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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269화. 윤서하의 팔찌와 이름표를 바꿔야 해 일러스트

268-269화. 윤서하의 팔찌와 이름표를 바꿔야 해

268화. 윤서하의 팔찌

바닥에 떨어진 것은 아주 작고 하찮은 플라스틱 조각이었다. 25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그것은 갓 뽑아낸 것처럼 선명한 흰색을 띠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찌든 물때와 곰팡이 사이에서 혼자만 깨끗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팔찌를 집어 들었다. 신생아용 팔찌. 조그만 아기의 손목을 감쌌을 그 물건 위에는 푸르스름한 잉크로 이름이 박혀 있었다.

[ 윤서하 ]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거기 적힌 글자는 분명 우리 팀장의 이름이었다.

“……팀장님.”

입술이 바짝 말랐다. 나는 팔찌를 든 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평소라면 내 헛소리에 차가운 일침을 날리거나,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이미 칼을 빼 들었을 윤서하가 굳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든 팔찌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의 단단한 눈동자가 아니었다. 미세한 균열이 간 유리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거, 이리 줘.”

윤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 손끝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내 손에서 팔찌를 낚아채듯 가져가려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팔찌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팔찌를 움켜쥔 그녀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1999년 2월 14일.”

나는 팔찌 뒷면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팀장님 생일, 이거 아니지 않아요? 프로필에는 분명 97년생이라고…….”

“아니야.”

윤서하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 못을 박듯 반복했다.

“내 생일은 11월이고, 출생지는 서울이 아니야. 부모님 기록도, 병원 기록도 전부 확인했어. 이건…… 동명이인이거나, 시스템 오류야.”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목소리에는 평소의 확신이 없었다.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허공에 떠 있던 내비게이션 화면이 노이즈를 일으키며 붉게 점멸했다.

[ 알림: 개체 식별 정보 동기화 중…… ]

[ 보호자 후보 ‘윤서하’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

[ 상태: 동시 이송 누락자 -> 회수 대상 보류자 ]

“동시 이송 누락자?”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백연이 비명을 삼키며 되물었다. 그녀는 태블릿 PC를 미친 듯이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만요, 이거 이상해요. 팀장님, 방금 시스템이 팀장님을 ‘보호자’가 아니라 ‘반출물’이랑 같은 카테고리로 묶었어요. 도윤 씨랑 같은…… 그러니까, 25년 전에 여기서 나갔어야 했던 ‘물건’ 취급을 하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윤서하가 차갑게 쏘아붙였지만, 그녀는 팔찌를 쥔 손을 주머니 속으로 감췄다. 아니, 숨겼다는 표현이 더 맞았다. 그녀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주민센터 직원도 이 정도로 출생 기록이 꼬이면 사표 던지고 나갈 판이다. 내 인생은 왜 복사본보다 원본이 먼저 죽는 것도 모자라, 동료의 과거까지 이런 꼴로 만드는 걸까.

“팀장님, 일단 그거 저 줘봐요.”

“강도윤 씨.”

“잔향 좀 들어보게 그래요. 나 이거 전공이잖아요. 억울한 사연 듣고 뒷목 잡는 거.”

나는 짐짓 가벼운 말투로 손을 내밀었다. 농담이라도 섞지 않으면 이 축축하고 불쾌한 공기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윤서하는 한참 동안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거부와 두려움, 그리고 수사관으로서의 본능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에 닿은 팔찌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런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잔향은 뜨거웠다.

나는 눈을 감았다. 굳이 집중하려 애쓰지 않아도, 25년 전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싸구려 플라스틱이 타는 냄새.

덜 마른 잉크의 비린내.

갓 태어난 아이의 배냇저고리에서 날 법한, 옅은 분유 냄새와 피 냄새.

[ ……이 애는 아니야. ]

환청처럼 목소리가 들렸다. 젖은 우산을 든 검은 형체가 신생아실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부식시켰다.

그는 두 개의 침대 앞에 섰다.

하나는 990214-01. 내 이름표가 붙어 있던 침대였다.

그리고 그 옆에, 이름표가 반쯤 찢겨 나간 또 다른 침대가 있었다.

[ 하나는 내보내고, 하나는 남겨라. ]

누군가의 명령이었다. 차갑고 기계적인, 인간의 감정이라고는 섞이지 않은 목소리.

그때 젊은 시절의 문태식이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품에는 이미 포대기에 싸인 내가 안겨 있었다.

[ 문 순경! 미쳤어? 불길이 여기까지 왔다고! ]

뒤따라온 다른 경찰의 외침에도 문태식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름표가 찢긴 두 번째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아주 작은 여자아이가 울지도 못한 채 쌔근거리고 있었다.

[ 둘 다 데리고 나가면 안 돼. 규정이……! ]

[ 규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애들이 죽게 생겼는데! ]

문태식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잔향 속의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 혹은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 ……미안하다. 내가, 내가 다 책임질게. 일단 이 애부터. ]

그가 내 침대를 밀었다. 그리고 두 번째 침대에 누워 있던 아이의 팔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를 뜯어냈다. 아니, 뜯어낸 것이 아니라 ‘바꿨다’.

자신의 기록을 지우고, 타인의 이름을 덧씌우는 행위.

그 팔찌에 적힌 ‘윤서하’라는 이름은 본래 그 아이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서 빼앗아온 이름, 혹은 누군가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이름.

“억……!”

강한 두통과 함께 잔향에서 튕겨 나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차가운 타일 벽에서 검은 물이 배어 나와 내 손등을 적셨다.

“강도윤! 괜찮아?”

백연이 달려와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팔찌를, 아니, 그 너머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팀장님…… 이거, 팀장님 이름이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뜻이지?”

“누군가 이름을 바꿨어요. 25년 전 그 밤에. 팀장님이 진짜 윤서하인지, 아니면 윤서하라는 이름을 대신 쓰고 있는 건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복도의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가 터져 나왔다.

지직, 지지직―!

[ 안내드립니다. ]

[ B4 신생아실, 미등록 사망자 12명의 회수 절차를 개시합니다. ]

[ 현재 반출물 상태: 부적합. ]

벽면에 붙어 있던 낡은 간호사 스테이션의 단말기가 번쩍이며 켜졌다. 도트 프린터가 비명을 지르며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치익, 치익, 치익―.

백연이 얼른 달려가 쏟아지는 종이를 받아냈다.

“이거, 병동 배치도예요! 1999년 당시의…… 어? 잠깐만요.”

백연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들고 있는 종이에는 신생아실의 구조가 그려져 있었지만, 우리가 있는 이곳과는 조금 달랐다.

“지하 4층이 아니에요. 이건 ‘B4’ 구역이라고 되어 있는데…… 층수가 아니라 관리 코드 같아요.”

나는 그녀가 내민 종이를 낚아채듯 살폈다.

Black Umbrella Batch-4.

종이 뒷면에 흐릿하게 찍힌 스탬프 문구였다.

B-04.

심장이 내려앉았다. 헌터 관리국 창고에서 봤던 폐기 장비함 번호, 그리고 내가 처음 각성했을 때 마주했던 장비의 일련번호와 일치했다.

“이 병원 자체가…… 검은 우산의 실험장이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시스템 창이 우리 셋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 선택지 발생 ]

[ 시스템은 등가교환을 원칙으로 합니다. ]

[ 문태식의 ‘대리 납부’ 계약을 종료하기 위해선, 원래의 반출물을 반환해야 합니다. ]

[ 반환 대상 선택: ]

개체 990214-01 (강도윤)

개체 Y-00 (윤서하 - 기록 말소 예정)

[ * 하나를 반납할 시, 문태식의 사망 보류 시간이 24시간 연장됩니다. ]

[ * 남은 시간: 01:03:12 ]

“이런 미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둘 중 하나를 제물로 바치라고? 25년 전에는 문태식이 우리를 빼돌렸으니, 이제는 다시 돌려놓으라는 소리인가.

“도윤 씨, 이거 함정이에요! 선택하면 안 돼요!”

백연이 소리쳤지만, 상황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부터 거대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젖은 담요 냄새가 진동하며,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고막을 찔렀다.

응애, 애애액―!

단순한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원망과 굶주림, 차가운 물속에서 숨이 끊어져 간 이들의 비명이었다. 미등록 사망자 12명. 그들의 잔향이 실체화되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팀장님, 정신 차려요!”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윤서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찌가 채워져 있던 자리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낮게 읊조렸다.

“내가 만약…… 그들이 찾는 ‘물건’이라면.”

“헛소리하지 마요! 팀장님이 무슨 물건이에요? 나보다 훨씬 잘 싸우고 성격도 더러운 사람인데!”

“나는 기억이 없어.”

그녀가 나를 보았다. 그 눈에는 난생처음 보는 나약함이 서려 있었다.

“내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은 전부 안개 속이야. 부모님도, 집도…… 내가 윤서하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이 팔찌 하나에 흔들리고 있어.”

그녀는 칼집을 고쳐 쥐었다. 너클 부분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네가 갈 필요 없어. 원래 여기 있어야 했던 게 나라면, 내가 남겠어.”

“무슨 주인공 병 걸렸어요? 팀장님 없으면 나랑 백연 씨는 여기서 어떻게 나가라고!”

나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인생은 늘 이 모양이다. 남의 빚이나 대신 갚고, 남의 사망 플래그나 대신 줍고 다니는 팔자.

“선택지 따위 안 골라요. 난 이거 다 부숴버릴 거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연장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내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철컥.

복도 끝, 굳게 닫혀 있던 ‘신생아실 B4’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서 차가운 냉기와 함께 하얀 김이 쏟아져 나왔다.

열두 개의 빈 신생아 침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든 침대는 비어 있었지만, 오직 두 개의 침대 위에만 낡은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강도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윤서하(말소 예정).

그 침대 사이, 어둠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검은 제복을 입은, 지금보다 훨씬 젊고 꼿꼿한 체격의 남자. 하지만 그의 어깨는 짐을 짊어진 듯 무겁게 처져 있었다.

[ 둘 다 데리고 나가면 안 돼. ]

젊은 문태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우리가 있는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빈 침대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하나를 데려가면,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게 이 병원의 법칙이야.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은 수만 번의 죄책감을 덧칠한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 도윤아. 그리고…… 서하야. ]

그가 우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내비게이션의 남은 시간이 미친 듯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 00:59:59 ]

[ 00:45:12 ]

[ 00:12:05 ]

“시간이 왜 이래!”

백연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시스템이 강제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었다.

“둘 다 데리고 나갈 거야.”

윤서하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녀의 목소리에서 다시 차가운 날이 섰다.

“문태식 경감님도, 강도윤도, 그리고 나도. 누구 하나 여기 남겨두지 않아.”

하지만 그녀의 발치가 검은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침대 밑에서 수십 개의 작은 손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 가디마…… 혼자 가디마…… ]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우리를 덮쳤다.

나는 윤서하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윤서하의 팔찌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진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고 들렸다.

문태식의 목소리가 아닌, 아주 익숙하고도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 서하야, 이름표를 바꿔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

그것은 한○희의 목소리였다.

나를 밖으로 던진 여자이자, 25년 전 이 지옥의 법칙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의 마지막 속삭임이었다.

269화. 이름표를 바꿔야 해

지지직, 비릿한 노이즈와 함께 고막을 긁는 목소리가 신생아실 전체로 퍼졌다. 젖은 담요를 수십 겹 겹쳐놓은 것처럼 무겁고 축축한 음성. 한○희의 잔향이었다.

“서하야, 이름표를 바꿔야 해. 그래야 네가 살아.”

그건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25년 전, 이 지옥 같은 병동의 어느 구석에서 절박하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누군가에게, 혹은 ‘윤서하’라는 이름표를 달아야만 했던 그 작은 생명에게 건네는 유언이자 주문이었다.

발밑에서 솟구친 검은 물이 내 구두 굽을 삼키고 윤서하의 발목을 휘감았다.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작은 손들이 그녀의 전투화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졌다.

“……이거 좀 놓지?”

윤서하가 이를 악물며 다리를 휘저었다. 하지만 손들은 마치 껌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저 손들이 내뱉는 ‘기록되지 못한 슬픔’에 압도당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나는 얼른 허리를 숙여 그녀의 발목을 붙잡은 손가락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갓 인쇄된 신문지에서 날 법한 진한 잉크 냄새가 훅 끼쳐왔다.

“야, 너희들. 이 누나 지금 바쁘거든? 이름표 바꾸라는 말 못 들었어? 행정 착오면 민원실 가서 따져야지, 왜 애꿎은 현장 공무원 발목을 잡아!”

방어기제처럼 튀어나오는 농담에 윤서하가 나를 쓱 내려다봤다.

“강도윤 씨, 지금 농담이 나와요?”

“안 하면 심장마비 걸릴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리고 얘들, 나쁜 의도로 잡는 게 아니에요. 그냥…… 자기들도 데려가 달라는 것 같아서.”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아이들의 잔향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추워요.]

[내 이름은 어디 있어요?]

[엄마가 나중에 온댔는데.]

억울하게 지워진 열두 명의 기록. 그 무게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나는 서하의 발목을 옥죄던 마지막 손을 떼어내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공중에 떠 있는 홀로그램 시스템 창은 여전히 붉게 점멸하며 우리를 다그치고 있었다.

[개체 990214-01 (강도윤) 또는 개체 Y-00 (윤서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반납 시 문태식의 사망 보류 시간이 24시간 연장됩니다.]

“미친 시스템 같으니라고. 사후세계 행정 처리를 어디 외주라도 줬나? 출생신고가 이따위 호러면 민원창구에 성수라도 뿌려야 한다고요.”

나는 빈정거리며 시스템 창을 노려봤다. 윤서하는 칼집을 꽉 쥔 채, 선택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누굴 고를지 고민 안 해. 저딴 버튼을 만든 놈을 찾아서 시스템 자체를 부숴버리면 끝이니까.”

“말은 참 쉽죠. 저게 물리 타격으로 부서지는 물건이면 내가 벌써 발로 찼을 텐데.”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연이었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어깨를 들썩이면서도, 아까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챙겨온 젖은 병동 배치도와 도트 출력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있었다.

“저, 저기…… 이거 보세요! 휴대용 핫팩으로 대충 말렸는데, 뒷면에 뭐가 보여요.”

백연이 스캐너 전용 라이트를 비추자, 잉크가 번진 도트 출력지 뒷면에서 숨겨진 레이어가 드러났다. 탄 자국처럼 거뭇하게 남은 글자들은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힘들었지만, 백연의 장비는 그걸 또렷한 문장으로 복구해내고 있었다.

[이름표 교환 절차(Emergency Protocol): 사망 플래그의 귀속 대상과 보호자 계약자를 강제로 불일치시킴. 이름표를 교환할 경우, 수납과의 추적 알고리즘에 일시적 결함 발생. 단, 이는 영구적 말소가 아닌 ‘유예’에 불과함.]

“이게 뭐야…….”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잔향청취가 그 글자들에 맺힌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희의 낮은 대화였다.

-태식 씨, 아이 둘을 다 데리고 나가는 건 불가능해요. 규정이 그래요. 하나를 데려가면 하나는 반드시 이곳의 ‘거름’으로 남겨야 해요.

-방법이 없습니까? 둘 다 살려야 합니다. 내 목숨을 대신 내놓더라도!

-아뇨, 당신 목숨으로는 부족해요. 대신…… 이름표를 바꿔요. 시스템이 누가 누군지 헷갈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럼 적어도 지금 당장은 수거하러 오지 못할 거예요.

문태식은 악당이 아니었다. 그는 한○희가 설계한 위험천만한 도박의 공범이자,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 미래를 담보로 잡힌 대리 납부자였다. 25년 전, 그들은 이름표를 바꿔치기해 우리를 살렸다. 하지만 그 대가로 시스템은 ‘누락된 개체’를 찾기 위해 25년을 기다렸고, 이제야 수납과를 통해 회수 절차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둘 다 살리려고 이름을 꼬아버렸다는 거네. K-병원의 행정 오류가 우리 목숨줄이었다니, 참 웃기지도 않아서.”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윤서하는 출력지의 내용을 훑더니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그녀는 허공에 뜬 ‘반납 대상 선택’ 버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챙-!

강철과 홀로그램이 부딪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역시나 버튼은 잘리지 않았다. 하지만 내 잔향청취가 그녀의 공격과 맞물리는 순간, 노이즈 사이로 숨겨져 있던 작은 문구 하나가 도드라졌다.

[관리자 승인자: 검은 우산 B-04]

“서하 씨, 잠깐만! 저 버튼 밑바닥을 봐요.”

내 외침에 윤서하의 시선이 멈췄다. 백연도 얼른 카메라 줌을 당겼다.

“관리자 승인자……? 시스템이 제멋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승인을 내리고 있다는 뜻인가요?”

“맞아요. 저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라, 저 승인자를 찾아야 해요.”

백연이 재빨리 병동 배치도를 다시 스캔했다.

“B-04…… 아까 제가 말씀드린 코드예요! 층수가 아니라 관리 구역 코드. 여기 배치도 보세요. 신생아실 안쪽, 원래 화재 기록이나 도면에는 표시되지 않은 공간이 있어요. 분만 준비실 뒤쪽 비상 세척실 자리인데…… 여기만 번호가 안 붙어 있어요!”

“거기가 관리실이겠군.”

윤서하가 주저 없이 신생아실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가 움직이자마자, 정지해 있던 열두 개의 빈 침대가 일제히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슨 바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침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켜, 이 녀석들아. 너희 이름표 찾아주러 가는 길이니까.”

나는 짐짓 센 척을 하며 맨 앞에 선 침대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침대는 바닥에 뿌리라도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위로 희미한 잔향의 조각들이 튀어 올랐다.

[4번 침대…… 이름 없었음. 몸무게 2.1kg. 폐렴으로 기록 삭제.]

[7번 침대…… 이름표가 찢어짐.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음.]

[11번 침대…… 담요가 너무 젖어서 추웠음. 잉크 냄새가 싫었음.]

짧고 단절된 기억들. 괴물이라기엔 너무나 가냘프고 억울한 아이들의 흔적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해달라고, 이 지워진 기록의 틈바구니에서 자신들을 꺼내달라고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이었다.

“강도윤 씨, 비켜요!”

윤서하가 내 어깨를 밀치고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칼을 휘두르는 대신, 자신의 팔목에 묶인 낡은 신생아 팔찌를 높이 치켜들었다.

“너희가 누군지 알아. 기록에는 없어도 여기 이렇게 남아 있잖아. 우리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너희 이름도 다시 불러줄 수 있을지 몰라. 그러니까 길 열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낯선 힘이 실려 있었다. 1999년의 잔향과 현재의 윤서하가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신기하게도 길을 막고 서 있던 침대들이 서서히 양옆으로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낡은 비상 세척실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 위에는 먼지 쌓인 명판이 붙어 있었다.

[B-04 관리실]

문 손잡이를 잡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극심한 이명이 들려왔다.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문을 밀었다.

끼이익-.

방 안은 온통 구식 서버들과 도트 프린터,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서류철로 가득했다. 천장에서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의 전선들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백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홀린 듯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와 카메라를 향해 렌즈를 돌렸다.

“도윤 씨, 서하 씨…… 이것 좀 보세요. 제 카메라 필터에만 잡히는 기록이 있어요.”

백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민 카메라 액정 속에는, 방금 전 우리가 본 시스템 창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세한 로그 기록이 흐르고 있었다.

[B-04 관리자 기록 일지]

[보호자: 한○희 (상태: 행방불명/채무 불이행)]

[대리 납부자: 문태식 (상태: 담보 집행 중 - 사망 보류)]

거기까지는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마지막 줄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윤서하의 눈동자도 거세게 흔들렸다.

[최종 수거자: 윤서하 (상태: 예약됨)]

단순히 회수 대상이 아니었다. 시스템은 윤서하를 피해자가 아니라, 이 모든 연쇄 사망 플래그를 마무리 짓고 ‘수거’를 완료할 주체로 점찍어두고 있었다.

“……내가 수거자라고?”

윤서하가 허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발등 위로, 아까보다 훨씬 진하고 검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가 이 방의 주인이라는 듯이.

그리고 벽면에 붙은 도트 프린터가 미친 듯이 종이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찌르르르,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출력된 종이에는 딱 한 문장이 수백 번 반복되어 적혀 있었다.

[이름표를 바꿔야 해. 이름표를 바꿔야 해. 이름표를 바꿔야 해.]

누구의 이름표를, 누구와 바꿔야 한다는 건가.

나는 문득 내 팔목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혀 있는 것만 같았다.

“서하 씨, 저거…….”

내가 입을 떼려는 찰나, 백연의 비명이 들렸다. 카메라 액정 너머로, 관리실 안쪽 어둠 속에서 검은 우산을 쓴 형체가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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