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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살아 있는 사망자와 문을 두드린 BG-04 일러스트

7-8화. 살아 있는 사망자와 문을 두드린 BG-04

제목: 7화. 살아 있는 사망자 명단

은성주차타워 후문 골목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전신에 유리가 박힌 것처럼 아팠지만, 지금 병원에 가면 접수대보다 먼저 협회 수갑이 나를 맞이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깨진 휴대폰 화면을 노려봤다. 멘탈은 아까 옥상 환풍구 어딘가에 두고 온 것 같았다.

[반가온: 문태식 팀장? 그 사람, 오늘 새벽 D-17 출입자 명단에 살아 있는 이름으로 찍혔어.]

타이핑을 하려는데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이건 그냥 공포가 아니었다. 생존 본능이 비상벨을 머리 안쪽에서 후려치는 소리였다. 문태식은 D-17 폐쇄 이후 실종 처리된 감식반 팀장이다. 그런 사람이 오늘 새벽 폐쇄 던전에 들어갔다고?

“미친….”

욕이 알아서 나왔다. 내가 주운 건 사망 플래그가 아니라 사망 폭탄이었다.

반가온의 아지트로 바로 가는 건 자살이었다. 검은 우산의 핀이 내 손등을 찔렀다. 피만 가져갔으면 다행인데, 잔향은 그 핀이 아주 얇은 기억 반응까지 긁어 갔다고 속삭였다. 놈들이 내 능력을 복제하든 추적하든, 둘 다 내 입장에서는 월세보다 급한 재난이었다.

경유지가 필요했다. 시끄럽고, 더럽고, 생활 냄새가 잔향을 뒤섞어 버리는 곳.

나는 골목을 빠져나와 24시간 무인 코인세탁소 `워시앤조이`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딸랑.

도어 벨 소리와 함께 후끈한 열기와 락스 냄새, 그리고 끕끕한 젖은 옷 냄새가 훅 끼쳐왔다.

"으악."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그래도 이 냄새가 필요했다. 잔향청취는 깨끗한 곳보다 더러운 곳에서, 조용한 곳보다 시끄러운 곳에서 먼저 망가진다. 추적자들이 내 잔향을 쫓는다면 락스와 묵은 때와 남의 양말 냄새 사이에서 길을 잃어 주길 바랐다.

세탁기 대여섯 대가 힘차게 돌아가며 ‘콰르르, 덜컹덜컹’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가장 구석진, CCTV 사각지대처럼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젖은 가죽 점퍼에서 핏물과 섞인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다.

폰을 켰다. 반가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문태식 확실해? D-17은 감식반도 접근 금지잖아. 그리고 너, 겨우 파일명 캐시 가지고 협회 내부망을 어떻게 털었어?]

답장은 즉각적이었다.

[반가온: 너는 현장만 정리했지, 서류 지옥은 안 돌아봤지? 협회 등록부는 이중 구조야. 공식 서버랑, ‘그림자 인덱스’라고 부르는 백업 서버가 있어. 네가 보낸 파일명들은 그림자 인덱스의 임시 접근 경로(D17_temp_access)를 가리키고 있어. 이건 경로만 알면 우회 접속이 가능해. 내 실력을 의심하지 마.]

[반가온: 그리고 그 보험 묶음 파일(insurance_batch_lower_rank_9cases.tmp), 그거 9명 보상 처리 내역 맞아. 같은 날짜에 사망 처리됐는데… 그중 1명이 살아 있는 걸 확인했어.]

[나: 누군데?]

화면 너머로 반가온이 씨익 웃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가온: 추가금 콜? 이건 단순 정보가 아니라 비밀번호 급이야. 월세 통장 털 준비 됐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월세 통장 잔고와 내 목숨값이 천칭 위에 올라갔다.

[나: …얼마.]

[반가온: 저번 거래액의 세 배. 깔끔하게 일시불로 가자.]

[나: 야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장사꾼아! 나 지금 주차타워에서 추락해서 죽을 뻔했어!]

[반가온: 살아 있잖아. 죽으면 정보도 필요 없지? 3, 2, 1.]

[나: …보냈어. 입금 확인해.]

통장이 텅 비었다. 나는 정보의 소유자가 됐고, 집주인에게는 다음 달부터 미스터리 포인트로 월세를 낼 수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

[반가온: 오케이, 확인. 계약 성립.]

[반가온: 살아 있는 사망자 이름은 ‘한지율’. 공식 등급 F급. 사망 처리일은 D-17 폐쇄일과 동일. 그런데 특이점 발견. 최근 48시간 이내에 특정 약국에서 의료 물품 구매 기록이 있어. 생존 확정.]

한지율.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나: 누구야? D-17에 있던 헌터야?]

[반가온: 그게 두 번째야. 그 보험 묶음에 있던 9명, 같은 공략 파티가 아니었어. 길드도 제각각이고 소속도 없어. 그런데 공통점이 딱 하나 있더라. 9명 모두 과거에 감식반 계약 업무나 현장 정리 업무로 D-17과 한 번씩 접촉했던 경력이 있어. 그러니까 너랑 비슷한 부류들이야.]

머릿속에 전구가 켜졌다. D-17의 진실을 목격한 하급 헌터들을 한데 묶어 사망 처리하고 보험금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빠져나갔다.

[나: 그럼 검은 우산이 찾는 게 그 한지율인가?]

[반가온: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리고 네 전 팀장, 문태식에 대한 마지막 정보. 새벽 출입 기록, 그거 정상 출입 아니야. 감식반 회수 권한(Recovery Authority)으로 찍혔어.]

[나: 회수 권한?]

나는 그 권한에 대해 알고 있었다. 게이트 내에서 실종된 헌터의 ‘유품’이나 ‘시신’을 거두러 갈 때 쓰는 초법적인 권한이다. 하지만 D-17은 폐쇄됐다. 회수할 게 없다.

[나: 문태식이 죽은 사람들 유품을 찾으러 갔다고? D-17이 폐쇄됐는데?]

[반가온: 아니, 협회 규정상 회수 권한은 시신뿐만 아니라 ‘협회 소유의 중요 데이터’를 회수할 때도 발동돼. 문태식은 D-17의 ‘무언가’를 회수하러 간 거야. 그게 뭔지는 나도 몰라.]

정보가 너무 많았다. 세탁기가 콰르르 돌았다. 내 머릿속도 비슷한 코스로 탈수 중이었다.

그때, 코인세탁기 동전 투입구 쪽에서 ‘삑’ 하는 기계음과 함께 이질적인 잔향이 내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아 씨발, 왜 안 들어가. 피 냄새 나나? …일단 빨아야 돼, BG-04 팀장이 알면 죽여버릴 거야….]

투덜거리는 남자의 목소리. 거칠고 다급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동전 투입구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오늘 새벽, 피 묻은 검은 장갑을 이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다가 투입구에 피가 묻어 인식이 안 되자 실패하고 돌아갔다.

‘BG-04? BG는… 블랙 가드(Black Guard)인가?’

협회 직속 특수 기동대, 블랙 가드. 그들이 이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장갑에 묻은 피는 누구의 것인가. 한지율? 아니면 문태식?

나는 소름이 돋아 내 점퍼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 점퍼에서도 잔향이 터져 나왔다.

[…복제 완료. 미량의 기억 반응 검출. F급치고는 특이한 신경 패턴. 추적 스캔 가동….]

이건 검은 우산의 핀에서 느껴지는 잔향이었다. 차갑고 기계적인 목소리.

‘이 새끼들이 내 능력까지 긁어갔어?’

놈들이 내 능력을 복제하려는 건지, 그 반응으로 나를 추적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기분은 최악이었다.

나는 폰을 집어 들었다. 윤서하에게 물어봐야 했다.

[나: 윤서하, 나 지금 세탁소야. 블랙 가드가 근처에 있었어. 그리고 한지율이라는 여자애 알지? 그애가 살아 있어. 검은 우산이 걔를 찾는 거 같은데.]

메시지를 보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세탁소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안쪽만 물을 뺀 세탁조처럼 텅 비었다.

딩동.

윤서하의 답장이 왔다.

[윤서하: 한지율을 찾으면 먼저 도망치게 해요. 보호 요청 넣지 말고. 협회 내부도 안전하지 않아요.]

[나: 보호 요청을 넣지 말라고? 협회 직속 헌터잖아!]

[윤서하: 문태식 팀장님이 회수하러 간 게… 그냥 회수가 아닐 수도 있어요. 한지율은 유일한 증인이에요. 그녀를 확보하는 쪽이 D-17의 진실을 가지게 돼요.]

짧았다. 그래서 더 불길했다. 윤서하도 협회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폰을 끄고 세탁소 내부를 둘러보았다. CCTV가 두 대 보였다. 한 대는 카운터를 비추고 있고, 다른 한 대는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잠깐.’

머리 위 CCTV를 노려봤다. 붉은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전원이 꺼져 있거나 더미(dummy)였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더미 카메라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카메라 하단에 미세한 틈이 보였다. 나는 손톱을 밀어 넣어 카메라 하우징을 열었다.

그 안에, 구식 마이크로SD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이건 뭐야?’

나는 저장칩을 떼어냈다. 이런 곳에 저장칩을 숨겨둔다?

내 손가락이 칩을 건드리는 순간, 잔향이 폭발했다.

[…여기는 사각지대니까… 강도윤 씨가 여기로 올 확률이 가장 높다고 했어. 팀장님이….]

처음엔 문태식의 목소리인 줄 알았다. 곧 아니란 걸 깨달았다. 한지율이 문태식의 말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내 폰에 저장칩을 꽂았다. 폰이 저장칩을 겨우 인식했다. 파일은 딱 하나였다. 4초짜리 비디오 파일. 파일명은 For_KDY.mp4.

떨리는 손가락으로 파일을 재생했다.

화질은 엉망이었다. 이 코인세탁소 입구의 낡은 CCTV 화면 같았다. 화면 구석에 타임스탬프가 ‘하루 전’으로 찍혀 있었다.

흐릿한 영상 속으로, 한 여자가 걸어 들어왔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입구 근처 더미 카메라 아래 잠시 멈춰 섰다가,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더미 카메라를, 아니, 칩을 찾아낼 나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다. 대신 칩에 묻은 잔향이 내 귀 안쪽에서 문장을 만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강도윤 씨가 오면 말해 주세요.”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문태식 팀장님은… D-17에 회수하러 간 게 아니에요.”

세탁기의 콰르르거리는 소리가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목소리만 남았다.

“그분은… 묻으러 간 거예요.”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와 함께 영상이 툭 끊겼다.

나는 폰을 손에서 놓쳤다. 폰이 세탁소 바닥으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묻으러 갔다. 협회는 D-17의 무언가를 회수하려 했고, 문태식은 그걸 덮으려 했다. 그리고 한지율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내 폰에 다시 진동이 울렸다. 반가온의 메시지였다.

[반가온: 야, 한지율 위치 떴어. 근처야. 지금 블랙 가드 BG-04 팀이 그쪽으로 이동 중이야. 어떡할 거야?]

나는 떨리는 손으로 폰을 주워 올렸다. 월세 통장은 텅 비었고, 내 앞에는 사망 플래그가 빨래집게처럼 줄줄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도 그냥 도망칠 수는 없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으니까.

나는 젖은 점퍼를 걸쳐 입고 세탁소 문을 열었다. 락스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에 씻겨 나갔다.

“미친, 진짜… 묻긴 뭘 묻어. 내가 다 정리해버릴 테니까.”

나는 한지율의 위치를 향해 뛰었다. 어둠이 자동문처럼 열렸다.

작가의 말: 도윤이의 월세 통장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제목: 8화. BG-04가 문을 두드렸다

“묻으러 간 거예요.”

한지율의 목소리는 영상이 끊긴 뒤에도 내 귓속에서 치직거렸다. 나는 저장칩을 휴대폰에서 뽑아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이 떨려서 두 번이나 실패했다. 죽음의 증거를 챙기는 일도 손재주가 필요하다. F급 현장 정리 헌터 채용 공고에 그런 말은 없었다.

반가온의 전화가 다시 울렸다.

[한지율 위치 잡혔어. 세탁소 뒤쪽 오래된 상가 지하. 그런데 BG-04도 움직여. 빨라.]

“세탁소 CCTV는?”

[벌써 삭제됐어. 내가 백업을—]

뚝.

통화가 끊겼다.

“타이밍 한번 예술이네. 내 장례식 축사도 중간에 끊기겠다.”

나는 세탁소 뒷문으로 나갔다. 골목은 어둡고 습했다. 뒤쪽 상가는 간판 절반이 떨어져 나간 낡은 건물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기름 냄새가 올라왔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벽에 붙은 광고지가 비틀린 얼굴처럼 흔들렸다.

지하 2층 끝에 작은 간판이 남아 있었다.

`청옥 장비 수리점.`

헌터 장비를 고쳐 주던 가게였다. 지금은 셔터가 반쯤 찌그러져 있고, 자물쇠는 누군가 최근에 부순 흔적이 있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가 멈췄다. 문 아래쪽에 가는 실선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력 차단선.

전문가가 만든 건 아니었다. 선은 삐뚤빼뚤했고, 마력 농도도 고르지 않았다. 그래도 안쪽 사람이 얼마나 급했는지는 보였다. 죽기 싫은 사람은 결계도 가계부처럼 쓴다. 모자란 돈으로 최대한 버티는 방식이다.

나는 선을 피해 문을 밀었다.

끼이익.

소독약 냄새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다음 피 냄새. 안쪽에는 낡은 방어구, 깨진 헬멧, 부러진 검집, 녹슨 팔 보호대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전부 주인이 없어진 물건들이었다. 아니,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들.

바닥에는 피 묻은 붕대가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건드렸다.

[아파. 빼지 마. 아니, 빼. 빼라고. 아, 미친, 말을 하나만 해.]

낯선 여자 목소리와 이를 악문 숨소리. 한지율이었다. 붕대는 울고 싶어 했다. 붕대가 울고 싶어 하는 현장이라니, 내 직업 만족도는 오늘도 지하 3층을 뚫었다.

계산대 위에는 오래된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먼지를 털고 손바닥을 올렸다.

[사망자 명의 의료 물품 입고. 이름 한지율. 배송지는 청옥 장비 수리점. 수령인은 공란. 현금 결제. 영수증 발행 거부. 거부. 거부.]

이 가게는 폐업한 뒤에도 비밀 치료소처럼 쓰이고 있었다. 한지율이 사망 처리된 뒤, 의료 물품은 공식 주소가 아니라 이 지하로 들어왔다. 누군가 그녀를 살려 두었다. 아니, 죽은 사람으로 만든 뒤 몰래 숨겼다.

나는 깨진 헌터 헬멧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안쪽에는 검은 얼룩이 빗물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손끝이 닿자 머릿속에 비가 내렸다.

[검은 비다! 마력 방패 안 먹혀!]

[기억 로그 분리. 이름값 삭제. 파티 기록 삭제. 보험 처리 대기.]

[나는 안 죽었어. 이름을 지우지 마. 야, 내 이름—]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끊겼다.

나는 헬멧을 놓쳤다. D-17에서 하급 헌터 9명이 그냥 죽은 게 아니었다. 8명은 검은 비에 노출됐다. 몸이 죽었는지, 기억이 죽었는지, 기록이 죽었는지조차 분리된 상태. 그리고 한지율만 빠져나왔다.

검은 비는 몬스터 공격이 아니었다. 던전 내부 기록을 지우는 인공 현상. 검은 우산이 현장 증거를 빨아들이던 방식과 같은 냄새가 났다. 증거를 훔치는 우산. 기록을 지우는 비. 누가 봐도 같은 회사 제품이었다. 소비자 상담실은 지옥에 있겠지.

구석의 낡은 소화기가 덜컹거렸다. 바람도 없는데.

나는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지율 씨. 내가 말한 곳으로 가요.]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건조하고 낮았다.

[거기서 버티세요. 강도윤이 올 겁니다.]

[그 사람을 믿으라고요?]

[그놈은 죽은 사람 말보다 물건 말을 더 믿어요. 사람 말은 의심하고, 물건 말은 욕하면서도 듣죠. 그래서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신뢰를 얻을 줄은 몰랐다. 인간 불신과 물건 의존이 추천서가 되는 인생. 문태식 팀장님, 칭찬인지 모욕인지 다음에 만나면 꼭 물어보겠습니다. 살아 계시면요.

“거기서 손 떼요.”

등 뒤에서 칼날이 번뜩였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낡은 방어구 사이에서 여자가 나왔다. 찢어진 재킷, 피로 굳은 붕대, 잠을 며칠은 포기한 눈. 한지율이었다. F급이라고 들었는데, 눈빛은 내 월세 독촉 문자보다 날카로웠다.

“강도윤?”

“네. 오늘부로 사망 플래그 수거 전문 강도윤입니다. 출장비는 선불이고요.”

“문태식이 당신 이름을 말했어요. 그래서 더 못 믿겠어요.”

“보통 추천인이 있으면 신뢰도가 올라가지 않습니까?”

“그 추천인이 사람을 묻으러 간 사람이라면요?”

말문이 막혔다. 훌륭했다. 오늘은 적도 아군도 전부 논리로 나를 때렸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윤서하의 문자였다.

[BG-04 진입 루트: 지하 상가 주차장 -> 수리점 뒷문]

나는 화면을 보다가 눈을 찡그렸다. 문장 끝이 미세하게 비틀려 있었다. 글자는 뒷문이라고 말하는데, 잔향은 다른 소리를 냈다.

[정문. 정문. 원문 덮어쓰기. 뒷문으로 유도. 정문 진입 준비.]

“변조됐어.”

“뭐가요?”

“윤서하 씨 문자가 중간에 덮였어요. BG-04는 뒷문이 아니라 정문으로 옵니다.”

한지율은 칼을 더 세게 쥐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문자도 거짓말하면 혀가 꼬입니다. 저는 그 꼬인 소리를 듣는 쪽이고요.”

“정말 미친 사람이네요.”

“오늘 들은 평가 중 제일 온건합니다.”

발소리가 들렸다. 지하 복도 끝. 일정하고 깨끗한 군화 소리. 협회 타격대보다 조용했고, 민간 헌터보다 차가웠다. BG-04.

정면 전투는 불가능했다. 나는 F급이다. F급이 검은 장갑 특수팀을 상대로 멋있게 검을 뽑으면, 다음 장면은 추모 현수막이다.

그래서 현장 정리 헌터답게 싸우기로 했다.

나는 청소도구함을 열어 대걸레와 세제통을 꺼냈다. 차단기 박스의 덮개를 열고, 불안정한 전선을 소화기 분말 쪽으로 돌렸다. 낡은 방어구 몇 개를 셔터 안쪽에 세워 놓고, 바닥에는 세제를 얇게 뿌렸다.

한지율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작전이에요?”

“작전이라고 부르면 멋있고, 사고라고 부르면 보험 처리가 됩니다.”

“보험 얘기 하지 마요.”

“죄송합니다. 오늘 장르가 그쪽이라.”

우리는 보관함 뒤로 몸을 숨겼다. 한지율의 숨이 가빴다. 가까이서 보니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과 별개로, 그녀는 오래 도망친 사람이었다. 오래 도망친 사람은 가끔 멈추는 법을 잊는다.

“문태식 팀장님은 살아 있어요.” 그녀가 아주 작게 말했다. “적어도 제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나는 대답하려다 멈췄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정중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한지율 씨, 그리고 강도윤 씨.”

문 너머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감정이 거의 없었다.

“감식반 문태식 팀장 사망 사건 참고인으로 동행 요청합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문태식은 살아 있는 단서였다. D-17에 출입했고, 한지율을 숨겼고,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

그런데 협회는 이제 그를 사망 사건으로 부르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나자마자, 다시 죽은 사건이 생겼다.

내 인생은 정말 정리할수록 어질러졌다.

작가의 말: 도윤은 한지율을 찾았지만, 문태식의 생사부터 다시 의심해야 하는 문 앞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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