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89화. 죽은 보호자의 사무실과 보호자 자격 면담
제목: 88화. 죽은 보호자의 사무실
[보호자 자격 말소. 사유: 대상자 사망(死亡).]
검증석의 차가운 금속판 위로 떠오른 붉은 텍스트가 시신경을 긁었다. 머릿속이 일순간 진공 상태가 된 것처럼 멍해졌다. 사망? 최성국이?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내 뒤통수에 대고 믹스커피나 한 잔 타오라고 핀잔을 주던 그 늙은 여우가 1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내 입에서 나간 건 말이 아니라 헛웃음이었다.
“야, 반가온. 네 기계 고장 났어. 이거 수선실 예산 좀 더 써서 최신형으로 바꿔야겠는데? 10년 전 기록을 지금이라고 착각하잖아.”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반가온은 내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검증석에 박힌 검은 우산 직인과 ‘사망’이라는 두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기계는 거짓말 안 해, 강도윤. 그리고 이건 ‘오류’가 아니라 ‘조회 결과’야.”
검증석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다음 단계, 즉 ‘보호자 부재에 따른 대상자 강제 회수’ 절차로 넘어가려 했다. 시스템이 윤서하를 다시 그 끔찍한 기록의 심연으로 끌고 가려는 찰나였다.
“잠깐, 멈춰!”
반가온이 품 안에서 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주사위 모양의 부산물을 꺼내 검증석 틈새에 끼워 넣었다.
콰득!
소름 끼치는 파쇄음과 함께 주사위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균형의 추]—시장가로만 억 단위가 넘어가는 고위급 감정용 매개체였다. 검증석의 톱니바퀴가 억지로 멈춰 서며 붉은 경고등이 명멸했다.
“이걸로 30분은 벌었어. 내 전 재산 중 하나가 날아갔으니까, 멍하니 있지 말고 움직여.”
반가온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비용에 대한 아까움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조차 감당 못 할 진실을 마주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0-14 생존자 기록의 공명에 흔들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도윤 씨, 지금 당장 최 주임님께 전화해 봐요.”
나는 홀린 듯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 신호음이 간다. 뚜르르, 뚜르르. 평소라면 세 번이 가기도 전에 “어, 왜.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하며 퉁명스럽게 받았을 터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 […치익, …지… 금은… 연결… 수 없… 치익…]
노이즈 섞인 기계음.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녹음된 음성이라기엔 지나치게 단조롭고 이상하게 편집된 단어들의 나열이었다.
— […강도윤 헌터… 퇴근… 보고… 미비… 다시… 기록… 하십시오…]
“이게 뭐야…?”
“전화기가 아니야. 이건 미리 입력된 코드에 반응하는 응답기예요.”
이현우가 내 스마트폰을 가로채 소리를 분석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알던 최성국 주임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니, 적어도 지금 이 전화를 받는 건 생명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수선실을 뛰쳐나왔다. 목적지는 협회 별관 지하 3층, 감식반 구역 끝자락에 처박힌 최성국의 개인 사무실이었다.
사무실 문은 평소처럼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훅 끼쳐 왔다. 싸구려 담배 냄새,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 같은 믹스커피의 달큰한 향, 그리고 낡은 종이가 썩어가는 퀘퀘한 냄새.
“평소랑 똑같잖아.”
내가 중얼거리며 책상 위를 훑었다.
재떨이에는 아직 불씨가 남은 듯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다. 고장 난 프린터는 ‘지직’ 소리를 내며 예열 중이었고, 의자 뒤에는 최 주임이 야근할 때 덮던 때 묻은 담요가 아무렇게나 걸려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영수증 묶음을 만졌다.
[잔향 청취 발동.]
죽은 자와 물건 사이에 눌어붙은, 이 끔찍하고도 유용한 감각이 곤두섰다. 사물의 기억이 내 고막을 두드렸다.
— “허허, 이놈 봐라. 영수증 처리 좀 제때 하라니까.”
최 주임의 목소리였다. 무뚝뚝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그 특유의 톤.
— “도윤아, 인생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마라. 어차피 서류상으론 다 죽고 사는 문제 아니겠냐.”
웃기지도 않는 농담. 그런데 그 ‘서류상’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꽂혔다. 잔향 속에서 최 주임의 형체가 흐릿하게 명멸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마치 낡은 필름 속에 갇힌 유령처럼 보였다.
박영진이 책상 서랍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낡은 협회 신분증과 사번 갱신 기록지가 쏟아져 나왔다.
“이거 봐. 이상해.”
한지율이 기록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최성국 주임님의 사번은 매년 1월 1일에 갱신됐어요. 그런데 승계인이나 승인권자 서명이… 전부 없어.”
기록지 하단, 승인란에는 사람의 이름 대신 기괴한 문양 하나가 찍혀 있었다. 검은 우산. 그리고 그 옆에 적힌 날카로운 필체의 코드.
[기록보전과 B-0]
“협회에 이런 부서가 있었나?”
내 물음에 이현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식 직제표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부 감사용 비밀 부서거나, 혹은… ‘검은 우산’이 협회 내부 시스템을 완전히 장악하고 만든 가상 부서일 가능성이 높죠.”
이현우는 책상 위의 먼지 쌓인 호출기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도윤 씨, 지금 최성국이라는 존재에 대해 세 가지 가설이 가능합니다. 첫째, 10년 전 사고에서 살아남았지만 어떤 이유로 사망 처리된 채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고 있다. 둘째, 이미 10년 전에 죽었고 지금의 최성국은 검은 우산이 만든 정교한 ‘기록 기반 인격체’다. 셋째….”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누군가 최성국의 껍데기를 쓰고 연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그를 ‘최 주임’이라고 믿게끔 말이죠.”
“그럴 리가 없어. 나랑 같이 술도 마셨고, 같이 구른 짬이 몇 년인데!”
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윤서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동정심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도윤 씨… 의심해야 해요.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게 검은 우산이 설계한 ‘보호’였다면, 그건 보호가 아니라 감금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최성국은 나를 챙겨주는 척하면서, 동시에 내가 협회의 핵심이나 0-14의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막아서는 벽이었다.
그때였다.
위잉— 덜컥, 덜컥.
정적 속에서 기괴한 기계음이 들렸다. 전원도 연결되지 않았던 고장 난 프린터가 스스로 빛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낡은 잉크 냄새가 진동하며 종이 한 장이 천천히 뱉어졌다.
“설마….”
반가온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이거, 방금 날짜로 발행된 서류야.”
종이 상단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호자 권한 임시 승계 신청서]
최성국이 ‘사망’ 처리되면서 공석이 된 내 보호자 자격을 누군가 가로채려 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라면 윤서하나, 혹은 협회장인 박영진이 맡는 게 수순이었다.
하지만 출력된 종이 위, ‘승계 대상자’란에 적힌 이름은 우리 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승계 대상자: 제갈후(諸葛候)]
“제갈후? 이 미친… 진행자 놈이 왜 내 보호자가 돼?”
나는 종이를 뺏어 들었다.
제갈후. 검증석에서 우리를 비웃던 그 매끈한 진행자 놈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동시에 내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표시 제한.
나는 홀린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방금 전의 기계적인 노이즈가 아닌, 소름 끼치도록 매끄럽고 여유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강도윤 헌터. 퇴근 시간은 아직 멀었죠? 이제부터 진짜 ‘면담’을 시작해 봅시다. 보호자 자격으로 말입니다.”
사무실 안의 믹스커피 향이 갑자기 피비린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제목: 89화. 보호자 자격 면담
“보호자 자격으로 면담을 시작하도록 하죠. 강도윤 씨.”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마치 방금 기계 세차를 끝내고 나온 고급 세단의 보닛처럼, 결 하나 없이 번들거리는 친절함.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름 끼치는 금속성의 서늘함이 박혀 있었다.
나는 고장 난 프린터 위에 놓인 수화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최성국의 사무실, 찌든 담배 냄새와 눅눅한 믹스커피 향이 진동하는 이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취조실로 변한 기분이었다.
“보호자라니요. 제갈후 이사님, 보통 보호자는 월세 보증인이지 인생 관리자가 아니거든요. 제가 아직 미성년자도 아니고, 협회에 제 인감도장이라도 맡겨놓은 줄 아시나 본데.”
농담을 섞어 뱉었지만, 손바닥에는 기분 나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제갈후의 웃음소리가 스피커 너머로 짧게 들렸다.
“유머 감각은 여전하시군요. 하지만 도윤 씨, 당신의 자각과는 별개로 당신은 ‘관리 대상’입니다. 10년 전, 성모 병원 재활병동에서 채워졌던 0904-X821번 팔찌. 그리고 오늘 오전 8시 42분에 기록된 협회 별관 출입 로그까지. 당신의 모든 기록은 제 승인 하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10년 전 병원 팔찌 번호. 나조차 가물가물한 그 숫자를 그는 마치 어제 읽은 서류처럼 읊조리고 있었다. 그는 내 과거와 현재를 가느다란 줄로 엮어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노는 인형술사 같았다.
“최성국 씨는 말이죠.”
제갈후가 말을 이었다.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사망자의 이름으로 승인된 ‘임시 보관자’였을 뿐이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 구석에 밀어 넣어둔 관리인 같은 역할 말입니다. 이제 그 통조림을 제가 제대로 처리하겠다는 겁니다.”
선의인지, 감시인지, 아니면 영원한 감금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어조. 옆에서 듣고 있던 윤서하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녀가 내 손에서 휴대폰을 뺏으려 손을 뻗었다.
“제갈후 이사님, 이건 명백한 권한 남용입니다. 현장 헌터의 신상 정보를 이런 식으로….”
“서하 양.”
제갈후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목소리는 여전히 상냥했지만, 그 안에 담긴 압력은 수심 수백 미터의 수압과 같았다.
“당신의 0-14 기록을 잊은 건 아니겠죠? 당신에게도 사실 보호자 권한 신청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걸 포기했죠. 왜일까요? 본인이 보호받아야 할 처지라는 걸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 아니었나요?”
윤서하의 움직임이 굳었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손등 위로 툭, 핏줄이 불거졌다. 평소라면 독설로 받아쳤을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반가온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무실 곳곳을 살피더니,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도윤 씨, 이상해. 이거 통신망 신호가 아니야.”
“뭐?”
“전화기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고. 이 방 전체가 울리고 있어. 프린터, 저 재떨이, 쌓여 있는 영수증 묶음…. 저 물건들이 가진 ‘기록’의 잔향을 타고 목소리가 출력되는 거야. 제갈후는 지금 살아있는 전화선이 아니라 ‘기록 회선’을 타고 들어왔어.”
반가온의 말대로였다. 내 잔향청취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제갈후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책상 위의 낡은 볼펜이 미세하게 떨렸고, 재떨이 속의 담배꽁초들이 바스락거렸다.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신기이자 스피커가 되어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시선을 프린터로 돌렸다. 방금 출력된 ‘보호자 권한 임시 승계 신청서’.
제갈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척하며, 나는 슬그머니 프린터의 몸체에 손을 올렸다.
‘말 좀 해봐. 너희 주인이 숨겨놓은 게 뭐야?’
잔향청취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뇌가 지직거리는 통증과 함께 물건들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잉크도 없는데 자꾸 뽑으래…. 귀찮게….]
[…맨 밑바닥, 특수 인쇄…. 열에 반응하는 잉크….]
고장 난 프린터가 투덜대며 숨겨진 정보를 뱉어냈다. 나는 슬쩍 책상 위에 놓인 라이터를 켰다. 신청서 종이 하단에 불꽃을 살짝 가까이 대자, 보이지 않던 푸른색 글자들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특이사항: 승계 완료 시, 피보호자 ‘강도윤’의 대여명(貸與名) 회수 권한 발생. 원본 식별 번호 ‘0-0’을 협회 정식 기록망(Main-Frame)에 등록 및 동기화함.]
대여명 회수.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빌린 이름이라는 뜻인가? 그리고 0-0이라니. 그건 기록의 시작점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무(無)인가.
“B-0….”
이현우가 서류 상단의 코드를 보며 읊조렸다.
“도윤 씨, 저 코드 말입니다. ‘기록보전과’의 분류 기호라고 생각했는데, 다르게 읽힐 수도 있겠어요. Backup-Original 0. 혹은 보호자 0번. 어느 쪽이든 누군가 도윤 씨를 사람보다 백업 데이터에 가깝게 취급했다는 뜻 같군요.”
이현우의 추측은 불길한 예감과 정확히 일치했다. 제갈후는 나를 살리려는 게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을 지우고, 그들이 원하는 ‘데이터’로 치환하려는 것이었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뺏는 것이 그 첫 번째 단계일 터였다.
그때, 사무실 한구석에서 캉! 하는 쇠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벽면을 두드려보던 박영진과 바닥을 훑던 한지율이 낡은 캐비닛 뒤쪽의 벽지를 뜯어내고 있었다.
“도윤아, 여기 뭐가 있다!”
벽면을 뜯어내자 드러난 것은 매립형 철제 금고였다. 아주 오래된 모델이라 전자식 키패드도 없었다. 오로지 구식 열쇠 구멍 하나만 덩그러니 뚫려 있었다.
“열쇠는? 근처에 없었어?”
한지율이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책상을 훑었다. 서랍은 이미 다 뒤졌다.
문득, 최성국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숨길 때 가장 뻔한 곳에 두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쓰레기통 옆에 처박혀 있던 빈 믹스커피 상자와 재떨이 옆의 일그러진 담배갑을 집어 들었다. 담배갑 안쪽을 찢어내자, 은박지 사이에 끼워져 있던 평범한 은색 열쇠 하나가 툭 떨어졌다.
“찾았다.”
열쇠를 금고에 꽂고 돌렸다.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금고 문이 열렸다.
먼지가 풀썩 일며 쏟아져 나온 것은 몇 장의 서류와 낡은 사진 한 장이었다.
이현우가 서류를 집어 들고 안경을 고쳐 썼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이건… 최성국의 실제 사망진단서 사본입니다. 사망 일자가… 10년 전이에요. 도윤 씨가 병원에서 퇴원하던 그날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나와 함께 컵라면을 나눠 먹고, 내 머리를 쥐어박던 그 아저씨는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웠다.
10년 전, 낡은 병원 환자복을 입고 있는 한 아이의 사진이었다. 얼굴은 흐릿하게 뭉개져 있었지만, 아이의 손목에는 0904-X821번 팔찌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진을 뒤집었다. 거기엔 최성국의 거친 필체로 짧은 문장이 휘갈겨져 있었다.
[절대로 강도윤으로 부르면 안 된다. 이름이 반응한다.]
순간, 사무실 안의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전화기 너머 제갈후의 웃음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방 전체를 울렸다.
“아아, 보셨군요. 맞습니다. 강도윤은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명령어’였죠.”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덮쳤다.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가 내 존재를 옥죄는 사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