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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97화. 두 번째 보호자의 봉투와 꺼지지 않는 라이터 일러스트

196-197화. 두 번째 보호자의 봉투와 꺼지지 않는 라이터

196화. 두 번째 보호자의 봉투

내 손등 위로 돋아난 푸른 선들이 윤서하의 팔에서 뻗어 나온 줄기들과 지독하게 엉켜 있었다.

마치 굶주린 기생 생물이 숙주를 갈아타기 위해 촉수를 뻗은 형국이었다. 그 푸른 빛은 체온을 앗아갔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손등을 타고 올라와 어깨 부근에서 멈췄다.

“그 봉투…… 제가 보관할까요? 강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침착했지만, 기계가 미리 입력된 문장을 출력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정확한 발음이었다. 그녀의 눈동자 너머로 푸른 인광이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봉투를 건네기도 전에 “수사 자료니까 압수합니다”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여자가, 지금은 허락을 구하는 인형처럼 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머릿속을 더듬었다. 그런데 기묘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그녀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우리가 이 지옥 같은 병원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마신 커피가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까칠한 성격 탓에 아메리카노의 산미가 어쩌고 하며 투덜거렸던 감각은 남아 있는데, 정작 그 풍경이 통째로 오려나간 것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윤 경위님, 평소엔 내가 길가에 떨어진 십 원짜리 하나만 주워도 횡령죄 운운하며 눈을 부라리더니. 갑자기 왜 그렇게 예의 바르게 굽니까? 사람 무안하게.”

농담을 던졌지만 입안이 썼다. 방어기제치고는 너무 형편없는 타율이었다. 기억의 결손은 생각보다 더 날카롭게 내 평정심을 갉아먹고 있었다.

“기록의 안정성을 위해서입니다. 제1 보호자는 현장을 유지하고, 제2 보호자는 증거를 보존해야 하니까요. 그게 시스템의 효율입니다.”

윤서하가 다시 대답했다. 이번엔 한 박자 늦었다. 대화의 리듬이 깨져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며 내가 쥔 봉투를 향해 다가왔다.

“도윤 아저씨, 맡지 마요.”

반가온이 내 옷소매를 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녀석의 코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 봉투, 이상해요. 소장님 필체고 소장님 손때 묻은 냄새도 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에요. 봉투 입구 쪽에서 진눈깨비 냄새가 나요. 아주 차갑고, 사람 피 말리게 하는 서류 뭉치 냄새요. 저 누나 몸에서 나오는 저 파란 줄기랑 똑같은 냄새라고요.”

가온의 말에 나는 봉투를 고쳐 쥐었다. 문태식의 필체로 적힌 ‘두 번째 보호자는 믿지 마라’라는 경고문. 그리고 시스템이 지정한 제2 보호자, 윤서하.

아이는 내 뒤에 숨어 윤서하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윤서하의 ‘뒤’를 보고 있었다.

“그림자가…… 얼굴이 없어요.”

아이가 내 바지를 꽉 쥐며 중얼거렸다.

“윤 순경님 뒤에, 얼굴 없는 아줌마가 실덩어리를 감고 있어요. 저 파란 실을 윤 순경님 팔에 막 감고 있다고요. 무서워요. 저거한테 봉투 주면 안 돼요.”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은 윤서하 자체가 아니라, 그녀를 침식하고 있는 시스템의 형상인 모양이었다.

“흐흐, 역시 아이들은 눈이 밝군.”

검은 우산을 든 기록 대리인이 보드 구석에서 우산 끝으로 바닥을 긁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쇳조각이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보호자 제도란 본래 그런 것이네. 한 명은 아이를 붙들고, 한 명은 아이의 기록을 감시하지. 둘이 서로를 감시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병원이 분실물을 관리하는 방식이야. 문태식 그 노인네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믿지 말라’는 유언 같은 경고를 남긴 것 아니겠나?”

대리인의 우산 끝이 보드 위, 내가 방금 적어 넣은 접수증 조각을 가리켰다.

“하지만 자네가 세 번째 길을 선택한 순간, 시스템은 보완책을 찾았네. 제2 보호자가 공석이면 이 계약은 성립되지 않아. 아이는 다시 분실물 센터로 반송되겠지. 윤서하 경위가 그 역할을 맡지 않으면, 자네는 아이를 지킬 수 없어.”

[알림: 제2 보호자 승인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경고: 증언자의 기록 보관 능력이 검증되지 않을 경우, 보호자 자격이 박탈됩니다.]

윤서하의 눈동자가 완전히 푸른 빛으로 덮였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오른손이 강박적으로 봉투를 낚아채려 뻗어 나왔다.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쇳덩이처럼 속도가 빨랐다.

나는 그녀의 손이 닿기 직전, 봉투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도윤 씨!”

윤서하가 짧게 비명을 지르듯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아주 잠깐, 원래의 그녀다운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봉투가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집중했다. 머릿속의 빈 공간을 무시하고, 내 손가락 끝에 남은 감각을 증폭시켰다.

‘잔향청취.’

바닥에 떨어진 봉투에서 소리의 파편들이 피어올랐다. 거칠고 메마른 문태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오래전, 그가 아직 젊었을 무렵의 목소리였다.

……상관없어. 두 번째 보호자는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아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인’이기만 하면 돼. 꼭 살아있는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여성용 라이터를 켜는 날카로운 마찰음. ‘칙,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가스 냄새가 청각적 환각과 섞여 들어왔다.

그럼 나를 증인으로 써.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차분하지만 단호했고, 어딘가 슬픔이 서린 음색.

아이를 서하에게 묶지 마. 서하는 이런 기록 같은 거 몰라도 돼. 걔는 그냥…… 평범하게 퇴근해서 맥주나 마시는 사람으로 살게 둬, 태식 씨.

하지만 당신은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왔어. 라이터를 켤 때마다 당신의 시간이 타버릴 텐데?

상관없어. 내가 이 아이의 ‘기록’이 될게. 봉투 안에 내 계약서를 넣어둬.

소리가 끊겼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봉투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문태식의 필체. ‘두 번째 보호자는 믿지 마라.’

그는 윤서하를 믿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시스템이 강제로 설정한 ‘두 번째 보호자’라는 역할 그 자체를 경계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윤 경위님, 정신 차려요.”

나는 달려드는 윤서하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밀쳤다.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던 푸른 라인들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내가 최근 1년 기억은 좀 까먹었는데, 당신 성격 하나는 기억나거든. 당신은 남의 물건 보관해준답시고 뺏어가는 타입이 아니야. 차라리 다 박살을 내면 냈지.”

나는 보드 구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낡은 압정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드에서 헌터 등록증들을 고정하고 있던, 녹슨 핀이었다.

“기록 대리인. 제2 보호자가 꼭 ‘확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무슨 소린가?”

“보류도 전략이거든. 특히 공무원들 서류 처리할 때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검토 중’이라는 도장이야.”

나는 봉투를 집어 들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떨어진 봉투의 봉인 부분 바로 옆, 보드의 빈 공간에 그 녹슨 핀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봉투를 찌르지 않고, 봉투가 보드와 바닥 사이의 틈새에 끼어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만 시켰다.

이름도, 서명도 적지 않았다. 그저 그 물리적인 고정 자체가 나의 의지였다.

“이 봉투는 지금부터 ‘제출 보류’ 상태다. 증인이 누구인지, 기록자가 누구인지 확정될 때까지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지 않아. 나도, 윤서하도, 당신도.”

[알림: 제2 보호자 확정 절차가 ‘보류’되었습니다.]

[시스템 오류: 증언의 주체가 불분명합니다. 대체 증인 심사를 시작합니다.]

순간, 윤서하의 몸을 칭칭 감고 있던 푸른 라인들이 힘없이 풀어졌다. 그녀는 무릎을 꺾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동자의 푸른 빛이 가라앉고 원래의 갈색 눈동자가 돌아왔다.

“하아…… 하아…… 강도윤 씨? 지금…… 내가 무슨……”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떨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의지를 좀먹던 감각이 남았는지 안색이 창백했다.

“괜찮아요. 그냥 업무 과다로 잠깐 헛것 본 거라 치죠. 나중에 산재 신청이나 도와줄게.”

나는 애써 덤덤하게 말했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주의: 대체 증인을 확정하지 못할 경우, 아이의 유예 시간은 1/10로 단축됩니다.]

[남은 유예 시간: 00:14:59]

15분. 그 안에 ‘사람이 아닌 증인’을 찾아야 한다.

“도윤 아저씨, 저기!”

반가온이 손가락으로 분실물 보드를 가리켰다.

내가 핀을 박아 넣은 바로 옆, 이름표가 떨어져 나가 비어 있던 빈칸 하나가 천천히 뒤집히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 것처럼.

뒤집힌 칸에는 사진 대신 기묘한 문구가 떠올랐다.

<대체 증인 후보: 여성용 라이터>

동시에, 정적만이 가득하던 병원 매점 계산대 아래에서 소리가 들렸다.

‘칙.’

오래전에 가스가 다 떨어져 버려졌어야 할 싸구려 플라스틱 라이터 하나가, 어둠 속에서 홀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로.

그 작은 불꽃이 흔들리며, 어두운 복도 끝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규칙적이고, 서두르지 않는 여성의 구두 소리였다.

197화. 꺼지지 않는 라이터

치익.

어두운 매점 진열대 너머에서 부싯돌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은 마찰음이었지만, 적막이 고인 폐쇄 병동의 복도에서는 고막을 찢는 파열음만큼이나 선명했다.

먼지 쌓인 유리창 안쪽,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껌 상자들 사이에서 주황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아무도 잡지 않은 낡은 플라스틱 라이터였다. 불꽃은 심지가 다 타들어 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일렁였지만, 결코 꺼지지 않았다.

또각, 또각.

복도 끝에서 규칙적인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급하지도, 그렇다고 느긋하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차가운 타일 벽을 타고 메아리쳤다. 유리창에 비친 내 시야에 긴 그림자가 스쳤으나,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매캐한 가스 냄새와 코끝을 간지럽히는 옅은 화장품 향기만이 공기 중에 부유할 뿐이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오른쪽 팔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의 신경계에 기생하며 봉투를 향해 뻗게 했던 그 푸른 실들의 잔흔이었다. 시스템이 강제로 연결을 끊으면서 발생한 역류 현상일 터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눈빛만은 이미 평소의 날카로운 수사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팔은 괜찮습니까?”

“움직이는 건 지장 없어요. 그보다…… 저걸 보세요.”

윤서하가 턱 끝으로 분실물 보드 옆에 뜬 시스템 메시지를 가리켰다.

[제2 보호자 확정 보류]

[대체 증인 심사 시작: 여성용 라이터]

[남은 유예 시간: 14분 52초]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분실물 보드의 빈칸이 뒤집히며 나타난 ‘여성용 라이터’라는 글자가 기괴하게 번쩍였다.

“대체 증인이 사람이 아니라니, 시스템 오류입니까?”

“아니요. 기록 대리인의 논리에 따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윤서하는 떨리는 오른팔을 왼손으로 붙들며 말을 이었다. 수사 업무를 수행할 때의 그 건조하고 명확한 말투였다.

“보호자 제도의 핵심은 ‘기록’과 ‘감시’예요. 사람이 증인이 되는 건 그 현장을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물건이 그 현장의 ‘현장성’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다면…… 시스템은 그것을 증인으로 채택할 수 있습니다. 소유권이나 보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 물건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증언이 되는 거죠.”

그때, 내 옆에서 킁킁거리며 공기를 들이마시던 반가온이 미간을 찌푸렸다. 녀석의 예민한 후각은 이미 매점 안의 라이터에 닿아 있었다.

“……이상해. 냄새가 섞여 있어.”

“뭐가?”

“아저씨, 이거 그냥 라이터가 아니야. 싸구려 플라스틱 타는 냄새랑, 오래된 병원 매점의 그 눅눅한 껌 냄새…… 그리고 분꽃 냄새 나는 화장품 향기가 나. 그런데 그 밑에 아주 작게, 어린아이용 딸기 맛 해열제 시럽 냄새가 섞여 있어. 아주 달고 끈적거리는 냄새.”

반가온이 코를 실룩거리며 라이터가 놓인 진열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 라이터, 단순히 누가 흘리고 간 게 아니야. 누군가 이걸로 아이를 달래줬어. 불꽃을 보여주면서, 울지 말라고.”

내 등 뒤에 숨어 있던 아이가 ‘불꽃’이라는 말에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동자에 매점 안에서 일렁이는 작은 주황색 빛이 반사되었다. 아이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 불꽃을 보는 순간만큼은 호흡이 조금 안정되었다.

“……안 무서웠어.”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두울 때…… 누가 저걸 켜주면, 잠깐 안 무서웠어. 따뜻했어.”

기록 대리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증인? 저 쇳조각이 증인이라고? 웃기지 마라. 물건이 증언을 하려면 자격이 필요해.”

허공에서 비릿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록 대리인의 형체 없는 시선이 라이터를 향했다.

“저 라이터가 ‘그날, 그 시간, 그 현장’에 있었다는 걸 증명해라. 증명하지 못하면 대체 증인 심사는 기각된다. 제한 시간 내에 저 라이터의 마지막 불꽃을 재현해 봐. 단—.”

시스템 창이 붉게 점멸하며 경고를 띄웠다.

[주의: 대체 증인의 ‘기억’을 강제 인출할 경우, 현재 소지자의 기억 중 해당 물건과 관련된 파편이 소거될 위험이 있습니다.]

“직접 잡으면 기억이 타버린다는 뜻인가.”

나는 빈정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참 편리한 시스템이다. 뭘 하려고 하면 꼭 통행료로 기억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안 그래도 윤서하와의 커피 기억을 날려 먹어서 찝찝해 죽겠는데 말이다.

“도윤 씨, 위험해요. 제가 하겠습니다. 제 기억이라면 어차피…….”

“됐습니다. 윤 형사님은 지금 팔도 제대로 못 쓰잖아요.”

나는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라이터를 직접 만지지 않고 ‘재현’해야 한다. 인류 최초의 F급 헌터식 과학수사 장비를 가동할 때였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매점 영수증 조각을 줍고, 아까 분실물 보드에서 뽑아낸 녹슨 핀을 꺼냈다. 그리고 아이가 쥐고 있던 낡은 환자복 소매 끝에서 삐져나온 실타래를 살짝 끊어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윤서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장비 제작 중입니다. 이름하여 ‘F급 전용 기억 비접촉 인출기’라고 해두죠.”

나는 영수증 종이를 말아 지지대를 만들고, 녹슨 핀을 꽂아 라이터의 점화 레버 근처에 위치시켰다. 실타래를 핀에 연결해 멀리서도 당길 수 있게 만든, 조잡하기 짝이 없는 낚시 도구 같은 형태였다. 손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숨기기 위해 나는 짐짓 더 여유로운 척 농담을 던졌다.

“이거 나중에 협회에 특허라도 내야겠네요. 기억 상실 방지용 최첨단 공구라고.”

실을 천천히 당겼다. 핀이 레버를 눌렀고, 부싯돌이 긁히며 불꽃이 튀었다.

치익—!

그 순간, 내 고유 스킬 ‘잔향청취’가 강제로 개방되었다.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며 색이 빠졌다.

어두운 병원 매점. 지금보다 훨씬 낡은 진열대들이 보였다. 빗소리가 들렸고, 매점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지금 내 뒤에 있는 아이인지, 아니면 아주 어릴 적의 나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아이의 눈앞에서 라이터를 켰다.

긴 손가락. 정갈하게 손질된 손톱. 하지만 그 손등에는 날카로운 것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화면이 흔들리며 젊은 시절의 문태식인지, 혹은 또 다른 누군가인지 모를 실루엣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울고 있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윤 형사의 어린 시절인가?

그 흐릿한 소음들 사이로, 한 여자의 목소리가 얼음물처럼 투명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 불은 이름을 묻지 않아. 그냥 옆을 비춰줄 뿐이야.

여자는 라이터를 든 채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네가 누구든, 지금 여기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라이터의 마지막 불꽃이 내 눈앞에서 일렁이며 타올랐다. 나는 그 문장을 그대로 낚아채 현재의 공간으로 끌고 왔다.

나는 보드 옆의 기록용 펜을 들어, 시스템이 요구하는 ‘증언’ 칸에 휘갈겨 썼다. 아니, 적는다기보다 새겼다는 표현이 맞았다.

<이 라이터는 이름을 소유하지 않았다. 오직 그날 밤, 길을 잃은 아이의 곁에서 빛으로서 존재했을 뿐이다.>

[시스템이 대체 증인의 증언을 수락합니다.]

[‘여성용 라이터’가 임시 대체 증인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제2 보호자(윤서하)와의 강제 연결이 해제됩니다.]

[남은 유예 시간이 15분에서 60분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윤서하의 팔을 감싸고 있던 푸른 빛의 잔상들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녀가 짧은 숨을 내뱉으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대가는 즉시 찾아왔다.

“윽…….”

라이터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며 내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겁지 않은, 오히려 시린 냉기가 뇌를 훑었다. 또다시 기억의 조각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그냥 내주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사라지려는 파편을 억지로 붙들었다. 윤서하와 커피를 마시며 무슨 심각한 대화를 나눴는지는 끝내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공백 속에서, 그녀가 나를 보며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웃었던 그 찰나의 ‘감정’만은 손바닥 안에 가두어 냈다.

내용은 잃었어도, 그 느낌만은 타지 않았다.

“……도윤 씨, 괜찮아요?”

윤서하가 다가오며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주워 들었다. 이제 불꽃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럭저럭요. 그런데 형사님, 이것 좀 보시죠.”

나는 라이터 밑면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오래된 플라스틱 표면에 날카로운 금속으로 긁어 새긴 글자가 있었다. 세월의 흔적 때문에 뒷부분은 깎여 나가 제대로 읽히지 않았다.

[ Y. S. ? ]

“Y.S…… 윤서하(Yoon Seo-ha)의 이니셜인가요?”

반가온이 옆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하지만 윤서하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녀는 라이터를 받아 들자마자 마치 달궈진 인두를 잡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시선은 이니셜의 마지막, 긁혀서 보이지 않는 세 번째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요. 제 라이터가 아니에요. 전 비흡연자고, 이런 물건을 가진 적도 없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라이터에 새겨진 ‘Y’와 ‘S’를 더듬었다.

“그런데…… 이 글씨체. 이건 제 손글씨예요. 제가 쓰는 필기구 습관, 획의 끝을 맺는 방식까지…… 저조차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제 글씨예요.”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혼란과 공포가 뒤섞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도윤 씨. 내가 쓰지 않은 내 글씨가 왜 여기에 있죠? 그리고…… 왜 이 이니셜의 마지막 글자가, 제 이름의 ‘H’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요?”

복도 끝에서 다시 구두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가오는 소리가 아니라, 멀어지는 소리였다. 마치 볼일을 다 마쳤다는 듯이.

나는 꺼진 라이터를 쥔 채, 아직도 50분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짙어지는 병원의 어둠을 응시했다.

이제 막, 진짜 분실물이 무엇인지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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