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188-189화. 0층에서 온 수령인과 천장 위의 발소리 일러스트

188-189화. 0층에서 온 수령인과 천장 위의 발소리

188화. 0층에서 온 수령인

엘리베이터 상단의 디지털 표시등이 점멸했다. B4, 지하 4층을 가리키던 붉은 숫자가 기괴하게 비틀리더니 선 하나를 지워버렸다. 0. 존재할 리 없는 층수가 전광판에 박혔다. 띵, 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길게 늘어져 마치 누군가의 신음처럼 복도에 퍼졌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온 것은 서늘한 습기였다.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퀴퀴한 향과 장마철 지하 주차장에서나 날 법한 비린 비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박혔다.

엘리베이터 안쪽은 더 이상 우리가 아던 철제 상자가 아니었다. 겹쳐 있었다. 비에 젖은 우산들이 빼곡히 꽂힌 보관함과, 천장까지 서류 뭉치가 쌓인 보관고, 그리고 누군가 급하게 떠난 듯한 아동 보호시설의 긴 복도가 하나의 공간 안에 일그러진 채 밀어 넣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물이 찰랑거렸다.

그 안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오지 마.”

가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녀석은 코를 감싸 쥔 채 뒷걸음질 쳤다. 평소의 독설조차 뱉지 못할 만큼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저거, 지하 냄새가 아냐. 처음 기록된 곳…… 아니, 처음 버려진 곳에서 나는 냄새야. 다 썩어서 형체도 없는 것들이 모여 있다고!”

수령인이라 불릴 만한 형체가 문턱을 넘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검은 우산을 깊게 눌러쓴 탓에 어깨 아래만 보였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코트, 왼쪽 손목에 채워진 하얀 환자 팔찌, 그리고 허리춤에서 달랑거리는 낡은 보호자 호출 벨. 그 모습은 기괴할 정도로 정적이었다.

찰박, 찰박.

수령인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젖은 발자국이 남았다. 아까 전 ‘진짜 보호자’가 남겼던 젖은 흔적 위로 수령인의 발자국이 겹쳐졌다. 어떤 곳에서는 두 발자국이 완전히 일치했고, 어떤 곳에서는 미묘하게 어긋나며 서로를 지워버렸다. 둘은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서로를 쫓는 별개의 망령인가?

“도윤아, 안 돼…….”

문틈 사이에 반쯤 몸이 잠긴 서하 씨가 쥐어짜듯 말했다. 그녀의 팔목 일부에 겨우 색이 돌아왔지만, 여전히 하반신은 컨테이너 해치 안쪽의 어둠에 붙들려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나를 응시했다.

“저 자가 수령 확인을 하게 두지 마. 서명하든, 확인해주든…… 수령 절차가 완료되는 순간, 여긴 더 이상 병원이 아니게 돼. 전부 ‘보관물’로 확정될 거야.”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를 구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 자신조차 문틈이라는 경계선에 걸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였다.

수령인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우산 아래 가려진 시선이 내가 들고 있는 라벨지와 [임시 보관명: 강도윤]이라 적힌 전극 패드를 향했다. 놈의 손이 천천히 내 쪽으로 뻗어왔다. 손가락 끝에는 진득한 물기가 서려 있었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작은 아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평소의 천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아이는 엘리베이터 쪽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어른보다 더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소매 안으로 깊숙이 감추었다. 마치 보여선 안 될 것을 숨기려는 듯한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나는 놈의 허리춤에서 울리는 미세한 진동에 집중했다. 잔향이 들려왔다.

[치익…… 임시 보관물 수령 절차 개시.]

[보관명과 원명 불일치 확인. 보호자 대체 지정 프로세스 가동.]

[주의: 대리 수령 시 반송 불가. 분실 시 보관소 전체 폐기.]

블랙코미디 같은 행정 문구들이 머릿속을 긁어댔다. 강도윤, 강도원.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름들. 수령인은 내 손목을 잡으려 했다. 내 이름을 확인하고, 내가 ‘보관물’인지 ‘수령인’인지 결정하려는 절차였다.

놈의 손이 닿기 직전,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반송 서명권 절반을 치켜들었다. 검은 우산과 아이의 팔찌 직인이 찍힌 그 종이.

내 머릿속에 이 비정상적인 시스템의 허점이 스쳤다. 이건 실무다. 이 괴물들이 따르는 건 논리가 아니라 절차다. 그렇다면 절차를 꼬아버리면 된다.

“수령 확인 안 해.”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소리쳤다. 수령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이건 수령 대상이 아냐. 분실물이다.”

나는 반송 서명권의 검은 직인 위로 내 엄지손가락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서하 씨를 당장 끌어내 구하는 정공법이 아니었다. 놈의 관심을 돌리고 시간을 벌기 위한, 지독히도 비겁하고 실무적인 꼼수였다.

“대리 보호자 후보 강도윤은 이 보관물의 수령을 거부하고, 절차를 ‘분실물 신고’로 전환한다! 보관 명칭 불일치에 따른 사고 접수라고!”

순간,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왼쪽 손목 위로 마치 낙인이 찍히듯 하얀 환자 팔찌의 환영이 떠올랐다. 살갗을 파고드는 그 서늘한 감각 속에 글자들이 명멸했다. ‘강도윤’이 아니었다. 피와 비에 젖어 번진 듯한 글자들 사이로 ‘강……현’ 혹은 ‘……현’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전체 이름은 여전히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성씨와 끝자리만으로도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삐이이이이-.

병실 안에서 정지해 있던 문태식의 모니터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의식 없는 그의 산소호흡기 안으로 커다란 기포가 보글거리며 올라왔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경련하며 침대 시트를 긁었다.

[……수령인은…… 보호자가…… 아니다…….]

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산소호흡기의 잡음과 모니터의 파형을 타고 잔향이 들려왔다. 그것은 경고였다. 저 우산을 든 자는 누군가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지우러 온 것이라는 섬뜩한 확신.

내 꼼수가 통했는지, 수령인은 멈춰 섰다. 뻗었던 손을 거두고 대신 품 안에서 낡은 도장 하나를 꺼냈다.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수령인은 내가 아닌, 서하 씨가 갇힌 문틈으로 다가갔다. 놈은 문틀 한복판에 도장을 찍어버렸다.

[동반 보관 대상]

붉은 글자가 서하 씨의 어깨 위 공중에 박혔다.

“안 돼! 서하 씨!”

내가 달려들려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하며 발생한 강력한 돌풍이 나를 뒤로 밀쳐냈다. 수령인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놈은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서 있던 자리, 0층의 습기가 머물던 바닥에서 무언가 굴러 나왔다.

달그락.

작은 플라스틱 팔찌였다. 병원에서 흔히 쓰는 환자용 팔찌. 하지만 그 위에 적힌 이름은 강도윤도, 강도원도 아니었다.

문태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내 손목에 낙인처럼 찍혔던 그 이름.

[……현]

반쯤 지워진 그 이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 순간, 옆에 서 있던 작은 아이가 내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아이의 눈동자가 기이할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는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내려다보며, 평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낮고 서늘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 이름…… 내 거 아니야. 형.”

아이는 자기 손목을 더 꽉 움켜쥐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0층을 가리키던 숫자가 꺼지고, 복도에는 오직 썩은 종이 냄새와 서하 씨의 낮은 신음만이 남았다.

절차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더 최악의 방향으로 비틀렸을 뿐이다. 나는 내 손목에 남은,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타인의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령인은 아직 이 층을 떠나지 않았다. 발소리가, 천장 위에서 들리고 있었다.

189화. 천장 위의 발소리

쿠웅,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0층이라는, 존재할 수 없는 숫자를 띄웠던 인디케이터의 불빛이 꺼지고 정적이 찾아와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정적 대신 찾아온 것은 기괴한 무게감이었다.

질척, 질척.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워졌다. 수평이 아니라 수직의 방향에서. 낡은 병실 천장 타일 너머, 배관과 전선이 얽혀 있을 그 어두운 틈새에서 누군가 젖은 구두를 신고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 타일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미세하게 휘어지며 먼지를 털어냈다.

툭, 투둑.

천장에 매달린 스프링클러 헤드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맑은 물이 아니었다. 바닥에 닿는 순간 검게 번지는, 잉크처럼 진하고 비릿한 냄새가 섞인 액체였다. 그 차가운 액체가 내 어깨에 떨어지는 순간, 뒷목의 잔털이 곤두섰다.

“……위층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야.”

반가온이 코를 찡그리며 천장을 노려봤다. 녀석의 예민한 후각은 이미 이 이질적인 공간의 본질을 훑고 있었다. 녀석이 짧게 혀를 찼다.

“오래된 분실물 센터 냄새가 나. 먼지 쌓인 서류 더미랑, 주인을 영영 잃어버려서 썩어가는 물건들 특유의 그 역겨운 냄새. 수령인인지 뭔지 하는 그 자식, 위로 올라간 게 아니라 ‘위층’이라는 개념 자체로 옮겨간 모양인데?”

반가온의 독설 섞인 분석은 정확했다. 수령인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0층이라는 행정적 공백 속에서, 그는 이제 우리의 머리 위에서 다음 절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서하 씨!”

나는 문틈에 반쯤 몸이 잠긴 윤서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어깨 근처가 형광등 불빛을 투과하며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수령인이 남기고 간 [동반 보관 대상]이라는 직인이 붉은 낙인처럼 그녀의 가슴팍 위 공중에서 일렁였다.

문틈은 이제 단순한 틈이 아니라 거대한 아가리처럼 변해 그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서하의 손등에서 푸른 헌터 라인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마력이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존재 자체가 ‘분실물’로 처리되어 시스템 속으로 귀속되는 과정이었다.

“도윤…… 씨…….”

그녀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수조 깊은 곳에서 울리는 수중음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희게 일어난 팔찌 자국 위로 ‘……현’이라는 글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두 번째 팔찌. 거기에도 똑같은 이름의 일부가 찍혀 있었다. 나는 옆에 선 작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겁에 질린 채 자신의 양 손목을 등 뒤로 숨기고 있었다.

‘그 이름은 내 거 아니야. 형.’

아이의 낮은 목소리가 뇌리를 찔렀다.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왜 저 수령인이 너와 나를 묶어두려 하는지. 하지만 아이의 눈동자에 맺힌 공포가 너무 깊어, 나는 차마 질문을 뱉지 못하고 갈증 섞인 침만 삼켰다. 지금은 추궁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때, 스프링클러에서 떨어진 검은 물방울이 내 손목의 화상 흉터, KDW라는 이니셜 위로 떨어졌다.

[치익-]

마치 달궈진 철판에 물이 닿는 듯한 환청과 함께 잔향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분실물 신고 접수 완료.]

[소유자 미확인 물품은 동반 보관 대상과 함께 묶음 처리 진행.]

차갑고 기계적인 행정 문구들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차 싶었다. 아까 수령인을 돌려보내기 위해 던진 ‘분실물 신고’라는 꼼수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내가 윤서하를 내 동료로, 혹은 내게 귀속된 존재로 정의하려 했던 시도가 시스템상으로는 ‘소유주가 불분명한 물건들끼리의 묶음 배송’으로 해석되어버린 모양이었다.

“미치겠군. 공무원 놈들이 일 처리를 이딴 식으로 하니까 민원이 끊질 않는 거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주변을 훑었다. 천장 위의 발소리는 이제 규칙적인 박동처럼 변해 병실 전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수령인이 위에서 서류를 넘길 때마다 천장 타일이 들썩였다.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윤서하는 ‘묶음 처리’가 되어 0층의 서류 보관고 어딘가로 영원히 처박힐 것이다.

나는 문태식의 침대 곁으로 달려갔다.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산소호흡기 튜브, 가슴팍에 붙은 전극 패드,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이름 모를 팔찌. 나는 그것들을 한데 모았다.

“강도윤, 뭐 하려는 거야?”

반가온이 당황하며 물었지만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윤서하의 손끝에 남은 희미한 푸른 마력 라인을 붙잡아 문태식의 산소호흡기 튜브에 억지로 감았다. 그리고 내 손목의 팔찌 자국을 전극 패드 위에 짓눌렀다.

현장 감식반 시절, 소유권이 불분명한 마석이나 유물을 압수할 때 쓰던 편법이 있었다. ‘공동 소유권 분쟁’ 상태를 만드는 것이다.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정되지 않았을 때, 제3자가 강력한 연고권을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하면 해당 물품의 귀속 절차는 즉시 중단된다. 행정적 결론이 날 때까지 그 물건은 ‘동결’ 상태가 된다.

“이건 이제 분실물이 아니야. 소유권 분쟁 대상이지.”

나는 튜브와 패드, 그리고 팔찌를 잇는 마력 회로를 억지로 비틀었다. 헌터로서의 감각과 행정 실무의 꼼수를 한데 섞어, 윤서하의 존재를 문태식의 생명 유지 장치와 내 ‘KDW’ 기록 사이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번쩍!]

강렬한 스파크가 일며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그 짧은 찰나, 내 기억의 저편에 닫혀 있던 문 하나가 거칠게 열렸다.

비가 쏟아지는 병원 복도였다. 아니, 보호시설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색빛 벽지와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 그 복도 끝에서 두 명의 아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아이가 자신의 손목에서 플라스틱 팔찌를 풀러 다른 아이에게 건넸다.

‘이거 하고 있어. 그럼 아무도 널 못 데려가.’

팔찌를 건네받은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팔찌에 새겨진 글자는 선명했다. ‘……현’. 누가 누구에게 팔찌를 준 것인가. 누가 진짜 ‘……현’이고 누가 가짜인가. 기억은 거기서 단절되었고, 다시 현실의 감각이 돌아왔을 때 내 손목의 KDW 화상 자국 위에는 ‘……현’이라는 흔적이 이전보다 훨씬 더 진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커헉!”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에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윤서하를 빨아들이던 문틈의 인력이 멈췄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반투명했지만, 더 이상 깊이 끌려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병실 벽면과 천장, 그리고 문틀에 검은 글자들이 문신처럼 새겨지기 시작했다.

[공동 보관 분쟁 당사자: 강도윤 / 윤서하 / ……현]

이름의 뒷부분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 문구가 뜨는 순간 천장 위의 발소리가 멈췄다. 수령인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한 것일까. 아니면 이 분쟁이 해결될 때까지 ‘위층’에서 지켜보기로 한 것일까.

삑, 삑, 삑-.

정적 속에서 문태식의 모니터 파형이 다시 움직였다. 불규칙한 선들이 모여 점 세 개와 짧은 획 하나를 그려냈다. 그 기하학적인 문양은 놀랍게도 내 손목에 새로 새겨진 ‘……현’의 획 일부와 정확히 겹쳐 보였다. 문태식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내게 경고를 보내는 것인가.

“……일단, 멈췄네.”

반가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하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내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임시방편일 뿐이다. 분쟁 중인 물건은 언제든 압류될 수 있다.

그때였다. 천장의 스프링클러에서 더 이상 검은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달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물체 하나가 내 발치로 떨어졌다.

그것은 낡은 우산 보관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번호표였다. 앞면에는 퇴색된 글씨로 0-04 혹은 0-B4처럼 보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번호표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무심코 번호표를 뒤집은 나는 숨을 멈췄다.

거기엔 조잡한 인쇄 문구 대신, 날카롭고 급하게 휘갈겨 쓴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지독하게 익숙한, 문태식의 필체였다.

단 한 줄의 문장이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도윤아, 네가 데리고 나온 아이를 믿지 마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서 있는 작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손목을 숨긴 채,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 위에서 다시, 아주 작게, 질척이는 발소리가 시작되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