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87화. 0-0번 원본과 보호자 소환 절차
제목: 86화. 0-0번 원본
세상이 뒤집힌 줄 알았다. 아니, 세상이라는 낡은 양탄자를 누가 내 발밑에서 홱 뽑아 버린 쪽에 가까웠다.
중력은 더 이상 아래로 흐르지 않았다. 제갈후의 이름표가 목덜미를 지질 듯이 달구며 폭주했고, 나는 검증석의 차가운 바닥을 뚫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아니, 추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다. 잉크가 번진 기록표 속으로, 10년 전의 눅눅한 공기 속으로.
“...도윤 씨! 강도윤!”
윤서하의 비명이 멀어졌다. 내 팔을 붙잡던 그녀의 온기가 가느다란 실처럼 가늘어지더니 이내 툭 끊겼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다시 그 병원에 있었다.
천장에는 곰팡이가 핀 초록색 커튼이 레일을 따라 기분 나쁘게 사그락거리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코올 냄새와 녹슨 쇠 냄새. 누군가의 신음과 기계적인 비프음이 뒤섞인 공간. 하지만 여긴 살아있는 사람의 병실이 아니었다.
내 손목에는 낡은 플라스틱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이름란은 비어 있었고, 오직 숫자만이 선명했다.
[관리번호 0-0]
“이봐, 거기 멍하니 누워 있는 대여품.”
누군가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렸으나 사람은 없었다. 대신 내 머리맡에 서 있는 낡은 수액대가 바퀴를 까닥거리며 서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디가 대여품이라는 거야. 이 팔찌, 내 피부에 아주 찰떡인데.”
입술이 잘 움직이지 않았지만, 농담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졌다.
수액대 위에 걸린 유리병 속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이름도 없는 게 말은 많네. 강도윤? 그건 네 게 아니잖아. 잠깐 빌려 쓴 거면 슬슬 반납해야지. 연체료가 꽤 쌓였어.”
“연체료라니. 나 협회에서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받는 몸이야. 독촉은 협회장한테 가서 해.”
주변의 사물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먼지 쌓인 차트판이 파닥거리며 입을 열었다.
“보호자 서명란 봐봐. 최성국. 그 아저씨가 너 보증 섰더라? 근데 직인은 검은 우산이야. 넌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등록됐다고.”
초록색 커튼이 내 몸을 휘감으며 속삭였다.
“0-0. 최초의 보관 절차. 시작점. 넌 아이가 아니야. 넌 그냥... 첫 번째 샘플이지.”
가슴이 조여왔다. 0-0이라는 숫자가 내 가슴팍을 낙인처럼 누르는 것 같았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이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감각. 나는 정말로 ‘나’인가, 아니면 최성국이 어딘가에서 주워와 강도윤이라는 라벨을 붙여놓은 무언가인가.
그때, 멀리서 아주 작지만 선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벽 너머, 현재의 시간대에서 들려오는 반가온의 외침이었다.
“...끊으면 안 돼! 제갈후의 권한이 연결된 상태에서 강제 종료하면 도윤 씨 영혼이 찢겨나갈 거야! 이현우, 그 번호판 다시 봐!”
“이거, 검증석 번호판이 아냐!”
이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번째 침상 번호판... 이건 증인석 밑에 붙어 있었어. 그러니까 유리 너머에 있는 저 자는 ‘원본 확인자’가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우리를 지켜보던 ‘증인’이 확인자 행세를 하는 거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심연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유리 너머, 불투명한 안개 속에 앉아 있는 그 형체. 최성국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나를 ‘0-0’이라 명명한 존재를 쏘아보았다.
“이봐, 증인 양반.”
나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남의 인생에 감 놓으라 배 놓으라 하기 전에 본인 신분증부터 까는 게 예의 아닌가?”
[강도윤. 이름은 껍데기일 뿐이다. 너의 본질은 관리번호 0-0. 원본은 여기에 보관되어 있다.]
변성된 기괴한 목소리가 뇌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내 손목의 흉터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10년 전, 그 병원에서 새겨진 상처. 그것이 마치 ‘원본의 증거’인 양 나를 압박했다.
“이름을 빌렸든 뺏었든, 지난 10년 동안 월세는 내가 냈어.”
나는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에 붙은 제갈후의 이름표를 움켜쥐었다.
“피 흘리고, 구르고, 몬스터한테 뜯기면서 몸으로 때웠다고. 이 이름의 소유권은 이제 나한테 있어. 그리고 너...”
나는 내 눈앞에 떠다니는 기록표의 서명란을 노려보았다.
최성국의 정갈한 서명. 그리고 그 옆에 찍힌 기분 나쁜 검은 우산 모양의 직인.
“절차를 따지는 놈치고는 허술하네. 이거, 무효야.”
[...무엇이?]
“원본 확인이라며? 근데 여기 찍힌 건 검은 우산의 ‘조직 직인’이잖아. 개인의 원본을 확인하는 데 왜 단체 도장을 찍어? 이건 ‘개인 서명’이 아니라 ‘재고 관리’ 도장이잖아. 그리고 최성국의 서명 위치도 틀렸어. 여긴 ‘보호자’란이지 ‘확인자’란이 아니라고.”
제갈후의 권한이 내 의지에 반응했다. 이름표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기록표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검증석은 논리의 오류를 감지하고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서류가 이따위인데 나보고 가짜라고? 야, 9급 공무원도 서류 이따위로 가져오면 반려해. 어디서 사기를 쳐?”
박영진의 목소리가 한지율의 입을 빌려 공명했다.
“맞아... 0-0은 이름이 아냐. 그건 사람이 아니라, 그날 밤 병원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의 코드네임이었어. 도윤아, 넌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걸 부수고 나온 유일한 오작동이야!”
주변의 병원 풍경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액대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초록색 커튼이 불에 타듯 사그라들었다.
“반려다, 이 새끼야! 야근 수당 정산도 안 끝났는데 어디서 퇴직을 시키려고!”
나는 제갈후의 이름표에 남은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진행자의 권한이 검증석 위로 푸른 문구를 내리꽂았다.
[검증 오류.]
눈앞의 기록표가 종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유리 너머의 형체가 당황한 듯 몸을 떨었다.
“허억!”
숨이 터져 나왔다.
차가운 검증석 바닥의 감촉이 다시 느껴졌다. 나는 거칠게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윤서하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고, 반가온과 이현우가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살아…… 있는 거죠?”
윤서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응. 아직 카드값 남았어. 죽을 때가 아냐.”
나는 농담을 던졌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까진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검증석 중앙, 내가 방금 빠져나온 그 지점에서 갑자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허공에 걸려 있던 빈 환자복 하나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입고 있는 것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환자복의 소매가 채찍처럼 날아와 내 손목의 팔찌를 낚아채 갔다.
“뭐야, 이건?”
이현우가 검을 뽑아 들었지만, 환자복은 공격 대신 검증석 벽면에 붉은 글자를 써 내려갔다.
[검증 오류. 원본 확인 실패.]
[대여명 ‘강도윤’의 정당성 확인을 위해 추가 증거를 요청함.]
그리고 그 아래,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문구가 떠올랐다.
[다음 검증 대상: 관리번호 0-0의 보호자.]
[최성국. 즉시 소환 절차를 개시함.]
“……최 아저씨를 부른다고?”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증석 바닥에 거대한 검은 우산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문(門)이었다. 10년 전,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준 남자를 다시 이 지옥으로 불러들이려는 소환의 문.
방금 내가 한 서류상의 반격은 겨우 내 목을 빼낸 대신, 최성국을 이 위험천만한 검증석으로 끌어들이는 빌미가 됐다.
“서하 씨, 가온 씨, 뒤로 물러나!”
나는 제갈후의 이름표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제부터는 내 정체성 싸움이 아니었다. 나를 강도윤으로 살게 해준 유일한 증인을 지켜야 하는 싸움이었다.
검은 우산 직인이 붉게 타오르며, 검증석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제목: 87화. 보호자 소환 절차
검증석 바닥이 쩍 갈라졌다. 그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니라 질척한 어둠이었다.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삶을 억지로 뜯어온 듯한 파편들이 섞여 있었다. 낡아서 끝이 해진 트렌치코트 자락, 필터까지 바짝 타들어 간 궐련의 매캐한 냄새, 그리고 90년대에나 썼을 법한 구식 헌터 호출기가 바닥에 떨어져 요란하게 진동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굴러온 것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헌터 신분증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지만, 특유의 불만 가득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최성국. 즉시 소환 절차를 개시함.]
허공에 뜬 글자가 붉게 점멸했다. 수선실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아, 진짜……. 최 아저씨 벌써 퇴근했을 시간인데. 노인네 야근시키면 고용노동부에 찌를 겁니다, 내가.”
농담을 내뱉었지만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안쪽이 서늘했다.
최성국은 단순한 상사가 아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나를 사람으로 대접해주고 내 이름을 불러준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가 이 검증의 무대에 끌려나온다는 건, 내 마지막 안식처마저 해부당한다는 뜻이었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누군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검증석 바닥에 새겨진 검은 우산 문양이 그녀의 안에 잠재된 ‘0-14’의 기억을 자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록의 공명 때문에 금방이라도 소환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형색이면서도, 그녀는 나를 놓지 않았다.
“도망치지 마요. 저건 환각일 수도 있어요.”
“환각이면 차라리 낫겠는데…… 냄새가 너무 진짜라서요.”
나는 코를 찔러오는 싸구려 담배 향을 맡으며 이를 악물었다. 윤서하의 손아귀 힘이 나를 현실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늘 내가 그녀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반대였다.
“잠깐, 이거 절차가 이상해.”
반가온이 소환문 주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외쳤다. 그녀의 눈이 기계적인 분석을 쏟아내고 있었다.
“‘보호자’와 ‘원본 확인자’는 엄연히 다른 권한이야. 보호자는 관리 대상의 신병을 인도받는 존재지, 그 대상의 본질을 증명하는 주체가 아니라고. 이건 계약 논리상 성립이 안 돼!”
“가온 씨 말이 맞아요.”
이현우가 증인석 밑바닥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아까 네 번째 침상 번호판이 증인석 밑에 있었죠? 이 소환문은 최성국이라는 ‘인간’을 실시간으로 부르는 게 아니에요. 10년 전, 그 병원에서 최성국이 남겼던 ‘증언 기록’을 끄집어내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데이터 복구라고요!”
그 순간, 소환문 너머에서 치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이게 최선입니까?
낮고 거친, 하지만 분명히 익숙한 목소리. 최성국의 목소리였다. 10년 전의 그는 지금보다 목소리에 생기가 있었지만, 특유의 염세적인 톤은 여전했다.
— 이놈, 그냥 여기 두면 ‘보관함’행이잖아요. 0-0이니 뭐니 하는 딱지 붙여서 평생 실험실 쥐새끼로 살게 할 순 없다고.
한지율과 박영진이 병원 잔향의 흐름을 읽어내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최성국 씨가…… 서류를 조작하고 있어요. ‘보관’이 아니라 ‘퇴원’으로 처리하려고 해요.”
“검은 우산의 직인이 찍히기 전에 자기 서명을 먼저 넣으려고 버티는 중이야. 도윤아, 저 아저씨 저때부터 저랬던 거야?”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최 아저씨는 나를 샘플로 남겨두려는 조직의 손길에서 빼돌리려 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게 선의였는지, 다른 장부로 옮겨 적는 일이었는지 아직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소환문의 빛은 점점 더 붉게 물들었다. 유리 너머의 원본 확인자가 목소리를 변조하며 개입하기 시작했다.
[증언 오염 감지. 보호자 최성국의 발언을 검증용으로 재편집합니다.]
“편집은 무슨, 원본 그대로 내놔!”
나는 제갈후의 이름표를 움켜쥐었다. 진행자 권한이 내 손안에서 맥동했다. 검증석 시스템의 일부가 내 의지에 반응하며 비명을 질렀다.
“편집 금지. 원본 재생으로 고정해. 제갈후의 권한으로 명령한다!”
시스템 창이 깨지며 불꽃이 튀었다. 원본 확인자의 목소리가 일그러졌다. 소환문 안에서 최성국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이번에는 훨씬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야, 이 살아남은 놈아.
‘도윤아’라는 다정한 부름도, ‘강도윤’이라는 공식적인 이름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놈’.
그건 10년 전, 무너진 병원 잔해 속에서 그가 나를 처음 발견했을 때 던진 말이었을 것이다. 그 호칭이야말로 내가 이름도 기억도 없던 시절, 유일하게 부여받은 정체성이었다.
— 너, 내 밑에서 영수증 처리나 하면서 평생 숨어 지내기로 했잖아. 왜 자꾸 이런 데 발을 들여? 귀찮게 말이야.
“아저씨…….”
나는 홀린 듯 소환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증언 기록이 완전히 열리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검증석 전체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붉은 점멸등이 멈추고, 기계적인 시스템 보이스가 서늘하게 울렸다.
[알림: 보호자 소환 절차가 중단되었습니다.]
[사유: 보호자 자격 상실.]
“뭐? 자격 상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소리쳤지만, 시스템은 무심하게 다음 문구를 띄웠다. 소환문 위로 검은 우산의 직인이 찍힌 서류 한 장이 데이터 형태로 떠올랐다.
[대조 결과: 보호자 최성국은 10년 전 병원 붕괴 사고 당시 ‘사망 처리’된 인물임.]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망자는 증인 및 보호자 자격을 유지할 수 없음.]
바닥의 문이 순식간에 닫혔다. 굴러다니던 낡은 코트 자락과 호출기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수선실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사망 처리……?”
나는 멍하니 빈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금 사무실에서 믹스커피를 타고 있을 그 최성국은 누구란 말인가. 나를 10년 동안 지켜봐 온 그 남자는, 이미 죽은 사람의 이름을 빌린 또 다른 이름 없는 존재인 걸까.
[다음 검증 단계를 준비합니다.]
시스템은 내 혼란 따위 상관없다는 듯 다음 지옥의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