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2-233화. 강제 회수 모드의 분실함
232화. 분실함 속의 진짜 강도윤
콰직, 하고 고막을 긁는 불쾌한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S급 헌터의 근력은 상식 밖이다. 윤서하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낡은 강철 자물쇠의 걸쇠를 비틀어버렸다. 족히 수십 년은 버텼을 법한 자물쇠가 녹슨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댕그랑, 소리가 유리 보관소의 매끄러운 바닥을 타고 유독 길게 울려 퍼졌다.
“서하 씨! 멈춰요!”
내 외침은 반 박자 늦었다. 아니, 그녀의 손이 멈추지 않은 것이니 내 말이 닿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윤서하는 멍한 눈으로 000번 분실함의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돋아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감당 못 할 무언가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틈새, 살짝 열린 문 틈새로 ‘그것’이 흘러나왔다.
—서하 씨, 제발. 열지 마세요.
분실함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나와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수준이 아니다. 이건 내 목소리였다. 성대의 떨림, 특유의 빈정거리는 비음, 그리고 긴박할 때 끝이 살짝 갈라지는 습관까지 완벽하게 복제된 ‘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지금의 나는 당장이라도 편의점 진열대를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지만, 저 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영하 20도의 냉동창고 안에서 백 년쯤 냉동 보관된 유통기한 무제한의 인간처럼, 서늘하고 건조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거기 있는 강도윤은…… 진짜가 아니에요.
그 말에 윤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와 나를 향했다. 불신과 혼란, 그리고 일말의 애수가 섞인 눈동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윤 씨……?”
“저게 하는 말 믿지 마요. 보관소 물건이 다 그렇잖아요. 원래 주인 마음 흔들어서 결제하게 만들려고 감성 마케팅하는 거라고요.”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뱉었지만, 손끝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분실함 틈새로 새어 나오는 것은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건 ‘잔향’이었다. 하지만 평소 내가 듣던 죽은 자들의 비명이나 물건에 깃든 잡음과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귀가(歸家)’의 잔향이었다.
따뜻한 저녁 찌개 냄새, 형광등 아래서 펼쳐보는 신문 소리, 현관문을 열 때 나는 익숙한 도어락의 기계음,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이 한데 뭉쳐진 고밀도의 정서. 742일 전, 내가 잃어버렸던 그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그 작은 분실함 안에 압축팩처럼 눌러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가온이가 코를 찡긋거리며 내 옷소매를 꽉 쥐었다.
“아저씨, 냄새가 이상해.”
“가온아, 뒤로 물러나 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상자 봉인에서 서하 언니 냄새가 나. 근데 그냥 냄새가 아니라, 언니 명찰에서 났던 그 기분 나쁜 파란 쇳물 냄새랑 똑같아.”
가온이의 말에 나는 윤서하의 가슴팍을 보았다. 그녀의 헌터 협회 수사협조관 명찰. 그 구석에 미세하게 금이 간 틈새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기운. 742일 전의 기록에 ‘미도착 서명’을 남긴 자와, 이 000번 분실함을 봉인한 ‘보관자’가 동일인이라는 확신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윤서하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미래의, 혹은 과거의 그녀가 나를 이곳에 가두었다는 뜻인가?
—강도윤. 너도 알고 있잖아.
분실함 속의 목소리가 이제는 나를 직접 겨냥했다.
—네가 그 ‘귀가’를 수령하는 순간, 네 옆의 ‘품목’은 처리된다.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품목’이라 함은,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 M-17을 말하는 것이었다.
—반품 대상인 M-17은 보관자가 수령을 완료하는 즉시 폐기 절차를 밟게 되어 있어. 네가 ‘인간 강도윤’으로 돌아가 집으로 퇴근하는 대가는, 저 아이의 소멸이다.
“……개소리 하지 마.”
나는 이빨을 까드득 갈았다.
“어떤 편의점이 손님 물건 돌려주면서 사은품으로 받은 애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소비자 보호원에 고발당하고 싶어?”
—이건 유통의 논리다. 보관소에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진짜’가 들어오면 ‘대역’은 사라져야 하지. 742일 전, 점장이 너를 위해 협상했을 때 이미 정해진 수순이야. 너를 미등록 자산으로 남겨두는 대신, 아이를 담보로 잡았던 거라고.
분실함 문이 끼이익, 조금 더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둠뿐이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바로 내가 그토록 되찾고 싶어 했던 ‘나의 삶’이라는 것을. 그걸 얻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F급 헌터 생활도, 귀신 들린 소리를 듣는 고통도, 검은 우산의 위협도 끝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내 바지춤을 잡고 무표정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M-17을 보았다. 아이의 눈은 여전히 맑았고,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이 아이는 자신이 폐기될 위기라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내가 ‘임시 보관’을 허락했기에 내 곁에 서 있을 뿐이다.
“서하 씨, 손 떼요.”
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윤서하는 갈등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윤 씨, 이 안에 정말로 당신의…….”
“나 여기 있잖아요. 눈앞에 버젓이 살아 있고, 입만 열면 재수 없는 소리 잘만 뱉는 강도윤 여기 있다고요.”
나는 그녀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았다. S급 헌터의 온기는 뜨거웠지만, 내 손은 얼음장 같았다.
“안에 있는 게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어요. 적어도 지금 저랑 같이 퇴근하고 싶은 건 저 안의 유령이 아니라 이 녀석이니까.”
나는 문태식 점장님의 낡은 조끼에 묻어 있던 잔향을 떠올렸다. 점장님은 분명히 ‘대리수령자’라는 표현을 썼다. 수령자와 대리수령자. 이건 물류 용어다. 수령인이 부재중일 때 물건을 맡아두는 사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진짜 강도윤’이 아니라 ‘진짜 강도윤을 대리해서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보관함’ 같은 존재인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지만, 시스템은 자비가 없었다. 분실함 틈새로 검은 액체 같은 그림자가 흘러나오며 바닥에 메시지를 써 내려갔다.
[ 주의 : 품목 ‘강도윤의 귀가’ 열람 시도 중 ]
[ 경고 : 수령자와 보관자의 서명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
[ 시스템 과부하 발생 — 불량 품목(M-17)의 즉시 반품을 권고합니다. ]
“반품 권고? 웃기시네. 난 반품 같은 거 안 해. 내 사전에 환불은 있어도 반품은 없다고.”
나는 주머니를 뒤져 아까 챙겼던 ‘미발행 영수증’ 뭉치를 꺼냈다. 문태식 점장님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나 다름없는 물건이다. 나는 그걸 분실함의 문틈 사이에 쑤셔 넣었다.
“도윤 씨! 뭐 하는 거예요?”
“배송지연 시키는 중입니다. 고객님 변심으로 인한 보류 처리는 상담원 연결 없이도 가능하거든요.”
나는 ‘잔향청취’의 감각을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000번 분실함에 깃든 윤서하의 미래 서명, 그리고 그 안에 갇힌 나의 목소리. 나는 그 두 가지 파동 사이에 끼어들어 강제로 ‘조작’을 가했다.
편의점 알바 시절, 포스기가 먹통이 되면 일단 모든 작업을 ‘보류’ 버튼으로 눌러버리고 다음 손님을 받던 그 감각으로.
[ 스킬 : ‘잔향청취’가 ‘현장 정리’ 권한과 동기화됩니다. ]
[ ‘000번 분실함’에 대한 ‘배송 보류’ 명령을 하달합니다. ]
[ 사유 : 수령인(강도윤)의 수취 거부 및 대리인 지정. ]
치이익, 하며 분실함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쪽에서 들리던 내 목소리가 일그러진 소음으로 변하더니 서서히 잦아들었다.
—너…… 후회하게 될 거다. 대리수령의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아…….
“후회는 내일 출근해서 할게요. 오늘은 퇴근이 먼저라.”
나는 영수증 뭉치를 자물쇠가 있던 자리에 억지로 구겨 넣고, 내 손목에 감겨 있던 시스템의 쇠사슬을 그 위로 칭칭 감았다. 임시방편이다. 하지만 이 보관소라는 시스템 안에서 ‘서류상 보류’만큼 강력한 방패는 없다.
하지만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윽!”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머릿속에서 필름 하나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가 처음으로 돈을 벌어 부모님께 내복을 사드렸던 기억? 아니면 초등학교 졸업식 날 혼자 짜장면을 먹었던 기억?
무언가 소중한 기억 한 조각이 ‘보관료’ 명목으로 뜯겨 나가는 게 느껴졌다. 시스템은 공짜가 없다. 시간을 번 대가로 나는 나의 일부분을 저 분실함에 추가로 저당 잡혀야 했다.
“도윤 씨! 괜찮아요?”
윤서하가 나를 부축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겨우 서서, 다시 출력되기 시작한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분실함 000번의 라벨이 지직거리며 갱신되고 있었다.
새하얀 종이 위에 찍힌 검은 글자들은 아까보다 훨씬 불길한 빛을 띠고 있었다.
[ 갱신된 보관 정보 ]
[ 품목 : 강도윤의 첫 퇴근 (The First Return) ]
[ 상태 : 배송 보류 중 (수취 거부) ]
[ 보관 만료 시한 : 오늘 밤 23:59:59 ]
[ 특이사항 : 만료 시 수령 권한은 ‘검은 우산’ 본사로 자동 승계됨. ]
[ *주의 : 승계 완료 시 해당 품목은 ‘영구 소멸’ 처리됩니다. ]
“……오늘 밤 자정.”
나는 시계를 보았다. 현재 시각 저녁 8시 42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채 4시간도 되지 않았다.
만약 자정까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집으로 돌아갈 권리’를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검은 우산이 내 퇴근을 수거해가는 순간, 나는 평생 이 보관소와 현장을 떠도는 유령 헌터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저씨, 저기 봐.”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아니었다. 000번 분실함 뒤쪽, 거대한 유리 벽 너머로 어두운 복도가 새로 생겨나고 있었다.
그 복도 끝에서, 수많은 검은 우산을 쓴 형체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 자리에는 눈코입 대신 붉은색 바코드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식 절차 밟아서 나가긴 글렀네요.”
나는 M-17의 손을 더 꽉 쥐었다.
“서하 씨, 가온아. 뛰어. 배송 기사들이 단체로 항의 방문 온 모양이니까.”
검은 우산들이 소리 없이 바닥을 미끄러지듯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관소 전체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 안내드립니다. 000번 품목의 무단 보류로 인해 전체 물류 라인이 정지되었습니다. ]
[ 지금부터 ‘강제 회수’ 모드를 가동합니다. ]
[ 대상 : 강도윤 및 동행 품목 전원. ]
바닥의 유리가 깨지며 수천 장의 날카로운 영수증 조각들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폭풍 속으로 몸을 던지며, 단 하나만을 생각했다.
진짜 강도윤이 저 안에 있다면, 지금 여기서 뛰고 있는 나는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보관소의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검은 우산 하나가 우리를 덮쳐왔다.
그리고 그 우산 살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아, 영수증 처리는 확실히 해야지?”
그건 문태식 점장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건 ‘잔향’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서늘한 육성이었다.
233화. 강제 회수 모드
하늘이 무너지는 건 본 적 없지만, 거대한 검은 우산이 머리 위를 덮치는 광경은 그에 못지않게 절망적이었다.
우산살이 내려앉으며 사방의 공간을 수직으로 분절했다. 유리 사물함들이 비명 지르듯 깨져 나갔고, 공중에는 수만 장의 영수증 조각들이 눈보라처럼 휘날렸다. 단순한 종이 조각이 아니었다. 살갗에 스치기만 해도 예리한 커터 칼에 베인 듯 선명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경고: 물류 보관소 내 비정상적 점유물 감지.]
[시스템 권한: 관리자 모드에서 ‘강제 회수 모드’로 전환합니다.]
[사유: 보관 만료 및 수령 거부 품목의 장기 방치.]
고막을 찢는 듯한 기계음이 보관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붉은 경고등이 바닥의 유리 파편에 반사되어 온 세상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아저씨, 저기!”
가온이가 내 소매를 잡아끌며 소리쳤다. 우산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의 형상이었지만 사람이 아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머리 대신 거대한 바코드 리더기를 달고 있는 기괴한 형체들. 그들이 손에 든 것은 무기가 아니라, 붉은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VOID’ 스탬프와 철제 송장판이었다.
철컥, 철컥.
그들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불길한 기계음이 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도윤아, 영수증 처리는 확실히 해야지?”
그때였다. 내 조끼 안감, 혹은 귓가 근처 어딘가에서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태식 점장님이었다. 잔향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실재라기엔 형체가 없는 목소리.
“점장님? 어디 계세요!”
“허튼소리 하지 말고 잘 들어. 보류는 시간벌기일 뿐이야. 저놈들은 ‘미출고’ 상태를 제일 싫어하거든. 지금 네가 들고 있는 건 임시 영수증이야. 그걸로는 부족해.”
허공에서 점장님의 조끼 잔향이 옅은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내가 쥐고 있던 영수증 뭉치를 감쌌다.
“반품 사유서를 써. 아니면 오배송 신고서를 작성하든가. 물건을 뺏기지 않으려면 ‘내 거’라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잘못 배달된 거니까 내 방식대로 돌려보내겠다’고 우겨야 산다.”
점장님의 목소리는 포스기 계산 완료음처럼 짧고 간결하게 끊겼다.
“서하 씨! 가온이랑 M-17 좀 부탁합니다!”
내가 외치며 영수증 뭉치를 고쳐 쥐었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윤서하 씨가 앞장서며 손을 뻗었으나,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야 할 S급의 마력 파동이 힘없이 흩어졌다.
“……윽!”
그녀가 가슴팍의 명찰을 부여잡으며 비틀거렸다. 명찰 속 파란 금속판이 000번 분실함과 공명하며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742일 전의 기록, 그리고 그녀의 서명이 담긴 그 명찰이 이곳의 시스템과 충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S급 헌터인 그녀가 마치 전원이 꺼져가는 기계처럼 무력해 보였다.
“윤서하 씨!”
“괜찮아요…… 하지만 힘이, 제 마음대로 제어가 안 돼요. 이 공간 자체가 제 마력을 ‘회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나를 바라봤다. 공포가 서린 눈동자였지만, 그녀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M-17의 다른 쪽 손을 꽉 쥐고 있었다.
“가온아, 냄새! 나가는 문 말고, 뭔가 ‘잘못된’ 냄새 나는 곳 찾아봐!”
나는 급히 소리쳤다. 정상적인 출구는 이미 저 바코드 머리들이 장악했다.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우리를 에워싸며 송장을 내밀고 있었다. 그 송장에는 내 이름, 가온이의 이름, 그리고 M-17의 제조번호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저씨, 저쪽! 저기서 엄청 비린 냄새랑…… 오래된 쇠 냄새가 나요. 근데 거긴 문이 아니라 그냥 구멍인데?”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깨진 사물함 너머, 분류된 물건들이 떨어지는 시커먼 컨베이어 레인의 입구였다. ‘오배송 처리반’이라는 낡은 푯말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나, 반품 아니야.”
내 손을 잡고 있던 M-17이 갑자기 낮게 읊조렸다. 평소의 아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시스템 가이드 음성처럼 건조하고 차가운 톤.
“샘플이야. 초기 불량품은 폐기 전에 검사실로 가야 해. 검사실로 보내줘.”
“M-17?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경로 이탈. 재분류가 필요합니다. 수동 입력 모드로 전환하세요.”
아이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빛을 내뿜었다. 녀석의 머릿속에 각인된 ‘품목 정보’가 시스템의 강제 회수 모드에 반응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바코드 리더기를 단 회수 담당자 하나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녀석이 거대한 ‘VOID’ 스탬프를 내 이마를 향해 내리찍으려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주머니 속에서 500원짜리 토큰을 꺼내 녀석의 바코드 눈 사이에 박아버렸다.
“유통기한 지난 건 너희들이나 처먹어!”
퍼억! 소리와 함께 녀석의 머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윤서하 씨와 아이들을 끌고 가온이가 가리킨 컨베이어 레인으로 몸을 날렸다.
“뛰어요!”
미끄러지듯 들어간 레인 안쪽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등 뒤에서 회수 담당자들의 기계적인 발소리와 ‘미출고 품목 발생’이라는 경고음이 멀어졌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레인을 타고 아래로 추락하는 동안, 내 가슴 한구석이 텅 빈 듯한 기묘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보관료로 뜯긴 기억.
[품목 : 강도윤의 첫 퇴근]
나는 분명히 그 기억을 알고 있었다. 헌터 협회 감식반 계약직으로 처음 출근했던 날, 온종일 시체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에 시달리다 녹초가 되어 편의점 들러 맥주 한 캔을 샀던 그 저녁. 찬 바람이 뺨을 스치던 그 알싸한 해방감.
그런데 기억나지 않는다.
맥주가 무슨 맛이었는지, 그때 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누구에게 퇴근 보고를 했는지.
분명히 ‘퇴근했다’는 사실은 아는데, 그 장면을 구성하는 감정과 감각이 통째로 도려내져 있었다. 가슴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젠장, 진짜로 가져갔냐.”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잊어버리는 것과는 달랐다. 내 존재의 일부가 물리적으로 뜯겨 나가 ‘보관소’의 자산으로 귀속된 느낌.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상실감이 나를 짓눌렀다.
콰당!
얼마나 떨어졌을까. 딱딱한 금속 바닥에 몸이 처박혔다.
“아으으…….”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온통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벽면이었다. 천장에는 수술실에서나 볼 법한 무영등이 깜빡이며 불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윤서하 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온이와 M-17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여긴…… 어디죠?”
“M-17이 말한 ‘검사실’인 것 같네요. 혹은 오배송 검수실이거나.”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벽면을 훑었다. 이곳은 보관소의 화려한 유리 사물함들과는 결이 달랐다. 훨씬 더 차갑고, 실무적이며, 비인간적인 공간.
벽면 한쪽에는 누런 종이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종이들은 ‘검사 결과 보고서’였다. 날짜는 전부 742일 전.
내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보고서의 상단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검은 우산의 문양 아래 적힌 글자들.
[품목 분류 및 정밀 감정 결과서]
그중 가장 안쪽에, 마치 어제 붙여놓은 것처럼 깨끗한 보고서 한 장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 숨을 멈췄다.
[대상 A : M-17 (신규 생산 샘플)]
[대상 B : 강도윤 (F급 헌터 / 잔향 처리 적합자)]
그 아래에는 체중, 골격 밀도, 마력 파동의 파형 등이 소수점 단위까지 정밀하게 비교되어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붉은색 스탬프로 찍힌 최종 판정란에 적힌 문구는 내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최종 판정: 동일 출처(Origin)에서 분리된 샘플 2종 확인.]
[특이사항: 본 시스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귀가' 권한은 하나로 통합 관리함. 동시 출고 불가.]
[결론: 하나의 샘플이 귀가(Clock-out)할 경우, 나머지 샘플은 자동 폐기(Delete) 및 자산 회수 처리할 것.]
손이 떨렸다. 보고서 옆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742일 전의 나. 차가운 실험대 위에 잠든 채 누워 있는 나의 모습.
그리고 내 바로 옆 실험대에서,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M-17.
우리 두 사람의 손목에는 똑같은 바코드 태그가 채워져 있었다.
“……동일 출처?”
내가 멍하게 중얼거리는 순간, 등 뒤에서 육중한 철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그리고 검사실 내의 스피커에서, 아까보다 훨씬 더 선명해진 점장님의 목소리가—아니, 점장님의 목소리를 빌린 시스템의 안내가 들려왔다.
[검수 시작. 출고 대상을 확정하십시오. 보관료 미납으로 인해 현재 한 명분의 '퇴근 카드'만 유효합니다.]
M-17이 내 옷자락을 잡았다. 아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저씨…… 나, 아저씨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
나는 아이의 눈물과 벽에 붙은 보고서를 번갈아 보았다.
내가 ‘귀가’를 선택하면 이 아이는 지워진다.
하지만 이 아이를 살리면, 나는 영원히 이 보관소의 분실물로 남아야 한다.
[남은 시간 : 00:05:00]
검사실 벽면에 붉은 디지털 숫자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숫자 너머로,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들이 반투명한 벽 너머로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스탬프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마치 내 이마에 찍힐 ‘폐기’ 도장을 준비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