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193화. 이의 제기 접수 창구와 폐쇄 엘리베이터
192화. 이의 제기 접수 창구
[보호자 대리 서명자 확인: 강도윤]
[피보호자(대상자): 강도윤]
문태식의 모니터에 떠오른 글자들은 명백한 오타거나,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농담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뱉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시야가 붉게 번졌지만 모니터 속의 푸른 글자는 망막을 뚫고 들어올 듯 선명했다.
“내가 내 보호자고, 내가 내 피보호자라고? 이봐요, 문 소장님. 이건 가족관계증명서가 아니라 정신과 예약표 같은데.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다는 소립니까?”
입술 끝에서 비죽 터져 나온 농담은 방어기제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을 떨쳐내기 위한 비겁한 발악. 하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좁은 병실 안을 채운 공기는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작은 아이가 그 문구를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아이는 떨리는 눈으로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아이의 작은 손이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아…… 저…….”
아이는 나를 부르려다 입술을 달싹이며 멈췄다. ‘아저씨’라는 호칭이 나오려다 ‘보호자’라는 단어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 것 같았다. 아이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단순히 귀신이나 괴물을 보는 공포가 아니라, 근원적인 질서가 뒤틀린 것을 목격한 자의 절망이었다. 보호자라는 단어가 들릴 때마다 아이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마치 그 단어가 자신을 해칠 날카로운 칼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윤서하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을 옭아맸던 푸른 헌터 라인은 내 이의 제기로 인해 팽팽한 장력을 잃고 늘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벽 안쪽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실처럼 그녀의 사지에 연결되어, 언제든 다시 그녀를 끌고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냉정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창구가 생겼다는 건, 저들이 규정한 절차가 열렸다는 뜻이에요. 함정일 가능성이 높지만…… 절차 안에서는 규칙이 작동하죠. 그게 우리가 살아날 유일한 틈이에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병실 문 밖,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할 복도가 변하고 있었다. 평범한 병원의 타일 바닥은 닳고 닳아 반질반질해진 나무 바닥으로 바뀌었고, 하얀 벽면에는 누렇게 바랜 서류들이 덕지덕지 붙은 낡은 접수대가 솟아올랐다.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냄새가 고약해. 이건 아저씨네 소장님 잉크 냄새가 아냐. 아주 오래된 병원 접수대에서 나는 눅눅한 먼지 냄새, 비에 젖은 우산 천 냄새…… 그리고 어린애들이 차는 플라스틱 손목 밴드 냄새가 섞여 있어.”
반가온의 말이 목 뒤를 서늘하게 긁었다. 여긴 단순한 0층 보관소가 아니었다. 병원 접수대, 협회 서류, 던전 잔해가 한데 눌어붙은 곳. 누가 이런 걸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취향 하나는 최악이었다.
벽 안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이 커졌다. 윤서하의 몸이 다시 한 번 움찔하며 벽 쪽으로 1센티미터쯤 끌려갔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이를 내 등 뒤로 더 깊숙이 숨겼다.
“가온아, 서하 씨 좀 부탁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라인이 더 끌려가지 않게 잡아.”
“알았어. 대신 빨리 해결해. 나 배고프면 예민해지니까.”
반가온이 투덜거리며 윤서하의 곁을 지켰다. 나는 한 걸음씩, 낡은 창구를 향해 발을 뗐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들려와 신경을 긁었다.
접수대 위에는 녹이 슨 호출벨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뻗었다.
땡-
경쾌한 금속음이 울려 퍼져야 할 순간, 내 귀를 때린 것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으아앙! 싫어, 안 갈래!
그것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아주 멀고 먼 과거, 혹은 기억의 심연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듯한 나의 어린 시절 울음소리. 벨을 누른 손가락 끝에서부터 차가운 소름이 돋아 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의 제기 접수하러 왔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창구 안쪽에서 스르륵, 무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빳빳하게 다려진 행정관의 제복을 입고 있었으나, 깃 위로 솟아오른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이름표가 달려 있었지만, 그곳 역시 비어 있었다. 직원의 손에는 검은 우산 손잡이처럼 기괴하게 휜 만년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이의 제기 접수에는 신분 확인이 필요합니다.]
얼굴도 없는 존재가 내뱉는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잔향과 같았다. 감정이 배제된, 기계적이고 서늘한 행정 문구였다.
[본인 확인을 위해 다음 중 하나를 제시하십시오.]
[1. 원래 이름.]
[2. 바뀐 이름.]
[3. 보호자가 지운 이름.]
숨이 막혔다. 세 가지 중 내가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너머의 진실은 안개 속에 가려져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창구 위에 놓인 물건들에 집중했다.
‘잔향청취.’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가장 위험한 독. 나는 호출벨과 낡은 대기표, 그리고 직원이 쥐고 있는 기괴한 만년필에 서린 잔향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시야가 뒤틀리며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도윤이를 살리려면 이름을 잠깐 맡겨야 한다. 이건 버리는 게 아니야. 숨기는 거지.
문태식의 목소리와 닮았지만, 훨씬 더 젊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 뒤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이의 숨소리가 겹쳤다. 겁에 질린, 그러나 필사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
이름만 지우면, 그들이 찾지 못할 거야. 도윤아, 미안하다. 하지만 이게 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 잔향은 배신보다 보호에 가까웠다. 잔인한 보호. 누군가 나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내 이름을 보관소의 어둠 속에 처박아 둔 것 같았다.
잔향이 깊어질수록 내 왼쪽 손목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KDW와 ……현 사이의 공백에 기괴한 빛이 감돌며 새로운 획이 그어지려 꿈틀댔다. 그와 동시에 내 등 뒤에 숨은 아이의 손목에서도 희미한 반응이 일어났다. 아이가 고통스러운 듯 끙 소리를 냈다.
나는 아이의 손목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아이의 유일한 방어선임을 알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의 손목에서 시선을 뗐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잔향의 흐름 속에 떠올랐던 가장 중요한 글자 한 획이 내 시야 밖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심장을 찌르는 듯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신분 확인 실패.]
창구 직원의 목소리가 선고처럼 울렸다.
[제시된 정보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의 제기 기각. 피보호자의 회수를 재개합니다.]
직원이 만년필을 휘두르자, 접수대 서랍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 안에서 검은 연기 같은 손들이 뻗어 나와 바닥에 쓰러진 윤서하의 푸른 라인을 움켜쥐었다.
“아악……!”
윤서하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살짝 뜨며 서랍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반가온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버텼지만, 차원의 무게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강도윤! 내 이름을…… 보증인으로 써요!”
윤서하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내 이름은…… 기록에 확실히 남아 있으니까…… 그걸 담보로 잡으라고!”
나는 직감했다. 그녀의 이름을 쓰는 순간, 윤서하는 이 기괴한 보관소의 시스템에 영원히 귀속될 것이다. 나를 위해 그녀를 제물로 바칠 수는 없었다.
“안 돼.”
나는 창구 앞에 서서 내 손등을 거칠게 그었다. 피가 솟구쳤다. 나는 그 피 묻은 손으로 접수대 위에 놓인 빈 종이를 짓눌렀다.
“내 이름을 한 번 더 걸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이름, 강도윤!”
창구 직원의 고개가 기우뚱하게 기울어졌다.
[‘강도윤’은 등록된 유효 이름이 아닙니다. 원본 기록과의 불일치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럼 임시 접수라도 해! 내가 나인 걸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나는 마력을 폭주시키며 종이 위에 내 의지를 쏟아부었다. 접수처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창구 직원의 만년필 끝이 가늘게 떨렸다.
[……조회 중.]
[현재 사용명 ‘강도윤’을 확인했습니다. 원본명 확인 전까지 효력을 제한하여 임시 접수를 승인합니다.]
서랍 속에서 뻗어 나왔던 검은 손들이 스르르 사라졌다. 윤서하의 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목을 움켜쥐었다. 창구 안쪽에서 덜컹거리며 종이 한 장이 뱉어져 나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임시 접수증을 낚아채듯 집어 들었다.
[대상자: 강도윤]
[대리 보호자: 강도윤]
[증인: 윤서하(미완료)]
[동반 기록물: 이름 미확인 아동]
아이의 이름 칸은 여전히 공백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붉은 인장이 찍힌 문구들이 나타났다.
[원본명 확인 장소 안내]
[장례식장 매점 뒤 폐쇄 엘리베이터 - B4/0층 겹침 구역]
나는 접수증을 꽉 쥐었다. 종이의 질감이 마치 사람의 피부처럼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그때, 접수증 뒷면에서 익숙하고도 서늘한 잔향이 한 줄기 흘러나와 내 고막을 긁었다.
그것은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지독하게 슬프고도 확신에 찬 어조였다.
도윤아, 네가 그 아이를 데려온 게 처음이 아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처음이 아니라고? 나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 이 순환의 고리에 발을 들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소린가.
복도의 불빛이 지지직거리며 꺼져갔다. 낡은 접수 창구의 형상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사라지고, 다시 차가운 병실의 잔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내 손에 쥐어진 축축한 접수증만은 사라지지 않은 채, 우리가 가야 할 다음 지옥을 가리키고 있었다.
193화. 폐쇄 엘리베이터의 버튼
접수 창구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방금까지 내 목을 조여 오던 기괴한 행정 절차의 압박이 사라진 자리엔, 다시 곰팡이 핀 병실의 잔해와 매캐한 먼지 냄새만이 남았다. 손안에는 질감이 기분 나쁘게 미끈거리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임시 접수증]
대상자: 강도윤
대리 보호자: 강도윤
증인: 윤서하(미완료)
동반 기록물: 이름 미확인 아동
확인 장소: 장례식장 매점 뒤 폐쇄 엘리베이터 - B4/0층 겹침 구역
“...장례식장 매점 뒤라니. 병원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거기라는 건 너무 현실 고증이 세잖아. 이왕이면 좀 더 판타지스러운 장소면 안 됐던 건가.”
내 입에서 나온 농담은 바닥에 떨어지는 먼지보다도 힘이 없었다. 방어기제라는 건 가끔 나 자신조차 기만할 정도로 형편없이 작동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지껄이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심박수를 버틸 수가 없었다.
“도윤 씨, 이거….”
윤서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벽면에서 뻗어 나온 푸른 헌터 라인들이 여전히 그녀의 한쪽 어깨와 손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마치 벽 자체가 그녀를 삼키려 드는 거대한 아귀처럼 보였다. 그녀가 움직이려 할 때마다 푸른 줄기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괴한 마찰음을 냈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접수증의 ‘증인: 미완료’라는 문구를 멍하니 응시했다.
“저도… 아직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거네요. 당신을 돕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짐이 된 것 같아요.”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요. 완료되지 않았다는 건, 아직 과정이 남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윤서하조차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면, 이 병원이 요구하는 ‘절차’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걸까.
반가온이 다가와 윤서하의 다른 쪽 팔을 부축했다. 그는 코를 찡긋거리며 내 손의 접수증을 노려보았다.
“냄새가… 고약해요. 형, 이 종이에서 나는 냄새요.”
“뭐라고 하는데?”
“병원 매점 비닐봉지 냄새, 그리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캔커피의 비릿한 금속 냄새가 나요. 그런데 그 밑에… 아주 오래된 엘리베이터 윤활유 냄새가 섞여 있어요. 마치 썩은 기름이 바닥에 고여 있는 것 같은.”
가온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아이 쪽을 힐끗 보았다.
“그리고 이 아이 손목 밴드에서 나던 그 플라스틱 냄새도요. 전부 다 섞여서… 다음으로 가야 할 길을 가리키고 있어요.”
가온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끝, 장례식장 방향이었다.
내 옆에 붙어 있던 아이는 아까 들었던 잔향 때문인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네가 그 아이를 데려온 게 처음이 아니다’라는 문태식의 목소리. 그건 나에게도, 이 아이에게도 지독한 선고처럼 들렸다.
아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엘리베이터를 알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내 시선을 피하며 바닥에 고인 검은 물을 응시했다.
“거기서 버튼을 누르면… 이름이 내려가. 내려가서, 다시는 안 올라와.”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이름이 내려간다는 게 무슨 뜻일까. 삭제된다는 뜻인가, 아니면 어딘가로 보관된다는 뜻인가. 나는 아이에게 더 묻고 싶었지만, 아이의 눈에 서린 공포가 너무 깊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해답이 아니라 이동이었다.
우리는 병실을 나와 장례식장 쪽 복도로 향했다.
기묘한 현상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병원 복도는 겉보기에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깨진 타일도 없고, 깜빡이는 형광등도 평범한 병원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벽에 붙은 안내판들이 우리를 비웃듯 변하기 시작했다.
[소아병동]이라고 적혀 있어야 할 판자가 순간적으로 [보호자 대기실]로 보였다가 사라졌다. [장례식장] 안내 화살표는 [반송물 수령처]로, [매점]은 [임시 이름 보관대]로 글자가 뒤틀리며 명멸했다. 눈을 깜빡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망막에 남은 잔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입원 팔찌와 사망확인서와 매점 영수증이 같은 서랍에 들어가는 곳. 병원이 이렇게까지 행정에 미치면, 차라리 던전이 친절해 보였다.
내 감각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잔향청취가 제멋대로 날뛰며 주변의 사물들이 뱉어내는 소리를 내 귀에 쑤셔 넣었다.
— 끼이익, 덜컹. (복도 끝에 세워진 낡은 휠체어가 굴러가는 소리) “여기는 자리가 없어요. 이름 없는 것들은 서서 기다려야지.”
— 웅, 웅. (전원이 꺼진 자판기 내부의 진동음) “동전 대신 기억을 넣으세요. 반환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소리가 소음이자 농담 같았다. 그러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빛바랜 영수증 한 장에서 선명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검은 우산 1개, 어린이 손목밴드 1개. 이름 임시 보관료 0원. 합계, 당신의 시간 전부.”
나는 멈춰 서서 그 영수증을 짓밟았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이름 임시 보관료가 0원이라니. 공짜보다 무서운 건 세상에 없다. 그 대가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병원은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장례식장 매점 앞에 도착했을 때, 셔터는 굳게 내려가 있었다. 낡은 철제 셔터 틈새로 검은 물이 조금씩 흘러나와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마치 매점 안에서 누군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매점 옆, 직원 전용이라고 적힌 좁은 통로는 원래라면 커다란 수납장에 가로막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접수증을 그쪽으로 가까이 가져가자, 공간이 일그러지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그 끝에 먼지 쌓인 문 하나가 있었고, 그 위엔 조잡하게 휘갈겨 쓴 표지가 붙어 있었다.
[폐쇄 엘리베이터]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당황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버튼이 없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화살표도, 층수를 누르는 판넬도 없었다. 대신 어린아이의 병원 팔찌를 끼워 넣을 수 있는 좁은 홈과, 성인 헌터 등록증을 인식시키는 낡은 판독기만이 벽에 박혀 있었다.
“버튼이 없는데… 어떻게 부르는 거죠?”
가온이 당황하며 판독기를 만져보려 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윤서하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헌터 등록증을 꺼냈다.
“제가 해볼게요. 증인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으니까….”
그녀가 판독기에 카드를 갖다 대었다. 삐익, 하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인식 실패: 증인 상태 미완료. 대상자와의 연결 고리가 부족합니다.]
“...안 돼요. 제가 아직 ‘완전한’ 증인이 아니라서 거부당하는 것 같아요.”
그녀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접수증에 적힌 대로 ‘대상자’인 나와 ‘동반 기록물’인 아이가 동시에 인증을 마쳐야 했다.
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손목에는 여전히 글자들이 새겨진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이는 내가 팔찌를 볼까 봐 두려운 듯 손을 등 뒤로 숨겼다.
나는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을 맞췄다.
“약속할게. 안 봐. 네 이름이 뭔지, 팔찌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절대 안 볼 거야.”
아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저 홈에 팔찌를 넣어야 문이 열려. 그러니까… 내가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네가 직접 저 끝부분만 홈에 밀어 넣어줄 수 있을까?”
나는 정말로 눈을 감았다. 아니, 정확히는 시야를 차단하고 오직 소리에만 집중했다. 아이가 조심스럽게 발을 떼는 소리, 플라스틱 팔찌가 차가운 금속 홈에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작은 마찰음과 함께 내 헌터 등록증도 판독기에 밀어 넣었다.
순간, 병원 전체의 전등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강렬한 스파크가 튀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왔다.
툭, 투둑.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장례식장 입구 쪽에서부터 검은 우산을 접는 소리가 다발적으로 들려오고 있었다. 한 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기록 대리인’들, 혹은 이 병원의 수령인들. 그들은 마치 정해진 배송물을 받으러 온 택배 기사들처럼 기계적이고 서늘한 압박감을 풍기며 거리를 좁혀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직전, 다시 한번 잔향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 “도윤아.”
이번엔 두 개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하나는 내가 아는 현재의 문태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훨씬 젊고 날 선 감각을 지닌 과거의 문태식이었다.
— “내가 못 가면, 네가 데리고 나와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라. 네가 그 이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아이는 다시 시스템에 잡힌다. 기억은 곧 소유니까.”
무슨 소리야. 이름을 알아내야 이 아이를 살릴 수 있는 거 아니었나? 기억하는 게 왜 다시 잡히는 지름길이라는 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질문을 던질 대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치익—!
녹슨 금속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부는 기이할 정도로 넓었다. 안에는 우리가 흔히 아는 숫자 버튼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신 황동으로 만들어진 다섯 개의 낡은 버튼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B4]
[0]
[반송]
[보호자]
[원본명]
네 개의 버튼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가장 아래에 있는 [원본명] 버튼만이 선혈처럼 붉은 빛을 내뿜으며 기분 나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걸… 눌러야 하는 건가요?”
가온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아이와 윤서하도 뒤따라 들어왔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나는 정면에 붙은 엘리베이터 거울 속을 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작은 아이의 모습이 없었다. 거울 속에서 내 손을 잡고 있는 건, 수십 년 전 낡은 옷을 입고 겁에 질려 있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거울 속의 어린 강도윤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이번엔 나를 버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