 끝부분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젖은 구두 그림자가 벽면을 타고 길게 늘어졌다. 수령인이 내려오려 하고 있었다. 보관물—즉 우리를—직접 수거하기 위해서.
“안 돼!”
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녀석은 내가 번호표를 갖다 댄 보관함을 가리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 문은…… 내가 나온 문이 아니야!”
무슨 소리지? 아이의 목소리에는 명확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번호표가 슬롯에 닿는 순간, 보관함의 문이 아니라 병실의 벽면 자체가 일렁이기 시작했으니까.
벽지가 잉크에 젖은 종이처럼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그 너머로 보인 것은 병실의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철제 선반의 숲. 0층 보관소의 단면이었다.
차갑고 습한 공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수십, 수백 개의 검은 우산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모두 똑같은 모양, 똑같은 색깔. 그리고 선반 위에는 이름표가 달린 팔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마치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한 유기견들의 목줄처럼 처량하게.
나는 본능적으로 그 선반의 한 구석을 보았다. 0-04번 칸.
그곳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끔찍한 것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반의 모서리에 낡은 이름표가 붙었다가 억지로 떼어진 흔적이 있었다. 접착제 자국 위로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
[강도윤]
내 이름이었다.
“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KDW 화상이 있는 손등이 칼로 긋는 듯한 통증에 뒤틀렸다. 동시에 멈춰 있던 문태식의 모니터가 미친 듯이 파형을 그리며 단 한 문장을 출력했다.
『네 이름은 한 번 반송된 적이 있다.』
반송. 내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기억의 파편이 날카롭게 뇌를 찔렀다. 비 오는 복도, 팔찌를 건네주던 아이, 그리고 내 이름을 부르던 누군가의 목소리. 하지만 그 너머를 보려는 순간, 천장이 무너질 듯 진동했다.
수령인의 상체가 천장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 없는 어둠 속에서 서류 뭉치들이 눈송이처럼 떨어졌다. 그 서류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검은 잉크로 변해 윤서하의 발치를 적셨다. 서하의 몸이 다시 투명해지며 벽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윤 씨! 닫아요! 그거 닫아야 해!”
가온이가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붙잡았다.
선택해야 했다. 저 열린 공간 안으로 손을 뻗어 내 이름표의 잔해를 확인하고, 내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당장 저 문을 닫고 수령인의 접근을 막아 서하와 아이를 지킬 것인가.
선반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가 보였다. 거기엔 ‘강도윤’의 폐기 사유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내 잃어버린 시간과, 문태식이 숨기려 했던 진실이 저기 있었다.
하지만.
“……서하 씨!”
나는 선반을 향했던 손을 돌려 번호표를 움켜쥐었다. 기록 따위가 사람보다 무거울 수는 없다. 설령 내가 반송된 물건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옆에서 숨 쉬는 이들은 물건이 아니니까.
나는 번호표를 억지로 꺾어 슬롯에서 뽑아냈다.
철컥!
환상처럼 열렸던 0층 보관소의 풍경이 비명과 함께 닫혔다. 일렁이던 벽면이 다시 딱딱한 콘크리트로 돌아왔고, 천장에서 내려오려던 수령인의 그림자도 썰물처럼 밀려 나갔다. 방 안에는 다시 무거운 정적과, 스프링클러에서 떨어지는 검은 물소리만이 남았다.
“하아, 하아…….”
나는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번호표는 반으로 쪼개져 바닥에 굴러다녔다. 윤서하는 간신히 벽 밖으로 튕겨 나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아이는 구석에서 떨고 있었다.
모든 게 멈춘 것 같았을 때, 내 손바닥 안에 종이 조각 하나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번호표를 뽑는 순간, 보관함 문틈에 끼어 있던 것이 찢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펼쳤다.
[반송 사유: 보호자 서명 불일치]
그 아래, 보호자 서명란이 있었다.
그곳에는 문태식의 정갈한 글씨도, 수령인의 기괴한 문양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건 나의 필체였다.
지금의 내가 쓰는 것보다 조금 더 거칠지만, 분명히 내 손버릇이 고스란히 담긴, 강도윤 나의 서명.
그 서명을 보는 순간, 귓가에 낯선 잔향이 스쳤다.
—도윤아.
그건 내 목소리였다.
수십 년 뒤의 나인지, 혹은 수십 년 전의 나인지 알 수 없는, 하지만 분명한 나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네가 네 이름을 직접 지웠잖아. 기억 안 나?
나는 종이를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구석에 선 아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처음으로 미세한 동질감이 서렸다. 마치, 자신과 똑같은 처지의 괴물을 발견한 것처럼.
191화. 직접 지운 이름
"도윤아. 네가 네 이름을 직접 지웠잖아. 기억 안 나?"
귓가를 맴도는 잔향은 지독할 정도로 내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아니, 그냥 내 목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어릴 적의 미성이나 변조된 기계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입을 열어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질 때의 바로 그 톤으로.
나는 손바닥에 남은 작은 종이 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소름이 돋는 것보다 먼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만약 진짜 내가 나한테 이런 식으로 말한 거라면, 나중에 나 자신이랑 면담 좀 해야겠네.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사람을 이렇게 몰아세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방어기제처럼 내뱉은 농담이었지만, 입안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농담으로라도 넘기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이 기괴한 기록의 늪에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천장에서는 여전히 검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령인이 내려오려던 흔적이자, 0층 보관소의 습기였다. 이상한 점은 내 손바닥 안의 종이 조각이었다. 사방이 젖어 들고 내 셔츠 소매도 축축하게 변해가는데, 이 종이만은 비정상적으로 뽀송뽀송했다. 오히려 검은 물방울이 종이에 튀자 글자가 번지기는커녕, 마치 방금 쓴 것처럼 더욱 진하고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반송 사유: 보호자 서명 불일치]
그 아래 적힌, 내 필체를 빼다 박은 서명이 기분 나쁘게 번뜩였다. 반가온이 내 손목을 잡지 않은 채 고개만 숙여 종이를 살폈다. 녀석의 미간이 평소보다 깊게 패였다.
"이건 단순한 복사본이 아니야. 형, 이건 현재 병원에 존재하는 물건도 아니고 문태식이 개인적으로 숨겨둔 서류도 아니야. 0층 보관소, 그 심장부에 박혀 있어야 할 '반송 기록 원본'의 찢어진 일부야. 이게 왜 형 손바닥에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녀석의 시선이 천장과 종이를 번갈아 훑었다.
"이 종이 자체가 일종의 '열쇠'이자 '미끼'가 된 것 같아. 보관소는 이걸 되찾으려고 할 거야."
"도윤 씨……."
바닥에 쓰러진 윤서하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몸의 절반이 문틀과 벽면의 경계에 걸쳐진 채, 실루엣이 마치 TV 노이즈처럼 지직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헌터 라인이 벽 안쪽으로, 그러니까 0층의 어둠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내 손바닥 위의 종이를 응시했다. S급 수사협조관으로서의 본능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의 초인적인 집중력인지 모를 시선이었다.
"그 서명…… 이상해요. 지금의 도윤 씨 서명 습관이랑은…… 미세하게 달라요. 끝부분을 맺는 필압이…… 훨씬 더 망설임이 없어요. 마치, 자기 이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윤서하의 관찰은 날카로웠다. 내 서명은 평소에 끝을 살짝 올리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종이 위의 서명은 수평으로 길게 뻗어 나가다 단호하게 끊겨 있었다. 내가 썼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가 쓴 것 같은 기묘한 괴리감.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아이가 움찔하며 반응했다. 아이는 '네 이름을 직접 지웠잖아'라는 잔향이 들려온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홀린 듯 입을 열었다.
"그건 지운 게 아니라…… 바꾼 거야."
"뭐?"
내가 되묻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방금 그 말은 아이의 의지가 아니라, 일종의 인과에 의한 누설처럼 들렸다. 하지만 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내 옷자락만 꽉 쥐었다.
종이 조각에서 다시 한번 잔향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하나가 아니었다. 아주 어린아이의 가느다란 숨소리와, 지금의 내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기괴한 이중창이었다.
[보호자 서명 불일치.]
[자기 서명은 보호자 서명으로 인정 불가.]
[이름 변경 요청자와 피보호자 동일 가능성 확인 요망.]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행정 문구 같은 딱딱한 단어들이 쏟아졌지만,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엔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내 이름을 바꾸려 했다고? 그리고 내가 내 자신의 보호자로서 서명을 했다는 건가? 그게 불가능해서 '반송'되었다는 소린가?
"젠장, 행정 절차 복잡한 건 죽어서도 똑같나 보네."
욕지거리를 내뱉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변했다. 수령인이 직접 내려오는 것은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대신 '회수 보류' 상태를 강제로 해제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병실 벽면에 붙어 있던 산소호흡기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금속 질감의 외형이 순식간에 누런 종이 질감으로 변하더니, 이내 낡은 서류철 뭉치로 바뀌어 바닥으로 쏟아졌다.
"……이게 뭐야?"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윤서하의 팔목에 연결되어 있던 전극 패드가 검은 우산의 손잡이로 변했고, 벽면의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은 0-04라는 번호표가 달린 열쇠 고리로 변했다. 현실의 물건들이 0층 보관소의 '소장품'들로 치환되고 있었다.
문제는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윤서하가 기대고 있는 문틀이 거대한 서류 보관함의 칸막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녀 자체가 보관소의 기록물 중 하나로 박제될 판이었다.
"도윤 씨, 저 종이를…… 없애야 해요!"
윤서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게 이 공간을 보관소랑 연결하는 고리예요! 그걸 태우거나 찢어버리면…… 보관소의 간섭이 끊길 거예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종이 조각을 파괴하면 이 기괴한 현상은 멈출 것이다. 수령인의 추적도, 현실의 잠식도 일단은 저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 이름이 왜 반송되었는지, 내가 누구의 이름을 지우거나 바꾸려 했는지에 대한 유일한 단서도 영원히 사라진다.
문태식이 남긴 그 미친 기록의 잔해를 붙잡을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갈등하는 내 눈앞에 반가온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녀석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형, 결정해. 단서 아깝다고 사람을 서류철로 만들 거면, 헌터 때려치우고 보관소 문서 팀에 취직이나 해. 감식반은 살아 있는 걸 기록하는 곳이지, 기록하려고 사람을 죽이는 곳이 아니야."
독설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래, 반가온 말이 맞다. 나는 문서 보관원 따위가 아니다.
하지만 그냥 파괴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내 인생을 뒤흔든 이 미친 시스템에 그냥 당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종이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내 손가락 끝을 살짝 그었다.
"미안하지만, 난 폐기 처분은 전문이 아니라서 말이야."
"형? 뭐 하려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내 피와 마력을 끌어모아 종이 조각의 '보호자 서명란' 위에 거칠게 덧쓰기 시작했다.
[이의 제기]
행정적인 오류라면 행정적으로 맞서주마. 보관소의 규칙이 그렇게 철저하다면, 그 규칙의 틈새를 찔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서명 불일치로 반송되었다면, 당사자가 직접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는 반드시 존재할 터였다.
내 피가 종이에 닿는 순간, 불꽃이 튀는 듯한 통증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으윽!"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목에 새겨진 'KDW'와 '……현'이라는 글자 사이, 텅 비어 있던 공간에 새로운 획 하나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었다.
새로 생긴 획은 '강도윤'의 '강'도 아니었고, '……현'의 일부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제3의 이름을 암시하는 듯한 기묘한 형태를 띠며 앞뒤의 글자들을 강제로 연결하려 들었다.
"아아악!"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공간이 진동했다. 병실을 잠식하던 서류더미와 우산들이 신기루처럼 흔들리더니, 서서히 원래의 병원 비품들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벽으로 빨려 들어가던 윤서하의 푸른 헌터 라인도 고정되었다. 완전히 구출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기록물'로 변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쾅!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아니, 문이 열린 게 아니라 복도의 풍경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원래라면 간호 스테이션이 보여야 할 자리에는, 칠이 벗겨진 낡은 나무 책상 하나와 그 위에 걸린 찌그러진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의 제기 접수 창구]
"……진짜로 생겨버렸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KDW'와 그 뒤를 잇는 낯선 획, 그리고 '……현'. 세 단어가 기묘한 균형을 이루며 내 피부 위에 박혀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을 문장이었다.
그때, 꺼져 있던 문태식의 모니터가 지직거리며 다시 켜졌다.
이번에는 파형이 나를 향하지 않았다. 모니터 앞에 얼어붙어 있는 작은 아이를 향해, 푸른빛의 문장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시스템 메시지: 이의 제기 접수 완료.]
[보호자 대리 서명자 확인: 강도윤]
그리고 그 아래, 방점을 찍듯 단 한 줄의 문구가 붉게 점멸하며 나타났다.
[피보호자(대상자): 강도윤]
나와 아이, 그리고 반가온과 윤서하의 시선이 동시에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보호자가 강도윤인데,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자도 강도윤이라고?
말이 되지 않는 문구였다. 하지만 그 문구가 화면에 새겨지는 순간, 복도의 '접수 창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고, 규칙적인, 종이를 넘기는 듯한 바스락거림을 동반한 발소리였다.
나는 아이를 뒤로 숨기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이제 막, 보관소의 가장 깊고 추악한 행정 절차 안으로 발을 들이민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