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255화. 훼손된 명찰의 주인과 지하 1층 우산 보관실 / 우산을 바꿔 놓은 아이와 대리 서명자의 연체료
252화. 훼손된 명찰의 주인
404호 분실물 보관소의 바닥은 차갑다 못해 발목을 베어낼 듯 시렸다. 그 시린 바닥 위로 떨어진 작은 플라스틱 조각 하나. 15년이라는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누렇게 변색되고 모서리가 깨진 명찰이었다.
그 위에는 붉은 잉크가 번진 자국과 무언가로 날카롭게 긁어낸 흔적이 가득했다. 읽을 수 있는 건 오직 끝자리 한 글자뿐이었다.
[…희]
“그건 증거능력이 없는 폐기물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원소유주’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쇳소리를 냈다. 형체 없는 압박감이 방 안을 메웠다. 404호의 원장이라 칭하던 존재도, 검은 우산의 껍데기도 그 목소리 앞에서는 숨을 죽였다.
“절차는 끝났다. 이름 없는 장물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그 쓰레기 조각이 무엇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원소유주의 비웃음이 들리는 찰나, 바닥에 떨어진 명찰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달그락.
그것은 단순한 떨림이 아니었다. 낡은 병원의 젖은 우산꽂이 밑바닥에서 들려오던 금속성 마찰음, 그리고 아이들의 손목에 채워진 신생아 팔찌들이 일제히 조여드는 서늘한 소리가 겹쳐 들렸다. 명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석처럼 주변의 잔향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쓰레기라니. 말이 좀 심하시네.”
나는 명찰을 집어 들며 툭 내뱉었다.
“병원에서 명찰 하나가 얼마나 무서운 건데. 이거 하나 없으면 점심시간에 식당 줄도 못 서고, 보안 구역 통과도 못 합니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영혼은 사원증과 퇴근표에 붙어 있는 법이라고요. 어쩌면 이 명찰 주인이 나중에 내 사원증이랑 같이 유산 상속권이라도 주장할지 모르는데, 함부로 버릴 순 없지.”
농담은 차가운 공기를 뚫지 못하고 흩어졌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내 손가락 끝을 통해 명찰의 차가운 감촉이 타고 올라왔다.
[시스템 오류: 원소유주 자격 검증 수치 하락(99% -> 82%)]
[M-17: 이…의…신…청… 접수 중…….]
[알림: ‘찾아낸 이름표’에는 소유자의 기억을 증언할 ‘매개물’이 필요합니다.]
화면이 지직거리며 깨진 팝업을 띄웠다. 증언자라고? 여기 있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진 놈이 하나라도 있던가.
그때였다.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명찰 근처로 다가왔다.
“아저씨, 이거 냄새가 이상해.”
“장물 냄새냐?”
“아니. 아까 그 검은 우산 아저씨한테서 나던 썩은 냄새가 아니야. 이건… 소독약 냄새 뒤에 숨은 싸구려 딸기우유 냄새야. 그리고 야간 실습복 주머니에 며칠 동안 구겨 넣은 퇴근표 냄새도 나.”
가온의 말에 백연의 하얀 우산이 거칠게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금이 간 우산살이 비명을 질렀다.
“실습생…?”
백연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신생아 팔찌가 살을 파고들 듯 조여졌다. 15년 전, 그 병원의 어두운 복도를 서성거리던 누군가의 실루엣이 그녀의 흐릿한 눈동자에 스쳤다.
“기억나요. 그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어요. 우리를 보러 오던… 아주 젊고, 손이 늘 차가웠던 보조자.”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명찰 끈을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잊은 게 아니었군요. 잊게 된 거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보다 강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존댓말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쥐고 있는 명찰 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길이 치솟을 것 같았다.
“제 기록을 누군가에게 주려 했던 건 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선의를 비틀어 누군가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도구로 쓴 건 당신들이죠. 당신의 기록까지 그자에게 넘기지 마세요, 강도윤 씨.”
검은 우산의 껍데기가 명찰을 보며 기괴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막으려 했던 건지, 아니면 이 순간을 두려워했던 건지 알 수 없는 침묵을 지켰다. 명찰에 적힌 […희]라는 글자가 검은 우산의 말소 행위와 깊게 얽혀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문태식 팀장의 병원 식권을 꺼냈다. 그리고 백연의 금 간 우산살에서 떨어진 조각, 윤서하의 찢어진 명찰 끈을 한데 모았다.
그 순간, 물리적인 연결이 일어났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병원 식권에서 눅눅한 밥 냄새가 풍겼고, 찢어진 명찰 끈은 핏줄처럼 맥동하기 시작했다. 가온이 말한 싸구려 딸기우유 냄새가 404호의 곰팡이 냄새를 덮어버렸다. 물건들이 내는 소리가 하나의 화음을 이루어 내 귀를 때렸다.
이건 설명이 필요한 영역이 아니었다. 15년 전, 이름이 지워진 누군가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명백한 삶의 흔적이었다.
[M-17: 조건 충족. 매개물 연결 완료.]
[분실물 회수 이의신청: 제3 증언자 호출 절차를 개시합니다.]
[경고: 호출을 위해서는 해당 명찰 소유자의 ‘마지막 근무 기록’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근무 기록?”
나는 명찰을 뒤집었다. 앞면의 지워진 이름과는 달리, 뒷면에는 아주 희미한 스티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그 자국을 훑자, 끈적거리는 질감 너머로 각인된 숫자들이 보였다.
[99-02-14 / B1-104]
15년 전 병원의 야간 실습 출근표 번호였다. 그리고 그 번호가 가리키는 장소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404호가 아니었다.
“원장님, 손님맞이 준비는 나중에 하시죠.”
나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퇴근하러 가는 게 아니라, 출근 기록 확인하러 갑니다. 지하로요.”
원소유주의 분노 섞인 포효가 방을 뒤흔들었지만, 이미 바닥의 차가운 물기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404호의 문이 거칠게 열리고,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가 스스로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홀린 듯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낡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가라앉는 기분으로 버튼을 확인했다.
지하 1층. 우산 보관실.
엘리베이터 버튼 위로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맺혔다. 그것은 누군가의 눈물 같기도 했고, 오랫동안 갇혀 있던 이의 마른 침삼킴 같기도 했다.
버튼의 불빛이 붉게 점멸하며 우리는 어둠 밑바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253화. 지하 1층 우산 보관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발바닥이 간지러웠다. 중력의 장난이라기엔 기분 나쁜, 마치 내 발밑의 바닥이 사실은 거대한 혓바닥이고 우리가 그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
숫자판 위로 맺힌 차가운 빗방울이 천천히 아래로 흘러내렸다. [4]에서 [3]으로, 다시 [2]로. 빗방울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빨간 LED 숫자가 노이즈 낀 것처럼 치직거리며 흐릿해졌다. 4층이 죽음(死)의 냄새였다면, 지하는 그 죽음이 썩어 문드러진 뒤에 남은 진득한 찌꺼기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와 축축한 곰팡이, 그리고 던전 심층부에서나 맡아본 비릿한 마력의 잔향이 섞여 콧속을 찔렀다.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내려갈 때마다 내 월세 보증금도 같이 내려가는 기분이네요.”
나는 긴장을 털어내려 툭 내뱉었다. 농담은 훌륭한 방어기제다. 적어도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한 비용으로 평정심을 유지하게 해 주니까.
“우산 보관실이라고 했죠? 적어도 지상의 분실물 센터보다는 습도가 정직하겠네요. 거긴 가식적인 에어컨 바람이라도 나왔는데, 여긴 대놓고 눅눅하니까.”
옆에 선 윤서하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찢어진 명찰 끈을 손가락에 칭칭 감은 채 굳어 있었다. 지하 1층을 가리키는 [B1] 버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기억해 내려’ 애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곳에 존재해야 할 기억이 통째로 파여 나간 ‘공간의 형태’를 더듬으며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챙, 채챙.
백연이 든 하얀 우산이 비틀린 우산살을 드러내며 엘리베이터 내벽을 긁었다. 금이 간 우산살이 비명을 지를 때마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신생아 팔찌가 살을 파고들 듯 조여들었다.
“딸기…… 우유.”
백연이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이 줬어. 손이 아주 차가웠는데, 분홍색 우유를 줬어. 빨대가 자꾸 헛돌아서…… 잘 안 마셔졌어.”
이름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실습생’이라 불리는 누군가의 형상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었다.
띡-.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것은 지독할 정도의 습기, 그리고 낡은 종이 뭉치가 썩어가는 냄새였다.
“단순한 창고가 아니에요.”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앞장섰다.
“병원 냄새가 제일 진한데, 그 뒤에 야간 근무자들이 야식으로 먹던 컵라면 냄새, 그리고 실습복 주머니에 넣어둔 눅눅한 영수증 냄새가 섞여 있어요. 여긴…… 퇴근표를 찍던 곳이에요.”
복도는 어두웠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이미 수명을 다해 깜빡이는 것조차 포기한 상태였다. 가온의 말대로, 그곳은 [B1-104 우산 보관실]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는 실습생들이 머물던 좁은 관리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 양옆으로는 우산꽂이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대충 던져진 투명 비닐 우산들, 누군가의 이름표가 붙은 낡은 접이식 우산들. 그 사이로 물기를 머금지 않은 채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검은 우산 몇 개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다.
내 품 안의 검은 우산 껍데기가 거칠게 진동했다. 이놈은 마치 동족의 장례식장에 온 조문객처럼 불안해 보였다.
[치이익- 지익-]
벽면에 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쇳소리가 섞인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404호 원장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이 건물을 지배하는 원소유주의 의지 같기도 했다.
무단 출입입니다.
해당 구역은 폐기물 보관소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자의 접근은 금지됩니다.
기록…… 기록 없음. 삭제된 구역입니다.
“기록이 없긴 왜 없어. 우리가 지금 그 기록 찾으러 온 건데.”
나는 출근기록기가 놓인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1999년 2월 14일에서 멈춘 벽시계 아래, 먼지 쌓인 기계 하나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시야에 깨진 유리 파편 같은 팝업창들이 떠올랐다.
[시스-템 간섭 발생: B1-104의 규칙이 적용됩니다.]
[분실물 회수 이의신청 절차: ‘마지막 근무 기록’을 대조하십시오.]
[주의: 과거를 불러오는 대가로 현재 인물 중 1인의 ‘기억 기록’이 일시적 담보로 설정됩니다.]
[기록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담보는 소멸됩니다.]
“담보?”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인생에 담보 잡힐 거라곤 대출금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던전에서도 담보를 요구할 줄이야.
“제가 하죠. 내 기억 따위, 던전에 팔아넘겨도 시세가 안 나올 텐데 말입니다.”
내가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차가운 손 하나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아니요, 강도윤 씨. 이건 제 일입니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눈은 평소보다 훨씬 차분했고, 그만큼 단호했다.
“제가 잊게 된 거라면, 찾는 것도 제 몫이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제 기록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윤서하 씨, 이건 농담이 아니에요. 잘못되면 당신 이름조차 기억 못 할 수도 있다고.”
“제 이름은 이미 한 번 지워졌던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녀는 내 말을 자르고 찢어진 명찰 끈을 명찰 조각과 함께 출근기록기 입구에 밀어 넣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 여자는 선의를 위해 자신을 태우는 타입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그 선의를 배신한 누군가에게 지독하게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묵묵히 한 걸음 물러났다. 대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달칵.
윤서하가 명찰과 끈을 출근기록기의 좁은 틈새에 집어넣었다.
순간, 보관실 안의 공기가 급변했다.
코를 찌르는 강렬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말도 안 되게 달콤하고 비릿한 싸구려 딸기우유 냄새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우우우웅-!
복도에 세워져 있던 검은 우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뒤집혔다. 우산 속살이 밖으로 터져 나오며 검은 천들이 박쥐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것은 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억울한 출근 기록들이 토해내는 검은 잉크였다.
끼릭, 끼리릭!
녹슨 출근기록기가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톱니바퀴가 헛돌며 내부에서 종이가 씹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후, 기계의 틈새에서 누렇게 변색된 카드 한 장이 천천히 뱉어졌다.
1999년 2월 14일.
야간 실습 마지막 근무자 명단.
카드에는 실습생의 이름이 찍혀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칼로 긁어낸 듯 글자가 뭉개져 있었다.
[한○희]
성씨와 마지막 이름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글자. 그 아래, 퇴근 도장이 찍혀야 할 자리에는 도장 대신 누군가의 손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것처럼 삐뚤빼뚤하지만, 동시에 윤서하의 필체와 지독하게 닮은 글씨였다. 나는 그 첫 줄을 읽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선생님, 제가 우산을 바꿔 놓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퇴근하세요.>
“……이거, 윤서하 씨 글씨 맞죠?”
내 물음에 윤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손등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빗물, 혹은 눈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기록이 담보로 잡은 것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라, 그녀가 평생 믿어왔던 ‘자신의 선의’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254화. 우산을 바꿔 놓은 아이
“선생님, 제가 우산을 바꿔 놓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퇴근하세요.”
누렇게 변색된 카드 위, 삐뚤삐뚤한 글씨가 내 망막을 긁었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배려가 담긴 문장. 하지만 이 병원의 미친 규칙들과 맞물리는 순간, 그 문장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선고로 변한다.
누군가에게 퇴근하라는 말은 보통 축복이다. 하지만 이 지하 1층, 시간이 멈춘 분실물 보관소에서 ‘퇴근’은 곧 ‘존재의 소멸’이거나 ‘대리인의 양도’를 뜻한다.
“이거…….”
윤서하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떨렸다. 그녀의 시선은 카드 위의 필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15년 전의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자를 적었는지.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경련하며 공중에서 글씨의 궤적을 쫓고 있었다. 근육이 기억하는 습관, 억눌린 무의식이 내뱉는 비명이었다.
“제가…… 쓴 게 맞아요. 이 필압, 이 꺾임…….”
윤서하의 호흡이 짧아졌다. 평소의 차분한 존댓말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문장 사이의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좁았다. 그녀는 자신의 찢어진 명찰 끈이 걸린 출근기록기를 마치 고문 도구라도 되는 양 응시했다.
나는 카드를 집어 들어 출근기록기 상단의 투입구에 올렸다.
덜컥, 철컥!
녹슨 기계음이 지하의 정적을 찢었다. 그와 동시에 B1-104 관리실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면에 걸린 1999년 2월 14일의 시계가 미친 듯이 거꾸로 돌더니,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현재의 풍경 위로 과거의 잔상이 덧씌워졌다.
완벽한 회상은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필름 영사기를 고장 난 형광등 아래에서 돌리는 듯한 불완전한 중첩.
“지직…… 서하야, 우산은 저쪽에 둬야지.”
서늘한 공기 속으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가운데, 달큰하고 저렴한 딸기우유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치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한○희]. 야간 실습생의 복장을 한 그녀는 좁은 관리실 안에서 젖은 투명 비닐 우산들을 하나하나 펼쳐 말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어린아이를 대하는 몸짓만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이름표는 바닥에 두지 마. 잃어버리면 집에 못 가거든.”
한○희가 바닥에 떨어진 훼손된 명찰을 주워 선반 위에 올렸다. 그녀 옆에는 머리 하나가 작은 어린아이가 서 있었다. 어린 시절의 윤서하였다. 아이의 손에는 빨대를 꽂은 딸기우유 팩이 들려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과거의 한○희는 악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지옥 같은 병원에서 아이들을 챙기던 유일한 조력자에 가까웠다. 그녀는 실습생이었고, 아마도 가장 낮은 서열의 소모품이었을 것이다.
장면 속의 어린 서하가 웅얼거렸다.
“선생님, 비가 너무 많이 와요. 선생님 우산은 구멍 났는데.”
“괜찮아. 선생님은 금방 갈 거니까.”
한○희는 웃으며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검은 우산’을 힐끗 보았다. 그 우산은 젖지 않았다. 이 기괴한 공간에서 유일하게 건조한 존재.
병원 관계자들이 퇴근할 때 쓴다는, 혹은 퇴근을 ‘허락’받은 자만이 쥘 수 있는 검은 권력.
장면이 빠르게 감겼다. 한○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린 서하는 딸기우유를 든 채 검은 우산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의 눈에는 선생님의 낡은 투명 우산이 가여웠던 모양이다. 아이는 선생님이 ‘진짜 좋은 우산’을 쓰고 안전하게 집에 가길 바랐다.
서하의 작은 손이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한○희의 이름표가 붙은 투명 비닐 우산을 보관함 구석으로 밀어 넣고, 그 자리에 검은 우산을 갖다 놓았다.
“선생님, 제가 우산을 바꿔 놓았으니 이제 안심하고 퇴근하세요.”
아이의 속삭임이 현재의 관리실에 메아리쳤다. 그 순수한 선의가 기폭제가 되어, 우산 보관소에 늘어선 검은 우산들이 일제히 기괴한 각도로 뒤집히기 시작했다.
후두둑!
천장에서 빗물 대신 검은 액체가 떨어졌다.
[M-17 경고: 기록의 불일치 감지.]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퇴근 승인’이 발생했습니다.]
[매개물: 우산(소유권 전이).]
“아…….”
백연이 신생아 팔찌를 찬 손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 사람이…… 우리를 구하려고 했어요. 서하 언니랑 나를…… 밖으로 내보내려고 자기 식권까지 줬는데…….”
백연의 목소리에 금이 갔다. 한○희는 퇴근하지 못했다. 그녀가 퇴근하기 위해 쥐었어야 할 기록(우산)을, 어린 서하가 선의로 바꿔치기했기 때문이다.
“냄새가 나요.”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검은 우산 하나를 가리켰다.
“이 검은 우산 껍데기에서…… 원소유주 냄새 말고, 다른 게 섞여 있어요. 아주 오래된, 어린아이 손에 묻어 있던 딸기우유 설탕 냄새요.”
가온의 말은 쐐기였다. 어린 서하가 검은 우산을 만진 순간, 그 행위 자체가 기록으로 남았다. 검은 우산은 아이의 선의를 삼키고, 대신 한○희의 퇴근 권한을 강탈해 간 것이다.
나는 혀를 찼다.
“이거 완전 악질적인 약관 위반이네.”
내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 퇴근표 대신 찍어주는 건 봤어도, 병원 시스템이 애들 동심을 이용해서 퇴근 기록을 ‘스틸’하는 건 처음 보는데. 이 정도면 고용노동부가 아니라 퇴마사협회 법무팀을 불러야 할 수준이야.”
농담을 던졌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아이의 선의를 범죄의 절차로 치환해 버리는 병원의 악랄한 설계다.
내 옆의 검은 우산 껍데기가 움찔거렸다. 아까까지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놈은 자신이 대단한 악당인 줄 알았겠지만, 결국 놈도 이 거대한 시스템이 사용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서하 씨, 당신 잘못이 아니야.”
나는 얼어붙은 윤서하의 어깨를 툭 쳤다.
“보험사 약관도 이렇게는 안 짜요. 괄호 치고 작은 글씨로 ‘선의로 우산을 바꿀 시 퇴근 권한은 소멸됨’이라고 적어놓지도 않았잖아? 이건 사기 계약이지, 당신 실수가 아니라고.”
윤서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출근기록기로 향했다.
기계가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카드 뒷면을 토해냈다.
거기에는 한○희의 필체가 아닌, 시스템이 강제로 각인한 듯한 차가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우산을 든 사람은 퇴근하지 않는다. 대신 이름을 맡긴다.>
그리고 그 밑으로, 피처럼 붉은 글자들이 명찰 끈을 타고 흘러나와 시스템 팝업을 띄웠다.
[근무자: 한○희 - 퇴근 미처리(기록 미비)]
[보증인: 윤서하 - 대리 서명자(Proxy Signatory)]
지하 관리실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대리…… 서명자?”
윤서하가 그 단어를 읽는 순간, 그녀의 손목에 묶여 있던 찢어진 명찰 끈이 뱀처럼 살아 움직이며 그녀의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한○희가 퇴근하지 못한 15년치의 연체료를, 이제 대리 서명자인 윤서하에게 청구하겠다는 듯이.
나는 검은 우산의 자루를 꽉 쥐었다. 이 미친 병원의 야근 수당은 목숨으로 지불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내 동료는 연차 대리 결재 같은 거 안 해준다.
“퇴근하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오라고 해.”
나는 출근기록기를 향해 검은 우산을 휘둘렀다.
“우리는 아직 퇴근 시계 안 찍었으니까.”
255화. 대리 서명자의 연체료
깡!
검은 우산의 장대와 녹슨 출근기록기가 충돌하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금속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젖어 있고, 비명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건조한 소음이었다. 기계는 부서지는 대신, 낡은 톱니바퀴를 억지로 굴리며 입을 벌렸다.
그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영수증이 아니었다. 혓바닥처럼 길게 뽑혀 나온 붉은 종이 테이프였다.
[근무자: 한○희 - 퇴근 미처리(기록 미비)]
[경과 시간: 5,475일 14시간 22분]
[연체료 산정 중……]
붉은 종이 위로 ‘한○희’라는 이름이 찍히려다 지지직거리며 잉크가 번졌다. 그리고 그 위를 덧쓰듯, 아주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박히기 시작했다.
[대리 서명자: 윤서하(Proxy Signatory)]
“……아.”
서하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동시에 그녀의 손목을 감고 있던 찢어진 명찰 끈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살점을 파고들었다. 명찰 끈은 단순히 묶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서하의 이름을 혈관에서 직접 뽑아내려는 듯, 피부 아래로 파고들어 붉은 줄기를 만들고 있었다.
“선생님, 제가…… 제가 그때 우산을 안 바꿨으면…….”
“윤서하 씨.”
나는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잘랐다. 서하의 눈에 맺힌 죄책감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나는 검은 우산을 다시 한번 출근기록기 옆구리에 쑤셔 박았다.
“사과할 시간 있으면 이자 계산이나 하세요. 15년 치 퇴근 연체료라니, 이건 사채업자도 혀를 내두를 수준 아닙니까? 우리 병원 복리후생이 쓰레기인 건 알았지만, 이건 거의 장기 기증 서약 수준인데.”
“하지만 저 때문에 한○희 선생님이…….”
“죄책감은 나중에 번호표 뽑고 오세요. 지금은 채권추심부터 막는 게 우선입니다. 서하 씨 이름이 이 종이 쪼가리에 완전히 말소되기 전에 말이죠.”
내 농담이 방어기제라는 걸 그녀도 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억지스러운 냉소라도 없으면, 서하의 영혼이 이 낡은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허공에 M-17의 팝업창이 지지직거리며 떠올랐다. 평소보다 심하게 깨진 글자들이 비문처럼 흩뿌려졌다.
[대리 서명 해제 조건(Partial):]
원근무자(한○희)의 실● 확인.
미처리 퇴근 사유에 대한 직접 증언.
대리 서명자의 자발적 철회 혹은 원근무자의 직● ●수.
“조건이 아주 악랄하네. 본인이 직접 오거나, 우리가 범인을 찾아오라는 거 아냐.”
그때, 옆에서 바닥을 살피던 백연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은 과거의 환영이 남기고 간 잔해들에 머물러 있었다.
“도윤 씨, 여기 보세요. 이건 한○희 씨가 마지막까지 들고 있던 것들이에요.”
백연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으깨진 딸기우유 빨대와 반으로 찢긴 병원 식권, 그리고 금이 간 하얀 우산살이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백연이 조심스럽게 집어 든 하얀 우산살 끝에, 아주 작고 붉은 실밥 하나가 걸려 있었다.
“이건 우산의 부속품이 아니에요. 아주 부드러운 캐시미어나, 가공된 가죽에서 빠져나온 실 같아요.”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녀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딸기우유 설탕 냄새 밑에, 다른 게 있어. 아주 비린 냄새. 그리고…… 가죽 장갑.”
가온의 눈동자가 세로로 찢어졌다.
“이 검은 우산 손잡이에서 났던 냄새랑 똑같아. 그런데 서하 누나 손 냄새는 아냐. 더 크고, 차갑고, 소독약 냄새가 찌든…… 어른의 손.”
가온의 말은 쐐기였다. 서하가 선의로 우산을 바꿔 놓았을 때, 그 검은 우산은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덫’으로 세팅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어린 서하가 우산을 바꾼 행위는 그저 범인이 파놓은 구멍에 마지막 흙을 덮은 꼴밖에 되지 않았다.
내가 쥐고 있는 검은 우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껍데기만 남은 이 불길한 물건이 내 손바닥에 낮은 울림을 전해왔다.
— 나는 처음이 아니었다.
— 그날, 이미 손잡이에는 다른 체온이 있었다.
우산의 불완전한 증언이 머릿속을 긁었다. 이놈도 자기가 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아니면 그저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가.
그때였다. 보관실 벽면에 걸려 있던 수십 개의 검은 우산들이 일제히 ‘탁, 탁’ 소리를 내며 서하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인들이 우산을 들고 그녀를 포위하듯. 서하의 손목에 감긴 명찰 끈이 더욱 팽팽해지며 그녀의 이름을 뜯어내려 했다.
[연체료 청구 강제 집행 시작—]
“집행은 무슨. 아직 근로계약서 확인도 안 끝났어!”
나는 품 안에서 문태식 팀장의 훼손된 명찰과 절반쯤 타버린 병원 식권을 꺼냈다. 문태식, 이 병원의 비리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끝내 방관자가 되었던 자의 잔상. 나는 그것들을 검은 우산 손잡이에 억지로 밀어 넣으며 외쳤다.
“잔향청취(殘響聽取), 강제 개방!”
귀가 찢어질 듯한 고주파음과 함께 공간이 일렁였다. 1999년 2월 14일의 잔향이 현재의 공기와 충돌하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고, 멀리서 신생아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음 너머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하를 원망하는 고함이 아니었다. 아주 차분하고, 어딘가 슬픈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
— 서하야.
서하의 몸이 굳었다.
— 네가 바꾼 건 우산이 아니라 방향이야. 울지 마. 방향을 틀었으면, 끝까지 가야지.
“선생님……?”
서하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목소리는 금세 흩어졌다. ‘방향’이라니. 그게 무슨 뜻일까. 퇴근하는 길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이 병원의 뒤틀린 구조를 말하는 건가.
그 순간, 출근기록기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오래된 우산꽂이 번호판 중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집혔다.
[B1-104-동쪽 통로 / 직원 전용 퇴근문]
그곳은 원래 곰팡이 핀 벽면이어야 했다. 하지만 번호판이 뒤집히자마자 벽면의 페인트가 허물처럼 벗겨지며 좁고 어두운 문 하나가 드러났다.
이상한 점은 그 문 위에 검은 우산 하나가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우산천은 찢어져 너덜거렸고, 그 틈으로 마치 눈동자 같은 안광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문 너머에서, 기계음처럼 건조하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리 서명자 확인.”
동시에 서하의 손목을 죄던 명찰 끈이 문 안쪽으로 무섭게 끌려 들어갔다. 서하의 몸이 문턱을 향해 쏠렸다.
“도윤 씨!”
백연의 외침과 함께 나는 서하의 허리를 낚아채며 검은 우산을 문틈에 끼워 넣었다. 문 너머는 단순한 복도가 아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종이 테이프의 숲, 그리고 그 숲 사이사이에 퇴근하지 못한 수많은 ‘대리 서명자’들의 명찰이 묘비처럼 걸려 있는 광경이 보였다.
나는 문틈을 버티며 이를 악물었다.
“야근 수당도 안 주면서 사람을 가두려고? 이 병원, 노동청에 신고하기 전에 내가 먼저 폐업시켜 주지.”
문 너머의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15년 동안 쌓인 연체료를 받으러 온 집행관의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