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64-267화. 직접 회수와 보호자 한○희 / 1999년의 신생아 침대와 지하 4층 반납 구역 일러스트

264-267화. 직접 회수와 보호자 한○희 / 1999년의 신생아 침대와 지하 4층 반납 구역

264화. 사망 플래그 직접 회수

유리 너머의 풍경은 지나치게 정적이라 오히려 기괴했다. 3번 창구,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이 도장을 쥔 채 굳어 있었다. 그 아래 깔린 영수증에는 내 인생의 잔여 기한이 연체 고지서처럼 박혀 있었다.

[연체 금액: 문태식 잔여 생존일수 0일]

[대체 납부자: 강도윤]

[납부 방식: 사망 플래그 직접 회수]

“이봐요, 보통 대체 납부라고 하면 계좌 번호를 먼저 물어보는 게 상도덕 아닙니까?”

빈정거리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갔다. 공포를 가리는 건 언제나 내 저렴한 유머였다. 하지만 유리 너머의 가죽장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찌지직’ 하는 노이즈와 함께 머리 위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었다.

[대기번호 444: 사망 플래그 직접 회수 절차를 시작합니다.]

쿵. 가죽장갑이 장부 위에 도장을 찍었다. 그 소리는 단순한 문구류의 마찰음이 아니었다. 내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서늘한 예감, 혹은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압축된 파열음이었다.

장갑이 천천히 영수증을 밀어냈다. 유리창 아래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온 종이는 차가웠다.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훅 끼쳐오는 냄새가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딸기우유의 비릿한 단내.

“문 소장님…….”

장부에 적힌 필체는 익숙했다. 협회 감식반 시절, 수당 청구서마다 지겹게 봐왔던 문태식의 악필이었다. 그는 지난 25년 동안 내 대신 이곳에 무언가를 납부해왔다. 식권,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자신의 생존일수까지. 그는 나를 살리기 위해 자기 일상의 조각들을 이 창구에 저당 잡혔던 거다.

손목의 검은 도장이 화끈거렸다. 수납과 엘리베이터 밖에서 들리던 백연의 외침이나 윤서하의 다급한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소음조차 행정적으로 차단된 공간이었다.

‘지잉-’

창구 안내음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장갑이 펜을 들어 장부의 빈칸을 가리켰다. ‘회수자 서명’란이었다.

“회수가 뭔데요. 내가 뭐, 길거리에 떨어진 죽음이라도 줍고 다녀야 한다는 겁니까? 난 환경미화원이 아니라 현장 정리 헌터인데.”

가죽장갑은 미동도 없었다. 대신 내 손등의 도장이 마치 심장처럼 맥동하며 통증을 뿜어냈다. 으득, 어금니를 깨물며 영수증에 손을 올렸다.

‘잔향청취(殘響聽取).’

귀가 멍해지며 세상의 소리가 뒤집혔다. 창구의 적막함은 사라지고, 폭풍우 치는 밤의 소음이 고막을 두드렸다.

—이걸로 한 달 더 연장해 주시오.

—[승인 거절. 강도윤의 사망 플래그 농도가 임계점을 넘었습니다.]

—그럼 내 내년치 식권을 다 가져가라고! 그놈한테는 이 비가 내리면 안 된단 말이다!

젊은 날의 문태식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훨씬 힘 있고 거칠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절박함은 지금의 늙은 소장님과 똑같았다.

잔향 속에서 문태식은 검은 가죽장갑과 대치하고 있었다. 창구 너머의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서류 더미와 그림자가 뭉쳐진 듯한 형상이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강도윤의 사망 플래그는 본래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도시 전체에서 수거한 죽음의 징조를 그라는 그릇에 몰아넣은 것입니다. 이 양은 개인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딴 짓을 했는지 알아내면 내가 그놈 모가지를 딸 거니까, 일단 장부나 갱신해!

장면이 일그러지며 파편화되었다. 빗줄기가 보였다. 세 번 접힌 검은 우산의 영수증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누군가 비에 젖지 않은 발자국을 남기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14층 버튼을 누르는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그 손목에 희미하게 남은 이름의 조각.

‘한…… 희.’

마지막 글자는 노이즈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이름이 내 사망 플래그의 원소유주이거나, 혹은 이 비정상적인 ‘할부 계약’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잔향이 끊기며 현실로 돌아왔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켜자 폐부로 차가운 공기가 쏟아졌다.

손바닥 아래 있던 영수증이 타오르듯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검은 우산의 환영이 맺혔다. 아니, 환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화된 ‘죽음의 징조’였다. 지금까지 내가 피해왔던, 혹은 문태식이 대신 막아줬던 수많은 사고 중 하나가 내 손등 안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손등에 박힌 검은 도장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우산의 잔영을 집어삼켰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통증이었다. 내 몸이라는 장부에 ‘미납된 죽음’ 한 건이 정식으로 기입되는 감각.

하지만 통증의 끝에 기묘한 감각이 뒤따랐다.

항상 나를 짓누르던 막연한 불안감,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그 압도적인 무게감이 아주 미세하게 줄어들었다.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반환 도장의 색깔이 아주 살짝,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옅어져 있었다.

“……아, 이거였나.”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피한다고 능사가 아니었던 거다. 문태식이 25년 동안 필사적으로 뒤로 미뤄왔던 숙제를, 이제는 내가 직접 채점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제대로 회수하면 내 것이 되지만, 회수하지 못하고 터지면 그대로 죽음이다. 이 무슨 악덕 사채업자 같은 시스템이란 말인가.

“야근 확정이네. 수당도 안 나오는데.”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창구 선반을 짚고 일어났다. 가죽장갑은 이미 다음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냉담한 태도였다.

하지만 전광판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빛이 더욱 점멸하며 기계적인 안내음을 내뱉었다.

[회수 대상 01: ‘빗줄기 속의 우산’ 처리 완료.]

[다음 대기자 호출합니다.]

창구의 유리 너머, 전광판의 숫자가 444에서 263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내 심장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263번 고객님. 보호자 한○희 님을 호출합니다. 3번 창구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내 잔향 속에서 들렸던 그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 쪽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혔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비에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든, 아주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265화. 보호자 한○희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기계음이 고요한 14층 수납과에 울려 퍼졌다. 열린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온 건 차가운 냉기와 함께 밀려온 눅눅한 안개였다. 그 뿌연 장막 너머로 검은 우산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빗방울 하나 묻지 않은 매끄러운 검은 천. 그 아래로 보이는 건 단정한 정장 바지와 굽 낮은 구두, 그리고 우산 자루를 쥔 하얀 손가락이었다.

전광판의 글자가 지지직거리며 붉은색으로 점멸했다.

[263번 고객님. 보호자 한○희 님을 호출합니다.]

"도윤아."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안개와 우산 그림자에 가려 이목구비는 희미했다. 병원 천장의 백색광이 간신히 비추는 건 창백한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뿐이었다. 그런데도 심장이 기분 나쁘게 요동쳤다. 왠지 모를 기시감. 기억의 저편, 가장 깊숙이 박혀 있어 차마 꺼내지 못한 서랍 속의 사진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네. 많이 컸어."

말투는 다정했다. 하지만 그 음색에는 기묘한 이질감이 섞여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된 대형 병원의 복도에서 울려 퍼지는, 노이즈 낀 보호자 호출 방송을 듣는 것 같았다. 인간의 온기가 묻어 있지만 동시에 시스템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서늘한 목소리.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보호자? 내 인생에 그런 게 있었나? 보통 내 인생 보호자는 통장 잔고랑 유통기한 안 지난 삼각김밥이 다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당신?"

"서운하게 듣지는 마. 네가 말하는 보호자와 내가 맡은 역할은 조금 다르니까."

그녀—한○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안개가 그녀의 발치에서 파도처럼 갈라졌다.

"여기서 '보호자'란 권리가 아니라 의무야. 사망 플래그라는 거대한 빚을 담는 그릇이 깨지지 않게 관리하는 서명인. 너라는 육체가 반납 절차를 마치기 전에 파손되는 걸 막기 위해 내가 보증을 섰던 것뿐이지."

"보증? 와, 그거 세상에서 제일 하면 안 되는 거라던데. 내 목숨이 무슨 압류 예정인 담보물이라도 돼?"

나는 빈정거렸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이 여자가 내 등에 그 수많은 죽음의 예고장을 처박은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그럼 당신이 원소유주야? 아니면 내 등짝에 이 쓰레기들을 다 몰아넣은 범인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관리인?"

내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유머는 이미 바닥났다. 분노가 농담의 껍질을 뚫고 새어 나왔다. 대답 대신 그녀는 3번 창구 앞에 섰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은 가죽장갑이 움찔거렸다. 장갑은 평소보다 훨씬 고압적인 태도로 깃펜을 고쳐 쥐더니, 신경질적으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한○희는 익숙한 듯 우산을 한쪽 어깨에 기대고 펜을 잡았다.

동시에 내 머리 위 전광판에 새로운 문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확인 중: 보호자 서명 만료 - 갱신 필요]

[경고: 원소유주 기록 일부 훼손 - 복구 불가]

[상태 업데이트: 대리인 문태식 사망 처리 보류]

"문태식……?"

나는 전광판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태식은 죽었다. 내 눈앞에서, 그 지독한 악연의 마침표를 찍으며 분명히 숨이 넘어갔다. 그런데 '사망 처리 보류'라니. 14층의 행정 시스템은 아직 그를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어디쯤에 묶어두고 있다는 소리였다.

한○희가 서류에 서명을 마치고 펜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이 가볍게 접혔다. 툭, 소리와 함께 우산살 안쪽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세 번 정교하게 접힌, 낡은 영수증이었다. 종이의 질감은 빳빳했지만 가장자리는 누렇게 변해 있었다.

영수증에는 단 세 줄의 정보만이 적혀 있었다.

[1999. 02. 14]

[비어 있는 신생아 침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한 아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999년 2월 14일. 내 생일이다. 그리고 '비어 있는 신생아 침대'라는 문구를 보는 순간, 뇌리에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스쳤다.

이건 다음 회수 대상에 대한 힌트였다. 아니, 힌트 정도가 아니라 내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무언가였다.

"이게 뭐야.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나는 참지 못하고 잔향청취를 시도하기 위해 영수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종이에 남은 과거의 소리를, 그날의 진실을 강제로라도 긁어내야 했다. 손끝에서 푸른 불꽃 같은 감각이 일렁이려는 찰나였다.

차가운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한○희였다.

"하지 마."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경고였다.

"이건 네가 가진 수많은 플래그 중 가장 첫 번째이자, 가장 무거운 거야. 지금 네가 이걸 읽어버리면, 14층 수납과는 너를 '회수 대상'으로 간주할 거야. 네가 모은 플래그를 정산하는 게 아니라, 너라는 인간 자체를 수납해버린다는 뜻이지."

"내 생일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내가 태어난 게 아니라, 누가 죽기라도 했나?"

"도윤아, 진실은 가끔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는 뜯지 않는 게 나아."

그녀는 내 손목을 놓으며 다시 우산을 펴들었다. 안개가 다시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갑작스러운 노이즈가 내 귀청을 때렸다.

지지직—!

귓속에 꽂혀 있던 M-17 통신기가 비명을 질렀다. 이 14층에는 신호가 잡히지 않을 텐데, 찢어지는 듯한 잡음 사이로 윤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도윤 씨! 들려요? 제 말 들리냐고요!

"윤서하? 어떻게……."

지금 당장 거기서 떨어져요! 백연 씨가 방금 본부 데이터베이스에서 뭘 찾아냈는데, 말도 안 되는 기록이 있어요. 한○희라는 이름요!

통신기는 터질 듯이 울부짖었다. 한○희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비친 그림자가 묘한 미소를 짓는 것처럼 보였다.

1999년에 사망한 사람이에요! 강도윤 씨 생일에, 그 산부인과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이미 '사망 처리'가 끝난 보호자라고요!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건 사람이 아니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한○희의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다음에 봐, 도윤아.'

쾅-!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14층 수납과에는 다시 지독한 정적과 소독약 냄새만이 남았다. 내 손등에 찍힌 검은 반환 도장이 미친 듯이 박동하며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나는 손에 쥔 영수증을 꽉 쥐었다. 1999년 2월 14일. 내가 태어난 날 죽었다는 나의 보호자.

야근 수당도 안 나오는 이 지옥 같은 회수 작업의 끝에, 결국 내가 수납되어야 할 운명이라면.

"……엿 먹으라고 해."

나는 영수증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일단은 다음 퇴근지를 정해야 했다. 그게 설령 내가 태어난 지옥이라 할지라도.

266화. 1999년의 신생아 침대

지잉, 하는 기분 나쁜 기계음이 텅 빈 수납창구의 정적을 깼다. 3번 창구의 구식 도트 프린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길쭉한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한○희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은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만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물기조차 일반적인 물은 아니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검은 잉크처럼 번지더니 이내 대리석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프린터가 뱉어낸 종이를 낚아챘다. 종이는 갓 뽑아낸 것처럼 뜨거웠고, 손바닥에 닿는 촉감은 종이라기보다 말린 가죽에 가까웠다.

[물품명: 1999. 02. 14. 신생아용 이동식 침대 (부속품 포함)]

[처리 상태: 임시 반출]

[반출 기한: 24:00:00 (카운트다운 시작)]

[특이사항: 기한 내 반납 실패 시, 대리인 문태식의 사망 보류 취소 및 수납 대상자 강도윤의 영구 귀속 처리.]

“영구 귀속? 이거 그냥 여기서 평생 알바 시키겠다는 뜻 아니야?”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24시간. 내 생일의 기원이 담긴 ‘영수증’을 들고 튈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뿐이었다. 창구 너머 전광판에 내 이름과 함께 ‘보호자 서명 만료’라는 붉은 글자가 점멸했다. 마치 더 이상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가 없으니 알아서 살아남으라는 선고 같았다.

“강도윤 씨! 들려요? 응답해!”

인이어 너머로 윤서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직거리는 노이즈가 섞여 있는 걸 보니 이 14층 수납과와 현실 세계의 연결이 아슬아슬한 모양이었다.

“들립니다, 팀장님. 여기 서비스가 좀 엉망이라 늦었습니다. 환불도 안 해주고 자꾸 추가 결제만 요구하네요.”

“농담할 때 아냐. 한○희라는 이름, 방금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확인했어. 1999년 2월 14일, 서울 새봄산부인과 화재 사고 사망자 명단에 있어. 신원 확실해. 당신 보호자라고 주장하던 여자는 25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다. 그 차가운 손과 젖은 우산,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 낯선 눈빛이 산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건 내 잔향청취 능력이 이미 비명을 지르며 알려주고 있었다.

“알아요. 방금 제 눈앞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퇴근하셨거든요. 저도 이제 나갈 겁니다. 여기 공기가 너무 비싸서요.”

나는 ‘임시 반출증’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뒤편에서 3번 창구의 셔터가 내려가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복도가 뒤틀리고 천장의 형광등이 하나둘씩 꺼지며 어둠이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현실의 병원 복도로 튕겨 나오듯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느껴진 건 폐를 찌르는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 윤서하의 거친 숨소리였다.

“하아, 하….”

윤서하는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팀장님, 이거 성희롱인 거 아시죠?”라고 깐족댔겠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그런 시시한 농담을 받아줄 상태가 아니었다.

“몇 분 지났습니까?”

“3분. 네가 14층 구역으로 진입한 지 딱 3분 지났어.”

수납과에서의 체감 시간은 최소 30분은 넘었던 것 같은데, 현실은 고작 3분이라니. 가성비 하나는 끝내주는 지옥이다. 하지만 내 손등은 농담처럼 넘어가 주지 않았다. 검은 도장은 아까보다 훨씬 진해져 있었고,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혈관들이 검게 도드라지고 있었다. 마치 내 몸 자체가 누군가에게 배달되어야 할 소포가 된 기분이었다.

“도윤 씨, 이거 봐.”

언제 왔는지 백연이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그녀의 눈 밑에는 평소보다 더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태블릿 화면에는 누렇게 바랜 신문 기사와 흐릿한 사고 현장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새봄산부인과 화재 사건. 1999년 2월 14일 새벽 2시 발생. 원인 미상의 누전으로 시작된 불이 순식간에 신생아실을 덮쳤어. 당시 사망자 12명, 부상자 30명. 그 명단 속에 한○희 씨가 있어. 당시 산부인과 간호사였지.”

백연의 손가락이 화면을 넘기자, 당시 실종 및 이송 명단이 나타났다.

“이상한 건 이거야. 여기 보이지? ‘미등록 이송 신생아 1명’. 화재 현장에서 구출됐는데 부모가 확인되지 않아서 임시 보호소로 넘겨졌다고 돼 있어. 그리고 이 아이의 임시 팔찌 번호.”

백연이 사진을 확대했다. 그을린 플라스틱 팔찌에 적힌 숫자는 ‘990214-01’. 그리고 그 밑에 적힌 관리 번호의 뒷자리가 내 헌터 등록번호의 앞자리와 완벽하게 일치했다.

“와, 제 생일이 무슨 할인 쿠폰 번호도 아니고 이렇게 딱딱 들어맞네요.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저주라고 해야 하나.”

“둘 다 아니야.”

윤서하가 내 말을 끊으며 차갑게 덧붙였다.

“설계된 거지. 네 삶도, 네 죽음도.”

나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받은 반출증을 꺼내려다 멈췄다. 한○희가 경고했었다. 이 영수증을 직접 읽으면 14층 수납과가 나를 수납해버릴 거라고. 하지만 잔향청취는 직접 읽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영수증 자체를 보는 대신, 백연의 태블릿에 띄워진 당시 사고 기록 로그를 손끝으로 쓸었다.

삐이이이이-.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이 들려왔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25년 전, 불길 속에서 타오르던 비명과 살을 에는 듯한 열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빨리! 엘리베이터 작동 안 해!

안 돼요, 이 애는… 이 애는 내려보내면 안 돼요!

무슨 소리야! 애부터 살려야지!

아뇨, 침대… 침대를 비워야 해요. 그래야 ‘그것’들이 여기 담기죠….

목소리는 찢어지는 고함과 뒤틀린 웃음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잔향 속에서 본 환영은 끔찍했다. 불길이 치솟는 복도, 한 여자가 신생아 침대를 밀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한○희였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홀린 듯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놓인 갓난아이—아마도 나였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침대 위에는 아이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몸 주변으로 검은 연기 같은 것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이의 숨을 들이마시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못한 아이.

한○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아이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정작 자신은 비어 있는, 아니, 검은 ‘사망 플래그’들로 가득 찬 신생아 침대와 함께 닫히는 엘리베이터 속으로 사라졌다.

“허억!”

나는 손을 떼며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도윤 씨! 괜찮아?”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가 본 것을 더듬더듬 설명했다.

“그 아이… 제가 죽어야 했던 게 아니었어요. 그 엘리베이터 안에는 도시 전체에서 수거된 죽음의 징조들, 그러니까 사망 플래그들이 가득 차 있었어요. 누군가 그걸 처리하려고 했고, 제가 그 쓰레기통… 아니, 그릇으로 선택된 겁니다.”

“그릇이라고?”

“네. 그리고 문태식 씨는… 그 현장에 있었어요. 감식반 보조로요. 그는 한○희가 던진 저를 받았던 겁니다. 그 여자가 문태식 씨에게 무슨 협박을 했는지, 아니면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태식 씨는 그때부터 제 대신 그 ‘침대’를 끌고 다녔던 거예요. 25년 동안이나.”

문태식이 왜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았는지, 왜 자기 식권과 기억까지 팔아가며 내 플래그를 막았는지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그는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의무감이었을까. 그는 나를 살린 게 아니라, 나라는 폭탄이 터지지 않게 핀을 붙잡고 있었던 셈이다.

“백연 씨, 새봄산부인과 지금 어떻게 됐죠?”

내 물음에 백연이 자판을 두드렸다.

“폐원됐어. 화재 이후로 재건축 허가가 계속 반려되다가 지금은 그냥 공터로 남아 있어. 서울 외곽의 그린벨트 지역이라 사람도 거의 안 다녀.”

“가야겠네요. 거기 제 ‘신생아 침대’가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윤서하는 두말하지 않고 차 키를 챙겼다. 그녀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이 거대한 음모의 끝을 보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나를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24시간이야. 그 안에 끝내야 해.”

그녀의 말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 마십시오. 제 생일 선물로 지옥행 티켓을 받는 건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적어도 케이크는 먹고 죽어야죠.”

우리는 곧바로 협회 차량에 올라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희의 우산에서 본 그 끈적하고 기분 나쁜 빗줄기였다. 와이퍼가 바쁘게 앞유리를 닦아냈지만,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졌다.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지도로 보면 분명 서울이었지만, 풍경은 수십 년 전에서 멈춘 듯한 폐허였다.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난 공터 중앙에, 뼈대만 남은 낡은 건물이 흉측하게 서 있었다. 새봄산부인과. 한때 생명이 태어나던 곳은 이제 죽음조차 머물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 있었다.

윤서하가 차를 몰고 공터 입구로 들어서려 할 때였다.

“어? 내비게이션이 왜 이래?”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백연이 당황하며 외쳤다. 차량용 내비게이션 화면이 지직거리더니, 갑자기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층수를 표시하기 시작했다.

[현재 위치: 지하 3층 진입 중]

[목적지: 지하 4층 신생아 침대 반납 구역]

“지하 4층? 이 건물, 기록상으로는 지하 2층까지만 있는데?”

윤서하가 브레이크를 밟으려 했지만, 차는 마치 누군가 뒤에서 미는 것처럼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철거된 줄 알았던 지하 주차장 입구가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차단기 앞에 멈춰 서자, 먼지 쌓인 전광판에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보호자 동승 확인.]

[임시 반출 기한 엄수 안내.]

[신생아 침대 반납 구역으로 진입하십시오. 보호자 서명이 지연될 경우, 담보물 강도윤의 즉시 수거가 시작됩니다.]

차단기가 뒤틀린 소리를 내며 위로 올라갔다. 어둠뿐인 지하 통로 너머에서,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잔향이 되어 내 귀를 때렸다. 그것은 생명의 소리가 아니라, 누군가 억지로 녹음해둔 비명처럼 들렸다.

“팀장님, 제 보험 수혜자 아직 문태식 씨로 돼 있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꽉 쥐며 물었다.

“그래. 왜?”

“아뇨, 혹시나 해서요. 제가 거기서 못 나오면, 그 양반 미납된 식권 값이라도 좀 갚아주라고요. 그 사람, 제법 배고프게 살았거든요.”

윤서하는 대답 대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지하 4층의 어둠 속으로, 우리는 25년 전의 지옥으로 다시 한번 발을 들였다. 내 손등의 도장이 마치 심장박동처럼 뜨겁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진짜 수납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267화. 지하 4층 반납 구역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질척였다. 분명히 지상 폐허에는 비가 오지 않았는데,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램프 구간부터는 벽면을 타고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협회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내비게이션의 화살표는 이미 지도 밖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잠시 후 목적지 부근입니다. 신생아 침대 반납 구역으로 진입하십시오.]

차단기가 올라갔다. 녹슨 쇠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지하 4층이라니. 이 건물, 등기부등본에는 지하 2층까지밖에 없었잖아요.”

뒷좌석에서 백연이 태블릿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헌터 생활하면서 별의별 게이트는 다 가봤을 텐데도, 이런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은 결이 다른 공포를 주는 모양이다. 나 역시 핸들을 잡은 손등의 도장이 욱신거려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귀신들이 불법 증축의 달인들이거든요. 세금도 안 내고 공간 확장하는 건 부럽네.”

농담을 던졌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조수석의 윤서하는 이미 칼자루에 손을 얹은 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친 지하 4층의 풍경은 기괴했다.

지상은 25년 전 화재로 뼈대만 남은 폐허인데, 이곳은 달랐다. 1999년의 시간이 그대로 박제된 것 같은 병원 복도가 펼쳐졌다. 하얀 타일 벽, 천장에 달린 구식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신경질적인 소음을 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모든 것이 젖어 있었다.

벽면에는 누군가 젖은 우산을 세워두고 간 것 같은 긴 물자국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고, 바닥에는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건 매캐한 탄내와 소독약, 그리고 오래 젖은 담요에서 나는 눅눅한 악취였다.

차가 멈춰 서자, 대시보드의 내비게이션 화면이 치직거리며 글자를 띄웠다.

[진입 인원 확인 완료.]

[보호자 서명자: 윤서하]

[임시 반출자: 강도윤]

[기록 보조자: 백연]

“보호자?”

윤서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가 내비게이션 화면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강도윤 씨, 이게 무슨 뜻입니까. 왜 내가 보호자로 잡히지?”

“글쎄요. 제가 좀 동안이라 보호자가 필요한 관상이긴 한데. 그쪽이 저보다 연봉도 높고 힘도 세니까 시스템이 알아서 서열 정리를 한 거 아닐까요?”

“농담할 상황 아닙니다.”

윤서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스템이 지정하는 '보호자'라는 단어가 단순히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아니라, 25년 전 한○희라는 간호사가 맡았던 그 역할을 계승하라는 의미라는걸.

나는 애써 서늘해지는 뒷덜미를 무시하며 차 문을 열었다.

“내립시다. 24시간 안에 반납 못 하면 제 목숨이 저쪽으로 영구 귀속된다니까요. 제 인생 서류는 왜 본인 확인보다 반납 확인이 더 빠른지 모르겠네.”

차에서 내리자 발밑에서 물이 튀었다. 웅덩이 속에 비친 내 얼굴 위로 검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복도 끝, '신생아실'이라고 적힌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걸었다. 백연은 덜덜 떨면서도 목에 건 소형 카메라와 기록 장치를 연신 체크하며 내 뒤를 바짝 따랐다.

“도윤 씨, 저기 보세요.”

백연이 가리킨 곳은 복도 한가운데였다.

그곳에 덩그러니 놓인 것. 14층 수납과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델의 이동식 신생아 침대였다. 투명한 플라스틱 바구니 아래에 철제 프레임과 바퀴가 달린, 아주 평범하고도 낡은 물건.

침대 머리맡 이름표에는 내 이름 대신 생소한 번호가 적혀 있었다.

[미등록 이송 990214-01]

그리고 그 아래, '보호자' 칸에 적힌 글자가 기괴하게 일렁이며 변하고 있었다.

[한○희 -> 갱신 대기: 윤서하]

“미치겠군.”

내가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었다. 윤서하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저 침대에 내미는 손길 하나, 서명 하나가 어떤 무게를 지니게 될지.

그때, 벽면에 붙어 있던 낡은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가 갑자기 드르륵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원 연결도 되어 있지 않은 고물이었다.

“히익!”

백연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지만, 이내 직업 정신을 발휘해 출력되는 종이를 낚아챘다.

“이거… 사고 기록이에요. 1999년 당시 현장 진술서 사본 같은데….”

백연이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가 떨렸다.

“진술인 문태식.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간호사 한 씨는 이미 불길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이가 담아버린 걸 죽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애는 잘못이 없다고, 그저 받아냈을 뿐이라고….’”

종이의 뒷부분은 검게 타 들어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문장만으로도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다. 아이가 담아버린 것. 그게 내가 평생 주워 담아야 했던 사망 플래그들을 말하는 걸까.

나는 홀린 듯 신생아 침대로 다가갔다.

“강도윤 씨, 함부로 만지지 마세요!”

윤서하가 제지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손가락 끝이 차가운 침대 프레임에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비틀렸다.

“아악…!”

폭주하는 잔향이 고막을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수천, 수만 명의 아기 울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 울음에는 아이 목소리만 섞여 있지 않았다. 죽음을 앞둔 이들의 비명과 억울함이 응축된, 지독한 소음이었다.

시야가 번쩍이며 1999년 2월 14일의 잔상이 나를 덮쳤다.

불길이 치솟는 신생아실. 복도 끝에서 검은 우산을 든 정체불명의 형체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가 우산을 접을 때마다 검은 연기 같은 플래그 묶음들이 병원 전체로 쏟아져 나갔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희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미친 듯이 신생아 침대들을 끌어모아 그 검은 흐름을 막아세웠다.

‘여기 담겨라. 차라리 여기에….’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플래그들을 빈 침대에 가두려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거대한 검은 줄기 하나가 튀어 올라 유리창 너머의 갓난아기에게 달라붙었다.

그게 나였다.

[990214-01. 수용체 확인.]

시스템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릴 때,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거친 목소리.

‘야! 정신 차려! 정신 안 차려?’

불길을 뚫고 들어온 젊은 문태식이었다. 그는 불타는 천장 잔해를 맨몸으로 막아내며, 검은 기운에 휩싸인 갓난아기—나를 받아냈다.

‘이 애가 살면… 내가 책임진다. 내가 다 낼 테니까, 일단 살리고 봐!’

그건 대리 납부의 시작이었다. 문태식이 내민 그 투박한 손이, 내 25년의 시간을 유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강도윤!”

현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앞의 잔상이 깨지며 검은 액체가 내 팔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침대에서 뿜어져 나온 사망 플래그들이 내 손등의 도장을 매개로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윽, 놔… 이거 놓으라고!”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영구 귀속. 시스템이 나를 이 지하 4층의 일부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때,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내 팔목을 때렸다.

“물러나!”

윤서하가 특수 제작된 헌터용 전기 충격기가 장착된 칼집으로 내 손과 침대 사이의 연결을 물리적으로 끊어버렸다. 지직거리는 불꽃과 함께 검은 줄기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서더니, 내 손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냉정했지만, 나를 붙잡은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보호자 서명 요청. 윤서하 헌터, 대리 납부 계약에 동의하십니까?]

침대 위로 홀로그램 문구가 떠올랐다. 윤서하의 손이 허공의 확인 버튼으로 향하려 했다.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그녀 역시 문태식처럼 자기 인생을 저당 잡히려는 것이다.

“안 돼.”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서명하지 마요. 이거, 당신이 감당할 거 아냐.”

“지금 방법이 없잖아요. 시간은 줄어들고 있고, 당신 도장은 진해지고 있어요.”

“누구한테 또 빚지면서 살 생각 없어요.”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대 이름표를 노려보았다. '미등록 이송 990214-01'. 25년 동안 나를 정의해온 그 비인간적인 번호를.

“반납 안 해. 내가 왜 반납물이야? 난 사람이야. 퇴근하면 맥주 마시고 싶고, 내일 출근하기 싫어서 머리 쥐어뜯는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내가 소리를 지르자, 지하 4층 전체가 부르르 떨렸다. 바닥의 물웅덩이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반납 거부 확인.]

[임시 반출자의 일방적 계약 파기. 비용 산출을 시작합니다.]

“도윤 씨! 저기… 저기 봐요!”

백연이 가리킨 침대 아래 공간에서 새로운 문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음 회수 대상 리스트 공개]

[회수 대상 02: 신생아실 B4 / 미등록 사망자 12명]

[문태식 사망 보류 남은 시간: 01:14:22]

시간이 깎여나가고 있었다. 내가 거부한 대가는 고스란히 문 부장님의 수명과 다른 무고한 영혼들의 회수 통보로 돌아오고 있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나는 결국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존재인가.

그때였다.

반납을 거부하며 발로 차버린 신생아 침대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바닥 타일 틈새에 끼어 있던 무언가가 툭 튀어나왔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러 내 발등에 닿은 것.

먼지 낀 투명한 비닐 팔찌였다. 1999년 당시 병원에서 신생아들의 신원을 식별하기 위해 채워주던 그 조잡한 플라스틱 팔찌.

나는 덜덜 떠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백연이 조명을 비췄다.

거기엔 파란색 펜으로 휘갈겨 쓴 이름이 있었다. 25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검은 물에 젖었음에도 선명하게 읽히는 이름.

내 이름이 아니었다.

[윤서하]

나는 굳어버린 채 내 옆에 선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이 실시간으로 보였다. 그녀의 시선은 내 손바닥 위의 팔찌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윤서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1999년 2월 14일, 새봄산부인과에 있던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지하 4층의 환풍기에서 뒤틀린 웃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이제야 진짜 게임이 시작되었다고 조롱하는 것처럼.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