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121화. 이진하의 미수 기록과 B-04의 신음
제목: 120-121화. 이진하의 미수 기록과 B-04의 신음
제목: 120화. 이진하의 미수 기록
점장실의 천장이 비명처럼 찢어졌다.
그 틈새로 윤희가 남긴 푸른 잔향이 빠져나갔다. 퇴근이라기보다 탈옥에 가까웠다. 오래 갇힌 사람이 문밖 공기를 처음 마실 때 나는 소리가 있다면, 아마 지금 점장실이 내는 금속 비명과 비슷했을 것이다.
“아, 으윽……!”
윤서하가 바닥을 짚었다. 목덜미에서 검은 실핏줄 같은 침식이 역류하며 꿈틀거렸다. 생존을 붙잡고 있던 시스템을 제 손으로 뜯어냈으니 멀쩡할 리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받쳤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떨림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정신 붙들어요. 지금 여기서 기절하면 아무도 퇴근 도장 못 찍어 줍니다.”
내 목소리는 나한테도 건조하게 들렸다. 죄책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면 사람은 이상한 소리를 낸다. 나는 그걸 농담이라고 부르며 살아왔고, 오늘도 성능은 별로였다.
윤서하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내 쪽이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장부 조각에 박혀 있었다.
[대체 퇴근 대상자: 이진하]
[사유: 미수]
[승인 대기 중]
“미수……?”
이현우가 안경을 밀어 올리고 장부 조각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서 흐른 푸른 회로 빛이 반쯤 탄 종이를 훑자, 사라졌던 문구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대체 프로세스 중단]
[원인: 관리자 권한 충돌 및 원본 데이터 손상]
[상태: 관리자 잔향 고착]
[완전 퇴근 불가]
[완전 귀속 불가]
“형, 이거 단순 실패 기록이 아니에요.”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누군가 대신 남으려고 신청서를 넣었는데, 승인 직전에 멈춘 겁니다. 이진하 씨는 지금 산 사람도, 완전히 죽은 사람도 아니에요. 말하자면…… 결재 대기 중인 서류 같은 상태예요.”
“사람을 서류로 비유하는 순간 이 방은 이미 이겼다.”
나는 그렇게 말했지만 웃지는 못했다.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은색 바늘이 미친 듯이 돌다가 이진하 쪽에서 멈췄다. 보랏빛과 검은빛이 바늘 끝에서 서로를 물어뜯었다.
“지독해요.”
가온이 숨을 삼켰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분노랑 구분이 안 돼요. ‘내가 대신 남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안쪽을 다 파먹고 있어요. 아저씨, 이건 공범의 감정이라기보다…… 자기가 죽지 못해 화가 난 사람의 감정이에요.”
구석에서 보관자가 낮게 웃었다. 검은 우산 그림자가 찢어진 장부 위로 젖은 손가락처럼 번졌다.
“승인 대기 중인 자가 아직 살아 움직이면 무엇이 되겠나?”
그의 시선이 이진하를 훑었다.
“강도윤. 네가 믿는 저 남자는 시스템이 뱉어내지 못한 찌꺼기다. 윤희가 제 이름을 남길 때 저자는 무엇을 했지? 뒤늦게 자기를 제물로 올리려다 기회조차 잡지 못한 낙오자일 뿐이야.”
“말 예쁘게 하네. 고객센터 상담 품질 평가에서 별 하나도 아깝겠다.”
“공범이 아니라면 방관자겠지. 아니면 아직 승인되지 않은 대체물. 언제든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예비 부품.”
나는 이진하를 봤다.
그는 말이 없었다. 평소의 능글맞은 미소도, 사람 열 받게 하던 여유도 없었다. 텅 빈 눈으로 찢어진 장부를 보고 있었다.
믿고 싶었다. 퇴근 후 치맥 이야기를 하던 그 실없는 선배를. 하지만 그가 숨긴 기록은 너무 무거웠다. 관리자 잔향. 미수. 승인 대기. 사람에게 붙일 말이 아니라 폐기 서류함에 붙일 말들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장부 페이지에 손끝을 댔다.
잔향청취가 열린다.
시야가 접혔다.
—안 돼! 이건 퇴근이 아니야!
젊은 이진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붕괴 현장. 윤희가 검은 퇴근 카드를 아이의 옷깃 안쪽에 밀어 넣던 그 순간보다 조금 뒤. 먼지와 피 냄새가 폐를 긁었다. 원본 KDY는 무너진 기둥 사이에서 누군가를 끌어내려 했고, 이진하는 윤희 뒤를 쫓으려 했다.
검은 우산이 그의 앞을 막았다.
—윤희는 이미 선택을 마쳤네, 이진하 군. 자네는 다음 차례를 기다려야지.
—비켜, 이 새끼야. 내가 대신 남을 테니까 저 사람은 보내라고!
이진하가 피 칠갑이 된 손으로 장부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펜촉이 종이를 찢을 만큼 깊게 눌렸다.
[대체 퇴근 신청 접수]
[신청자: 이진하]
[대상자 보호를 위한 자발적 귀속 요청]
그 순간 시스템 창이 붉게 멈췄다. 원본 KDY의 권한인지, 검은 우산이 비튼 규칙인지, 둘이 뒤엉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문구 하나는 선명했다.
[접근 거부]
[대체 퇴근의 연쇄를 보존하십시오]
[승인 상태: 미수]
이진하의 이름이 장부에 박혔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나가지도 못했고, 완전히 남지도 못했다. 시스템 틈새에 끼인 관리자 잔향. 다음 희생이 나올 때까지 이 지옥을 관리해야 하는 형벌.
숨이 돌아왔을 때, 나는 점장실 바닥에 무릎을 짚고 있었다.
“단정하지 마세요.”
윤서하가 보관자 앞을 가로막았다. 몸은 휘청거렸지만 목소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진하 씨가 무엇을 숨겼는지는 몰라요. 저도 화가 납니다. 그런데 방금 본 게 진짜라면, 적어도 이 사람은 윤희 언니가 남긴 걸 이용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녀는 이진하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끝내 닿기 전에 거두었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같은 손가락 끝에 걸려 있었다.
“나를 죽이려던 게 아니라…… 누군가를 더 남기지 않으려고 한 거예요.”
보관자가 우산을 기울였다.
“아름다운 믿음이군. 그 믿음으로 두 번째 잠금을 열 수 있을까?”
이현우가 장부 조각을 다시 훑었다.
“방법이 두 개 떠요. 이진하 씨의 미수 기록을 ‘승인 완료’ 하거나, ‘폐기’ 하거나.”
“차라리 점심 메뉴처럼 골라 보라고 하지 그래.”
“완료하면 이진하 씨가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요. 윤희 씨 대신 완전 귀속됩니다. 반대로 폐기하면…….”
현우가 말을 삼켰다.
“당시 이진하 씨가 대신 살리려 했던 대상자의 기록이 소멸합니다. 존재 자체가 시스템 인과에서 지워질 수도 있어요.”
점장실이 다시 흔들렸다. 명패들이 벽에서 반쯤 빠져나와 떨었다. 선택지는 늘 두 개였고, 둘 다 사람을 잡아먹는 쪽이었다. 이 방의 UI 담당자는 지옥에서도 취업이 잘될 것이다.
나는 장부 아래쪽을 봤다. 이진하의 이름보다 깊은 곳. 피와 검은 침식에 가려졌던 글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그가 대신 남으려 했던 대상자.
윤서하의 이름은 아니었다.
[대체 퇴근 대상자: 강도○]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진하.”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당신, 누구 대신 남으려고 했던 겁니까?”
이진하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변명 대신 오래 썩은 슬픔이 맺혀 있었다.
장부의 잉크가 번지며 마지막 글자가 선명해졌다.
제목: 121화. 마지막 글자
종이 위에서 번지던 검은 얼룩이 제 자리를 찾아 굳었다.
찢어진 장부 틈새로 잉크가 흘러들어 갔다. 이름의 마지막 조각이 천천히, 아주 예의 바르게 드러났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문서는 대체로 예의가 바르다.
[대체 퇴근 대상자: 강도원]
내 이름은 아니었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안도인지 공포인지 구분이 안 됐다. 강도윤과 강도원. 끝 글자 하나 차이였다. 내 이름표를 누가 복사기에 넣고 한 획쯤 번지게 출력한 것 같았다.
“강도원…….”
입안에서 이름이 비렸다. 나는 강도원을 모른다. 적어도 기억나는 사람 중엔 없다. 문제는 이 방에서 ‘기억나지 않는다’가 전혀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내가 최초 점장이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 인생은 이제 내 동의 없이 업데이트되는 사내 시스템이 됐다.
“내 이름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내 이름 같아서 전혀 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오타면 반려 신청 받습니까?”
말을 던졌지만, 이진하의 얼굴을 보는 순간 농담은 말라 죽었다.
그는 창백했다. 잔향이 창백해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가능하다고 답하겠다. 지금 이진하는 유령보다 더 유령 같았다.
“……살아 있었나.”
이진하가 처음으로 말했다. 쇠를 오래 물에 담갔다가 꺼낸 듯한 목소리였다.
“강도원이 누구입니까?”
윤서하가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몸은 아직 휘청거렸다. 그래도 시선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진하는 나를 봤다. 아니, 나를 통과해 오래전 붕괴 현장 어딘가를 봤다.
“원본 KDY가 끝까지 숨기려 했던 사람.”
그가 천천히 말했다.
“사람이자 기록이었다. 강도원이 사라지면 원본이 왜 자기 이름을 지우고 최초 점장이 되었는지, 그 이유까지 같이 묻힐 뻔했다.”
“그래서 당신이 대신 남으려 했고요?”
“그래.”
이진하의 손이 장부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종이를 통과했다. 그는 잠깐 그 사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래 겪은 절망은 사람을 무덤덤하게 만든다. 아니, 사람 비슷한 걸 무덤덤하게 만든다.
“그 기록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그런데 장부는 내 이름을 미수로 묶었다. 대체 퇴근의 연쇄를 보존해야 한다면서. 내 희생조차 저들이 허락하지 않았어.”
말끝에 웃음이 걸렸다. 웃음이라기보다 목에 걸린 녹슨 철심이었다.
점장실 전체가 크게 휘청였다.
벽면 명패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카드 리더기들이 삐걱대며 입처럼 벌어졌고, 천장 형광등이 붉게 깜빡였다.
[관리자 잔향 불안정 급증]
[미수 기록 자동 폐기 카운트다운 시작: 00:59]
[폐기 시 대상자 존재 기록 소멸]
“잠깐. 폐기라고?”
“시간이 없군.”
보관자가 우산 끝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마다 카운트다운 숫자가 한 칸씩 더 선명해졌다.
“이진하의 죄책감을 승인해 그를 영원히 이 방의 부품으로 만들든가, 강도원이라는 기록을 지우든가. 둘 중 하나다. 선택지는 단순할수록 아름답지.”
“아름답긴 개뿔. 이 방 UI 담당자 지옥 가면 바로 팀장 달겠네.”
입은 움직였지만 손끝은 떨렸다. 승인하면 이진하가 갇힌다. 폐기하면 강도원이 사라진다. 이 방은 계속 같은 문제를 냈다. 누굴 남길래. 누굴 지울래. 누굴 대신 죽일래.
옷소매가 잡혔다.
윤서하였다. 안색은 종이처럼 하얬고, 손에는 힘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붙잡은 손끝만큼은 똑바로 말했다.
“도윤 씨. 서두르지 마세요.”
“카운트다운이 있는데요.”
“보관자의 시간에 맞춰 결정하면 보관자가 원하는 사람이 돼요.”
그녀가 숨을 삼켰다. 목덜미의 검은 침식 자국이 다시 꿈틀거렸다.
“윤희 언니 때도 그랬잖아요. 누군가 대신 결정하는 건 보호가 아니에요. 그걸 다시 하면 안 됩니다.”
맞는 말이었다. 나는 이진하를 장부 속으로 밀어 넣을 권리도 없고, 강도원이라는 이름을 폐기함에 던질 권리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내 인생 하나도 제대로 결재 못 하는데 남의 존재 여부까지 승인하라니, 이건 직무 범위 초과다.
“현우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승인하고 폐기하는 거 말고 다른 버튼 없어? 숨겨진 메뉴라든가, 개발자 모드라든가, 고객센터 상담원 울리면 나오는 비상 코드라든가!”
이현우가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정상 메뉴엔 없어요. 그런데 우회는 가능할지도 몰라요. 미수 기록을 처리하지 않고 보류 시간을 강제로 연장하는 겁니다. 대상자 이름을 임시 봉인해서 시스템이 자동 폐기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거 좋네. 왜 이제 말해.”
“권한이 문제예요!”
현우가 화면을 돌렸다.
[필요 권한]
[보호자 0번: 강도윤]
[대체 승인 거부권자: 윤서하]
[동시 행사 필요]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바늘이 두 갈래로 갈라져 나와 내 이름표와 윤서하의 이름표를 동시에 가리켰다.
“안 돼요. 두 권한을 억지로 엮으면 도윤 아저씨랑 서하 언니 이름표가 서로 묶일 수 있어요. 그냥 협력 수준이 아니라, 진짜로 한쪽 통증이나 생명력이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하겠습니다.”
나와 윤서하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봤다. 같은 타이밍에 미친 결정을 내린 사람끼리 나누는 시선이었다. 반갑진 않았다. 그래도 혼자는 아니었다.
윤서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어요.”
“압니다. 제가 서하 씨 몫까지 가져가지 않기.”
“그리고 저도 도윤 씨 몫을 대신하지 않기.”
“각자 자기 권한만 쓰는 걸로.”
“네.”
그녀가 아주 작게 웃었다. 힘없는 웃음인데도 이상하게 방을 버티게 했다.
“보호가 통제가 되면, 우리는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집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각자도생인데 손은 같이 잡는 이상한 팀플로 갑시다.”
우리는 장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현우가 카운트를 외쳤다.
“셋, 둘, 하나!”
나는 보호자 0번 권한으로 이진하의 미수 기록을 붙들었다. 손등의 바코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차갑고 끈적한 죄책감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누군가를 대신 남기지 못한 사람의 감정. 너무 오래 썩어서 냄새까지 나는 후회.
동시에 윤서하가 대체 승인 거부권을 발동했다. 그녀의 이름표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와 자동 폐기 문구를 정면으로 막았다.
파직.
점장실이 한순간 새하얗게 번쩍였다.
그때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스쳤다.
—늦었지만, 이번엔 네 이름으로 막아.
원본 KDY의 잔향이었다.
내 이름. 강도윤. 원본의 이름인지, 내 이름인지, 누가 누구의 껍데기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장부를 붙든 건 내 손이었다. 내가 아는 유일한 내 이름으로.
“막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아무도 퇴근표 대신 안 찍는다.”
[미수 기록 자동 폐기 중단]
[대상자 명단 임시 봉인]
[두 번째 잠금 해제 진행률: 70%]
진동이 멎었다.
이진하의 형체는 더 흐릿해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윤서하는 비틀거리며 내 팔을 잡았고, 나는 반쯤 무너진 책상에 등을 부딪쳤다. 둘 다 멀쩡한 척하기엔 너무 숨이 찼다.
새 문구가 떠올랐다.
[추가 조건 발생]
[대상자 ‘강도원’ 생존 확인 필요]
[좌표 확인 중]
[현재 위치: 퇴근자 보관함 B-04]
“B-04…….”
그 코드는 낯설지 않았다. 폐기 장비함 B-04. 이미 몇 번이나 우리 발목을 잡았던 이름. 버리지 못한 이름표와 죽은 기록들이 쌓이는 곳.
점장실 구석, 어둠에 잠겨 있던 철제 캐비닛 하나가 스르르 열렸다. 안쪽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낡은 장비와 부서진 이름표 사이로, 누군가의 낮은 신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