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62-263화. 보관 만료 통지서와 14층 수납과 일러스트

262-263화. 보관 만료 통지서와 14층 수납과

262화. 보관 만료 통지서

망막을 할퀴던 1999년의 잔상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지독하게 시렸던 병원 복도의 한기가 가시고, 대신 후끈한 열기가 손등에서부터 치솟았다.

“하…….”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오른손등에 찍혔던 검은 도장이 숯불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뜨거운 게 아니다. 피부 아래에 박힌 혈관 하나하나를 검은 잉크로 채워 넣는 듯한 감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압인 흔적만 남아 있던 접수표 뒷면에는, 이제 누군가 방금 적어 넣은 것처럼 선명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회수 사유: 사망 플래그 과잉 보유]

[비고: 폐기 예정 사유 ─ 사망 플래그 회수 실패 시 개체 소멸]

“사망 플래그 과잉 보유라니. 무슨 포인트 적립도 아니고.”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보통 이런 건 10개 모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거나, 야근 5번 하면 하루 휴가를 주는 식이어야 정상 아닌가. 죽음의 징조를 너무 많이 모았으니 이제 그만 인생 퇴근하시라는 통보를 이런 식으로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도윤 씨, 정신 차리세요. 저 보세요.”

서늘하고 단단한 손길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손끝이 내 맥박 위를 예리하게 짚었다. 한 손으로는 내 상태를 살피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허공에 띄워진 M-17의 로그 데이터를 훑어내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기계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맥박 115, 호흡 불규칙. M-17의 동기화율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접수표의 잉크 성분…… 아니, 이건 성분 분석이 안 되는군요. 마력 잔류물이 아니라 ‘기록’ 그 자체가 물리적인 질량을 얻고 있어요.”

“서하 씨, 이거 보관 만료랍니다. 유통기한 지난 우유도 아니고 사람 목숨 가지고 이러기입니까?”

“농담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아직 의식은 명료하시군요. 하지만 웃어넘길 상황은 아닙니다. 도윤 씨 손등의 도장, 그리고 이 접수표. 보관소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반발력과 공명하고 있어요. 문태식 씨의 ‘보관’ 권한이 강제로 해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윤서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지만, 나를 붙잡은 손끝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수사협조관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눈앞에서 증발해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옆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백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창백한 손등을 감싸 쥔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뼛속까지 파고드는 동질적인 통증이었다.

“……아파요.”

백연이 신음하듯 내뱉었다.

“도윤 씨의 도장이 진해질수록, 제 낙인이 반응해요. 이건…… 같은 시스템이에요. 방향만 반대일 뿐이지, 결국 하나의 장부 안에 적힌 글자들이라고요.”

“장부요?”

“제 낙인이 ‘태어나지 못한 것들’을 억지로 이 세상에 붙들어 매는 매듭이라면, 도윤 씨의 도장은 ‘이미 사라졌어야 할 것들’을 원래의 자리로 끌어당기는 자석이에요. 누군가 아주 거대한 시스템을 짜놓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누락된 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거예요. 마치…… 체납된 세금을 징수하듯이요.”

백연의 말은 끔찍할 정도로 논리적이었다. 그동안 내가 겪어온 온갖 ‘사망 플래그’들이 단순한 불운이 아니라면? 거대한 시스템이 보낸 고지서라면? 야근 스탬프처럼 차곡차곡 찍힌 죽음의 징조들이 이제 만료 알림을 울리고 있었다.

“아저씨, 냄새가…… 냄새가 바뀌었어요.”

가온이 내 옷소매를 붙잡으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까 났던 딸기우유랑 식권 냄새가 안 나요. 태식 아저씨 냄새가 밀려나고 있어요. 대신…… 대신 아주 오래된 병원 수납창구에서 나는 잉크 냄새랑, 비 오는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눅눅한 쇠 냄새가 나요. 그리고…… 아주 비싼 가죽장갑 냄새도요.”

가온의 말과 동시에 내 품에 안겨 있던 검은 우산이 묵직해졌다. 빗물에 젖은 것처럼 천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바닥으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잉크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그 액체가 바닥에 닿자마자 기괴한 문자가 되어 흩어졌다.

[M-17 시스템 재분류 중……]

[문서 분류 변경: 1999-0214-B1 → 보관 만료 통지서]

[대리인 문태식: 관리 권한 자동 해제]

[원소유주: 강도윤 ─ 반환 절차 개시]

[안내: 담당 창구는 14층 수납과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합니다.]

치익, 치이익!

복도 끝에서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분명히 이곳은 지하 1층 보관소 복도였다. 복도 끝에는 막다른 벽뿐이어야 했다. 그런데 그 벽면의 타일이 기괴하게 뒤틀리더니, 낡은 황동색 엘리베이터 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층수 표시판의 숫자가 미친 듯이 회전했다.

-1.

그리고 숫자는 멈추지 않고 위로 치솟았다. 1, 2, 3…… 10, 11, 12, 13.

마침내 ‘14’라는 숫자에 불이 들어오자, 맑고 고운 여성의 안내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지나치게 친절해서 오히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였다.

─ 고객님,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보관 기간이 만료되어 수납 절차를 진행해 드립니다. 14층 수납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면 안 됩니다.”

윤서하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이미 권총을 꺼내 엘리베이터 문을 겨누고 있었다.

“저건 정상적인 공간의 연장선이 아니에요. 저 너머로 들어가는 순간, 도윤 씨는 ‘개체’가 아니라 ‘회수 물품’으로 처리될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B1-000 보관소의 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태식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목소리가 남긴 잔향이었다.

“……가라.”

짧고 단호한 목소리.

“거기 가면…… 내 보관 기록이 있다. 네가 왜 ‘보관’되어야 했는지, 그놈들이 무엇을 회수하려 하는지…… 그 기록을 확인해라. 그래야 네 플래그를 네 손으로 꺾을 수 있어.”

“태식 형님?”

내가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문 안쪽은 다시 깊은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보관 권한이 해제되면서 그의 존재도 함께 밀려난 것일까.

나는 엘리베이터와 보관소 문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물러나면 당장은 살 수도 있다. 윤서하 뒤에 숨어 이 기괴한 현상을 피해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손등의 도장은 점점 더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보관 만료 통지서를 무시한다고 빚이 사라지진 않는다. 연체료가 붙어 돌아올 뿐이다.

“아무래도 14층 수납과에 가서 영수증이라도 끊어와야겠는데요.”

나는 짐짓 가벼운 말투로 말하며 검은 우산을 고쳐 쥐었다. 우산 손잡이를 잡은 손바닥에 축축한 감각이 전해졌다.

“도윤 씨!”

“서하 씨, 수사협조관이면 증거물 확보하는 게 우선이잖아요. 태식 형님이 거기 기록이 있다는데, 공무원이 그걸 놓치면 안 되죠.”

“이건 야근 수당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위험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특별 상여금이라도 청구해 보려고요.”

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검은 발자국이 남았다. 14층. 이 건물엔 존재하지도 않는 층수. 1999년의 병원과 현재의 보관소가 뒤섞인 기괴한 공간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아주 천천히,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틈새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바닥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거리며 날아와 내 발등 위에 떨어졌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흔하디흔한 병원 수납창구의 번호표였다. 하지만 그 위에 찍힌 글자들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대기번호: 262]

[호명 대상: 대리인 문태식]

[동반 물품: 강도윤]

263화. 14층 수납과

손바닥에 든 번호표가 차갑다. 종이 쪼가리 주제에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파닥거리는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다. [대기번호: 262]. [호명 대상: 대리인 문태식]. 그리고 그 옆에 붙은 수식어, [동반 물품: 강도윤].

병원비 미납으로 끌려가는 의료기기라도 된 기분이라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내 팔자가 그렇지 뭐. 어디 가서 귀빈 대접 받기는커녕, 죽어서도 재고 정리 대상이 될 판이다.

“강도윤 씨, 혼자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윤서하가 엘리베이터 문턱에 발을 걸치며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냉철한 수사협조관 얼굴은 남아 있었지만, 눈가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명백한 증거물 확보 절차의 연장선입니다. 제가 동행해서 기록의 무결성을 증명해야 해요.”

그녀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천장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울렸다.

― 삑. [비인가 열람자 접근 거부].

“아윽!”

윤서하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뒤로 튕겨 나갔다. 투명한 막이 엘리베이터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결계라기보다, ‘입구 컷’ 당한 클럽의 문지기보다 더 단호하고 사무적인 거절이었다.

“윤서하 씨, 괜찮아요?”

내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내 손등의 검은 도장이 잉크처럼 번지며 뜨거운 통증을 내뱉었다. 백연이 비틀거리며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저도…… 저도 갈 수 있어요. 제 낙인이 이 문 너머의 기운과 공명하고 있어요. 이건 같은 계통의…….”

“안 돼요. 멈춰요.”

내가 그녀의 어깨를 짚어 멈춰 세웠다. 백연의 쇄골 근처에 새겨진 낙인이 검붉게 타오르며 옷감을 태우고 있었다. 내 손등의 도장과 그녀의 낙인이 자석의 같은 극처럼 서로를 밀어내며 끔찍한 불협화음을 냈다.

“가까이 오면 서로 찢어질 겁니다. 백연 씨 낙인은 태어나지 못한 것들을 붙잡는 거고, 이건 이미 죽었어야 할 놈을 수거하려는 거니까. 상성이 최악이라고요.”

“하지만 혼자 가시게 둘 순……!”

“걱정 마세요. 병원 수납하러 가는데 누가 잡아먹겠습니까? 돈 없으면 몸으로 때우는 건 한국 직장인의 기본 소양 아닙니까.”

농담을 던졌지만 입안이 쓰다. 야근 택시비 청구하러 가는 길도 아니고, 내 목숨값 청구서를 받으러 가는 길이니까.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엘리베이터 안쪽 바닥을 가리켰다.

“아저씨, 저기요. 저 구석에 아주 작은 얼룩 하나가 있어요.”

“얼룩?”

“딸기우유 냄새가 나요. 아주아주 오래된, 하지만 잊을 수 없는 냄새요. 문태식 아저씨의 냄새가 저 얼룩을 따라 안쪽으로 이어져 있어요. 14층은…… 병원 냄새가 나는데, 동시에 장례식장 지하 실온실 같은 냄새도 나요. 차갑고, 잉크 냄새가 지독해요.”

가온의 말대로 엘리베이터 바닥 구석에 옅은 분홍색 자국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문태식이 남긴 이정표다. 제 식권은 늘 구겨 들고 다니던 그 무뚝뚝한 아저씨가, 나를 위해서는 이런 치밀한 흔적을 남겼다.

나는 젖은 검은 우산을 고쳐 쥐었다. 문턱을 넘는 순간, 우산의 무게가 돌덩이처럼 무거워졌다. 단순한 우산살이 아니라, 수천 장의 종이를 엮어 만든 장부를 들고 있는 기분이다. 우산 끝부분에서 영수증 조각 같은 얇은 종이들이 삐져나와 복도 바닥을 쓸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서류 처리 금방 하고 올 테니까, 밖에서 주차 대기라도 하고 계세요.”

문이 닫혔다. 윤서하의 절박한 외침이 문틈 사이로 잘려 나갔다.

엘리베이터는 진동도 없이 상승했다. 숫자가 올라가는 대신, 층수 표시판에는 [연체], [압류], [이월], [소멸] 같은 단어들이 어지럽게 명멸했다. 14층에 도달하자, 지나치게 친절한 안내음이 다시 울렸다.

― 14층, 수납과입니다. 대리인께서는 번호표를 지참하시어 해당 창구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이 열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괴할 정도로 평범했다. 대학병원의 야간 수납 창구와 똑같은 모습. 하얀 대리석 바닥, 일렬로 늘어선 의자들, 그리고 유리벽 너머의 창구들. 하지만 불이 꺼진 복도 끝에는 오직 3번 창구만이 형광등을 깜빡이며 빛을 내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대신 전광판에 내 번호가 떴다.

[262번 고객님, 3번 창구로 오십시오.]

나는 홀린 듯 창구로 다가갔다. 유리 너머, 직원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는 검은 가죽장갑 한 짝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사람의 손이 들어있지 않은데도, 장갑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도장을 꽉 쥐고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서 M-17의 상태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알림: 14층 수납과 입장 완료.]

[데이터 동기화 중…… 보관 기록 열람 권한 획득.]

[대리인 문태식(ID: M-T-S) 기록: 미납 및 동결 상태.]

[동반 물품 강도윤(ID: K-D-Y) 상태: 반환 대기 중.]

창구 선반 위에 낡은 장부 한 권이 스르르 펼쳐졌다. 그것은 문태식의 필체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기록을 읽어 내려갔다.

거기엔 내가 모르는 나의 ‘유지비’가 적혀 있었다. 문태식은 나를 단순히 숨겨준 게 아니었다. 헌터 관리국에서 나를 ‘사망 플래그 과잉 보유자’로 분류해 폐기하려 할 때마다, 그는 제 몫의 무언가를 떼어내 수납해 왔다.

[○월 ○일분 납부 내역: 구내식당 식권 20매 분량의 생기(生氣).]

[○월 ○일분 납부 내역: 딸기우유 1팩 분량의 기억 잔상.]

[○월 ○일분 납부 내역: 낡은 근무표 1회분 노동력.]

그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모아, 그는 나의 사망 플래그를 분납하고 있었다. 내가 평범한 헌터로, 아니 평범한 직장인으로 퇴근 후 맥주 한 잔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제 일상을 갈아 넣어 만든 ‘유예’ 덕분이었다.

“……미련하게 진짜.”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자기 생존일수를 깎아 먹으며 내 사망 선고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수납 창구 밑에 떨어진 딸기우유 얼룩은 그가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버티며 지불했던 할부금의 흔적이었다.

그때, 유리 너머의 검은 가죽장갑이 스르르 움직였다.

장갑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도장을 들어 올렸다. 잉크 패드에 도장을 찍는 소리가 고요한 수납과에 천둥처럼 울렸다. 쿵.

장갑이 새 영수증 한 장을 밀어냈다. 유리창 밑 좁은 틈새로 흘러나온 종이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연체 금액: 문태식 잔여 생존일수 0일]

[대체 납부자: 강도윤]

[납부 방식: 사망 플래그 직접 회수]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