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119화. 윤희의 퇴근 반납과 대체 승인 거부
제목: 118-119화. 윤희의 퇴근 반납과 대체 승인 거부
제목: 118화. 윤희가 퇴근하지 못한 이유
모니터 빛이 윤서하의 얼굴을 파랗게 깎아 냈다.
[최초 퇴근 대상자: 윤희]
네 글자였다. 사람 하나를 눌러 죽이기엔 충분한 무게였다.
윤서하의 손이 떨렸다. 검은 침식이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번져 있었고, 그 아래 이름표는 금이 간 유리처럼 희미하게 빛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평소 같으면 상황을 정리하고, 위험도를 나누고, 나한테 “입 다물고 호흡하세요” 정도는 해 줬을 사람인데.
이번엔 이름 하나가 그녀의 호흡을 먼저 빼앗았다.
“윤희…….”
그 이름이 바닥에 떨어지자 점장실의 카드 리더기들이 작게 삐걱댔다. 누가 오래된 서랍을 여는 소리 같았다. 나는 그 소리가 싫었다. 이 방은 사람의 기억을 서류함처럼 다뤘고, 서류함은 늘 제일 중요한 종이를 맨 아래에 숨겨 둔다.
이현우가 화면을 가리켰다.
[보호자 0번의 미퇴근 사유 직접 진술 및 #######]
“형. 보호자 0번이면 형 맞죠?”
“나도 이제 내 직함이 많아서 헷갈린다. 사망자, 미출근자, 대리 점장, 최초 점장, 보호자 0번. 명함 만들면 접이식으로 해야 해.”
[진술 대기]
시스템이 기다렸다. 농담을 들으려는 표정은 없었다. 당연하다. 시스템은 표정이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정색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중앙 리더기에 꽂힌 검은 퇴근 카드를 봤다. 카드 표면은 아직도 빛을 삼키고 있었다.
“사유. 야근 수당이 짭짤해서.”
[진술 반려: 기만적인 사유입니다. 최초 점장의 연장 근무 수당은 0원입니다.]
“팩트 폭력은 노동법 위반 아니냐.”
“형, 장난치면 안 돼요.”
“나도 알아. 근데 진지하게 말하면 토할 것 같아서 그래.”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월세가 밀려서.”
[진술 반려: 미퇴근의 직접 원인이 아닙니다.]
“집에 가면 반겨 줄 고양이가 없어서 외로워서.”
[진술 반려: 감정적 회피입니다.]
[3회 이상 반려 시 진술권 박탈]
[진술권 박탈 시 점장실 영구 폐쇄]
좋다. 내 인생 상담사는 기계였고, 기계는 내 방어기제를 서류상 반려했다. 심지어 반려 사유도 정확했다. 이 정도면 협회 인사팀보다 낫다. 최소한 읽고 반려하니까.
윤서하가 나를 봤다. 원망은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원망이라도 해 주면 변명할 구멍이 생기는데, 그녀는 그냥 버티고 있었다. 윤희라는 이름을 보고도, 자기 몸에 번지는 침식을 느끼면서도.
그때 검은 퇴근 카드에서 연기 같은 잔향이 피어올랐다.
잔향청취가 뒤통수를 잡아챘다.
현재의 점장실 벽이 얇아졌다. 그 너머로 먼지가 보였다. 붕괴 직후의 임시 현장 사무실. 사이렌이 찢어져 울렸고, 천장에서는 회색 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해진 코트를 입은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흐렸다. 너무 흐려서 이름만 남은 사람 같았다. 여자는 아이 손에 구겨진 퇴근표를 쥐여 주었다. 종이 위에는 처음엔 ‘윤희’가 있었다. 곧 잉크가 번지더니 다른 이름을 덮어썼다.
“나가.”
여자가 말했다.
“이름이 적혀 있으면 나갈 수 있어.”
어딘가에서 원본 KDY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희 씨! 당신이 최초 퇴근 대상자야. 당신이 나가야 문이 맞게 열려!”
윤희는 돌아봤다. 얼굴은 끝내 선명해지지 않았다. 대신 입가의 웃음만 선명했다. 울지 않으려고 만든 웃음. 무너지면 아이 손을 놓칠까 봐 억지로 걸어 둔 웃음.
“내가 남을게요.”
그녀가 퇴근표를 아이 손에 밀어 넣었다.
“이 아이는 내 이름을 밟고서라도 나가야 해요.”
잔향이 끊겼다.
반가온이 감정 나침반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바늘이 미친 듯 돌다가, 윤서하의 이름표 앞에서 멈췄다. 파란 빛과 검은 빛이 한 바늘 끝에서 서로를 물고 있었다.
“아저씨.”
가온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이건 저주만은 아니에요. 사랑도 있어요. 너무 커서 사람을 묶어 버린 사랑. ‘나가’가 아니라…… ‘내 이름을 밟고라도 살아’에 가까워요.”
윤서하가 자기 팔을 움켜쥐었다. 검은 침식이 그 손가락 사이에서 맥박쳤다. 윤희가 남긴 보호. 그런데 보호가 너무 오래 남으면 족쇄가 된다. 우산도 오래 접지 않으면 곰팡이가 피는 법이다. 하필 사람 목숨에 곰팡이가 폈다.
이현우가 키보드를 두드렸다.
“잠금 풀렸어요. 뒷부분 나옵니다.”
깨진 글자가 맞물렸다.
[보호자 0번의 미퇴근 사유 직접 진술 및 최초 퇴근 대상자의 대체 승인 거부]
“대체 승인 거부?”
보관자가 낮게 웃었다.
“윤희는 자기 퇴근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아름다운 희생이지. 그리고 아주 쓸모 있는 오류다.”
검은 우산 그림자가 바닥을 적셨다.
“방법은 쉽다. 윤희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라. 최초 퇴근 대상자는 윤희였다고 승인해. 그러면 윤서하의 침식도 멎고, 너희도 나갈 수 있다. 죽은 여자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뿐이야.”
“제자리?”
나는 보관자를 봤다.
“사람 가두는 칸을 제자리라고 부르는 놈들은 보통 사무실 자리배치도도 지옥처럼 짜더라.”
보관자의 웃음이 가늘어졌다.
나는 화면 앞으로 한 걸음 갔다. 이번엔 농담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내가 삼켰다. 농담은 좋다. 하지만 가끔은 농담 뒤에 숨으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아주 드물게. 젠장, 오늘이 그날이었다.
“사유를 진술한다.”
[진술 대기]
“나는 누군가를 두고 퇴근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점장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윤서하의 손을 놓지 않았다.
“혼자 나가는 법은 안다. 튀는 법도 안다. 겁나면 도망치는 법도 안다. 그런데 누군가를 이 방에 밀어 넣고 문 닫는 법은 모른다. 그래서 못 나간다. 그게 내 미퇴근 사유다.”
검은 퇴근 카드가 한 번 울었다.
[진술 확인]
[보호자 0번의 정체성과 일치]
[세 번째 조건 전반부 충족]
이현우가 숨을 들이켰다. 환호하기 직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점장실은 그렇게 친절한 직장이 아니었다.
새 로그가 떴다.
[최초 퇴근 대상자 ‘윤희’ 상태: 대체 승인 대기]
[대체 승인 거부권자 확인 완료]
[권한 소유자: 윤서하]
홀로그램 영사기가 천천히 돌아갔다. 찢어진 노이즈 사이로, 붕괴지 아래에서 검은 퇴근 카드를 쥔 윤희의 손이 떠올랐다.
[윤희의 퇴근 반납 기록 재생을 시작합니다.]
제목: 119화. 퇴근 반납 기록
공간이 울렁였다.
점장실의 곰팡이 냄새 위로 쇠 냄새가 덮였다. 피와 먼지와 탄 냄새. 오래된 형광등 아래 있던 우리 발밑에 금 간 콘크리트 바닥이 겹쳐졌다. 가죽 소파 뒤로 무너진 기둥이 보였고, 보관자의 검은 장부 너머로 붉은 비상등이 깜빡였다.
[윤희의 퇴근 반납 기록 재생을 시작합니다.]
시스템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다. 사람 하나가 자기 퇴근을 반납하는 순간에도 저렇게 사무적으로 말할 수 있다니. 기계가 부러운 건 처음이었다. 저렇게 무정하면 덜 아플 테니까.
과거의 이진하가 화면 속에서 소리쳤다.
“안 됩니다. 이건 대피 절차가 아닙니다. 귀속이에요!”
지금보다 젊었다. 눈 밑의 피로는 덜했지만, 얼굴에는 더 노골적인 공포가 있었다. 그는 피 묻은 회색 조끼를 입고 윤희 앞을 막고 있었다. 한 손에는 찢어진 근무표를, 다른 손에는 작동을 멈춘 카드 리더기 부품을 들고 있었다.
윤희는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끝내 흐렸다. 그런데 팔목의 이름표 조각은 보였다. 반쯤 깨진 플라스틱에 `윤` 한 글자만 남아 있었다. 윤서하가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숨이 한 박자 어긋났다. 누군가 아주 오래전에 쓰다듬던 자리라도 기억난 사람처럼, 손끝이 제 머리칼 근처에서 멈췄다.
윤희가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당장 천장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곳에서, 아이 머리카락 하나라도 당기지 않으려는 손길. 그게 더 잔인했다. 세상이 무너질 때도 사람은 이상한 데서 다정하다.
“비켜주세요, 이진하 씨.”
“카드를 넘기면 당신 이름이 이 현장에 박힙니다. 퇴근자가 아니라 문고리가 된다고요.”
무너진 게이트 쪽에서 원본 KDY가 이를 악물었다. 나와 같은 얼굴이었지만, 내가 저렇게 결심한 표정을 지은 적은 없었다. 보통 나는 결심하기 전에 도시락 할인 스티커부터 확인한다.
“윤희 씨. 문 닫을 사람은 내가 줄일 거야. 당신이 나가. 당신이 최초 퇴근 대상자잖아.”
윤희는 대답 대신 아이 옷깃 안쪽에 검은 퇴근 카드를 밀어 넣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윤희의 소매를 잡았다. 잡는 힘이 약했다. 너무 어려서, 자기가 붙잡은 것이 사람인지 문인지도 모르는 손이었다.
“나는 괜찮아.”
윤희가 웃었다.
괜찮은 사람은 저런 웃음을 짓지 않는다. 나는 그걸 안다. 현장 정리 헌터 일을 하다 보면, 정말 괜찮은 사람은 “괜찮다”는 말을 아낀다.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은 대개 어디 한 군데가 이미 무너진 뒤다.
그때 검은 우산이 나타났다.
붕괴 현장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우산살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그 물방울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작은 글자가 생겼다.
[대체]
[승인]
[귀속]
“아름답군요.”
검은 우산의 남자가 말했다.
“자기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고, 빈자리를 자기 몸으로 메운다. 이건 선례가 됩니다. 아주 좋은 선례.”
“닥쳐.”
원본 KDY가 달려들려 했지만, 무너진 기둥이 그 앞을 막았다. 이진하가 윤희의 손을 붙잡았다.
“윤희 씨, 이건 희생이 아니라 악용당할 기록입니다. 한 번 남으면 저들이 계속 쓸 겁니다.”
윤희는 이진하의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럼 나중에 고쳐 주세요.”
그녀가 아이를 배출구 쪽으로 밀었다.
“지금은 이 아이가 먼저 나가야 해요.”
배출구가 열렸다. 하얀 빛이 아이를 삼켰다. 윤희의 몸은 반대로 어두워졌다. 이름표에서 `윤희`라는 두 글자가 떨어져 나와 검은 근무표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기록이 찢어졌다.
현재의 점장실로 돌아오자 허공에 선택창이 떠 있었다.
[최초 퇴근 대상자의 대체 승인 권한 확인]
[선택권자: 윤서하]
[1. 대체 승인 유지]
[결과: 윤서하 생존 안정 / 윤희 영구 귀속]
[2. 대체 승인 거부]
[결과: 윤희 귀속 해제 시도 / 윤서하 침식 역류 / 점장실 폭주 가능]
“보셨습니까?”
보관자가 윤서하 곁으로 다가갔다. 목소리가 낮고 부드러웠다. 누군가를 밀어 넣기 좋게 잘 다듬은 계단 같았다.
“윤희가 원한 건 당신의 생존입니다. 유지 버튼을 누르십시오. 그게 보답입니다. 죽은 사람이 남긴 뜻을, 산 사람이 멋대로 부수면 안 되지요.”
윤서하의 손이 떨렸다. 그녀는 1번과 2번 사이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어느 쪽도 쉬운 버튼이 아니었다. 하나는 윤희를 다시 방 안에 가두는 버튼이고, 다른 하나는 윤서하 자신을 찢을지도 모르는 버튼이었다.
반가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서하 언니 감정이…… 지금 둘로 갈라져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고,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있어요. 둘 다 진짜예요.”
“가온아.”
“네.”
“그런 말은 원래 어른들이 들어야 하는데, 미안하다.”
가온이 울듯 웃었다.
나는 윤서하 옆으로 갔다. 대신 앞을 막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목을 잡지도 않았다. 이번 선택은 내가 대신 누르면 안 된다. 보호라는 이름으로 남의 버튼을 누르는 순간, 검은 우산과 별로 다르지 않아진다. 그건 좀 많이 싫었다. 나는 인생이 망해도 우산 취향까지 망하고 싶진 않다.
“서하 씨.”
윤서하가 나를 봤다.
“보통 이런 때 주인공이 ‘나만 믿어’ 하고 대신 누르는데, 나는 그 정도로 재수 없는 놈은 아닙니다.”
“지금 농담할 때예요?”
“아뇨. 그래서 짧게 했습니다.”
나는 선택창을 봤다가 그녀를 봤다.
“윤희 씨가 당신을 살린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당신더러 평생 죄책감으로 결재 올리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누가 나 대신 야근하고 죽었으면, 내가 할 일은 그 사람을 계속 야근표에 박아 두는 게 아니라 그 회사 불태우는 쪽에 가깝죠.”
윤서하의 눈가가 젖었다.
“제가 거부하면…… 윤희가 정말 풀릴까요?”
“모릅니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시스템이 폭주할 수도 있고, 우리 다 여기서 이름표 세트로 팔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압니다. 유지 버튼을 누르면 윤희 씨는 계속 남습니다. 그건 너무 확실해서, 오히려 더 끔찍합니다.”
보관자가 웃었다.
“무책임한 위로군.”
“맞아. 난 책임 있는 위로를 잘 못 해. 대신 같이 망하는 건 잘합니다.”
윤서하가 아주 작게 웃었다. 눈물 사이로 나온 웃음이라 더 아팠다.
그녀가 손을 들었다.
“윤희가 저를 살렸다면.”
목소리는 떨렸지만 꺾이지 않았다.
“저는 그 생존으로 윤희를 다시 가두지 않겠습니다.”
손가락이 2번을 눌렀다.
[대체 승인 거부 선택]
[윤희 귀속 해제 절차 시도]
[경고: 보호 대상자 침식 역류]
점장실이 뒤집혔다.
벽의 명패들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카드 리더기들이 비명을 질렀다. 윤서하의 목덜미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뜨거웠다. 방금 전까지 얼음 같던 침식이, 이번엔 불에 가까웠다.
윤희의 잔향이 윤서하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보호였던 것. 족쇄였던 것. 둘 중 하나로만 부를 수 없는 것이 검은 안개와 푸른 빛이 섞인 형태로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 빛이 보관자의 장부를 때렸다.
“안 돼!”
보관자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좋은 소식이었다. 나쁜 소식은, 당황한 괴물은 대체로 사무용품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점이다.
장부가 찢어졌다. 페이지들이 날아올랐다. 그중 한 장이 내 발 앞에 꽂혔다.
[대체 퇴근자 명단]
윤희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다. 그 아래로 가려져 있던 이름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내 이름을 찾았다. 강도윤. 원본 KDY. 보호자 0번. 뭐가 나와도 이제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늘 이렇게 쓸데없는 순간에 배신한다.
윤희 바로 아래 적힌 이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대체 퇴근 대상자: 이진하]
[사유: 미수]
[승인 대기 중]
나는 찢어진 장부를 들고 보관자를 봤다. 아니, 보관자 너머 어딘가에 있을 이진하의 그림자를 봤다.
“이진하.”
입안이 바짝 말랐다.
“당신은 대체 누구 대신 못 나간 겁니까?”
찢어진 장부 속에서, 오래된 웃음소리가 대답처럼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